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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663 + (중형은 고제봉(高霽峰)에게 깊이 심복하여 늘 말하기를, “평양에 함께 있을 … 중형은 고제봉(高霽峰)에게 깊이 심복하여 늘 말하기를,</br>“평양에 함께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교(交) 자로 운을 내니 고공(高公)이 이에 화답하기를,</br>마을 연댄 벼 기장은 삼추 지나 무르익고 / 連村稌黍三秋後</br>한 고을의 서리 바람은 시월이라 초승일세 / 一路風霜十月交</br>라 하므로 나도 모르게 굴복하게 되었다.”</br>하고 또 말하기를,</br>“참판(參判) 유영길(柳永吉)의 시는 비록 시경(詩境)은 협소하나 좋은 곳이 있으니,</br>이를테면</br>금슬은 성급히 해를 녹이고 / 瑟錦消年急</br>금 병풍은 웃음 사기 더디구려 / 金屛買笑遲</br>발에 비친 석류는 곱기도 하고 / 映箔山榴艶</br>연못으로 통하는 들물은 맑기도 하네 / 通池野水淸</br>등의 시구는 밝고 굳세어 즐길 만하다.”</br>고 하였다.도 하네 / 通池野水淸 등의 시구는 밝고 굳세어 즐길 만하다.” 고 하였다.)
- E300 + (지금의 시학(詩學)은 오로지 만당(晩唐)을 숭상하고 소동파(蘇東坡) 시를 버 … 지금의 시학(詩學)은 오로지 만당(晩唐)을 숭상하고 소동파(蘇東坡) 시를 버려두고 있다. 호음(湖陰)이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br>“소동파의 시가 수준이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br>하고, 퇴계(退溪) 역시 말하기를,</br>“소동파의 시가 과연 만당에 미치지 못하는가?”</br>하였다. 나 역시 생각하기를, 소동파의 시에 이른바,</br>어찌 청주 육종사가 / 豈意靑州六從事</br>오유 선생이 될 줄 알았으랴 / 化爲烏有一先生</br>한 것이라든지,</br>옥루가 얼어 추워서 소름이 돋고 / 凍合玉樓寒起粟</br>빛은 은해를 흔들어 안화가 피는구나 / 光搖銀海眩生花</br>라고 한것,</br>풍화가 잘못 장춘원에 날아들고 / 風花誤入長春苑</br>구름 달은 길이길이 불야성에 다달았네 / 雲月長臨不夜城</br>한 것들이, 만당시 가운데 이 시처럼 빼어난 것과 겨룰 만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고려 시대에 과거의 방(榜)이 붙을 때마다 ‘33인의 소동파가 나왔다.’ 하였다. 고려의 문장은 본조(本朝)보다 우수한데, 그때 온 세상이 소동파를 사종(師宗)으로 삼았으니, 소동파의 시를 수준이 낮은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됨을 가볍게 보아서라면, 만당대(晩唐代)의 시인으로 소동파보다 나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오직 퇴계 상공은 소동파 시를 즐겨 읽어, 언제나,</br>구름 흩어 달 밝으니 그 누가 점철하였는가 / 雲散月明誰點綴</br>하늘색 바닷빛은 본디 맑은 것 / 天容海色本澄淸</br>이라는 구를 외웠다. 자신이 지은 시에도 소동파의 시를 끌어 쓴 것이 많다.이라는 구를 외웠다. 자신이 지은 시에도 소동파의 시를 끌어 쓴 것이 많다.)
- E719 + (지봉 이수광과 동주 이민구 부자는 모두 시문으로 명가라 일컬어졌다. 이수광은 … 지봉 이수광과 동주 이민구 부자는 모두 시문으로 명가라 일컬어졌다. 이수광은 시에 뛰어났고 이민구는 부에 뛰어났다. 이민구가 말했다. "선친의 시는 마힐 왕유를 숭상하고 나의 시는 소릉 두보를 숭상한다." 그 뜻은 대개 자부하는 뜻이 많았던 듯한데, 평가하는 사람들은 조예에 있어서 아들이 반드시 아버지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이민구의 "" 구는 비록 사람들이 전하여 읊었으나 구 가운데에서 '조수'와 '물', '생겨남'과 '사라짐'을 대로 삼았으니 병통을 피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이수광의 "" 구는 편안하고 느긋하여 빈틈이 없다.피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이수광의 "" 구는 편안하고 느긋하여 빈틈이 없다.)
- E100 + (지정 남곤이 황해 감사로 있던 때에 해주의 기녀를 매우 사랑하였다. 체차되어 돌아갈 적에 금교역에 이르러서 처음에는 주관(역관)이 기녀를 데려와 역정에서 작별하리라 여겨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밤새 두근거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절구 한 수를 읊어 벽에 썼다.""이 시를 들은 사람들이 이르기를, 향렴의 정감과 태도를 곡진하게 그려내어 그 묘함은 사람이 능히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 E021 + (지주사(知奏事) 최공(崔公)의 집에 천엽류(千葉榴) 꽃이 만발하였다. 그것은 … 지주사(知奏事) 최공(崔公)의 집에 천엽류(千葉榴) 꽃이 만발하였다. 그것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한(內翰) 이인로(李仁老)ㆍ내한 김극기(金克己)ㆍ유원(留院) 이담지(李湛之)ㆍ사직(司直) 함순(咸淳)과 나를 특별히 초청하여 문자를 내서 시를 짓게 하였다. 나의 시는 다음과 같다. 백옥 같은 미인 얼굴 처음 술에 취하여 / 玉顔初被酒 붉은 빛이 십분이나 더하듯 / 紅暈十分侵 꽃다운 꽃송이 조물주의 온갖 기교 모였고 / 葩馥鍾天巧 아리따운 그 자태 유객의 마음 끄누나 / 姿嬌挑客尋 훈훈한 향기 맑은 날에 나비를 이끌고 / 爇香晴引蝶 불빛처럼 환한 꽃 밤에 새를 놀라게 하네 / 散火夜驚禽 그처럼 고운 것을 늦게 피도록 하였으니 / 惜艶敎開晩 누가 조물주의 마음을 알겠는가 / 誰知造物心 내가 늦게 출세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물주의 마음을 알겠는가 / 誰知造物心 내가 늦게 출세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 E387 + (진란 때에는 왜놈들이 득실거렸다. 선조(宣祖)는 서쪽으로 피란 길을 떠났는데 … 진란 때에는 왜놈들이 득실거렸다. 선조(宣祖)는 서쪽으로 피란 길을 떠났는데, 상국(相國) 정철(鄭澈)을 귀양살이에서 풀어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에 임명하였다. 정철이 명을 받고 남으로 내려갈 때,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사사(金沙寺)에 이르러 10일 동안을 묵게 되었는데, 때는 - 4자 빠짐 - □해 7월 가을이었다. 정철이 감개하여 드디어 율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br>금사사에 열흘 머무른 것이 / 十日金沙寺</br>고국을 생각하는 마음 삼년과 같이 길게 하누나 / 三秋故國心</br>밤 밀물은 새벽 바람을 흩뜨리는데 / 夜潮分爽氣</br>돌아오는 기러기 떼는 슬픈 소리를 보내오네 / 歸雁送哀音</br>오랑캐가 나타나니 자주 칼을 보게 되고 / 虜在頻看劍</br>훌륭한 사람이 죽었으니 거문고를 끊고자 하노라 / 人亡欲斷琴</br>평소에 읽던 출사표를 / 平生出師表</br>난리를 당하여 다시 한 번 길게 읊어 보노라 / 臨難更長吟</br>하였다.生出師表 난리를 당하여 다시 한 번 길게 읊어 보노라 / 臨難更長吟 하였다.)
- E546 + (참판 박민헌이 '촉석루 시에 차운하여'에서, ""라 하였다. 다른 차운한 사람들이 모두 이에 미치지 못했다. 공은 당세에 시명이 있었으며 시학은 두보를 온전히 배웠다. 그러나 그의 사고 가운데 여러 작품들을 보면 모름지기 사람들의 뜻에 만족스럽지 못하다. 믿을 만하구나, 보는 것이 듣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 E076 + (참판 이자야(李子野)가 일찍이 명경(明京)에 갔을 때, 어떤 서장관(書狀官) … 참판 이자야(李子野)가 일찍이 명경(明京)에 갔을 때, 어떤 서장관(書狀官)이 마침 시가(市街)에 나갔다가 사창(紗窓) 속에서, 미인이 수를 놓고 있는 것을 보고 서장관이 눈을 떼지 못했더니, 미인이 창문을 열고 물을 뿌려서 옷이 모두 젖었다. 참판이 이 소문을 듣고 시를 짓기를,</br>하수의 다리 가에 버들개지 나는데 / 何水橋頭柳絮飛</br>춘색을 몹시 탐하다가 돌아가기를 잊었도다 / 酷探春色却忘歸</br>다정하도다 창 사이에서 홀연히 비가 내리니 / 多情忽有窓間雨</br>날려 분사의 어사 옷에 뿌리도다 / 飛酒分司御史衣</br>하였다. 그뒤에 다시 명경에 갈 때에 통주(通州)에 이르러서 앓지도 않다가 갑자기 죽어,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通州)에 이르러서 앓지도 않다가 갑자기 죽어,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 E055 + (철성(鐵城) 최영(崔瑩)은 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늘 “황금을 보기를 … 철성(鐵城) 최영(崔瑩)은 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늘 “황금을 보기를 흙같이 하라.[見金如土]”라고 가르쳤으므로, 항상 이 네 글자를 큰 띠[紳]에 써서 종신토록 지니고 다녀 잊지 않았다. 국정(國政)을 잡아 위신이 중외에 떨쳤으나 남의 것을 조금도 취하지 아니하고 겨우 먹고 사는 데 족할 따름이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시중(侍中)이 되었을 때에 점련(占聯)하기를,</br>3척 칼머리에 사직이 편하고나 / 三尺劍頭安社稷</br>하니, 당시의 문사들은 아무도 대구를 짓지 못했는데, 공이 재빨리,</br>한가닥 채찍 끝으로 천지가 안정된다 / 一條鞭末定乾坤</br>하니,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끝으로 천지가 안정된다 / 一條鞭末定乾坤 하니,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 E419 + (최간이(崔簡易)가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사당을 주제로 하여 시를 읊기를, 그 당시 삼강의 인륜 중히 여겨서 하였을 뿐 / 只爲三綱當日重 훗날 오등의 영화 바라고 한 일 아니었네 / 非期五等後時榮 청운지사(靑雲之士) 열전(列傳) 지어 문자를 달릴 적에 / 靑雲作傳馳文字 이름만 줄곧 논하다니 견식이 어설프군 / 一味論名見卽輕 이라 하였는데, 이는 전에 사람들이 내놓지 못한 것으로서 칠언 근체시(近體詩) 가운데 아래 2구에 나오는 것이다.)
- E230 + (추강 남효온이 한선선생 김굉필의 일을 서술하여 말하였다. 대유 김굉필은 점필 … 추강 남효온이 한선선생 김굉필의 일을 서술하여 말하였다. 대유 김굉필은 점필재 김종직에게서 학문을 받았는데, 삼가 행하는 데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평상시 반드시 관대를 착용하고, 인정(人定) 후에 잠자리에 들며, 닭이 울면 일어났으며 손에서 『소학』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국가 일을 물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소학 동자가 어찌 대의를 알겠는가' 하였다. 서른 살 이후에야 비로소 다른 책들을 삼가 읽기 시작하였다. 나이가 더해갈수록 도가 더욱 높아졌다. 세상을 돌이킬 수 없음과 도를 행할 수 없음을 깊이 알아 광채를 감추고 자취를 숨겼으나, 사람들이 또한 그것도 알았다.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역시 일을 말해 올리지 않자 김굉필이 시를 올렸다.""선생이 운을 맞추어 화답하였다. "" 이로부터 비로소 김종직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맞추어 화답하였다. "" 이로부터 비로소 김종직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 E059 +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양촌(陽村)에 이어 문형(文衡)을 맡았으나 문 …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양촌(陽村)에 이어 문형(文衡)을 맡았으나 문장은 나약하였다. 문사 김구경(金久冏)은 시를 잘 짓기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항상 춘정이 지은 시를 보고 입을 막고 크게 웃었다. 하루는 춘정이 휴가를 얻어 시골에 있는 별장에서 놀면서 우연히 시 한 구절을 지었는데,</br>허백한 것이 하늘을 이으니 강가엔 새벽이 되었고 / 虛白連天江渚曉</br>암황한 것이 이 땅에 서리니 들에는 버들가지 늘어진 봄이 왔구나 / 暗黃浮地柳郊春</br>하고, 아름다운 연구(聯句)를 얻었다고 자부하며 장차 상경하여 임금께 상주(上奏)하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구경에게 말했더니, 구경은 말하기를, “기가 아주 졸렬한데 만약 이 시를 상주한다면 이는 임금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옛날에 지은 시에,</br>역정에서 술잔을 잡으니 산이 문 앞에 당(當)해 있고 / 驛亭把酒山當戶</br>강군에서 시를 읊조리니 비는 배에 가득 차는도다 / 江郡哦詩雨滿船</br>라고 한 것이 있으니, 이런 것이 상주함직한 시이다.”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춘정에게 알리니, 춘정은 말하기를, “당(當) 자가 온당치 못하니 임(臨) 자로 고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그 사람이 또 이를 구경에게 얘기하니, 구경은, “사람들이 춘정은 시를 알지 못한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고시(古詩)에,</br>남산이 문에 당하니 더욱 분명하도다 / 南山當戶轉分明</br>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그 사람이 또 춘정에게 말하니, 춘정은, “고시에,</br>청산이 황하에 임(臨)하였도다 / 靑山臨黃河</br>하지 않았는가. 구경 그 자신이 시를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내가 지은 것을 비웃는다.” 하였다. 그 자신이 시를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내가 지은 것을 비웃는다.” 하였다.)
- E074 + (태종께서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더니 신우(辛禑) 임술년에 진사 제2등에 뽑혔 … 태종께서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더니 신우(辛禑) 임술년에 진사 제2등에 뽑혔고, 또 이듬해 계해년에는 문과에 뽑혔는데, 김한로(金漢老)가 장원을 하고 심효생(沈孝生)은 2등이 되고 태종은 10등이었는데, 이내(李來)ㆍ성부(成傅)ㆍ윤규(尹珪)ㆍ윤사수(尹思修)ㆍ박습(朴習)ㆍ현맹인(玄孟仁) 등은 모두 동방(同榜)이었다. 보위(寶位)에 오르자 김한로의 딸이 세자 이지(李禔)의 부인이 되었는데, 진퇴할 때 마다 항상 장원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br>태종이 일찍이 선시(扇詩)를 지어 이르기를,</br>풍탑에 의지했을 때는 밝은 달을 생각하고 / 風榻依時思朗月</br>월헌에서 읆조리면서는 맑은 바람을 생각하도다 / 月軒吟處想淸風</br>대를 깎아 단선을 이루고 보니 / 自從削竹成團扇</br>명월 청풍이 손바닥 안에 있도다 / 朗月淸風在掌中</br>하였다. 옛날부터 일찍이 문사(文士)로써 대업을 이룬 자는 있지 아니하였고, 문장이 또한 이와 같이 기교(奇巧)한 제왕도 있지 아니하였다. 그 사물을 인용하여 비유한 것과 함축된 의취(意趣)는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다.용하여 비유한 것과 함축된 의취(意趣)는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다.)
- E567 + (하응림은 나이가 겨우 열 살 때에 기이한 아이로 일컬어졌다. 어떤 어른이 죽쟁이를 가리키며 시제로 삼고 운을 부르자 즉석에서 응답하기를, ""라 하였다. 그가 소년 시절 급제한 뒤에 당시에 재주를 논하는 사람들이 하응림을 최고로 꼽았다. 일찍이 서교에서 손님을 전송하며 시를 지었다. "" 당시에 ""와 함께 칭송받았는데, 식자들은 혹 그의 수명이 길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 E696 + (학관(學官)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는 유자(儒者)이다. 그는 시를 전문 … 학관(學官)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는 유자(儒者)이다. 그는 시를 전문적으로 힘써 한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흥을 부친 작품들은 격이 높고 뜻이 깊어 사람들이 미칠 수 없었다. 그가 최고운(崔孤雲)을 읊은 시에서 이르기를,</br></br>고운은 당나라의 진사로 / 孤雲唐進士</br>애초에 신선 배우지 않았네 / 初不學神仙</br>만촉처럼 삼한이 다툰 날 / 蠻觸三韓日</br>풍진이 사해에 가득했네 / 風塵四海天</br>영웅의 뜻 어찌 헤아리리 / 英雄安可測</br>진결은 본래 전함 없거늘 / 眞訣本無傳</br>쌍학만 남기고 떠나갔으니 / 一去留雙鶴</br>맑은 풍도 오백년을 전해오네 / 淸風五百年</br></br>하였으니, 깊이 음미해 보면 무궁한 뜻이 있다.을 전해오네 / 淸風五百年 하였으니, 깊이 음미해 보면 무궁한 뜻이 있다.)
- E687 + (학사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평사(評事 북평사(北評事))로 함경도(咸 … 학사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평사(評事 북평사(北評事))로 함경도(咸鏡道)에 부임하자 손곡이 〈새하곡(塞下曲)〉 3수로 송별하였다. 그 첫 수에 이르기를,</br></br>도위가 군사를 나눠 밤에 적진 습격하니 / 都尉分軍夜斫營</br>한나라의 쇠북소리 변성을 진동하네 / 漢家金鼓動邊城</br>아침에 항복한 오랑캐 얘기 들으니 / 朝來更聽降胡說</br>서쪽 아래 음산에는 복병이 있다네 / 西下陰山有伏兵</br></br>하였는데, 한 때에 전하여 읊어졌다.</br>내가 일찍이 당나라 우곡(于鵠)의 시를 보니,</br></br>물 건너 오랑캐 말을 들으니 / 度水逢胡說</br>사막 북쪽에 복병이 있다네 / 沙陰有伏兵</br></br>라는 구절이 있었고, 권송계(權松溪 권응인(權應仁))의 시〈유해상인가(遊海上人家)〉에는,</br></br>갈매기가 잘못 난간에 날아드네 / 鷗飛誤入闌</br></br>라는 구절이 있었다. 또 나는〈하월호환취각(何月湖環翠閣)〉시에 나오는,</br></br>사금이 물을 차지하여 한가히 서로 따르다 / 沙禽占水閑相趁</br>성긴 발에 잘못 들어갔다 돌아나오네 / 誤入疏簾靜却廻</br></br>라는 구절도 보았다. 옛날에 유원보(劉原父)가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을 희롱하며 말하기를,</br>“영숙(永叔 구양수의 자(字))이 한유(韓愈)의 문장에서 공취(公取 공공연히 취함)한 것이 있고 절취(竊取 몰래 취함)한 것이 있는데, 공취한 것은 대강 셀 수 있지만 절취한 것은 셀 수가 없습니다.”</br>하였는데, 송계는 칠언 두 구절을 요약하여 오언 일구를 이루어 다만 그 뜻만을 취했을 뿐이니 절취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손곡은 고구(古句)를 완전히 베껴 거기에 몇 글자만 더해 한때에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자 했으니, 공취와 절취가 아니고 발총수(發塚手 무덤을 파헤친 솜씨)이다.고자 했으니, 공취와 절취가 아니고 발총수(發塚手 무덤을 파헤친 솜씨)이다.)
- E231 + (학사 사일의 '호접'시에 ""라 하니, 사람들이 사호접(謝蝴蝶)이라 불렀다. … 학사 사일의 '호접'시에 ""라 하니, 사람들이 사호접(謝蝴蝶)이라 불렀다. 조하의 '추석'시에 ""라 하니 자미 두보가 그를 가리켜 조의루(趙倚樓)라 불렀다. 정곡의 '자고'시에 ""라 하니 사람들이 그를 일러 정자고(鄭鷓鴣)라 불렀다. 포당의 '고안'시에 ""라 하니 그 때에 포고안(鮑孤雁)이라 이름하였다. 나의 생각에 목은 이색의 ""구는 가히 이풍등(李風磴)이라 이를 만하고 정지상의 ""시는 가히 정대동(鄭大同)이라 이를 만하다. 최사립의 ""시는 가히 최안천(崔眼穿)이라 이를 만하고 기재 신광한의 ""시는 가히 신강로(申江路)라 이를 만하다.라 이를 만하고 기재 신광한의 ""시는 가히 신강로(申江路)라 이를 만하다.)
- E685 + (학사 이동악(李東岳)의 시격은 혼후(渾厚)하고 농려(濃麗)하였다. 실로 세상 … 학사 이동악(李東岳)의 시격은 혼후(渾厚)하고 농려(濃麗)하였다. 실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시재로 가작(佳作)은 이루 다 기억할 수 없다. 그가 추성(秋城 전라남도 담양의 옛 명칭)을 다스릴 때 나와 함께 면앙정(俛仰亭)에 올라가 시를 지었다. 내가 감히 당돌하게도 먼저 지었는데 함련에 이르기를,</br></br>저녁놀 잠길 제 평야가 넓고 / 殘照欲沈平楚闊</br>태허는 막힘없어 뭇 산이 높네 / 太虛無閡衆峯高</br></br>하고서, 스스로 뛰어난 시어를 얻었다고 여겼다. 동악이 차운하여 이르기를,</br></br>서쪽을 조망하매 천원은 끝없고 / 西望川原何處盡</br>남녘의 형승은 이 정자가 으뜸 / 南來形勝此亭高</br></br>하였는데, 하구(下句)는 은연히 두보의 ‘해우에선 이 정자가 예스럽네〔海右此亭古〕’와 어세(語勢)가 대략 흡사하니, 가히 ‘목과를 던져 주고 경거(瓊琚)로 돌려받았다’고 이를 만하다.</br>천사(天使) 고천준(顧天俊)이 왔을 때, 그는 빈상(擯相 원접사(遠接使)) 월사(月沙) 이공의 막하로서 용만(龍灣)에 도착하여 통군정(統軍亭)에 올라 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유월 용만에 장맛비 개어 / 六月龍灣積雨晴</br>새벽에 홀로 통군정에 올랐네 / 淸晨獨上統軍亭</br>망망한 대야에 천기가 떠 있고 / 茫茫大野浮天氣</br>굽이굽이 장강은 지형을 가르네 / 曲曲長江裂地形</br>세상 백년에 사람은 흡사 개미요 / 宇宙百年人似蟻</br>산하 만리에 국토는 부평초로다 / 山河萬里國如萍</br>문득 백학이 서쪽으로 나는 걸 보니 / 忽看白鶴西飛去</br>요양 땅 옛 정씨가 아닐는지 / 疑是遼陽舊姓丁</br></br>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대가(大家)의 솜씨가 아니겠는가./ 疑是遼陽舊姓丁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대가(大家)의 솜씨가 아니겠는가.)
- E501 + (현옹 신흠은 어린 시절부터 문장에 전념하여 곧 하나의 일가를 이루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흠을 잡지 못했다. 일찍이 나에게 이별시를 지어 주었다. "" 그 시가 또한 노성하고 전중한 것이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 E243 + (호음 정사룡 공이 일찍이 관동에 사신으로 가서 곳곳에서 시를 지어서 '관동일 … 호음 정사룡 공이 일찍이 관동에 사신으로 가서 곳곳에서 시를 지어서 '관동일록'이 있다. 후에 내가 공을 모시고 일록을 보았는데 '광릉에서 일찍 나오다' 시에 ""구가 있었다. 내가 말했다. "밤중에 우는 닭을 황계라고 합니다" 공이 말했다. "거친 촌닭을 말한 것이다" 내가 말했다. "음양서에 이르기를 '밤중에 우는 닭을 황계라고 하는데, 울면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조척이 한밤중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유곤을 발로 차서 깨우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쁜 소리가 아니다. 대개 밤중에 우는 닭은 본래 나쁜 소리이지만 나쁜 소리가 아니라 하는 것은 천하가 이미 어지러워졌으므로 우리 두 사람이 공업을 세울 수 있다는 뜻이다'라 하였습니다." 공이 말했다. "그렇다" 하고, 즉시 글 쓰는 사람에게 '荒' 자를 '村' 자로 고치게 하였다. 근래에 공의 두 아들이 공의 문집을 간행함에 여전히 '荒' 자로 되어 있었는데, 아마 고치지 않은 본을 근거로 하여 인쇄한 것이 아닐까 한다.어 있었는데, 아마 고치지 않은 본을 근거로 하여 인쇄한 것이 아닐까 한다.)
- E676 +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항주도(杭州圖)〉 시 경련(頸聯)에, 호수 …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항주도(杭州圖)〉 시 경련(頸聯)에,</br></br>호수의 배 탄 객들 어두운 꽃 섬으로 가고 / 湖舫客歸花嶼暝</br>제방의 꾀꼬리는 짙은 버들그늘에 날아드네 / 蘇堤鶯擲柳陰濃</br></br>하였는데, 근세에도 전송되고 있다. 혹자가 말하기를,</br>“‘앵척(鶯擲)’의 ‘척(擲)’ 자를 옛날에도 썼는지 모르겠다. ‘버들에 나는 꾀꼬리는 금빛 북을 던지는 듯〔鶯飛柳上擲金梭〕’이라는 시구는 아동의 연구(聯句)인데, 호음이 어찌 이 연구 중의 문자를 사용했겠는가.”</br>하였으니,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있다. 내가 당나라의 백가(百家)를 열람하는 중에 그 이름은 잊었는데,</br></br>숲이 밝아 뛰는 원숭이 드러나네 / 林明露擲猿</br></br>라는 구절이 있었다. 또 두보의 시〈수계책(樹鷄柵)〉에 이르기를,</br></br>우리를 짜 그 안에 무리를 지워 / 織籠曹其內</br>들어가 뛰쳐나오지 못하게 하네 / 令入不得擲</br></br>하였는데 대개 ‘척(擲)’ 자는 ‘도척(跳擲)’의 의미이니, 족히 그 의심을 없앨 수 있겠다.(擲)’ 자는 ‘도척(跳擲)’의 의미이니, 족히 그 의심을 없앨 수 있겠다.)
- E725 + (호주 채유후가 일찍이 동호 독음에 갈 때에 승지 이원진과 같이 배를 타고 놀았다. 채유후가 크게 취하여 실수로 강물에 빠졌는데 이원진이 급하게 그를 구조하였다. 채유후가 곧 절구 한 수를 읊었다. "" 자리의 사람들이 모두 좋게 여겼다. 혹자는 전하기를, 채유후가 이미 이 구를 얻고서 일부러 물에 빠진 척하였다 하니, 시인의 웃음거리로 보탤 만하다.)
- E578 + (홍난상은 홍이상의 동생이다. 시재가 민첩하고 묘했다. 홍이상이 일찍이 월과를 … 홍난상은 홍이상의 동생이다. 시재가 민첩하고 묘했다. 홍이상이 일찍이 월과를 칠 때 홍난상으로 하여금 대신 치롱주(治聾酒) 칠언 절구를 지으라 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 그때 이산해가 문형을 맡고 있었는데 이 시를 일등에 두었다. 다른 날 홍이상을 만나 말했다. "그대의 월과시 중에서 치롱주 절구 한 수가 가장 좋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읊고서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홍이상이 말했다. "제가 지은 것이 아니라 우리 동생이 대신 지은 것입니다." 이산해가 놀라서 말했다. "훌륭한 아우의 재주를 내가 어찌 이리 늦게 들었는가." 즉시 가마를 돌려 정중히 찾아가서 극진하게 공경하고 예우한 뒤에 돌아왔다. 즉시 가마를 돌려 정중히 찾아가서 극진하게 공경하고 예우한 뒤에 돌아왔다.)
- C004 +
- E587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사신의 작품들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감히 가리지 못하고 받아서 간행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 사신 중에 글을 잘한다 일컫는 자는 필경 공용경인데 주지번에게 그를 물으니 일찍이 성명을 듣지 못했다 한다. 기순과 당고는 시어가 아름답고 굳세지만 또한 시가에 대하여 능한 사람은 아니다. 장녕은 다소 청려한 듯하나 또한 취약하여 골격이 없어서 끝내 소가에 귀결된다. 주지번의 시는 조잡하여 형태가 없으니 오히려 사신 웅화의 위약함만도 못하다. 그 밖의 사람들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 문인들이 매번 수창할 적에 대부분 미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대소정편의 다름이 있다. 원접사 서거정이 기순에 대해 감히 선창하기를 마치 도전하는 듯하게 하였지만 결국 ""구에 곤란을 겪었다. 율곡 이이가 조롱하여 말하기를 "사가 서거정은 씨름하는 사람과 같으니 먼저 다리를 걸고 후에 땅에 넘어뜨린다." 아랫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는 마땅히 받들어 접대하고 수창하여야 할 따름인데 어찌 감히 선창하겠는가? 이는 참으로 식자의 말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 그 시절 문인들 중 다소 시에 능한 자들을 모아서 수답하게 하였는데 그 택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사신의 웃음을 산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정사룡은 비록 시짓는 장수라 칭하지만 그 시가 이루어진 시에 견강부회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 오직 이행만이 혼연히 글을 완성하였으나 격조가 매우 비루하여 과체시의 류에 불과하였다. 지을 때마다 잠시 집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응수하였는데 그 대구가 잘 어울려 흠이 없었으니 평소에 익숙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소세양과 이희보는 비록 당시의 종사에게는 굴복하였으나 지금 세상에 동문을 읽고 사운시를 익히는 유근과 같은 자와는 함께 논할 수 없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 C004 +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죽이기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벌써 죽이기를 의논했다.’라는 대문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와서 무릎을 꿇었다 하니,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 E004 +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 …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었고, 또《계원필경(桂苑筆耕)》10권을 간행하였다. 나는 일찍이 중국 사람은 포용력이 넓어서 외국 사람의 글이라고 경홀하게 여기지 않고, 이미 사책에 실었을 뿐더러, 또 그 문집이 세상에 행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 갸륵하게 여겼다. 그러나 문예열전(文藝列傳)에 최치원을 위하여 특별히 그 전(傳)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 뜻을 모르겠다. 혹 그의 사적이 전을 설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겨서일까? 최치원은 12세에 바다를 건너 당 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여 한 번 과거를 보아 갑과로 급제하였고, 드디어 고변(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서는 황소에게 격문을 보내니 황소의 기가 꺾였으며, 뒤에 벼슬이 도통순관 시어사(都統巡官侍御史)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려 할 때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이 유선가(儒仙歌)를 주었는데, 그 한 구에, </br></br><div class="poetry-text">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br></br>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네</div></br></br>하였고, 그의 자서(自敍)에도, “무협 중봉(巫峽重峯)의 해에 보잘것없는 몸으로 중국에 들어 왔고, 은하 열수(銀河列宿)의 해에 비단옷 입고 고국에 돌아왔다.” 하였으니, 대개 열두 살에 당 나라로 들어갔다가 스물여덟 살에 고국으로 돌아왔음을 말한 것이다. 그 행적이 이처럼 뚜렷하니, 이것으로 전을 설치한다면 예문지에 실린 심전기(沈佺期)ㆍ유병(柳幷)ㆍ최원한(崔元翰)ㆍ이빈(李頻) 등의 반장 정도되는 열전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만약 외국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지(志)에는 써야 할 것이다. 번진호용열전(藩鎭虎勇列傳)에서는 이정기(李正己)ㆍ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다 고려 사람인데도 각각 그 전을 만들어 그 사실을 소상하게 기록했는데, 어째서 문예열전에서만 최치원을 위하여 그 전을 설치하지 않았는가? 내가 사의(私意)로 헤아리건대, 옛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시기함이 없지 않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의 외로운 몸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사들을 압도했음에랴. 만일 전을 설치하여 바른 대로 그 사적을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
- E240 + (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 … 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 율시가 적혀 있다고 하였다 "" 보고 들은 자들이 정자의 들보가 극히 높아서 시인이 시를 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반드시 귀신이 쓴 시라고 여겼다. 도성 아래가 소란스러우며,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말하기를, 들보의 시가 이제 없고 글씨는 원의 벽에 있다고 하니, 더욱 괴이하게 여겼다. 내가 분변하여 말하기를, "이른바 들보에 제시했다는 것은 본래 그런 일이 없었고, 다만 원의 벽에 쓰여 있었는데 전하는 자가 잘못한 것이다. 어찌 일찍이 들보에 있었다가 지금은 벽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 시를 호음 정사룡 선생에게 보였더니, "시가 심히 졸렬하고 속되며, 또한 장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불자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E366 + (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의 누제(樓題)는 모두 쌍(雙)과 창(窓) 두 자 … 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의 누제(樓題)는 모두 쌍(雙)과 창(窓) 두 자를 써서 지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양창해 선생 것이 더욱 좋다.</br>푸른 바다 붉은 무리 둥근 해의 반을 줄그었는데 / 碧海暈紅規日半</br>이끼 푸르고 바위 흰데 연기와 갈매기 짝지어 가네 / 蒼苔巖白煙鷗雙</br>금과 은으로 꾸민 대 위에 외로이 휘파람 부니 / 金銀臺上發孤嘯</br>넓고 넓은 천지 창으로 들어오네 / 天地浩然開入窓</br>이 시를 어떤 사람이 전하다가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공에게 보이니 말하기를, “혹 득의하여 이처럼 지을 만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반드시 이 시보다 나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우리 아버지께서도 이 운을 사용하여 지으시기를,</br>가랑비에 흰 갈매기 쌍쌍이 날고 / 疎雨白鷗飛兩兩</br>해질 녘 고깃배는 쌍쌍이 떴네 / 夕照漁艇泛雙雙</br>바다에서 돋는 해를 맞고자 / 擬看暘谷金烏出</br>정각의 동쪽 문을 두지 않았네 / 畵閣東頭不設窓</br>하였는데,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였다. 김첨경(金添慶)공이 관찰사였을 때에 지은 시 두 수가 있다. 그 하나는</br>아깝다 홍문(鴻門)에서 구슬 한말[玉斗] 깨뜨린 것이 / 可惜鴻門玉斗撞</br>조각조각 흩어져서 한 쌍 두 쌍 못 맞추네 / 紛紛片片不論雙</br>변해 흰 새가 되어 천백 떼를 이루어 / 化成白鳥群千百</br>해돋이 객 창가에 시끄럽게 울어대네 / 日出呶呶鬧客窓</br>이며, 또 하나는,</br>좋은 경치 하도 많아 좌우 부딪치는데 / 好景紛紛左右撞</br>말 머리엔 미인들도 쌍쌍이 보이는구나 / 馬頭紅粉亦雙雙</br>다음 구절은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그 뒤에 글을 쓰기를,</br>가소롭다 김문길이 / 可笑金文吉</br>정신 없이 좌우에 부딪치네 / 紛紛左右撞</br>하니, 듣는 사람이 조소하였다.吉 정신 없이 좌우에 부딪치네 / 紛紛左右撞 하니, 듣는 사람이 조소하였다.)
- E545 + (간이 최립은 문장을 잘하여 질정관으로 차출되어 연경으로 두 번 갔으니 대개 종계변무의 일 때문이었다. 황정욱이 시를 주기를, ""라 하였으니, 이 시를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하지만 격률이 아름답지 못하다.)
- E435 + (고려 때 최충의 시에, ""라 하였다. 이 시를 세상에서 아름답다 하였는데, 다만 '未傳人' 석 자가 마땅치 않다. 어떤 사람은 최충이 아니라 최항의 시라 한다.)
- E361 + (고려 말에 어떤 고상한 선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아니 … 고려 말에 어떤 고상한 선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아니하면서 강 위에 자리 잡고 살았다. 죽은 뒤에 벼슬아치 몇 사람이 그의 옛집을 찾았더니, 벽 위에 그가 지은 시가 붙어 있었는데, 긁혀 떨어져 다만 한 구절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글에,</br>파초(芭蕉) 소리가 문발 밖에서 들리니 산 비가 오는 줄 알겠고 / 蕉鳴薄外知山雨</br>배 돛대가 봉우리 끝에서 나오니 바닷 바람이 부는 것을 짐작하겠다 / 帆出峯頭見海風</br>하였다. 이 글을 본 벼슬아치들이 한참 동안 읊조리더니, 서로 말하기를, “섬돌 아래 파초란 말을 보고 윗 구절을 알만 하지만 재 돛을 보고 바닷바람이 부는 것을 짐작한다는 것은 모르겠다.” 하였다. 조금 지나서 앞 포구에 홀연히 한 척의 배가 돛에 바람을 잔뜩 안고 봉우리 밖에서 점점 나왔다. 이것을 보게 되면, 배는 해구로부터 올라오는 것이다. 밖에서 점점 나왔다. 이것을 보게 되면, 배는 해구로부터 올라오는 것이다.)
- E054 + (고려 정승 한종유(韓宗愈)는 어렸을 때에, 방탕불기(放蕩不羈)하여 수십 명과 … 고려 정승 한종유(韓宗愈)는 어렸을 때에, 방탕불기(放蕩不羈)하여 수십 명과 무리를 짜고 언제나 무당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데에 가서 음식을 빼앗아 취하도록 포식하고는 손벽을 치며 양화(楊花) 노래를 부르니, 그때 사람들이 양화도(楊花徒)라고 불렀다. 상국(相國)이 되어 공명과 사업이 당세에 빛나고, 만년에는 물러나 고향에서 노년을 보냈는데 지금의 한강 상류의 저자도(樗子島)이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br>10리 평호에 보슬비 지나고 / 十里平湖細雨過</br>한 줄기 긴 피리소리 갈대꽃 너머로 들린다 / 一聲長笛隔蘆花</br>금솥에 국 요리하던 손을 가지고 / 却將金鼎調羹手</br>한가로이 낚싯대 잡고 해저문 모래밭을 내려간다 / 閑把漁竿下晩沙</br>하고, 또</br>검은 사모에 짧은 갈옷으로 지당을 돌아서니 / 烏紗短褐遶池塘</br>버드나무 언덕 시원한 미풍이 얼굴에 스친다 / 柳岸微風酒面凉</br>천천이 걸어 돌아오니 산 위엔 달이 떴고 / 緩步歸來山月上</br>장두에선 아직도 연꽃 향기 스며온다 / 杖頭猶襲藕花香</br>하였다.緩步歸來山月上 장두에선 아직도 연꽃 향기 스며온다 / 杖頭猶襲藕花香 하였다.)
- E145 + (고려의 승려 신준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서하 … 고려의 승려 신준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서하 임춘도 역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학사 미수 이인로가 평하기를, 두 공의 작품은 처음에 서로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말을 토해내는 것이 처량하고 애절하여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하였다. 나는 이를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앞의 시는 사물을 읊었으나 섬약함에 빠졌고, 뒤의 시는 정감을 말했으나 구법이 호장하니, 기상이 서로 같지 않은데 이를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함은 어찌하여서인가? 임춘의 시는 본래 구양공 구양수의 ""에서 나온 것이니, 그 뜻을 훔쳤을 뿐 아니라 그 말까지 훔친 것이다. ""에서 나온 것이니, 그 뜻을 훔쳤을 뿐 아니라 그 말까지 훔친 것이다.)
- E484 + (고산 이굉은 어렸을 적부터 재능으로 이름이 있었다. 하루는 친구를 데리고 세심대에 놀러갔는데, 그곳의 주인 이형성이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공이 벽에 시를 썼다. "" 사람들이 모두 이를 전하였다. 이형성이 이를 병통으로 여겨, 성대하게 차리고는 공을 맞이하여 앞의 시를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붓을 들어 시를 고쳤다. "" 또 용문산에 놀러 가서 한 연을 지었다. "")
- E003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이 있다. 그러므로 동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이 있다. 그러므로 동방학자들은 모두 그를 유종(儒宗)으로 여긴다.<br />그가 지은 비파행(琵琶行) 한 수가 《당음(唐音)》유향(遺響)에 실려 있는데 작자는 무명씨로 적혀 있다. 후세에 그에 대한 의신(疑信)이 결정되지 못하는데 혹자는,<br /><div class="poem font-weight-light"><br /> 동정에 달이 떨어지니 고운이 돌아간다<br /></div><br />라는 글귀로 최치원의 저작이라는 증거를 댄다. 그러나 또한 그것으로는 단안을 내릴 수가 없다.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檄文) 한 편과 같은 것은 비록 사적(史籍)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죽이기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벌써 죽이기를 의논했다.’라는 대문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와서 무릎을 꿇었다 하니,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
- E266 + (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백마강’ 시는 다음과 같다. 나라 망하니 산과 물 … 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백마강’ 시는 다음과 같다.</br>나라 망하니 산과 물이 옛날과 다른데 / 國破山河異昔時</br>홀로 강달이 남아 몇 번이나 차고 기울었다 / 獨留江月幾盈虧</br>낙화암 위의 꽃은 아직도 남았으니 / 落花巖上花猶在</br>비바람 그 당시에 다 불어 떨어뜨리지 못하였나 / 風雨當年不盡吹</br>이 사문 강남(李斯文江男)의 시는,</br>고국에 올라 보니 마침 달이 오를 때라 / 故國登臨月上時</br>백제의 왕업이 여기 이루고 망했네 / 濟王家業此成虧</br>용 죽고 꽃 떨어진 천 년의 원한은 / 龍亡花落千年恨</br>동풍에 부는 한 피리에 부쳤네 / 分付東風一笛吹</br>이 두 시는 당시 사람들이 서로들 우열(優劣)을 논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아래 시 첫째 구가 너무 싱거운 것같다.(優劣)을 논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아래 시 첫째 구가 너무 싱거운 것같다.)
- E740 + (교관 조종저와 전중 임방은 모두 시에 재주가 있었다. 조종저가 눈을 읊은 시의 한 연에 ""라 하였고, 임방의 공북루 시의 한 연에 ""라 하였다. 사람들이 좋게 여겼으나 다만 꾀꼬리 소리 차갑고 어둡다(鶯語寒暗)라 한 것은 조어가 견강부회하여 온당하지 못하다.)
- E698 + (교관(敎官) 권필(權韠)의 호는 석주(石洲)이다. 시벽(詩癖)이 있어 과업( … 교관(敎官) 권필(權韠)의 호는 석주(石洲)이다. 시벽(詩癖)이 있어 과업(科業)을 일삼지 않았다. 그의 시는 노두(老杜)를 조종(祖宗)으로 삼고 간재(簡齋)를 답습하여 어의(語意)가 지극하고 구법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당시 시에 능한 사람들이 모두 추숭하여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근세에 성명(盛名)을 얻은 시인들 중 석주가 으뜸이 되었다. 들으니, 중국인이 동국(東國)의 시를 간행할 때 석주의 장률 몇 수가 들어갔다고 한다. 그중 한 수에 이르기를,</br></br>강가에 뚜우- 호각 소리 들리는데 / 江上嗚嗚聞角聲</br>북두성 자루는 강에 꽂혀 강물이 맑네 / 斗柄揷江江水明</br>아침조수 언덕을 침노하니 오리들 요란하고 / 早潮侵岸鴨鵝亂</br>먼 집엔 등불 켜져 다듬이 소리 울리네 / 遙舍點燈砧杵鳴</br>나그네 문을 나서니 달 지려 하고 / 客子出門月初落</br>뱃사람 돛을 거니 바람 일려 하네 / 舟人挂席風欲生</br>서주의 천리 길 여기서부터 가노니 / 西州千里自此往</br>긴 여정 험난한 길 어느 때나 평탄해질까 / 長路險艱何日平</br></br>하였는데, 파산(坡山 파주)에서 강도(江都 강화도)로 가려고 할 때 지은 것이다. 이 한 편만을 보아도 그의 재능이 뛰어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폐조(廢朝 광해군)때에 유씨(柳氏)의 여러 사람이 내세(內勢 광해비 유씨)를 빙자하여 멋대로 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니, 당시의 조정 신하들이 모두 아첨하고 애걸하였다. 지평(持平) 임숙영(任叔英)이 그때 거자(擧子 과거 보는 선비)로 대책문(對策文)을 지었는데, 촉휘(觸諱 꺼리는 것을 범함)하는 말이 많아 삭과(削科)를 당하려다가 다행히 중지하였다. 이에 석주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청청한 궁류에 꾀꼬리 어지러이 나는데 / 宮柳靑靑鶯亂飛</br>성 가득 벼슬아치 봄빛에 아첨하네 / 滿城冠蓋媚春輝</br>조정에선 모두 태평성대 축하하지만 / 朝家共賀昇平樂</br>누가 직언을 포의에서 나오게 했는고 / 誰遣危言出布衣</br></br>하였다. 그 후에 별시(別試)가 있어 박자흥(朴自興)이 등제(登第)하였는데, 박자흥의 부친 박승종(朴承宗)과 박자흥의 장인 이이첨(李爾瞻)이 고관(考官)을 했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순사(循私 사사로움에 따름)를 감히 거론하지 못하였다. 그때에 허균(許筠) 또한 시관(試官)으로서 자신의 조카 허아무개(허요(許窑))가 지은 글을 취하여 방(榜) 안에 넣었다가 죄를 입어 멀리 귀양을 갔다. 석주가 또 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과거급제 사사로운 정 있었다 한들 / 設令科第有私情</br>아들 사위 동생 중 조카가 제일 가벼운데 / 子壻弟中姪最輕</br>허균에게만 이 죄를 감당케 하니 / 獨使許筠當此罪</br>세간에 공도 행하긴 과연 어렵구나 / 世間公道果難行</br></br>하였다. 폐조에 이르러 역옥(逆獄 역적에 관련된 옥사)을 친국(親鞠)할 때 이 두 편의 시가 죄인의 서찰 가운데서 나오니, 석주는 시안(詩案) 때문에 형벌을 받고, 끝내는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석주를 들쳐 메고 동성(東城) 밖의 인가로 나왔는데, 나와 조현부(趙玄夫)가 함께 따라가 행구(行具)를 꾸려 주었다. 주인집 판영(板櫺) 위에 초서(屮書)로 이장길(李長吉 이하(李賀, 790~816))의 시〈장진주(將進酒)〉끝 4구를 보았는데 ‘권(勸)’ 자가 ‘권(權)’ 자로 되어 있었으니, 사실 잘못 쓴 데서 나온 것이었다.</br>때는 정히 늦봄이라, 도화(桃花)가 뜰에 가득하였다. 석주는 죽음에 임하여 석잔 술을 연거푸 마시더니 해가 질 무렵에 눈을 감았다. 한 글자 잘못 쓰인 것이 우연히 참언(讖言)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지 아니한가. 잘못 쓰인 것이 우연히 참언(讖言)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지 아니한가.)
- E699 + (교관(敎官) 성여학(成汝學)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의 생질(甥姪)이다 … 교관(敎官) 성여학(成汝學)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의 생질(甥姪)이다. 어렸을 적부터 시벽(詩癖)이 있어 시에 힘쓴 지 이미 오래되어 가는 곳마다 가구(佳句)를 지었다. 그의 시구,</br></br>풀잎 이슬에 벌레 소리 젖고 / 草露蟲聲濕</br>숲 바람에 새 꿈도 위태롭네 / 林風鳥夢危</br></br>는 사람들이 칭찬하였고,</br></br>얼굴은 그의 벗만 알 뿐이요 / 面唯其友識</br>먹는 일도 장부의 슬픔일세 / 食爲丈夫哀</br></br>한 것은 궁어(窮語)이다.</br>내가 일찍이 그의 집에 왕래하곤 하였는데, 항상 그가 떨어진 옷에 작은 두건을 쓰고 귀밑 가득 머리털이 센 채로, 홀로 한 칸 서재에 기대어 종일토록 동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으니, 진실로 일세의 궁사(窮士)였다. ‘시가 사람을 궁색하게 한다〔詩能窮人〕’는 말은 아마도 성 교수(成敎授)를 위해 나왔을 것이다.게 한다〔詩能窮人〕’는 말은 아마도 성 교수(成敎授)를 위해 나왔을 것이다.)
- E323 + (교리 고이순(高而順 경명(敬命)의 자)은 유생으로 있을 때 꿈에 시를 얻었다 … 교리 고이순(高而順 경명(敬命)의 자)은 유생으로 있을 때 꿈에 시를 얻었다.</br>젊은 시절 풍류는 유독 뛰어났는데 / 少日風流獨不群</br>만년의 강호생활 병마저 나누어 가졌네 / 暮年江海病兼分</br>주저되기는 상강의 병이라도 앓아야 할까 / 趑趄肯作湘中病</br>호걸은 응당 영외의 글을 짓는다지 / 豪健應脩嶺外文</br>조수가 해문에 드니 하늘은 물을 치고 / 潮入海門天拍水</br>해가 포구에 지니 장기가 구름같이 이네 / 日沈漁浦瘴如雲</br>강남인지라 역마의 소식이 없기에 / 江南驛使無消息</br>매화를 꺾어 그대에게 주지 못하네 / 折得梅花未贈君</br>계해년에 인순의 아버지 및 그 장인이 모두 벼슬이 떨어져 호남으로 돌아갔었고, 이순 또한 울산 군수에 제배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 시는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다.또한 울산 군수에 제배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 시는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다.)
- E626 + (국조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소재(盧蘇 … 국조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소재(盧蘇齋)는 두보(杜甫)의 법을 깨쳤는데 황지천(黃芝川)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은 당(唐)을 본받았는데 이익지(李益之)가 그 흐름을 밝혔다. 우리 망형(亡兄)의 가행(歌行)은 이태백(李太白)과 같고 누님의 시는 성당(盛唐)의 경지에 접근하였다. 그 후에 권여장(權汝章)이 뒤늦게 나와 힘껏 전현(前賢)을 좇아 용재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껏 전현(前賢)을 좇아 용재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
- E717 + (권협은 포의의 가난한 선비로 석주 권필의 아우이며 호는 초루이다. 그의 '송 … 권협은 포의의 가난한 선비로 석주 권필의 아우이며 호는 초루이다. 그의 '송도를 회고하며' 절구시 한 수는 다음과 같다. "" 이 시가 한때 널리 회자되었다. 권협이 일찍이 삼각산 승가사에 유람을 갔는데 때마침 여러 명사들이 와서 모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권협이 자리에서 시에 대해 태연하게 이야기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업신여기며 말했다. "오늘은 이름난 관리들의 모임인데 저 서생이 어찌 당돌하게 끼어드는가." 권협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의 벼슬이 어찌 나의 한 구절에 겨루겠는가." 여러 명사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구를 읊어 주기를 청하였다. 권협이 즉시 낭랑하게 ""의 구절을 읊으니 여러 명사들이 이에 크게 놀라 상석에 모시고 공경하고는 하루종일 취하도록 마셨다.명사들이 이에 크게 놀라 상석에 모시고 공경하고는 하루종일 취하도록 마셨다.)
- E171 + (그 뒤 시강(侍講) 동월(董越)이 왔을 때 행차가 평양까지 와서 풍월루(風月 … 그 뒤 시강(侍講) 동월(董越)이 왔을 때 행차가 평양까지 와서 풍월루(風月樓)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안찰사로 있던 성허백당(成虛白堂)은 모습이 훌륭하지 못하였다. 동월이 안찰사를 주(州)의 관리인 줄 알고 그렇게 대수롭게 보지 않았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시를 짓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시에 화답하였다. 성허백이 지은 시에,</br>붉은 비 뜰에 가득한데 복사꽃 이미 떨어졌고 / 紅雨滿庭桃已謝</br>파란 연잎 물결에 점 일으키며 연꽃이 처음 떠오르더라 / 靑錢點水藕初浮</br>하였다. 동월이 이것을 보고 정색하고는, “이런 사람이 어째서 주(州)의 관리밖에 못하고 있는가.” 하니, 반접사(伴接使)인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이, “우리 나라에서는 풍화(風化)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하여 조정에서 으뜸가는 사람들을 뽑아서 주관(州官)으로 삼습니다.” 하였다. 동월의 풍월루기(風月樓記)에, “관찰사가 속으로 빼어나고 문아(文雅)하다.” 한 것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가 돌아갈 무렵 압록강에서 전별 잔치를 할 때에 쌍방이 모두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빛이 있었다. 충정공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는데,</br>푸른 연기는 고요하게 떠 있고 풀은 무성한데 / 靑煙漠漠草離離</br>바로 강두에서 석별할 때라 / 正是江頭惜別時</br>말없이 서로 보는 정 한 없으니 / 黙黙相看無限意</br>이생에 어디에서 다시 만나 즐길고 / 此生何處更追隨</br>하였다. 두 중국 사신이 서로 보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렸으니, 정말 정과 뜻이 한가지로 통하는 것은 풍속과 지역의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정말 정과 뜻이 한가지로 통하는 것은 풍속과 지역의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 E051 + (그 뒤에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이 행인(行人) 장근(張瑾)과 함께 … 그 뒤에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이 행인(行人) 장근(張瑾)과 함께 와서 문묘(文廟)에 갔다. 호부는 순근(純謹) 화이(和易)하고 시와 부를 잘하였는데, 임금이 매우 후하게 대접하니 호부가 임금의 의채(儀采)를 흠모하여, “참다운 천인(天人)이다.” 했다. 노선성(盧宣城 노사신(盧思愼))과 서달성(徐達成)이 관반(館伴)이 되고 내가 홍겸선(洪兼善)ㆍ이차공(李次公)과 더불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대기하고 있을 적에 서달성이 말하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데 이는 모두 오래 전부터 지어둔 것일 것이다. 내가 먼저 시를 지어 차운하라고 청하면 반드시 그가 크게 낭패할 것이다.” 하였다. 한강에서 놀던 날 제천정(濟川亭)에 오르자 달성이 시 몇 수를 내보이면서, “대인의 뛰어난 운을 제가 도저히 화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서투른 글을 엮으니 화답을 바랍니다.” 하니, 호부가 미소하면서 한 번 보고 붓을 들어 내리쓰는데, 그 글에 고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br>백제의 지형은 물에 임하여 다하였고 / 百濟地形臨水盡</br>오대의 천맥은 하늘에서 왔다 / 五臺泉脈自天來</br>라는 글귀라든가</br>고루에 기대었으나 정을 다하지 못해 / 倚罷高樓不盡情</br>다시 춘색을 끌어당겨 밝은 허공에 띄우네 / 又携春色泛空明</br>사람은 죽엽배 속에서 취하고 / 人從竹葉杯中醉</br>배는 양화도 어구를 향해 가로지르네 / 舟向楊花渡口橫</br>라는 글귀 같은 것이다. 또 〈강지수사(江之水辭)〉를 지으면서 배를 타고 잠령(蠶嶺 남산(南山))까지 흘러내려 가도록 글 읊는 것을 그치지 않으니, 달성이 담이 내려 앉아 사모(紗帽)를 젖혀 쓰고 길게 신음할 뿐이요, 김문량(金文良)은 혀를 내민 채 거두지도 못하고서, “노적(老賊)이 너무 심하게 사람을 속였구나. 근래에 내가 침[針灸]를 맞지 않아서 시사(詩思)가 메말라 이와 같은 괴로움을 받을 따름이다.” 하고, 한마디도 말을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로움을 받을 따름이다.” 하고, 한마디도 말을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 E655 + (근대의 관각시(館閣詩)에서는 이아계(李鵝溪 아계는 이산해(李山海)의 호)가 … 근대의 관각시(館閣詩)에서는 이아계(李鵝溪 아계는 이산해(李山海)의 호)가 으뜸이다. 그의 시가 초년부터 당을 법받았으며 늘그막에 평해(平海)에 귀양 가서 비로소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고제봉(高霽峰 제봉은 고경명(高敬命)의 호)의 시 또한 벼슬을 내놓고 한거하는 가운데 크게 진보된 것을 볼 수 있었으니, 이에 문장이란 부귀 영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험난과 고초를 겪고 강산의 도움을 얻은 후에라야 묘경에 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이공(二公)뿐만 그러하랴. 고인이 모두 이러하니 유주(柳州)로 좌천됐던 유자후(柳子厚)나 영외(嶺外)로 귀양 갔던 소동파(蘇東坡)에서도 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나 영외(嶺外)로 귀양 갔던 소동파(蘇東坡)에서도 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 E575 + (근래에 당시를 배운다는 사람들이 모두 최경창과 이달을 칭송한다. 잠시 그 시 … 근래에 당시를 배운다는 사람들이 모두 최경창과 이달을 칭송한다. 잠시 그 시 중 좋은 것들을 취하여 기록한다. 최경창이 이장곤 옛 재상의 집을 지나며 지은 시는 이러하였다. "" 중국의 어느 장군이 전사했을 때 지은 만사는 이러하였다. "" 이달이 영광에서 최경창을 만났을 때에 눈여겨본 기생이 있었는데, 마침 상인이 보랏빛 비단을 파는 것을 보고 즉시 붓을 달려 최경창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 "" 최경창이 즉시 답하기를, "만약 이 시의 값을 논한다면 어찌 천금에 그치겠는가. 고을이 작아 재물이 마음에 차지 않을 것이다."라 하고 마침내 한 구에 백미 십 석을 쳐서 사십 석을 주었다. 그 밖에 바다에 머물며 지은 시는 이러하였다. "" 또다른 시는 이러하였다. "" 또 최경창의 시에 ""라 하였다. 모두 청담하며 가상히 여길 만하다. 다만 이런 사람들은 다만 작은 시만을 일삼고 본래 학문이 넉넉하지 못하였으므로 종래 옛사람들처럼 크게 울리지는 못하였으니 아쉬울 뿐이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종래 옛사람들처럼 크게 울리지는 못하였으니 아쉬울 뿐이다.)
- E741 + (근래에 시가 없다는 것은 정말로 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라고 할 만한 시 … 근래에 시가 없다는 것은 정말로 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라고 할 만한 시가 없다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이 옛날의 시짓기에 힘쓰지 않고 오직 과거 공부에만 힘써서 혹 과부나 과시에는 공교로우면서도 고시율에는 전혀 어둡다. 비록 대략 구를 엮을 줄 아는 자라도 또한 과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골 북과 섬 피리 같아서 잡다하고 산란하여 들을 수가 없으니 그것을 어찌 시라 하겠는가. 사람들이 전하는 어떤 향사의 시에, ""라 하였다. 비록 당시의 율격은 아니지만 과시의 틀을 벗어나 장법이 절로 이루어졌다. 애석하구나. 그 이름을 잃어 세상에 전하지 못하는 것이. 절로 이루어졌다. 애석하구나. 그 이름을 잃어 세상에 전하지 못하는 것이.)
- E040 + (금나라 말엽에 시인 양비경이 단풍을 읊은 시는 이렇다. <div cla … 금나라 말엽에 시인 양비경이 단풍을 읊은 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바다 놀 비도 오지 않는데 수풀가에 깃들고,<br> 들불 바람도 안 부는데 나무 끝에 올랐네.</div></br>문진공 이장용도 또한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황폐한 절간 쓸쓸하여 가을 생각 괴롭고,<br> 얕은 산 두드러져 석양녘에 분명하다.</div></br><div class="critique-text">이 시를 보면 양비경이 늙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div>;/div> <div class="critique-text">이 시를 보면 양비경이 늙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div>)
- E237 + (기수 최익령은 강릉 경포대 근처에 살고 있었다. 기재 신광한이 삼척의 현감으 … 기수 최익령은 강릉 경포대 근처에 살고 있었다. 기재 신광한이 삼척의 현감으로 있을 때, 경포에서 최익령의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고자 하였다. 마침 주인이 외출 중이어서 일단 바깥채에 머물렀다. 밤이 깊어갈 무렵, 한 줄기 불빛이 사람을 따라오는 것이 보이고 마을 개들이 모두 짖었다. 최씨 집 하인이 알리기를, "주인어른이 오십니다"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익령이 급히 들어와 안부를 묻자, 신광한이 시를 지었다. "" 그 후 관동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여러 번 이 운에 차운하여 큰 시첩을 만들었는데, 보는 이들이 모두 신광한의 시를 절창이라고 하였다. 몇 년이 지나 최익령이 선공감의 역으로 서울에 머물게 되어 거의 십 년을 지냈다. 하루는 시첩을 평소 친하던 서생에게 보여주며 차운을 청하자, 그가 제하기를, ""라 하였다. 최익령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 시야말로 참으로 나에게 금침이 되는 말이로구나."라 하였다.말하기를, "이 시야말로 참으로 나에게 금침이 되는 말이로구나."라 하였다.)
- E082 + (김문평(金文平)은 문장이 웅혼(雄渾)하고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오로지 사 … 김문평(金文平)은 문장이 웅혼(雄渾)하고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오로지 사마자장(司馬子長)의 궤범(軌範)을 모방하였는데, 온 세상에 맞설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 시 또한 기상(氣像)이 높고 깊이 골수(骨髓)를 얻었다. 성품이 검속(檢束)할 줄을 모르고 압운(押韻)이 바르지 못하여 모두들 시(詩)가 문(文)보다 못하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시나 문이나 모두 넉넉하였다.〈격옹도(擊瓮圖)〉라는 시에는,</br>독 속에 있는 천지가 갑자기 활짝 열리어 / 瓮中天地忽開豁</br>산천 품물이 한가지로 밝게 되살아나도다 / 山川品物同昭蘇</br>하고, 〈심중추산재(沈中樞山齋)〉라는 시에는,</br>삐딱한 사립문 시냇가 언덕에 면해 있어 / 紫門不整臨溪岸</br>산비가 아침마다 내려 물이 불어남을 보겠도다 / 山雨朝朝看水生</br>하고, 〈용궁헌제(龍宮軒題)〉라는 시에는,</br>마음껏 백배를 마시고 누상에 누워 / 痛飮百杯樓上臥</br>발을 걷으니 남북이 모두 청산이로다 / 捲簾南北是靑山</br>하였다. 또 산사(山寺)를 두고 시를 지었는데,</br>창은 비었는데 중은 장삼을 깁고 / 窓虛僧結衲</br>탑은 조용한데 객이 시를 짓도다 / 塔靜客題詩</br>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생각 너머의 정취를 얻은 것으로 보통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생각 너머의 정취를 얻은 것으로 보통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