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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st of all pages that have property "TextKor" with value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죽이기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벌써 죽이기를 의논했다.’라는 대문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와서 무릎을 꿇었다 하니,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Since there have been only a few results, also nearby values are displa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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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366  + (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의 누제(樓題)는 모두 쌍(雙)과 창(窓) 두 자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의 누제(樓題)는 모두 쌍(雙)과 창(窓) 두 자를 써서 지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양창해 선생 것이 더욱 좋다.</br>푸른 바다 붉은 무리 둥근 해의 반을 줄그었는데 / 碧海暈紅規日半</br>이끼 푸르고 바위 흰데 연기와 갈매기 짝지어 가네 / 蒼苔巖白煙鷗雙</br>금과 은으로 꾸민 대 위에 외로이 휘파람 부니 / 金銀臺上發孤嘯</br>넓고 넓은 천지 창으로 들어오네 / 天地浩然開入窓</br>이 시를 어떤 사람이 전하다가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공에게 보이니 말하기를, “혹 득의하여 이처럼 지을 만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반드시 이 시보다 나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우리 아버지께서도 이 운을 사용하여 지으시기를,</br>가랑비에 흰 갈매기 쌍쌍이 날고 / 疎雨白鷗飛兩兩</br>해질 녘 고깃배는 쌍쌍이 떴네 / 夕照漁艇泛雙雙</br>바다에서 돋는 해를 맞고자 / 擬看暘谷金烏出</br>정각의 동쪽 문을 두지 않았네 / 畵閣東頭不設窓</br>하였는데,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였다. 김첨경(金添慶)공이 관찰사였을 때에 지은 시 두 수가 있다. 그 하나는</br>아깝다 홍문(鴻門)에서 구슬 한말[玉斗] 깨뜨린 것이 / 可惜鴻門玉斗撞</br>조각조각 흩어져서 한 쌍 두 쌍 못 맞추네 / 紛紛片片不論雙</br>변해 흰 새가 되어 천백 떼를 이루어 / 化成白鳥群千百</br>해돋이 객 창가에 시끄럽게 울어대네 / 日出呶呶鬧客窓</br>이며, 또 하나는,</br>좋은 경치 하도 많아 좌우 부딪치는데 / 好景紛紛左右撞</br>말 머리엔 미인들도 쌍쌍이 보이는구나 / 馬頭紅粉亦雙雙</br>다음 구절은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그 뒤에 글을 쓰기를,</br>가소롭다 김문길이 / 可笑金文吉</br>정신 없이 좌우에 부딪치네 / 紛紛左右撞</br>하니, 듣는 사람이 조소하였다.吉 정신 없이 좌우에 부딪치네 / 紛紛左右撞 하니, 듣는 사람이 조소하였다.)
  • E361  + (고려 말에 어떤 고상한 선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아니고려 말에 어떤 고상한 선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아니하면서 강 위에 자리 잡고 살았다. 죽은 뒤에 벼슬아치 몇 사람이 그의 옛집을 찾았더니, 벽 위에 그가 지은 시가 붙어 있었는데, 긁혀 떨어져 다만 한 구절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글에,</br>파초(芭蕉) 소리가 문발 밖에서 들리니 산 비가 오는 줄 알겠고 / 蕉鳴薄外知山雨</br>배 돛대가 봉우리 끝에서 나오니 바닷 바람이 부는 것을 짐작하겠다 / 帆出峯頭見海風</br>하였다. 이 글을 본 벼슬아치들이 한참 동안 읊조리더니, 서로 말하기를, “섬돌 아래 파초란 말을 보고 윗 구절을 알만 하지만 재 돛을 보고 바닷바람이 부는 것을 짐작한다는 것은 모르겠다.” 하였다. 조금 지나서 앞 포구에 홀연히 한 척의 배가 돛에 바람을 잔뜩 안고 봉우리 밖에서 점점 나왔다. 이것을 보게 되면, 배는 해구로부터 올라오는 것이다. 밖에서 점점 나왔다. 이것을 보게 되면, 배는 해구로부터 올라오는 것이다.)
  • E054  + (고려 정승 한종유(韓宗愈)는 어렸을 때에, 방탕불기(放蕩不羈)하여 수십 명과고려 정승 한종유(韓宗愈)는 어렸을 때에, 방탕불기(放蕩不羈)하여 수십 명과 무리를 짜고 언제나 무당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데에 가서 음식을 빼앗아 취하도록 포식하고는 손벽을 치며 양화(楊花) 노래를 부르니, 그때 사람들이 양화도(楊花徒)라고 불렀다. 상국(相國)이 되어 공명과 사업이 당세에 빛나고, 만년에는 물러나 고향에서 노년을 보냈는데 지금의 한강 상류의 저자도(樗子島)이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br>10리 평호에 보슬비 지나고 / 十里平湖細雨過</br>한 줄기 긴 피리소리 갈대꽃 너머로 들린다 / 一聲長笛隔蘆花</br>금솥에 국 요리하던 손을 가지고 / 却將金鼎調羹手</br>한가로이 낚싯대 잡고 해저문 모래밭을 내려간다 / 閑把漁竿下晩沙</br>하고, 또</br>검은 사모에 짧은 갈옷으로 지당을 돌아서니 / 烏紗短褐遶池塘</br>버드나무 언덕 시원한 미풍이 얼굴에 스친다 / 柳岸微風酒面凉</br>천천이 걸어 돌아오니 산 위엔 달이 떴고 / 緩步歸來山月上</br>장두에선 아직도 연꽃 향기 스며온다 / 杖頭猶襲藕花香</br>하였다.緩步歸來山月上 장두에선 아직도 연꽃 향기 스며온다 / 杖頭猶襲藕花香 하였다.)
  • E003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이 있다. 그러므로 동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이 있다. 그러므로 동방학자들은 모두 그를 유종(儒宗)으로 여긴다.<br />그가 지은 비파행(琵琶行) 한 수가 《당음(唐音)》유향(遺響)에 실려 있는데 작자는 무명씨로 적혀 있다. 후세에 그에 대한 의신(疑信)이 결정되지 못하는데 혹자는,<br /><div class="poem font-weight-light"><br /> 동정에 달이 떨어지니 고운이 돌아간다<br /></div><br />라는 글귀로 최치원의 저작이라는 증거를 댄다. 그러나 또한 그것으로는 단안을 내릴 수가 없다.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檄文) 한 편과 같은 것은 비록 사적(史籍)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죽이기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벌써 죽이기를 의논했다.’라는 대문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와서 무릎을 꿇었다 하니,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
  • E266  + (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백마강’ 시는 다음과 같다. 나라 망하니 산과 물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백마강’ 시는 다음과 같다.</br>나라 망하니 산과 물이 옛날과 다른데 / 國破山河異昔時</br>홀로 강달이 남아 몇 번이나 차고 기울었다 / 獨留江月幾盈虧</br>낙화암 위의 꽃은 아직도 남았으니 / 落花巖上花猶在</br>비바람 그 당시에 다 불어 떨어뜨리지 못하였나 / 風雨當年不盡吹</br>이 사문 강남(李斯文江男)의 시는,</br>고국에 올라 보니 마침 달이 오를 때라 / 故國登臨月上時</br>백제의 왕업이 여기 이루고 망했네 / 濟王家業此成虧</br>용 죽고 꽃 떨어진 천 년의 원한은 / 龍亡花落千年恨</br>동풍에 부는 한 피리에 부쳤네 / 分付東風一笛吹</br>이 두 시는 당시 사람들이 서로들 우열(優劣)을 논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아래 시 첫째 구가 너무 싱거운 것같다.(優劣)을 논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아래 시 첫째 구가 너무 싱거운 것같다.)
  • E051  + (그 뒤에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이 행인(行人) 장근(張瑾)과 함께그 뒤에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이 행인(行人) 장근(張瑾)과 함께 와서 문묘(文廟)에 갔다. 호부는 순근(純謹) 화이(和易)하고 시와 부를 잘하였는데, 임금이 매우 후하게 대접하니 호부가 임금의 의채(儀采)를 흠모하여, “참다운 천인(天人)이다.” 했다. 노선성(盧宣城 노사신(盧思愼))과 서달성(徐達成)이 관반(館伴)이 되고 내가 홍겸선(洪兼善)ㆍ이차공(李次公)과 더불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대기하고 있을 적에 서달성이 말하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데 이는 모두 오래 전부터 지어둔 것일 것이다. 내가 먼저 시를 지어 차운하라고 청하면 반드시 그가 크게 낭패할 것이다.” 하였다. 한강에서 놀던 날 제천정(濟川亭)에 오르자 달성이 시 몇 수를 내보이면서, “대인의 뛰어난 운을 제가 도저히 화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서투른 글을 엮으니 화답을 바랍니다.” 하니, 호부가 미소하면서 한 번 보고 붓을 들어 내리쓰는데, 그 글에 고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br>백제의 지형은 물에 임하여 다하였고 / 百濟地形臨水盡</br>오대의 천맥은 하늘에서 왔다 / 五臺泉脈自天來</br>라는 글귀라든가</br>고루에 기대었으나 정을 다하지 못해 / 倚罷高樓不盡情</br>다시 춘색을 끌어당겨 밝은 허공에 띄우네 / 又携春色泛空明</br>사람은 죽엽배 속에서 취하고 / 人從竹葉杯中醉</br>배는 양화도 어구를 향해 가로지르네 / 舟向楊花渡口橫</br>라는 글귀 같은 것이다. 또 〈강지수사(江之水辭)〉를 지으면서 배를 타고 잠령(蠶嶺 남산(南山))까지 흘러내려 가도록 글 읊는 것을 그치지 않으니, 달성이 담이 내려 앉아 사모(紗帽)를 젖혀 쓰고 길게 신음할 뿐이요, 김문량(金文良)은 혀를 내민 채 거두지도 못하고서, “노적(老賊)이 너무 심하게 사람을 속였구나. 근래에 내가 [[T044|<span class="keyword topic">침</span>]] [針灸]를 맞지 않아서 시사(詩思)가 메말라 이와 같은 괴로움을 받을 따름이다.” 하고, 한마디도 말을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 E040  + (금나라 말엽에 시인 양비경이 단풍을 읊은 시는 이렇다. <div cla금나라 말엽에 시인 양비경이 단풍을 읊은 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79|<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바다 놀 비도 오지 않는데 수풀가에 깃들고,<br> 들불 바람도 안 부는데 나무 끝에 올랐네.</div></br>문진공 이장용도 또한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M080|<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황폐한 절간 쓸쓸하여 가을 생각 괴롭고,<br> 얕은 산 두드러져 석양녘에 분명하다.</div></br><div class="critique-text">[[C049|<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이 시를 보면 양비경이 늙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div>)
  • E082  + (김문평(金文平)은 문장이 웅혼(雄渾)하고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오로지 사김문평(金文平)은 문장이 웅혼(雄渾)하고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오로지 사마자장(司馬子長)의 궤범(軌範)을 모방하였는데, 온 세상에 맞설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 시 또한 기상(氣像)이 높고 깊이 골수(骨髓)를 얻었다. 성품이 검속(檢束)할 줄을 모르고 압운(押韻)이 바르지 못하여 모두들 시(詩)가 문(文)보다 못하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시나 문이나 모두 넉넉하였다.〈격옹도(擊瓮圖)〉라는 시에는,</br>독 속에 있는 천지가 갑자기 활짝 열리어 / 瓮中天地忽開豁</br>산천 품물이 한가지로 밝게 되살아나도다 / 山川品物同昭蘇</br>하고, 〈심중추산재(沈中樞山齋)〉라는 시에는,</br>삐딱한 사립문 시냇가 언덕에 면해 있어 / 紫門不整臨溪岸</br>산비가 아침마다 내려 물이 불어남을 보겠도다 / 山雨朝朝看水生</br>하고, 〈용궁헌제(龍宮軒題)〉라는 시에는,</br>마음껏 백배를 마시고 누상에 누워 / 痛飮百杯樓上臥</br>발을 걷으니 남북이 모두 청산이로다 / 捲簾南北是靑山</br>하였다. 또 산사(山寺)를 두고 시를 지었는데,</br>창은 비었는데 중은 장삼을 깁고 / 窓虛僧結衲</br>탑은 조용한데 객이 시를 짓도다 / 塔靜客題詩</br>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생각 너머의 정취를 얻은 것으로 보통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생각 너머의 정취를 얻은 것으로 보통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 E390  + (내 맏형님의 휘는 은로(殷輅)이다. 5세 때부터 글을 잘 지어 신동으로 이름내 맏형님의 휘는 은로(殷輅)이다. 5세 때부터 글을 잘 지어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상공(相公) 한규(韓㞳)가 강화 유수(江華留守)가 되었는데, 그때 선군께서는 성균관의 직강(直講)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계셨다. 맏형께서 겨우 아홉 살 되던 해, 어쩌다가 기와 조각 던진 것이 잘못되어 남의 집 장독에 떨어졌다. 이웃 사람은 누구의 짓인지 알지 못하고 불손한 말로 욕을 했다. 맏형은 이것을 듣고 그 사정을 하나하나 유수에게 호소했다. 유수는 잘 생긴 어린이가 뜰에 들어섬을 보고, 물어서 직강 집 아들임을 알게 되자,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묻기를, “너는 시를 지을 수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겨우 운이나 맞출 줄 압니다.” 하였다. 이때에 가뭄이 심하였으므로, 유수가 민우시(悶雨詩)를 짓도록 명하고 운(韻)자를 천(天) 하고 불렀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답하기를,</br>구름발이 공연히 하늘을 가렸네 / 雲霓空蔽天</br>하니, 또 전(田) 자를 가지고 짓도록 명했다. 대답하기를,</br>거북 등에 마른 논이 갈라졌네 / 龜背坼乾田</br>하였다. 또 연(年) 자를 가지고 지으라 하니,</br>노나라에서 무당을 불태우던 날이요 / 魯國焚巫日</br>은나라 탕 임금이 손톱 깎던 해일세 / 成湯剪爪年</br>하니, 유수가 무릎을 치며 칭찬하였다. 처음에는 사운(四韻 네 구로 된 율시임)을 짓도록 명하고자 했으나 서너 구절을 보더니, 곧 그만두었다. 아마도 재주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이어서 불러들여 약과와 음식을 먹이는 동시에, 지ㆍ필ㆍ묵도 내주었다. 그리고 그 이웃 사람을 불러다 매를 때렸다. 그 뒤 한공(韓公)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그대 아들의 재주가 매우 기특하니 꼭 숨기시오. 시를 지어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지 마시오. 내 손녀를 시집보내리다.” 하였다.를 지어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지 마시오. 내 손녀를 시집보내리다.” 하였다.)
  • E083  + (둔촌선생(遁村先生)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시에둔촌선생(遁村先生)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시에 영웅호걸이었다. 세상일을 비방하다가 말이 신돈(辛旽)에게 미쳤다. 신돈이 몰래 해치려고 하자, 선생은 아버지를 모시고 도망갔다. 동년(同年) 최원도(崔元道)가 영천(永川)에 산단 말을 듣고 드디어 그를 찾아가니, 최원도가 매우 두텁게 접대하고 3년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 선생의 아비가 세상을 떠났는데, 최원도는 빈렴(殯斂)의 모든 일을 자기 아비와 똑같이 하여 그 어머니 무덤 옆에 장례를 지내게 하고 시를 지어주면서 말하기를,</br>세상의 어지러움을 슬퍼하여 눈물로 옷깃을 적시는구나 / 慷慨僞時淚滿襟</br>나그네의 효도와 정성은 저 세상에까지 이르도다 / 流離孝懇達幽陰</br>한산은 아득히 멀어 구름과 연기로 가로막히고 / 漢山迢遞雲煙阻</br>나현은 돌고 돌아 풀과 나무가 무성하도다 / 羅峴盤回草樹深</br>하늘이 쌍마의 갈기의 선후를 점침과 같으니 / 天占後先雙馬鬛</br>누가 군과 나 두 사람의 마음을 알리오 / 誰知君我兩人心</br>원하건대 세세에 길이 이와 같이 하여 / 願焉世世長如此</br>모름지기 우리 우정 굳게 굳게 하리라 / 須使交情利斷金</br>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모두 그 신의를 칭송하고 있다. 나현은 어머니를 장례지낸 곳이다. 사람들이 모두 그 신의를 칭송하고 있다. 나현은 어머니를 장례지낸 곳이다.)
  • E068  + (문평공(文平公) 김괴애(金乖崖)는 육경(六經)과 제자백사(諸子百史)에 능통하문평공(文平公) 김괴애(金乖崖)는 육경(六經)과 제자백사(諸子百史)에 능통하여 깊이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석전(釋典)에는 더욱 깊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의 공은 모름지기 한 책을 숙독함을 요하고, 또 천천히 그 뜻을 생각하여야 하니 급속하면 그 맛을 맛보기 어렵다. 나는 마음을 바로잡고 성(性)을 정(定)하였으므로 대하는 곳마다 통한다.” 하였다. 황화(皇華) 진한림(陳翰林)이 양화도(楊花渡)에서 놀 때 시를 지었는데, 시에 이(怡) 자가 있어 차운하는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 우물쭈물하자, 공이 드디어 짓기를,</br>강이 깊으니, 화가는 물론 뜰 것이요 / 江深畫舸惟須泛</br>산이 멀어 밝은 구름은 다만 즐거워 하리다 / 山遠晴雲只可怡</br>하니, 진공이 말하기를, “어떤 시에,</br>산중에 무엇이 있으리오 / 山中何所有</br>묏부리 위에 흰구름이 많도다 / 嶺上多白雲</br>다만 스스로 즐거워 할지언정 / 只可自怡悅</br>그대에게 갖다 증정하지는 못하리다 / 不堪特贈君</br>하였는데, 그대야말로 그 뜻을 얻었도다.” 하였다. 기랑중(祈郞中)이 한강(漢江)에서 놀 때 시를 지었는데, 시에 면(眠) 자가 있어 좌중의 문사가 모두 한 편씩 화답하였으나, 공만은 간고(艱苦)히 신음만 하고 오래도록 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한 구를 지었는데,</br>강구에 해가 기우니 사람들이 스스로 모이고 / 江口日斜人自集</br>부두에 바람이 자니 백로가 졸도다 / 渡郖風靜鷺絲眠</br>하니, 이때에 주서(注書) 이창신(李昌臣)이 옆에 있다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집(自集)과 사면(絲眠)이 대구가 아닌 듯하다.” 하므로, 공은 문득, “그러면 그대가 고쳐보라.” 하였다. 이창신은, “사(絲)를 한(閑)으로 함이 어떠하오.” 하였다. 공은, “그대의 말이 아주 마땅하다. 나는 근래에 시사가 말라붙어서 [[T044|<span class="keyword topic">침</span>]]이나 뜸으로도 고치지 못할 병이 되어 버렸노라.” 하니, 사람들도 모두 웃었다.)
  • E320  + (상사(上舍) 심극효(沈克孝)는 중종 때 서울에 은거하여 남산 밑에 집을 지었상사(上舍) 심극효(沈克孝)는 중종 때 서울에 은거하여 남산 밑에 집을 지었는데, 율정(栗亭)이 있어서 더욱 좋았었다. 한때에 유명한 집이라고 하였는데, 한 재상이 찾아와 술 마시며 즐기다가 새 집을 주고 바꾸려고 하자, 심극효는 웃으면서 말하기를,</br>“비록 천하를 반을 갈라 주고 악양루(岳陽樓)로 값을 더 준다 하여도 바꿀 수 없소.”</br>하였다. 한상 형윤(韓相亨允)은 농담을 잘하였었는데,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br>“참으로 천하의 반분에다가 악양루로 값을 더 주고 바꾸기로 한다면 그대의 교환하는 일을 모름지기 애써 이루려 할 것이오.”</br>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재미있는 일이라고 하여 전하였었다. 그가 작고하니, 용재(容齋)는 만사를 이렇게 지었다.</br>한 골짝도 천하의 반을 당하는데 / 一壑自當天下半</br>율정을 어찌 악양루와 바꿀쏘냐 / 栗亭寧換岳陽樓 당하는데 / 一壑自當天下半 율정을 어찌 악양루와 바꿀쏘냐 / 栗亭寧換岳陽樓)
  • E019  + (서백사(西伯寺) 주지(住持) 돈유 선사(敦裕禪師)가 시 두 수를 부쳐왔다. 서백사(西伯寺) 주지(住持) 돈유 선사(敦裕禪師)가 시 두 수를 부쳐왔다. 사자(使者)가 문에 이르러 독촉하므로 주필(走筆)로 다음과 같이 화답해 부쳤다. 우로 같은 임금 은혜 성기는 게 아니라 / 不是皇恩雨露疏 연하의 높은 생각 스스로 - 원문 1자 빠짐 - 그윽해서라오 / 煙霞高想自囗幽 임금께서 바삐 부르실 줄 아오니 / 須知紫闥催徵召 푸른 산 사랑해 오래 머물 생각 마오 / 休憐靑山久滯留 세상을 은둔하는 진인은 기꺼이 자취를 감추었는데 / 遁世眞人甘屛跡 시세를 따르는 신진들은 다투어 머리를 내미네 / 趍時新進競昂頭 상왕(象王)이 어느 날에나 오셔서 / 象王何日來騰踏 호서의 비린내를 쓸어버릴는지 / 狐鼠餘腥掃地收 장안의 서신이 성기다 마소 / 莫道長安鯉信疏 세속의 소리가 어떻게 그윽한 수운에 이르겠소 / 俗音那到水雲幽 그대는 암당의 연월에서 편안히 은거하시는데 / 巖堂煙月棲身穩 나는 경연의 풍진에서 녹봉 그리워 머문다오 / 京輦風塵戀祿留 생각건대 그대는 도의 풍치가 골수에 스몄을 터인데 / 道韻想君風入骨 가련하도다 나는 벼슬길에서 머리가 희었다오 / 宦遊憐我雪蒙頭 어느날에나 벼슬 버리고 고상한 그대를 따라 / 掛冠何日攀高躅 육척의 쇠잔한 몸 고이 늙을꼬 / 六尺殘骸老可收 또 별도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어서 촉(燭)을 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해동 고운의 십세손인데 / 東海孤雲十世孫 문장에는 오히려 선조의 유풍이 있구려 / 文章猶有祖風存 최치원(崔致遠)의 10세 손이다. 치원의 자는 고운(孤雲)이다. 두 자루 금촉에 시까지 겸해 주셨으니 / 兩條金燭兼詩貺 시는 족히 마음을 밝히겠고 촉은 어둠을 밝히리 / 詩足淸心燭破昏 선사는 다음과 같이 답서를 보내왔다. “나는 그 시가 인물되어 전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제 간판에 새겨 벽 위에 걸어서 길이 전하게 했소.”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제 간판에 새겨 벽 위에 걸어서 길이 전하게 했소.”)
  • E677  + (수호(垂胡) 임기(林芑)는 많은 서적을 읽었고 겸하여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을수호(垂胡) 임기(林芑)는 많은 서적을 읽었고 겸하여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을 지녔다. 그래서 무릇 구류백가(九流百家) 및 기서고문(奇書古文)을 눈으로 섭렵하고 입으로 외우지 않는 것이 없었다.</br>일찍이 서울에서 문인재자(文人才子)들이 모두 그의 집에 모여 각자의 견문(見聞)을 수호에게 문난(問難 질문)하였다. 수호가 좌우를 보면서 묻는 대로 즉답하는데 의혹스러운 곳이 없어서, 마치 쏟아지는 강물이나 흐르는 수은 같아 그침이 없었다. 호음(湖陰)은 늘 그를 가리키며 ‘걸어 다니는 비서〔行秘書〕’라고 말하였다.</br>호음은 술자리에서 많은 시를 지었는데 때때로 그 용사(用事)가 이해할 수 없는 곳이 있었으니, 대개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수호가 일찍이 사적인 자리에서 호음을 모시고 있다가 물어 보기를,</br>“상공(相公)의 시는 자주 위어(僞語)로 사람을 속이는데 후세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십니까?”</br>하였다. 호음이 대답하기를,</br>“세간에 당신같이 안목을 기른 자가 몇이겠는가. 희작(戱作)은 사고(私稿)에는 등재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후인의 눈에 띄겠는가.”</br>하였다. 마침내 서로 한바탕 웃었다.</br>호음은 병이 위독하자 수호에게 부탁하기를,</br>“그대가 꼭 내 시에 주를 달아 주게.”</br>하였다. 수호는 이를 허락하였다. 십여 년 후에 호음의 시고가 세상에 간행되었는데 주가 없었다. 가군(家君 아버님)이 수호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br>“제가 일찍이 그의 시를 수습하여 이미 한 권에 주를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에 용사와 문자가 대체로 거듭나오는지라 취하여 두루 열람해 본 즉 거듭나오는 곳이 갈수록 더욱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만두게 되었습니다…….”</br>하였다. 수호는 비록 이같이 박학했지만, 다만 시를 익히지도 않았고, 또한 즐겨 짓지도 않았다.</br>임신년(1572, 선조5)에 조사(詔使 중국 사신)를 맞이할 때 임기는 일기관(日記官)으로 임당(林塘)을 따라 용만(龍灣)에 갔다. 학사 습재(習齋) 권벽(權擘)이 조사의 시를 차운하여</br></br>중선루 위에서 북쪽으로 옷깃을 열고 / 仲宣樓上開襟北</br>자미 시 가운데 서쪽으로 길머리 했네 / 子美詩中首路西</br></br>라는 구절을 지었다. 수호가 말하기를,</br>“‘누상(樓上)’을 고쳐 ‘부리(賦裏)’로 하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br>하였다. 임당이 가군을 보며 말하기를,</br>“저 부리를 치는 것이 좋겠소.”</br>하기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포복절도하였다. 우리 동방의 말에 부리〔喙〕와 ‘부리(賦裏)’의 음이 같은 까닭이었다.</br>그러나 증다산(曾茶山)의 시 〈송증굉수천태(茶山送曾宏守天台)〉의 함련(頷聯)에서,</br></br>흥공의 부 가운데 운하가 붉고 / 興公賦裏雲霞赤</br>자미의 시 중에 도서가 푸르네 / 子美詩中島嶼靑</br></br>하였으니, 수호가 어찌 근거 없이 이 말을 하였겠는가. / 子美詩中島嶼靑 하였으니, 수호가 어찌 근거 없이 이 말을 하였겠는가.)
  • E397  + (우리 나라에 대단한 문장가들이 많이 배출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식대로우리 나라에 대단한 문장가들이 많이 배출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식대로 하려고만 힘썼을 뿐 당(唐) 나라 때의 작품에서 모범을 취해보려고 노력한 작품조차 극히 드문 실정이다. 그런데 충암(沖菴 김정(金淨))과 망헌(忘軒 이주(李冑)) 이후로는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 등 몇 사람이 가장 저명하다. 충암의 시 가운데 사람들의 입으로 전송(傳誦)되어 오는 것이 원래 많은데, 가령</br></br>강남 땅 못다 꾼 꿈 고요한 대낮인데 / 江南殘夢晝厭厭</br>꽃다운 해 날마다 시름만 더해가네 / 愁逐年芳日日添</br>꾀꼬리 제비 오지 않고 봄날 또 저무는데 / 鶯燕不來春又暮</br>살구꽃에 이슬비 발을 도로 내려놓네 / 杏花微雨下重簾</br></br>이라고 한 것이나, 또</br></br>가을 바람 낙엽지는 금강의 가을인데 / 西風木落錦江秋</br>연무 덮인 모래섬 바라보면 시름겨워 / 煙霧蘋洲一望愁</br>해 저물녘 술은 깨고 사람은 멀리 떠나는데 / 日暮酒醒人去遠</br>감당 못할 이별 생각 강 누각에 가득하네 / 不堪離思滿江樓</br></br>라고 한 시 등은 당 나라 사람들의 시집 속에 놔두어도 쉽게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망헌의 시 가운데</br></br>통주는 천하의 절경이라 / 通州天下勝</br>누각들 하늘에 솟았구나 / 樓觀出雲霄</br>저자엔 금릉의 물화(物貨) 가득하고 / 市積金陵貨</br>물줄기 양자강에 합류하네 / 江通楊子潮</br>가을이라 까마귀떼 물가에 내려 앉고 / 飢鴉秋落渚</br>저녁이라 외로운 새 요동으로 돌아간다 / 獨鳥暮歸遼</br>말 탄 이 내 몸 천리 길 나그네라 / 鞍馬身千里</br>정자 올라 바라보는 멀고 먼 고국땅 / 登臨故國遙</br></br>라고 한 것 역시 충암에 버금가는 시라고 하겠다. 최(崔)의 시에,</br></br>지난 해 절 언덕에 배를 갖다 대놓고는 / 去歲維舟蕭寺岸</br>꽃 꺾어 물가에서 전송을 하였었지 / 折花臨水送行人</br>이별 슬픔 저 산승은 아는지 모르는지 / 山僧不管傷離別</br>문을 닫고 무단히 또 봄 한 철을 보내누나 / 閉戶無端又一春</br></br>이라고 한 것이나, 백(白)의 시에,</br></br>못 속엔 붉은 연꽃 바람이 집에 가득터니 / 紅藕一池風滿院</br>나무마다 매미 소리 비가 마을로 몰려가네 / 亂蟬千樹雨歸村</br></br>이라고 한 것이나, 이(李)의 시에,</br></br>병객의 외로운 배 달빛만 밝게 비춰주고 / 病客孤舟明月在</br>노승의 적막한 절 꽃잎만 많이 져 있구나 / 老僧深院落花多</br></br>라고 한 표현들은 한 번 음미하면 그 맛을 알 수가 있다. 老僧深院落花多 라고 한 표현들은 한 번 음미하면 그 맛을 알 수가 있다.)
  • E380  + (윤결(尹結) 공이 젊었을 때 어느날 작은 마루에 나와 앉아 있는데 문이 열리윤결(尹結) 공이 젊었을 때 어느날 작은 마루에 나와 앉아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고운 옷을 입은 종 하나가 나타나, 명함을 내어 놓기에 문으로 가서 맞이하니, 한 관인(官人)이 따라 들어오는데, 의관과 용모가 매우 바르고 깨끗하였다. 장원이 말하기를, “ 반드시 잘못 찾아오신 겁니다. 어찌 우리 집에 올 관인이 있겠습니까. 그만두시고 다른 데 가서 찾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자, 그 관인은 말하기를, “꼭 윤 진사님을 뵙고자 합니다.” 하였다. 장원은 바로 갓과 옷을 가져오라 명하고 손님을 들어오시도록 하니, 그 관인은 자리를 옮겨 꿇어 앉아 말하기를, “제가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 어른을 번거롭게 하니, 말이 나오지 아니하여 감히 여쭙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명하신 어른께서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장원이 말하기를, “공의 모습을 뵈옵건대 현달한 관원 같으신데, 무슨 일이 있으시기에 이렇게 오시어 이름도 없는 저를 찾으셨습니까.” 하였다. 그 관인은 용모를 단정히 하고 말하기를, “장옥견(張玉見) 선생이 남양부백(南陽府伯)이 되었는데, 거문고 잘 타는 사람이 차례가 되어 서울에 왔었는데, 제가 우연히 그와 만나는 기회를 얻게 되어 그것을 계기로 정이 함빡 들어 떨어지려 하여도 차마 떨어질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장공에게 관대하게 용납하기를 청해 보았지만 허락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이름난 어른들의 글을 가져다가 청을 넣어 보았지만 그래도 허락하지 못하겠다 하시더니, 말씀하시기를, ‘만일 윤 진사의 시를 얻게 된다면, 내가 1년 동안 빌려 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감히 두려움을 무릅쓰고 와서 청하는게 올시다.” 하고, 이어서 술과 돈과 홍화전(紅花牋 글 쓰는 종이)한 폭을 꺼내서 무릎을 꺼내서 무릎을 꿇고 바치면서, “원하옵건대 명공(明公)께서 한 번 글 지으시는 노고를 아끼지 마시고 베푸시어 이 목마르고 주린 사람의 소망을 풀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장원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왜 다른 시를 구해다가 내가 지은 양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합니까.” 하니, 그는 또 말하기를, “고명한 선생의 시명(詩名)이 당대에 제일인 까닭으로 장공께서 꼭 얻고자 하옵니다. 다른 분의 시야 어디 이를 나위가 있습니까.” 하였다. 장원이 마침내 율시(律詩) 한 수를 내리쓰니,</br>보압좋은 향로(옛날의 향로는 오리 모양이었다)에 향불 잦아지고 / 寶鴨香銷罷</br>난당(아름다운 방 또는 여자가 쓰는 그윽한 방)에는 연기 흩어지네 / 蘭堂烟散初</br>등잔불 식어가니 작은 병풍은 어슴푸레하고 / 燈寒小屛暗</br>달 떠오르니 반쯤 드린 발에 빛 새어 들어 오누나 / 月上半簾疎</br>혀를 내밀면 모두 시샘을 이루고 / 吐舌皆成妬</br>맹약을 삼으면 또 헛될까 두렵구나 / 申盟更怕虛</br>낭군(郞君)의 정이 나와 같을 양이면 / 郞君情似妾</br>어찌 백년 된 옥이라도 아낄 것인가 / 何惜百年磲</br>하였다. 다 써서 주니, 그 관인이 고맙다 인사하고 돌아갔다. 얼마 후에 그 관인이 와서 사례하여 말하기를, “장 사또께서 선생의 시를 얻고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거문고 타는 아가씨를 돌려보내라고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관인은 옥천군수(沃川郡守) 왕손명(王孫名)이었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관인은 옥천군수(沃川郡守) 왕손명(王孫名)이었다.)
  • E038  + (장간공 장일의 승평연자루시는 이렇다. <div class="poetry장간공 장일의 승평연자루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71|<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바람과 달 처량한 영자루,</br>낭관이 한번 간 뒤 꿈조차 아득하다.</br>당시 좌중의 손들 늙음을 어찌 싫어하는가,</br>누대 위의 미인도 또한 흰 머리가 되었는데.</div> </br>밀직 곽예의 수강궁일요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72|<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여름엔 서늘하게 겨울엔 따듯하게 깨끗하고 살찌게 길렀는데,</br>무슨 일로 구름을 뚫고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가.</br>바다제비는 일찍이 낟알 한톨 주지 않았는데,</br>해마다 곁에 돌아와서 대들보 위를 날아다닌다.</div> </br>이승휴의 영운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73|<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한조각 홀연히 바다 속에서 생겨,</br>동서남북 가로세로 멋대로 다니네.</br>장마되어 마른 곡식 살린다 하면서,</br>공연히 중천의 햇빛과 달빛만 가리네.</div> </br>밀직 정윤의의 증렴사라는 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74|<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이른 새벽 말을 달려 외로운 성에 들어가니,</br>울타리가엔 사람 없고 살구만 익었구나.</br>뻐꾸기는 나라일 급한 줄도 모르고서,</br>수풀가에서 밭 갈라고 하루 종일 권하고 있네.</div> </br><div class="critique-text">[[C045|<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이 시들은 사람들이 즐겨 일컫는 것이다.</div></br><div class="critique-text">[[C046|<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그러나 장일의 시는 옛일이 느꺼워 지은 것이니 다른 뜻이 없다.</div></br><div class="critique-text">[[C1743|<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그 나머지 세 편은 모두 풍유를 간직하고 있는데</div></br><div class="critique-text">[[C047|<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정윤의, 곽예의 시는 풍유가 드러나지 않고 완곡하다.</div>)
  • E172  + (정덕(正德) 신사년에 가정(嘉靖) 황제가 즉위하자, 수찬(修撰) 당고(唐皐)정덕(正德) 신사년에 가정(嘉靖) 황제가 즉위하자, 수찬(修撰) 당고(唐皐) 등이 와서 등극(登極)의 조서를 선포할 때, 사신을 접대하였던 용재(容齋)이택지(李澤之) 가 처음 연회에서 자리를 같이하며 술잔을 들어 앞으로 내어 밀자, 당고가 팔을 뻗어 그 잔대를 잡고 약간 밀쳐서 물러서게 하니, 가까이 오는 것을 꺼리는 뜻이 있는 듯하였다. 당고의 음락시(飮酪詩)가 있었는데, 용재가 차운(次韻)하여,</br>왕가 8백 리에 비하면 / 若比王家八百里</br>서생이 너를 용서한 것이 또한 많다 / 書生貸汝亦云多</br>하였더니, 이때부터 교제가 밀접해지고 늘 시단의 노장이라고 칭찬하였다. 문장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요즈음 중국에 어떤 예부랑(禮部郞)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서적을 구입하는 것을 가혹하게 금지하고, 문장이 해외로 너무 많이 흘러나간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를 예의와 문헌이 있는 나라라고 하여 이적(吏狄)들처럼 낮추어 보지 않는 것은 이상과 같은 까닭이 있어서이니, 진실로 우리 나라 문인들로 하여금 중국에 들어가 여러 선비들 사이에서 고하(高下)를 정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저들에게 모두를 양보하겠는가. 고금에 우리를 이적들처럼 대우하지 않았던 것은 명확한 일이다.양보하겠는가. 고금에 우리를 이적들처럼 대우하지 않았던 것은 명확한 일이다.)
  • E406  + (조남명(曹南冥)의 이름은 식(植)이요 자는 건중(楗中)인데 절의(節義)를 숭조남명(曹南冥)의 이름은 식(植)이요 자는 건중(楗中)인데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깎아지른 듯한 천 길 벼랑과 같은 기상이 있었으며 벼슬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문장 역시 기위(奇偉)하여 범상치가 않았는데, 가령</br></br>천 석들이 종을 보게나 / 請看千石鍾</br>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도 안 난다네 / 非大叩無聲</br>만고에 변함 없는 천왕봉을 보세나 / 萬古天王峯</br>하늘이 울어대도 우는 일 전혀 없네 / 天鳴猶不鳴</br></br>이라고 한 시를 보면 그 시운(詩韻)이 호장(豪壯)할 뿐만이 아니라 자부하는 것이 얕지 않음을 알 수 있다.韻)이 호장(豪壯)할 뿐만이 아니라 자부하는 것이 얕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E272  + (종곡(鍾谷) 성 징군(成徵君)은 다만 몸가짐이 매우 고상했을 뿐 아니라, 문종곡(鍾谷) 성 징군(成徵君)은 다만 몸가짐이 매우 고상했을 뿐 아니라, 문장이 일세에 절묘하였으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시를 보는 이가 드물었다. 그 시에,</br>한 번 종산 속에 들어오니 / 一入鍾山裏</br>소나무와 대 속 초가에 누웠구나 / 松筠臥草廬</br>하늘이 높은데 머리 어찌 구부리랴 / 天高頭宜俯</br>땅은 좁아도 무릎을 펼 만하네 / 地膝滕猶舒</br>이름난 이 어느 누가 살았는고 / 名下何人在</br>숲 사이 이 늙은이 남았네 / 林間此老餘</br>사립문에 손은 자연 끊어지니 / 柴門客自絶</br>거문고와 책을 파하는 날이 없더라 / 無日罷琴書</br>하였다. 이와 같은 작품은 비록 옛 사람들 시집 가운데 두더라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아깝도다.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 한스럽다.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아깝도다.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 한스럽다.)
  • E071  + (중 둔우(屯雨)는 환암(幻庵 혼수(混修))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학중 둔우(屯雨)는 환암(幻庵 혼수(混修))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써 경전(經傳)을 탐독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뜻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또 시에도 능하여 시사(詩思)가 청절하여 목은(牧隱)ㆍ도은(陶隱) 등 선생과 더불어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 아조(我朝)에서는 불교를 숭상하지 않아 명가의 자제는 머리를 깎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승려로서 글을 아는 자가 없어 사(師)의 이름이 더욱 나타났으며 사방의 학자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고, 집현전의 선비들도 모두 탑하(榻下)에 나아가 글을 물으니, 성대하게 유석 사림(儒釋士林)의 사표가 되어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나의 백형과 중형이 일찍 회암사(檜巖寺)에서 글을 읽을 때, 사의 나이가 90여 세였는데 용모가 맑고 파리하며, 기체가 여전히 강하여 혹은 이틀쯤 밥을 먹지 않아도 그다지 배고파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밥을 올리면 혹은 몇 그릇을 다 먹되, 또한 배부른 빛이 없고 며칠이 지나도록 변소에 가지 아니하며, 항상 빈 방에 우뚝 앉아서 옥등을 달고 깨끗한 책상을 놓고, 밤새도록 책을 보아 작은 글자까지 하나하나 연구하며 졸거나 드러눕는 일이 없으며, 사람을 물리쳐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부를 일이 있으면 손으로 소쟁(小錚)을 쳐서 제자들이 수응하도록 하였으며, 큰소리를 지르지 아니하였다. 일본 국사인 중 문계(文溪)가 시를 구하여 진신(縉紳) 중에서 시를 지은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었는데, 사도 또한 명을 받들어 시를 지었다. 그 시에,</br>수국고정 / 水國古精</br>상쾌한 무위의 사람이로다 / 灑然無位人</br>빨리 달리는 것도 응당 스스로 그칠 것이요 / 火馳應自息</br>고목처럼 섰으니 다시 누구와 친하리오 / 柴立更誰親</br>풍악에는 구름이 발 아래에서 일고 / 楓岳雲生屨</br>분성에는 달빛이 성문에 가득하도다 / 盆城月滿闉</br>바람 맞은 돛은 해천이 넓고 / 風帆海天闊</br>매류는 고원의 봄이로구나 / 梅柳故園春</br>하였다. 당시에 춘정(春亭)이 문형(文衡)을 주관(主管)하였는데, 쇄연무위(灑然無位)의 글귀를 고쳐서 “소연절세인(蕭然絶世人 쓸쓸히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이라 하니, 스승이 말하기를, “변공(卞公)은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로다. 소연(蕭然)이 어찌 쇄연(灑然)만 하며, 절세(絶世)가 어찌 무위(無位)만 하겠는가. 이것은 자연무위(自然無爲)의 뜻을 깎아 없앨 뿐이로다.”하고, 항상 문사를 보면 섭섭해 마지않았다. 지금 천봉집(千峯集)이 세상에 전해진다.상 문사를 보면 섭섭해 마지않았다. 지금 천봉집(千峯集)이 세상에 전해진다.)
  • E300  + (지금의 시학(詩學)은 오로지 만당(晩唐)을 숭상하고 소동파(蘇東坡) 시를 버지금의 시학(詩學)은 오로지 만당(晩唐)을 숭상하고 소동파(蘇東坡) 시를 버려두고 있다. 호음(湖陰)이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br>“소동파의 시가 수준이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br>하고, 퇴계(退溪) 역시 말하기를,</br>“소동파의 시가 과연 만당에 미치지 못하는가?”</br>하였다. 나 역시 생각하기를, 소동파의 시에 이른바,</br>어찌 청주 육종사가 / 豈意靑州六從事</br>오유 선생이 될 줄 알았으랴 / 化爲烏有一先生</br>한 것이라든지,</br>옥루가 얼어 추워서 소름이 돋고 / 凍合玉樓寒起粟</br>빛은 은해를 흔들어 안화가 피는구나 / 光搖銀海眩生花</br>라고 한것,</br>풍화가 잘못 장춘원에 날아들고 / 風花誤入長春苑</br>구름 달은 길이길이 불야성에 다달았네 / 雲月長臨不夜城</br>한 것들이, 만당시 가운데 이 시처럼 빼어난 것과 겨룰 만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고려 시대에 과거의 방(榜)이 붙을 때마다 ‘33인의 소동파가 나왔다.’ 하였다. 고려의 문장은 본조(本朝)보다 우수한데, 그때 온 세상이 소동파를 사종(師宗)으로 삼았으니, 소동파의 시를 수준이 낮은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됨을 가볍게 보아서라면, 만당대(晩唐代)의 시인으로 소동파보다 나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오직 퇴계 상공은 소동파 시를 즐겨 읽어, 언제나,</br>구름 흩어 달 밝으니 그 누가 점철하였는가 / 雲散月明誰點綴</br>하늘색 바닷빛은 본디 맑은 것 / 天容海色本澄淸</br>이라는 구를 외웠다. 자신이 지은 시에도 소동파의 시를 끌어 쓴 것이 많다.이라는 구를 외웠다. 자신이 지은 시에도 소동파의 시를 끌어 쓴 것이 많다.)
  • E387  + (진란 때에는 왜놈들이 득실거렸다. 선조(宣祖)는 서쪽으로 피란 길을 떠났는데진란 때에는 왜놈들이 득실거렸다. 선조(宣祖)는 서쪽으로 피란 길을 떠났는데, 상국(相國) 정철(鄭澈)을 귀양살이에서 풀어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에 임명하였다. 정철이 명을 받고 남으로 내려갈 때,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사사(金沙寺)에 이르러 10일 동안을 묵게 되었는데, 때는 - 4자 빠짐 - □해 7월 가을이었다. 정철이 감개하여 드디어 율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br>금사사에 열흘 머무른 것이 / 十日金沙寺</br>고국을 생각하는 마음 삼년과 같이 길게 하누나 / 三秋故國心</br>밤 밀물은 새벽 바람을 흩뜨리는데 / 夜潮分爽氣</br>돌아오는 기러기 떼는 슬픈 소리를 보내오네 / 歸雁送哀音</br>오랑캐가 나타나니 자주 칼을 보게 되고 / 虜在頻看劍</br>훌륭한 사람이 죽었으니 거문고를 끊고자 하노라 / 人亡欲斷琴</br>평소에 읽던 출사표를 / 平生出師表</br>난리를 당하여 다시 한 번 길게 읊어 보노라 / 臨難更長吟</br>하였다.生出師表 난리를 당하여 다시 한 번 길게 읊어 보노라 / 臨難更長吟 하였다.)
  • E074  + (태종께서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더니 신우(辛禑) 임술년에 진사 제2등에 뽑혔태종께서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더니 신우(辛禑) 임술년에 진사 제2등에 뽑혔고, 또 이듬해 계해년에는 문과에 뽑혔는데, 김한로(金漢老)가 장원을 하고 심효생(沈孝生)은 2등이 되고 태종은 10등이었는데, 이내(李來)ㆍ성부(成傅)ㆍ윤규(尹珪)ㆍ윤사수(尹思修)ㆍ박습(朴習)ㆍ현맹인(玄孟仁) 등은 모두 동방(同榜)이었다. 보위(寶位)에 오르자 김한로의 딸이 세자 이지(李禔)의 부인이 되었는데, 진퇴할 때 마다 항상 장원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br>태종이 일찍이 선시(扇詩)를 지어 이르기를,</br>풍탑에 의지했을 때는 밝은 달을 생각하고 / 風榻依時思朗月</br>월헌에서 읆조리면서는 맑은 바람을 생각하도다 / 月軒吟處想淸風</br>대를 깎아 단선을 이루고 보니 / 自從削竹成團扇</br>명월 청풍이 손바닥 안에 있도다 / 朗月淸風在掌中</br>하였다. 옛날부터 일찍이 문사(文士)로써 대업을 이룬 자는 있지 아니하였고, 문장이 또한 이와 같이 기교(奇巧)한 제왕도 있지 아니하였다. 그 사물을 인용하여 비유한 것과 함축된 의취(意趣)는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다.용하여 비유한 것과 함축된 의취(意趣)는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다.)
  • E501  + (현옹 신흠은 어린 시절부터 문장에 전념하여 곧 하나의 일가를 이루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흠을 잡지 못했다. 일찍이 나에게 이별시를 지어 주었다. "" 그 시가 또한 노성하고 전중한 것이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 C004  +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죽이기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벌써 죽이기를 의논했다.’라는 대문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와서 무릎을 꿇었다 하니,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 E240  + (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 율시가 적혀 있다고 하였다 "" 보고 들은 자들이 정자의 들보가 극히 높아서 시인이 시를 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반드시 귀신이 쓴 시라고 여겼다. 도성 아래가 소란스러우며,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말하기를, 들보의 시가 이제 없고 글씨는 원의 벽에 있다고 하니, 더욱 괴이하게 여겼다. 내가 분변하여 말하기를, "이른바 들보에 제시했다는 것은 본래 그런 일이 없었고, 다만 원의 벽에 쓰여 있었는데 전하는 자가 잘못한 것이다. 어찌 일찍이 들보에 있었다가 지금은 벽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 시를 호음 정사룡 선생에게 보였더니, "시가 심히 졸렬하고 속되며, 또한 장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불자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E545  + (간이 최립은 문장을 잘하여 질정관으로 차출되어 연경으로 두 번 갔으니 대개 종계변무의 일 때문이었다. 황정욱이 시를 주기를, ""라 하였으니, 이 시를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하지만 격률이 아름답지 못하다.)
  • E435  + (고려 때 최충의 시에, ""라 하였다. 이 시를 세상에서 아름답다 하였는데, 다만 '未傳人' 석 자가 마땅치 않다. 어떤 사람은 최충이 아니라 최항의 시라 한다.)
  • E145  + (고려의 승려 신준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서하 고려의 승려 신준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서하 임춘도 역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학사 미수 이인로가 평하기를, 두 공의 작품은 처음에 서로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말을 토해내는 것이 처량하고 애절하여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하였다. 나는 이를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앞의 시는 사물을 읊었으나 섬약함에 빠졌고, 뒤의 시는 정감을 말했으나 구법이 호장하니, 기상이 서로 같지 않은데 이를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함은 어찌하여서인가? 임춘의 시는 본래 구양공 구양수의 ""에서 나온 것이니, 그 뜻을 훔쳤을 뿐 아니라 그 말까지 훔친 것이다. ""에서 나온 것이니, 그 뜻을 훔쳤을 뿐 아니라 그 말까지 훔친 것이다.)
  • E484  + (고산 이굉은 어렸을 적부터 재능으로 이름이 있었다. 하루는 친구를 데리고 세심대에 놀러갔는데, 그곳의 주인 이형성이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공이 벽에 시를 썼다. "" 사람들이 모두 이를 전하였다. 이형성이 이를 병통으로 여겨, 성대하게 차리고는 공을 맞이하여 앞의 시를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붓을 들어 시를 고쳤다. "" 또 용문산에 놀러 가서 한 연을 지었다. "")
  • E740  + (교관 조종저와 전중 임방은 모두 시에 재주가 있었다. 조종저가 눈을 읊은 시의 한 연에 ""라 하였고, 임방의 공북루 시의 한 연에 ""라 하였다. 사람들이 좋게 여겼으나 다만 꾀꼬리 소리 차갑고 어둡다(鶯語寒暗)라 한 것은 조어가 견강부회하여 온당하지 못하다.)
  • E698  + (교관(敎官) 권필(權韠)의 호는 석주(石洲)이다. 시벽(詩癖)이 있어 과업(교관(敎官) 권필(權韠)의 호는 석주(石洲)이다. 시벽(詩癖)이 있어 과업(科業)을 일삼지 않았다. 그의 시는 노두(老杜)를 조종(祖宗)으로 삼고 간재(簡齋)를 답습하여 어의(語意)가 지극하고 구법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당시 시에 능한 사람들이 모두 추숭하여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근세에 성명(盛名)을 얻은 시인들 중 석주가 으뜸이 되었다. 들으니, 중국인이 동국(東國)의 시를 간행할 때 석주의 장률 몇 수가 들어갔다고 한다. 그중 한 수에 이르기를,</br></br>강가에 뚜우- 호각 소리 들리는데 / 江上嗚嗚聞角聲</br>북두성 자루는 강에 꽂혀 강물이 맑네 / 斗柄揷江江水明</br>아침조수 언덕을 침노하니 오리들 요란하고 / 早潮侵岸鴨鵝亂</br>먼 집엔 등불 켜져 다듬이 소리 울리네 / 遙舍點燈砧杵鳴</br>나그네 문을 나서니 달 지려 하고 / 客子出門月初落</br>뱃사람 돛을 거니 바람 일려 하네 / 舟人挂席風欲生</br>서주의 천리 길 여기서부터 가노니 / 西州千里自此往</br>긴 여정 험난한 길 어느 때나 평탄해질까 / 長路險艱何日平</br></br>하였는데, 파산(坡山 파주)에서 강도(江都 강화도)로 가려고 할 때 지은 것이다. 이 한 편만을 보아도 그의 재능이 뛰어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폐조(廢朝 광해군)때에 유씨(柳氏)의 여러 사람이 내세(內勢 광해비 유씨)를 빙자하여 멋대로 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니, 당시의 조정 신하들이 모두 아첨하고 애걸하였다. 지평(持平) 임숙영(任叔英)이 그때 거자(擧子 과거 보는 선비)로 대책문(對策文)을 지었는데, 촉휘(觸諱 꺼리는 것을 범함)하는 말이 많아 삭과(削科)를 당하려다가 다행히 중지하였다. 이에 석주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청청한 궁류에 꾀꼬리 어지러이 나는데 / 宮柳靑靑鶯亂飛</br>성 가득 벼슬아치 봄빛에 아첨하네 / 滿城冠蓋媚春輝</br>조정에선 모두 태평성대 축하하지만 / 朝家共賀昇平樂</br>누가 직언을 포의에서 나오게 했는고 / 誰遣危言出布衣</br></br>하였다. 그 후에 별시(別試)가 있어 박자흥(朴自興)이 등제(登第)하였는데, 박자흥의 부친 박승종(朴承宗)과 박자흥의 장인 이이첨(李爾瞻)이 고관(考官)을 했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순사(循私 사사로움에 따름)를 감히 거론하지 못하였다. 그때에 허균(許筠) 또한 시관(試官)으로서 자신의 조카 허아무개(허요(許窑))가 지은 글을 취하여 방(榜) 안에 넣었다가 죄를 입어 멀리 귀양을 갔다. 석주가 또 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과거급제 사사로운 정 있었다 한들 / 設令科第有私情</br>아들 사위 동생 중 조카가 제일 가벼운데 / 子壻弟中姪最輕</br>허균에게만 이 죄를 감당케 하니 / 獨使許筠當此罪</br>세간에 공도 행하긴 과연 어렵구나 / 世間公道果難行</br></br>하였다. 폐조에 이르러 역옥(逆獄 역적에 관련된 옥사)을 친국(親鞠)할 때 이 두 편의 시가 죄인의 서찰 가운데서 나오니, 석주는 시안(詩案) 때문에 형벌을 받고, 끝내는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석주를 들쳐 메고 동성(東城) 밖의 인가로 나왔는데, 나와 조현부(趙玄夫)가 함께 따라가 행구(行具)를 꾸려 주었다. 주인집 판영(板櫺) 위에 초서(屮書)로 이장길(李長吉 이하(李賀, 790~816))의 시〈장진주(將進酒)〉끝 4구를 보았는데 ‘권(勸)’ 자가 ‘권(權)’ 자로 되어 있었으니, 사실 잘못 쓴 데서 나온 것이었다.</br>때는 정히 늦봄이라, 도화(桃花)가 뜰에 가득하였다. 석주는 죽음에 임하여 석잔 술을 연거푸 마시더니 해가 질 무렵에 눈을 감았다. 한 글자 잘못 쓰인 것이 우연히 참언(讖言)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지 아니한가. 잘못 쓰인 것이 우연히 참언(讖言)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지 아니한가.)
  • E699  + (교관(敎官) 성여학(成汝學)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의 생질(甥姪)이다교관(敎官) 성여학(成汝學)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의 생질(甥姪)이다. 어렸을 적부터 시벽(詩癖)이 있어 시에 힘쓴 지 이미 오래되어 가는 곳마다 가구(佳句)를 지었다. 그의 시구,</br></br>풀잎 이슬에 벌레 소리 젖고 / 草露蟲聲濕</br>숲 바람에 새 꿈도 위태롭네 / 林風鳥夢危</br></br>는 사람들이 칭찬하였고,</br></br>얼굴은 그의 벗만 알 뿐이요 / 面唯其友識</br>먹는 일도 장부의 슬픔일세 / 食爲丈夫哀</br></br>한 것은 궁어(窮語)이다.</br>내가 일찍이 그의 집에 왕래하곤 하였는데, 항상 그가 떨어진 옷에 작은 두건을 쓰고 귀밑 가득 머리털이 센 채로, 홀로 한 칸 서재에 기대어 종일토록 동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으니, 진실로 일세의 궁사(窮士)였다. ‘시가 사람을 궁색하게 한다〔詩能窮人〕’는 말은 아마도 성 교수(成敎授)를 위해 나왔을 것이다.게 한다〔詩能窮人〕’는 말은 아마도 성 교수(成敎授)를 위해 나왔을 것이다.)
  • E323  + (교리 고이순(高而順 경명(敬命)의 자)은 유생으로 있을 때 꿈에 시를 얻었다교리 고이순(高而順 경명(敬命)의 자)은 유생으로 있을 때 꿈에 시를 얻었다.</br>젊은 시절 풍류는 유독 뛰어났는데 / 少日風流獨不群</br>만년의 강호생활 병마저 나누어 가졌네 / 暮年江海病兼分</br>주저되기는 상강의 병이라도 앓아야 할까 / 趑趄肯作湘中病</br>호걸은 응당 영외의 글을 짓는다지 / 豪健應脩嶺外文</br>조수가 해문에 드니 하늘은 물을 치고 / 潮入海門天拍水</br>해가 포구에 지니 장기가 구름같이 이네 / 日沈漁浦瘴如雲</br>강남인지라 역마의 소식이 없기에 / 江南驛使無消息</br>매화를 꺾어 그대에게 주지 못하네 / 折得梅花未贈君</br>계해년에 인순의 아버지 및 그 장인이 모두 벼슬이 떨어져 호남으로 돌아갔었고, 이순 또한 울산 군수에 제배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 시는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다.또한 울산 군수에 제배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 시는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다.)
  • E626  + (국조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소재(盧蘇국조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소재(盧蘇齋)는 두보(杜甫)의 법을 깨쳤는데 황지천(黃芝川)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은 당(唐)을 본받았는데 이익지(李益之)가 그 흐름을 밝혔다. 우리 망형(亡兄)의 가행(歌行)은 이태백(李太白)과 같고 누님의 시는 성당(盛唐)의 경지에 접근하였다. 그 후에 권여장(權汝章)이 뒤늦게 나와 힘껏 전현(前賢)을 좇아 용재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껏 전현(前賢)을 좇아 용재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
  • E717  + (권협은 포의의 가난한 선비로 석주 권필의 아우이며 호는 초루이다. 그의 '송권협은 포의의 가난한 선비로 석주 권필의 아우이며 호는 초루이다. 그의 '송도를 회고하며' 절구시 한 수는 다음과 같다. "" 이 시가 한때 널리 회자되었다. 권협이 일찍이 삼각산 승가사에 유람을 갔는데 때마침 여러 명사들이 와서 모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권협이 자리에서 시에 대해 태연하게 이야기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업신여기며 말했다. "오늘은 이름난 관리들의 모임인데 저 서생이 어찌 당돌하게 끼어드는가." 권협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의 벼슬이 어찌 나의 한 구절에 겨루겠는가." 여러 명사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구를 읊어 주기를 청하였다. 권협이 즉시 낭랑하게 ""의 구절을 읊으니 여러 명사들이 이에 크게 놀라 상석에 모시고 공경하고는 하루종일 취하도록 마셨다.명사들이 이에 크게 놀라 상석에 모시고 공경하고는 하루종일 취하도록 마셨다.)
  • E171  + (그 뒤 시강(侍講) 동월(董越)이 왔을 때 행차가 평양까지 와서 풍월루(風月그 뒤 시강(侍講) 동월(董越)이 왔을 때 행차가 평양까지 와서 풍월루(風月樓)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안찰사로 있던 성허백당(成虛白堂)은 모습이 훌륭하지 못하였다. 동월이 안찰사를 주(州)의 관리인 줄 알고 그렇게 대수롭게 보지 않았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시를 짓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시에 화답하였다. 성허백이 지은 시에,</br>붉은 비 뜰에 가득한데 복사꽃 이미 떨어졌고 / 紅雨滿庭桃已謝</br>파란 연잎 물결에 점 일으키며 연꽃이 처음 떠오르더라 / 靑錢點水藕初浮</br>하였다. 동월이 이것을 보고 정색하고는, “이런 사람이 어째서 주(州)의 관리밖에 못하고 있는가.” 하니, 반접사(伴接使)인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이, “우리 나라에서는 풍화(風化)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하여 조정에서 으뜸가는 사람들을 뽑아서 주관(州官)으로 삼습니다.” 하였다. 동월의 풍월루기(風月樓記)에, “관찰사가 속으로 빼어나고 문아(文雅)하다.” 한 것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가 돌아갈 무렵 압록강에서 전별 잔치를 할 때에 쌍방이 모두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빛이 있었다. 충정공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는데,</br>푸른 연기는 고요하게 떠 있고 풀은 무성한데 / 靑煙漠漠草離離</br>바로 강두에서 석별할 때라 / 正是江頭惜別時</br>말없이 서로 보는 정 한 없으니 / 黙黙相看無限意</br>이생에 어디에서 다시 만나 즐길고 / 此生何處更追隨</br>하였다. 두 중국 사신이 서로 보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렸으니, 정말 정과 뜻이 한가지로 통하는 것은 풍속과 지역의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정말 정과 뜻이 한가지로 통하는 것은 풍속과 지역의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 E655  + (근대의 관각시(館閣詩)에서는 이아계(李鵝溪 아계는 이산해(李山海)의 호)가 근대의 관각시(館閣詩)에서는 이아계(李鵝溪 아계는 이산해(李山海)의 호)가 으뜸이다. 그의 시가 초년부터 당을 법받았으며 늘그막에 평해(平海)에 귀양 가서 비로소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고제봉(高霽峰 제봉은 고경명(高敬命)의 호)의 시 또한 벼슬을 내놓고 한거하는 가운데 크게 진보된 것을 볼 수 있었으니, 이에 문장이란 부귀 영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험난과 고초를 겪고 강산의 도움을 얻은 후에라야 묘경에 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이공(二公)뿐만 그러하랴. 고인이 모두 이러하니 유주(柳州)로 좌천됐던 유자후(柳子厚)나 영외(嶺外)로 귀양 갔던 소동파(蘇東坡)에서도 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나 영외(嶺外)로 귀양 갔던 소동파(蘇東坡)에서도 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 E575  + (근래에 당시를 배운다는 사람들이 모두 최경창과 이달을 칭송한다. 잠시 그 시근래에 당시를 배운다는 사람들이 모두 최경창과 이달을 칭송한다. 잠시 그 시 중 좋은 것들을 취하여 기록한다. 최경창이 이장곤 옛 재상의 집을 지나며 지은 시는 이러하였다. "" 중국의 어느 장군이 전사했을 때 지은 만사는 이러하였다. "" 이달이 영광에서 최경창을 만났을 때에 눈여겨본 기생이 있었는데, 마침 상인이 보랏빛 비단을 파는 것을 보고 즉시 붓을 달려 최경창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 "" 최경창이 즉시 답하기를, "만약 이 시의 값을 논한다면 어찌 천금에 그치겠는가. 고을이 작아 재물이 마음에 차지 않을 것이다."라 하고 마침내 한 구에 백미 십 석을 쳐서 사십 석을 주었다. 그 밖에 바다에 머물며 지은 시는 이러하였다. "" 또다른 시는 이러하였다. "" 또 최경창의 시에 ""라 하였다. 모두 청담하며 가상히 여길 만하다. 다만 이런 사람들은 다만 작은 시만을 일삼고 본래 학문이 넉넉하지 못하였으므로 종래 옛사람들처럼 크게 울리지는 못하였으니 아쉬울 뿐이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종래 옛사람들처럼 크게 울리지는 못하였으니 아쉬울 뿐이다.)
  • E741  + (근래에 시가 없다는 것은 정말로 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라고 할 만한 시근래에 시가 없다는 것은 정말로 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라고 할 만한 시가 없다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이 옛날의 시짓기에 힘쓰지 않고 오직 과거 공부에만 힘써서 혹 과부나 과시에는 공교로우면서도 고시율에는 전혀 어둡다. 비록 대략 구를 엮을 줄 아는 자라도 또한 과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골 북과 섬 피리 같아서 잡다하고 산란하여 들을 수가 없으니 그것을 어찌 시라 하겠는가. 사람들이 전하는 어떤 향사의 시에, ""라 하였다. 비록 당시의 율격은 아니지만 과시의 틀을 벗어나 장법이 절로 이루어졌다. 애석하구나. 그 이름을 잃어 세상에 전하지 못하는 것이. 절로 이루어졌다. 애석하구나. 그 이름을 잃어 세상에 전하지 못하는 것이.)
  • E237  + (기수 최익령은 강릉 경포대 근처에 살고 있었다. 기재 신광한이 삼척의 현감으기수 최익령은 강릉 경포대 근처에 살고 있었다. 기재 신광한이 삼척의 현감으로 있을 때, 경포에서 최익령의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고자 하였다. 마침 주인이 외출 중이어서 일단 바깥채에 머물렀다. 밤이 깊어갈 무렵, 한 줄기 불빛이 사람을 따라오는 것이 보이고 마을 개들이 모두 짖었다. 최씨 집 하인이 알리기를, "주인어른이 오십니다"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익령이 급히 들어와 안부를 묻자, 신광한이 시를 지었다. "" 그 후 관동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여러 번 이 운에 차운하여 큰 시첩을 만들었는데, 보는 이들이 모두 신광한의 시를 절창이라고 하였다. 몇 년이 지나 최익령이 선공감의 역으로 서울에 머물게 되어 거의 십 년을 지냈다. 하루는 시첩을 평소 친하던 서생에게 보여주며 차운을 청하자, 그가 제하기를, ""라 하였다. 최익령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 시야말로 참으로 나에게 금침이 되는 말이로구나."라 하였다.말하기를, "이 시야말로 참으로 나에게 금침이 되는 말이로구나."라 하였다.)
  • E195  + (김시습이 유양양(柳襄陽)에게 보낸 편지가 수백 마디나 되는데, 그 대략은 다김시습이 유양양(柳襄陽)에게 보낸 편지가 수백 마디나 되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나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능히 글을 알아서 일가 할아버지 최치운(崔致雲)이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세 살에 글을 지을 수 있어,</br>복숭아는 붉고 버들은 푸르러 봄이 저물었도다 / 桃紅柳綠三春暮</br>구슬은 푸른 바늘로 꿰었으니 솔잎의 이슬이로다 / 珠貫靑針松葉露</br>등의 구절을 지었다. 다섯 살에 《중용(中庸)》ㆍ《대학(大學)》을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읽었으며, 사예(司藝) 조수(趙須)가 자(字)를 열(說)로 지어 주었으며, 정승 허조(許稠)가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니 노(老) 자로 시를 지으라.’ 하기에, 나는 곧</br>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이 늙지 않았도다 / 老木開花心不老</br>하였더니, 허정승이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기를, “이 아이는 이른바 신동(神童)이다.” 하였다. 세종이 이 말을 듣고 대언사(代言司 승정원)에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명하여 시험하게 하였다.</br>지신사가 무릎 위에 안고 벽화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며, ‘네가 시를 지을 수 있느냐.’ 하기에, 나는 곧 대답하기를,</br>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는고 / 小亭舟宅何人在</br>하였다. 이렇게 하여 매우 많은 글과 시를 지었다.있는고 / 小亭舟宅何人在 하였다. 이렇게 하여 매우 많은 글과 시를 지었다.)
  • E632  + (김이숙(金頤叔 이숙은 김안로(金安老)의 자)이 젊어서 관동에 놀러갔을 때 꿈김이숙(金頤叔 이숙은 김안로(金安老)의 자)이 젊어서 관동에 놀러갔을 때 꿈에 귀신이 나타나 읊조리기를</br>봄은 우전의 산천 밖에 무르익고 / 春融禹甸山川外</br>풍악은 우정의 조수 사이 아뢰누나 / 樂奏虞庭鳥獸間</br>라 하고는 이어서 말하기를,</br>“이것이 바로 네가 벼슬길을 얻을 시어(詩語)이다.”</br>고 하므로 꿈을 깨고 나서 이를 기억해 두었다. 다음해 정시(庭試)에 들어가니 연산(燕山)이 율시 여섯 편을 내어 시험을 치렀는데 그 가운데 ‘봄날 이원 제자들이 침향정 가에서 한가로이 악보를 들춰보다.[春日梨園弟子沈香亭畔閑閱樂譜]’라는 시제(詩題)를 가지고 한(閑) 자를 압운(押韻)으로 해서 시를 지으라는 문제가 있었다. 김이 생각하니 그 글귀가 꼭 들어 맞는지라 이내 그걸 가지고 써 냈다. 강목계(姜木溪 목계은 강혼(姜渾)의 호)가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크게 칭찬하고 장원(壯元)을 시켰다. 김모재(金慕齋 모재는 김안국(金安國)의 호)가 본디 글을 잘 안다고 이름이 난지라 참시관(參試官)을 하면서,</br>“이 구절은 귀신의 소리지 사람의 시가 아니다.”</br>하고 즉시 그 출처를 묻자 김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감식안에 탄복하였다. 출처를 묻자 김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감식안에 탄복하였다.)
  • E015  + (나는 옛날 매성유(梅聖兪 성유는 송(宋)의 시인 매요신(梅堯臣)의 자)의 시나는 옛날 매성유(梅聖兪 성유는 송(宋)의 시인 매요신(梅堯臣)의 자)의 시를 읽고 마음속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옛날 사람들이 그를 시옹(詩翁)이라고 호칭하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겉으로는 약한 듯하나 속으로는 단단한 힘이 있어 참으로 시 중의 우수한 것이었다. 매성유의 시를 알아본 뒤라야 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옛사람들이 사령운(謝靈運)의 시에, 못 언덕에 봄풀이 돋아난다 / 池塘春草生 는 것을 용하다고 하나, 나는 좋은 점을 모르겠다. 서응(徐凝 당(唐) 나라 시인)의 폭포시(瀑布詩)에, 한 가닥이 푸른 산 빛을 갈라 놓았다 / 一條界破靑山色 는 것은, 나는 매우 좋은 시구라고 생각되는데, 소동파(蘇東坡)는 악시(惡詩)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나 같은 자의 시를 알아보는 것은 옛날 사람에 미치지 못함이 매우 멀다. 도잠(陶潛)의 시는 담연히 화평하고 고요하여 마치 청묘(淸廟)의 거문고가 줄이 붉고 구멍이 커서 한 사람이 창(唱)하면 세 사람이 화답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 체를 본받으려 하나 끝내 비슷하게도 할 수 없으니 더욱 가소롭다. 나는 그 체를 본받으려 하나 끝내 비슷하게도 할 수 없으니 더욱 가소롭다.)
  • E024  + (나는 조칙(朝勅)을 받들어 변산(邊山)에서 벌목(伐木)하는 일을 맡아보았다.나는 조칙(朝勅)을 받들어 변산(邊山)에서 벌목(伐木)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벌목하는 일을 항시 감독하므로 나를 ‘작목사(斫木使)’라고 부른다. 나는 노상에서 장난삼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br>호위하는 수레 속에 권세 부리니 그 영화 뽐낼 만한데 / 權在擁車榮可詑</br>벼슬 이름 작목사라 하니 부끄럽기 그지없네 / 官呼斫木辱堪知</br>이것은 나의 하는 일이 지게꾼이나 나무꾼의 일과 같기 때문이다.</br>처음 변산에 들어가니 겹겹이 산봉우리가 솟았다 엎뎠다 구부렸다 폈다 하였고 옆에 큰 바다가 굽어보이고 바다 가운데 군산도(群山島)ㆍ위도(蝟島)가 있는데, 모두 조석으로 이를 수가 있었다. 해인(海人)들이 말하기를,</br>“순풍을 만나면 중국에 가는 것도 멀지 않다.”</br>하였다. 일찍이 주사포(主使浦)를 지날 때 밝은 달이 고개에 떠올라 모래 벌판을 휘영청 비추어서 기분이 상쾌하기에 고삐를 놓고 천천히 가며 앞으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침음(沈吟)하였더니 마부가 이상히 여겼였는데,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br>한 해 봄에 세 번이나 이 강가를 지나니 / 一春三過此江頭</br>왕사가 어찌 이렇게도 쉬지 못하게 하는고 / 王事何曾怨未休</br>만리라 장엄한 파도는 백마가 달리는 듯 / 萬里壯濤奔白馬</br>천년이라 늙은 나무는 푸른 교룡이 누웠는 듯 / 千年老木臥蒼虯</br>바닷바람은 만촌에서 나는 피리소리 전하고 / 海風吹落蠻村笛</br>모래에 비친 달빛은 포곡에 뜬 배를 맞이한다 / 沙月來迎浦谷舟</br>추동을 거느리고 가니 응당 나를 괴이하게 여기리라 / 擁去騶童應怪我</br>아름다운 경치 만날 적마다 오래 머무네 / 每逢佳景立遲留</br>나는 당초 시를 지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저절로 지어졌다. 당초 시를 지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저절로 지어졌다.)
  • E516  + (난설헌 허초희는 정자 김성립의 처로 최근의 규수 가운데 제일이었다. 일찍 죽었으나 시집을 남겨 세상에 전한다. 평생 금슬이 좋지 않아서 그녀의 시에는 원망하는 뜻이 많다. '채련곡'시에, ""라 하였다. 중국의 사람들이 그 시집을 사들여와서는 함께 이야기하곤 하였다.)
  • E622  + (남지정(南止亭 지정은 남곤(南袞)의 호)은 일찍이, 김일손(金馹孫)의 글이나 박은(朴誾)의 시는 쉽게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참으로 옳다. 박은의 시는 비록 정성(正聲)은 아니나 엄진(嚴縝)하고 경한(勁悍)하다. 흐린 봄날 비 오련다 새는 서로 지저귀고 / 春陰欲雨鳥相語 늙은 나무 무정하니 바람 절로 슬퍼지네 / 老樹無情風自哀 와 같은 구절은 당의 섬려(纖麗)한 시풍만을 배운 자로는 어찌 감히 그 경지에 올라설 수 있으랴.)
  • E684  +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은 서예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스스로 자앙(子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은 서예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스스로 자앙(子昂)을 배웠다고 말하였으나 조맹부(趙孟頫) 서체와는 달랐다. 해서(楷書) 글씨가 매우 아름다웠으며 그의 시는 낭연(琅然)하여 애송할 만하였다. 〈영신월(詠新月)〉 시의 일련에서 이르기를,</br></br>달빛이 비껴 흡사 명협 세 잎을 비추는 듯하고 / 光斜恰照蓂三葉</br>바퀴 이지러져 겨우 계수 한 가지만 용납하네 / 輪缺纔容桂一枝</br></br>하였는데, 사람들은 뛰어나다고 칭찬하였다. 동악(東岳 이안눌의 호)이 차운하여 이르기를,</br></br>낚시 드리워 굴혈에 잠긴 교룡 겁주고 / 鉤沈剩劫潛蛟窟</br>활 걸어 가지에 조는 학을 놀라게 하네 / 弓掛偏驚睡鶴枝</br></br>하였는데, 비록 원운에는 미치지 못하나 압운에는 선후의 난이(難易)가 있는 법이니, 동악의 높은 재주를 알 수 있다.</br>두보의 시 〈대월(對月)〉에 이르기를,</br></br>달빛이 잠긴 규룡을 쏘니 꿈틀거리고 / 光射潛虯動</br>밝음이 잠든 새에 어른거리니 찡그리네 / 明翻宿鳥頻</br></br>하였고, 또 왕원지(王元之)의 시〈중추월(中秋月)〉에 이르기를,</br></br>차가움은 반딧불 나는 풀 적시고 / 冷濕流螢草</br>달빛은 학이 조는 가지에 엉겼네 / 光凝睡鶴枝</br></br>하였으니, 대개 동악은 두 시의 말을 사용한 것이다.엉겼네 / 光凝睡鶴枝 하였으니, 대개 동악은 두 시의 말을 사용한 것이다.)
  • E224  + (남추강이 한훤선생의 일을 씀에 말하길, 대유(大猷)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남추강이 한훤선생의 일을 씀에 말하길, 대유(大猷)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에게 수업하였고, 고상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었고,인정(人定)이 된 뒤라야 잠자리에 들고 닭이 울면 일어났으며, 손에서 《소학》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이 국가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소학》을 읽는 아이가 어찌 큰 의리를 알겠는가.” 하였다. 나이 30이 된 뒤에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고, 나이가 들수록 도가 더욱 높아졌기에 세상이 만회될 수 없고 도가 행해질 수 없음을 익히 알아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다. 그러나 사람들이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br>점필재 선생이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또한 국사를 건의하는 일이 없자, 대유가 시를 지어 올리기를, </br>도란 겨울에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 마심에 있거늘 / 道在冬裘夏飮氷</br>비 개면 가고 비 오면 멈춤이 어찌 전능한 일일까 / 霽行潦止豈全能</br>난초도 만약 세속을 따른다면 마침내 변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br>소는 밭 갈고 말은 탄다는 이치를 누가 믿으리까 / 誰信牛耕馬可乘</br>하였다. 선생이 화답하기를,</br>분에 넘치게 관직이 경대부에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伐氷</br>임금 바로잡고 세속 구제함을 내 어찌 능히 하랴 / 匡君救俗我何能</br>이로써 후배로 하여금 오졸함을 비웃게 했으니 / 從敎後輩嘲迂拙</br>구구한 권세의 벼슬길에는 나설 것이 못 되누나 / 勢利區區不足乘</br>하였으니, 대개 이를 싫어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나빠졌다.乘 하였으니, 대개 이를 싫어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나빠졌다.)
  • E018  + (내가 꿈에 깊은 산에서 올라가 길을 잃어서 어느 골짜기에 이르니, 누대(樓臺내가 꿈에 깊은 산에서 올라가 길을 잃어서 어느 골짜기에 이르니, 누대(樓臺)가 매우 특이하게 화려하였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여기가 어떤 곳이냐고 물으니, 선녀대(仙女臺)라고 대답하였다. 조금 뒤에 미인 6~7명이 문을 열고 나와서 맞이하므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더니, 이내 시를 청하였다. 그래서 나는 곧 다음과 같이, 길 따라 옥대에 들매 푸른 문이 열리더니 / 路入玉臺呀碧戶 아름다운 선녀들 나와서 서로 맞이하네 / 翠蛾仙女出相迎 고 불렀더니, 여러 선녀들은 자못 기뻐하지 않았다. 나는 비록 그 까닭은 몰랐지만 곧, 밝은 눈동자와 흰 이로 웃으며 맞이하니 / 明眸皓齒笑相迎 선녀 또한 세정 있음을 비로소 알겠네 / 始識仙娥亦世情 고 고쳐 지었다. 여러 선녀들이 다음 구를 계속 지으라고 청하기에, 내가 여러 선녀들에게 사양하니, 한 선녀가 다음과 같이 연속시킨다. 세정이 나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 不是世情能到我 재자가 범상한 사람과 다름을 어여뻐해서이다 / 爲憐才子異於常 내가, “선녀도 운자를 그릇 쓰느냐?” 하니, 박장 대소하였다. 따라서 꿈을 깼다. 나는 추후에 그 시를 연속하여 다음과 같이 지었다. 한 구를 겨우 이루고 놀라 꿈을 깨었으니 / 一句纔成驚破夢 짐짓 빚을 남겨 다시 만날 기회로 삼노라 / 故留餘債擬尋盟/ 一句纔成驚破夢 짐짓 빚을 남겨 다시 만날 기회로 삼노라 / 故留餘債擬尋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