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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685 + (학사 이동악(李東岳)의 시격은 혼후(渾厚)하고 농려(濃麗)하였다. 실로 세상 … 학사 이동악(李東岳)의 시격은 혼후(渾厚)하고 농려(濃麗)하였다. 실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시재로 가작(佳作)은 이루 다 기억할 수 없다. 그가 추성(秋城 전라남도 담양의 옛 명칭)을 다스릴 때 나와 함께 면앙정(俛仰亭)에 올라가 시를 지었다. 내가 감히 당돌하게도 먼저 지었는데 함련에 이르기를,</br></br>저녁놀 잠길 제 평야가 넓고 / 殘照欲沈平楚闊</br>태허는 막힘없어 뭇 산이 높네 / 太虛無閡衆峯高</br></br>하고서, 스스로 뛰어난 시어를 얻었다고 여겼다. 동악이 차운하여 이르기를,</br></br>서쪽을 조망하매 천원은 끝없고 / 西望川原何處盡</br>남녘의 형승은 이 정자가 으뜸 / 南來形勝此亭高</br></br>하였는데, 하구(下句)는 은연히 두보의 ‘해우에선 이 정자가 예스럽네〔海右此亭古〕’와 어세(語勢)가 대략 흡사하니, 가히 ‘목과를 던져 주고 경거(瓊琚)로 돌려받았다’고 이를 만하다.</br>천사(天使) 고천준(顧天俊)이 왔을 때, 그는 빈상(擯相 원접사(遠接使)) 월사(月沙) 이공의 막하로서 용만(龍灣)에 도착하여 통군정(統軍亭)에 올라 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유월 용만에 장맛비 개어 / 六月龍灣積雨晴</br>새벽에 홀로 통군정에 올랐네 / 淸晨獨上統軍亭</br>망망한 대야에 천기가 떠 있고 / 茫茫大野浮天氣</br>굽이굽이 장강은 지형을 가르네 / 曲曲長江裂地形</br>세상 백년에 사람은 흡사 개미요 / 宇宙百年人似蟻</br>산하 만리에 국토는 부평초로다 / 山河萬里國如萍</br>문득 백학이 서쪽으로 나는 걸 보니 / 忽看白鶴西飛去</br>요양 땅 옛 정씨가 아닐는지 / 疑是遼陽舊姓丁</br></br>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대가(大家)의 솜씨가 아니겠는가./ 疑是遼陽舊姓丁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대가(大家)의 솜씨가 아니겠는가.)
- E494 + (한음 이덕형이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접반사가 되었다. 이 때 이여송이 왜적의 거짓 화의를 들어서 망설임을 면치 못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였다. 하루는 이여송이 적벽도를 내보이자 이덕형이 시를 지었다. "" 말에 법도와 풍자가 있으니, 이여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 E327 + (현령 성효원(成孝元)은 하산군(夏山君)의 조카다. 13~14세 때부터 병풍과 … 현령 성효원(成孝元)은 하산군(夏山君)의 조카다. 13~14세 때부터 병풍과 족자를 능히 썼고, 이미 시부(詩賦)를 잘 지을 줄 알아 한때에 유명하므로, 공경들이 다투어 초대하여 글씨 써주기를 청하였다. 그는 끝내 급제하지 못하고 만년에 음직으로 용인의 수령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사람됨이 구속받지 않는 기남자(奇男子)이었다. 일찍이 원루에서 잠들었다가 꿈에 사모하던 사람을 보게 되어 이런 시를 지었다.</br>그리던 가인을 꿈속에 만나 / 情裏佳人夢裏近</br>옛 얼굴 초췌해진 것 서로 놀랐네 / 相驚憔悴舊形容</br>깨어보니 몸은 높은 누대 위에 누웠는데 / 覺來身在高樓上</br>바람은 긴 강을 치고 달은 봉우리에 숨었네 / 風打長江月隱峯</br>당시에 절창이라고 하였다.강을 치고 달은 봉우리에 숨었네 / 風打長江月隱峯 당시에 절창이라고 하였다.)
- E039 + (<div class="critique-text">[[C048|<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 … <div class="critique-text">[[C048|<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월암장로 산립은 시를 짓는데, 옛사람의 말을 많이 점화하였다.</div></br>다음 시를 보자.</br><div class="poetry-text">[[M075|<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남쪽 수곡에 오면 도리어 어머니를 생각하고,</br>북쪽 송경에 이르면 다시 임금을 생각한다.</br>일곱 역과 두 강에 나귀는 작아,</br>문득 짐이 구름처럼 가볍지 않은 것이 싫어진다.</div></br>이 시는 곧 왕안석의 다음 시를 점화한 것이다.</br><div class="poetry-text">[[M076|<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한구 위에서 어머니를 모시고,</br>백저의 음지 쪽에 집을 두었네.</br>달 밝은 밤에 두견새소리 들으니,</br>남북 두 곳이 모두 마음에 걸린다.</div></br>또 월암은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M077|<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백악산 앞의 버드나무,<br> 안호사 안에 심었더니,<br> 봄바람 할 일 많아,<br> 한들한들 또 불어오네.<br></div></br>이 시는 즉 양거원의 다음 시를 점화한 것이다.</br><div class="poetry-text">[[M078|<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거리의 버드나무 연기처럼 푸른 실가지,</br>말 세우고 그대 시켜 가지 하나 꺾었더니,</br>봄바람만이 그것이 아까운지,</br>은근히 다시 손안으로 불어오네.</div>)
- E279 + (가정(嘉靖) 병진년 무렵에 명(明) 나라 사람 유응기(劉應箕)가 왜구(倭寇) … 가정(嘉靖) 병진년 무렵에 명(明) 나라 사람 유응기(劉應箕)가 왜구(倭寇)에게 잡혀 배 안에 감금되었다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사로잡혀 서울에 왔다.</br>그가 시를 지었다.</br>전쟁을 원망하지 하늘을 원망하랴 / 只怨干戈不怨天</br>고국 떠나 길은 천리 만리 / 離鄕去國路千千</br>근심에 싸인 병골은 쇠한 운명 슬프고 / 愁纒病骨哀衰運</br>눈물 홍안에 뿌려 젊은 나이 우노나 / 涙洒紅顔泣盛年</br>달 보며 고향 생각 서쪽 국경 밖이요 / 見月思歸西塞外</br>구름 보며 마음은 북당 앞으로 달리누나 / 看雲心逐北堂前</br>모구의 칡을 보니 세월 얼마 흘렀는고 / 旄丘見葛何多日</br>고생으로 외로운 몸 여기서 곤욕 당하네 / 尾瑣孤身因此邊</br>이 재상(李宰相) 아계공(鵝溪公)이 젊었을 때 이 시에 차운하여 지었다.</br>곤의 바다 고래 물결 하늘에 닿아 아득하고 / 鯤海鯨波杳接天</br>남쪽 형국(초 나라 땅) 아득하니 몇 삼천 리 되는고 / 南荊迢遞幾三千</br>이국 땅에 유리하니 오직 외로운 그림자만 / 流離異國惟孤影</br>타향에 굴러굴러 한창 어린 나이로다 / 飄泊他鄕是弱年</br>나비꿈 때때로 국경 밖에 전하지만 / 蝶夢有時傳塞外</br>기러기 편지는 집 앞에 닿을 길이 없네 / 雁書無路抵家前</br>알겠노라 그대의 밤마다 어버이 그리는 생각 / 知君夜夜思親處</br>가을비 쓸쓸히 객침가를 적셔주리 / 秋雨蕭蕭客枕邊</br>당시 유(劉)의 나이 15~16세요, 아계공의 나이는 17~18세여서 나이는 모두 어렸으나 시는 이미 문장을 이루었다. 자고로 일찍 현달한 사람은 반드시 숙성(夙成)하는 법이다. 아계는 지금 재상(宰相)이 되었는데, 유응기도 역시 현달하였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급제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하니, 과연 그런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이는 급제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하니, 과연 그런지 아닌지 알 수 없다.)
- E366 + (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의 누제(樓題)는 모두 쌍(雙)과 창(窓) 두 자 … 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의 누제(樓題)는 모두 쌍(雙)과 창(窓) 두 자를 써서 지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양창해 선생 것이 더욱 좋다.</br>푸른 바다 붉은 무리 둥근 해의 반을 줄그었는데 / 碧海暈紅規日半</br>이끼 푸르고 바위 흰데 연기와 갈매기 짝지어 가네 / 蒼苔巖白煙鷗雙</br>금과 은으로 꾸민 대 위에 외로이 휘파람 부니 / 金銀臺上發孤嘯</br>넓고 넓은 천지 창으로 들어오네 / 天地浩然開入窓</br>이 시를 어떤 사람이 전하다가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공에게 보이니 말하기를, “혹 득의하여 이처럼 지을 만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반드시 이 시보다 나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우리 아버지께서도 이 운을 사용하여 지으시기를,</br>가랑비에 흰 갈매기 쌍쌍이 날고 / 疎雨白鷗飛兩兩</br>해질 녘 고깃배는 쌍쌍이 떴네 / 夕照漁艇泛雙雙</br>바다에서 돋는 해를 맞고자 / 擬看暘谷金烏出</br>정각의 동쪽 문을 두지 않았네 / 畵閣東頭不設窓</br>하였는데,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였다. 김첨경(金添慶)공이 관찰사였을 때에 지은 시 두 수가 있다. 그 하나는</br>아깝다 홍문(鴻門)에서 구슬 한말[玉斗] 깨뜨린 것이 / 可惜鴻門玉斗撞</br>조각조각 흩어져서 한 쌍 두 쌍 못 맞추네 / 紛紛片片不論雙</br>변해 흰 새가 되어 천백 떼를 이루어 / 化成白鳥群千百</br>해돋이 객 창가에 시끄럽게 울어대네 / 日出呶呶鬧客窓</br>이며, 또 하나는,</br>좋은 경치 하도 많아 좌우 부딪치는데 / 好景紛紛左右撞</br>말 머리엔 미인들도 쌍쌍이 보이는구나 / 馬頭紅粉亦雙雙</br>다음 구절은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그 뒤에 글을 쓰기를,</br>가소롭다 김문길이 / 可笑金文吉</br>정신 없이 좌우에 부딪치네 / 紛紛左右撞</br>하니, 듣는 사람이 조소하였다.吉 정신 없이 좌우에 부딪치네 / 紛紛左右撞 하니, 듣는 사람이 조소하였다.)
- E043 + (결지는 과거에 합격하여 시를 잘 짓는다고 이름이 났는데, 출가하여 중이 된 … 결지는 과거에 합격하여 시를 잘 짓는다고 이름이 났는데, 출가하여 중이 된 뒤에 호를 취봉이라고 하였다. 그는 떨어지는 배꽃을 보고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M086|<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옥 같은 용 백만 마리가 여의주 다투는 날에,</br>바다 밑 물귀신이 떨어진 비늘을 주워,</br>봄바람 부는 꽃시장에 몰래 팔아</br>봄신이 홍진에 흩어버리기 쉽다네.</div></br><div class="critique-text">[[C053|<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시골 학생들이 지은 시라고 하겠다.</div></br>문정공 김구도 또한 “낙이화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M087|<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펄펄 날아 춤추며 왔다갔다,</br>거꾸로 날리다가 가지에 올라 다시 피려 하네.</br>무단히 한 잎이 거미줄에 걸리니,</br>거미가 나빈 줄 알고 잡으러 오네.</div></br><div class="critique-text">[[C054|<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작가의 표현 수단은 본래 각자 같지 않은 것이다.</div>)
- E040 + (금나라 말엽에 시인 양비경이 단풍을 읊은 시는 이렇다. <div cla … 금나라 말엽에 시인 양비경이 단풍을 읊은 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79|<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바다 놀 비도 오지 않는데 수풀가에 깃들고,<br> 들불 바람도 안 부는데 나무 끝에 올랐네.</div></br>문진공 이장용도 또한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M080|<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황폐한 절간 쓸쓸하여 가을 생각 괴롭고,<br> 얕은 산 두드러져 석양녘에 분명하다.</div></br><div class="critique-text">[[C049|<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이 시를 보면 양비경이 늙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div>)
- E011 + (나는 아홉 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지금까지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시서 … 나는 아홉 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지금까지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시서육경(詩書六經)ㆍ제자백가(諸子百家)ㆍ사필(史筆)의 글로부터 유경벽전(幽經僻典)ㆍ범서(梵書)ㆍ도가(道家)의 설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 깊은 뜻은 궁구하지 못했지만, 그를 섭렵하여 좋은 글귀를 따서 글 짓는 자료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또 복희(伏羲) 이후 삼대(三代)ㆍ양한(兩漢)ㆍ진(秦)ㆍ진(晉)ㆍ수(隋)ㆍ당(唐)ㆍ오대(五代) 사이의, 군신의 득실이며 방국의 치란이며 그리고 충신의사(忠臣義士)ㆍ간웅 대도(奸雄大盜)의 성패ㆍ선악의 자취를 비록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기억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들을 간추려 기송(記誦)하여 적시에 응용할 준비를 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혹시 지필을 가지고 풍월을 읊게 되면, 아무리 백운(百韻)에 이르는 장편(長篇)ㆍ거제(巨題)라 할지라도 마구 내려 써서 붓이 멈추지 않는다. 비록 금수(錦繡)와 주옥(珠玉) 같은 시편은 이루지 못하나 시인의 체재는 잃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건대, 자부함이 이와 같은데 결국 초목과 함께 썩게 되는 것이 애석하다. 한 번 붓을 들고 금문(金門)ㆍ옥당(玉堂)에 앉아서 왕언(王言)을 대신하고 고초(稿草)를 검토하며 비칙(批勅)ㆍ훈령(訓令)ㆍ황모(皇謨)ㆍ제고(帝誥)의 글을 지어 사방에 선포하여 평생의 뜻을 푼 뒤에야 말 것이니, 어찌 구구하게 대수롭지 않은 녹을 구하여 처자를 살릴 꾀를 하는 자의 유이기를 바랐겠는가. 아, 뜻은 크고 재주는 높건만, 부명(賦命)이 궁박(窮薄)하여 나이 30이 되도록 오히려 한 군현(郡縣)의 직임도 얻지 못하였으니, 외롭고 괴로운 온갖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내 두뇌를 알 만하다. 이때부터 경치를 만나면 부질없이 시를 읊고 술을 만나면 통쾌하게 마시며 현실을 떠나서 방랑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라, 바람은 화창하고 날씨는 따스하여 온갖 꽃이 다투어 피니, 이처럼 좋은 때를 그저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윤학록(尹學錄)과 함께 술을 가지고 구경하면서 수십 편의 시를 지었다. 흥이 무르익었을 때 취기로 인해 졸았는데, 윤학록이 운자를 부르며 나더러 시를 지으라고 권하기에 나는 곧 보운(步韻)으로 다음과 같이 지었다. 귀는 귀머거리되려 하고 입은 벙어리되려 하니 / 耳欲爲聾口欲瘖 곤궁한 처지에 더욱 세정을 안다 / 窮途益復世情諳 뜻과 같지 않은 일은 십에 팔구나 되고 / 不如意事有八九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열에 한둘도 없다 / 可與語人無二三 사업은 고기처럼 하기를 기약하고 / 事業皐夔期自比 문장은 반마처럼 하려 하였는데 / 文章班馬擬同參 연래에 신명을 점검하니 / 年來點檢身名上 전현에 미치지 못한 게 바로 나의 부끄러움이네 / 不及前賢是我慙 윤학록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팔구(八九)로 이삼(二三)을 대하니 평측(平仄)이 고르지 못하오. 공(公)은 평일에 있어서는 문장이 훌륭하여 비록 수백 운(韻)의 율시(律詩)라도 한 번 내려 쓰기를 마치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스쳐가듯 빨리 하나 한 글자도 하자가 없었는데, 지금은 한 작은 율시를 짓되 도리어 염(廉)을 어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지금은 꿈속에서 지은 것이므로 가리지 않고 내놓은 때문이오. 팔구는 천만(千萬)으로 고치는 것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소. 대갱(大羹)과 현주(玄酒)가 초장만 못하지 않은 법이라. 대가의 솜씨는 원래 이러한 것인데 공이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하품하고 기지개하면서 깨니 바로 한 꿈이었다. 그래서 꿈속에 있었던 일을 윤학록에게 갖추 말하기를, “꿈속에서 꿈에 지은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이른바 꿈속의 꿈이구려.” 하고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따라서 희롱으로 다음과 같이 한 절구를 지었다. 수향이 문득 취향과 이웃하였으니 / 睡鄕便與醉鄕隣 두 곳에서 돌아오니 다만 한 몸일러라 / 兩地歸來只一身 구십 일 온 봄이 모두 꿈이라 / 九十一春都是夢 꿈속에 도리어 꿈속 사람이 되었네 / 夢中還作夢中人꿈이라 / 九十一春都是夢 꿈속에 도리어 꿈속 사람이 되었네 / 夢中還作夢中人)
- E332 + (노산(魯山)이 영천(永川)에 있을 때 달밤에 명월루(明月樓)에 올랐다가 자규 우는 소리를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소쩍새 울고 산 달은 밝아 / 蜀魂啼山月白 그리움에 속절없이 다락머리에 기대어 있다 / 相思空倚樓頭 네 울음 슬프면 나도 시름하고 / 爾啼苦我心愁 네 소리 없으면 내 근심도 없다 / 無爾聲無我憂 부탁하노니 인간의 이별한 사람 / 寄語人間離別客 부디 소쩍새 우는 달 밝은 다락에 오르지 마소 / 愼莫登子規啼明月樓)
- E034 + (대축 오세재가 의종이 미행한 것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 <div cla … 대축 오세재가 의종이 미행한 것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M059|<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어찌하여 날이 청명한데도,<br>검은 구름 낮게 땅에 깔리었는가,<br>도성 사람들 가까이 마오.<br>용이 이 속으로 다닌다오.</div></br>그는 또 남의 운을 써서 극암에 대해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M060|<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성의 북쪽 높고 험한 바위,<br>나라 사람들은 극암이라고 부르지.<br>멀리 학을 탄 왕자 진을 찧을 듯하고,<br>높이 하늘에 오른 무함을 찌를 것 같다.<br>자루를 휘는 데 번개로 불을 삼고,<br>칼날을 담금질하는 데 서리로 소금을 삼는다.<br>어떻게 변기로 만들어,<br>초를 없애고 범을 살릴까.</div></br>눈병을 앓으면서 지은 시는 이렇ᄃᆞ.</br><div class="poetry-text">[[M061|<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늙음과 병은 기약이나 한 듯 찾아오지만,<br>죽을 때가 다된 한 포의의 신세.<br>눈동자 몹시 희미하여,<br>자수정 안경도 소용이 없네.<br>등잔불 앞에서 글자 보기가 겁나고,<br>눈 내린 뒤 빛을 부끄럽게 바라본다.<br>금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br>눈을 감고 기심을 잊는 것을 배우리라.</div></br>문순공 이규보가 말하기를, “<div class="critique-text">[[C037|<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선생이 시를 짓는 것은 한유와 두보를 배웠다. 그러나 그의 시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div></br>”고 하였다. </br>그런데 김거사집 가운데 그의 시가 한 편 실려 있다.</br><div class="poetry-text">[[M062|<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크기는 백 아름이나 되는 재목이지만 쓸 데가 없고,<br>길이는 석 자나 되는 입이지만 말을 못한다.</div></br><div class="critique-text">[[C038|<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역시 노건하여 칭찬할 만하다.</div>)
- E265 + (미전(薇田) 왕학(王鶴)이 기자묘(箕子廟)를 참배하고 시를 지었다. 호음(湖陰)이 사(師) 자 운을 짓기에 군색하여 며칠을 두고 다듬었는데, 지을수록 난삽하여 종사관(從事官)에게 부탁하자, 정랑(正郞) 이홍남(李洪男)이 즉석에서 써내려갔다. 삼인이 비록 행적은 다르지만 / 三仁雖異迹 백세에 오히려 같이 스승으로 삼는다 / 百世尙同師 하였다. 호음의 재주로도 때로는 간혹 막히는 수가 있으니,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이랴?)
- E032 + (사간 정지상은 이런 시를 지었다. <div class="poetry- … 사간 정지상은 이런 시를 지었다.</br></br><div class="poetry-text">[[M050|<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비 갠 뒤 긴 둑에 풀빛 푸른데,</br></br>임 보내는 남포 나루에서 슬픈 노래 부른다.</br></br>대동강물 어느때나 마를꼬?</br></br>해마다 이별의 눈물 푸른 파도에 더해만 가니.</div></br></br>연남 사람 양재가 일찍이 이 시를 베끼기를, “<div class="poetry-text">[[M051|<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별루년년창록파</div>”라고 하였다. </br></br>내 생각에 작과 창 두 자는 모두 그 뜻이 원만하지 않다. 마땅히 이것은 “첨록파”라고 해야 할 것이다. </br></br>정지상은 또 이런 시를 지었다.</br></br><div class="poetry-text">[[M053|<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땅이 푸른 하늘과 닿은 곳 멀지 않은데, </br></br>사람과 흰 구름이 한가롭게 마주 대하네.</div></br></br><div class="poetry-text">[[M054|<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뜬구름 흐르는 물 같은 나그네 절에 이르니, </br></br>빨간 잎 푸른 이끼낀 절의 중은 문을 닫는다.</div></br></br><div class="poetry-text">[[M055|<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푸른 버들 아래 문닫은 집 여덟 아홉 채, <br></br>밝은 달 가운데 발을 걷은 서너 사람.<br></div></br></br><div class="poetry-text">[[M056|<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위로 북두에 닿을 듯 삼각형 지붕, </br></br>허공에 높이 솟은 한 칸의 누대.</div></br></br><div class="poetry-text">[[M057|<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돌 위의 늙은 소나무에 한조각 달이 걸렸고, </br></br>하늘 끝 낮은 구름 밑에 천점 산이 있네.</div></br></br><div class="critique-text">[[C035|<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이 시인은 이 같은 시를 즐겨 썼다.</div>)
- E347 + (사인(士人) 이양국(李良國)은 자못 기풍이 있어 스스로 높은 체하고 법도를 … 사인(士人) 이양국(李良國)은 자못 기풍이 있어 스스로 높은 체하고 법도를 따르지 않았다. 일찍이 금강산으로 유람가는 사람을 전송하는데, 대개 그는 유람한 지 이미 10년이 되고 전송하는 사람은 3년이 된다. 그러므로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br>십년 된 사람이 삼년 된 손님을 전송하고 / 十年人送三年客</br>팔만 봉우리는 구만 장천에 솟았네 / 八萬峯高九萬天</br>휘파란 소리 부상에 떨어지는데 파도는 해를 흔들고 / 嘯落扶桑波撼日</br>읊조림은 울릉도에 울리는데 바다에는 안개가 일어나네 / 吟搖蔚島海生煙</br>또 신해년 겨울에 국가에서 두 종(宗)의 선과(禪科)를 다시 베풀게 되자, 유림들이 장차 소를 올리려고 회문(回文)하여 그의 집에 도착하였더니, 그는 자기의 이름 아래에,</br>불을 배척하여 상소한 것은 한유의 일이요 / 闢佛上疏韓愈事</br>학 타고 하늘에 간 것은 여동빈의 광기다 / 乘鶴橫空呂洞狂</br>라고 쓰고, 이어 말하기를,</br>“나는 내일 산으로 유람간다.”</br>하고 항소의 반열에 끼지 아니하였다.</br>또 일찍이 시를 가지고 그 애인을 이별하고자 부채에 시를 썼었는데, 그 애인에게 마음이 있었던 한 문관(文官)이 이를 보고 불살라 버렸다. 이 양국은 또 뒤에 타다 남은 끝에 다가,</br>지금까지 분서한 불이 꺼지지 않아 / 至今未盡焚書火</br>낭군의 석별시를 태우네 / 燒盡郞君惜別詩</br>라고 하여 문관은 그 기상을 가상하게 여겼었으니, 대개 소광(疎狂)하여서이다.고 하여 문관은 그 기상을 가상하게 여겼었으니, 대개 소광(疎狂)하여서이다.)
- E322 + (상(尙) 정승은 꿈에 높은 다락 호화스러운 잔치 자리에서 이렇게 근률(近律) … 상(尙) 정승은 꿈에 높은 다락 호화스러운 잔치 자리에서 이렇게 근률(近律)을 지었다.</br>백 자 넘는 높은 닭 중천에 기대었고 / 百尺高樓倚半天</br>세 줄 분바른 여인들 호화로운 자리에 벌여 있네 / 三行粉黛列華筵</br>앞의 강은 한 띠와 같이 평야를 둘렀고 / 前江一帶圍平野</br>먼 산의 일천 봉우리 짙은 안개 속에 드러났네 / 遠峀千岑露抹煙</br>때로 아름다운 꾀꼬리 푸른 버들 뚫는데 / 時有嬌鶯穿翠柳</br>다시 경쾌한 제비 붉은 줄 건드리지 않는구나 / 更無輕燕點朱絃</br>끝 구(句)를 미처 채우지 못하고 놀라 깨었다. 인하여 꿈속의 말을 되새겨서 다음과 같이 채웠다.</br>다락에 사는 사람 장막 속의 손 아니니 / 樓居非是幕中客</br>금병풍 눈앞에 두르는 것 필요없네 / 不用金屛在眼邊</br>기개와 도량이 매우 좋았다.풍 눈앞에 두르는 것 필요없네 / 不用金屛在眼邊 기개와 도량이 매우 좋았다.)
- E320 + (상사(上舍) 심극효(沈克孝)는 중종 때 서울에 은거하여 남산 밑에 집을 지었 … 상사(上舍) 심극효(沈克孝)는 중종 때 서울에 은거하여 남산 밑에 집을 지었는데, 율정(栗亭)이 있어서 더욱 좋았었다. 한때에 유명한 집이라고 하였는데, 한 재상이 찾아와 술 마시며 즐기다가 새 집을 주고 바꾸려고 하자, 심극효는 웃으면서 말하기를,</br>“비록 천하를 반을 갈라 주고 악양루(岳陽樓)로 값을 더 준다 하여도 바꿀 수 없소.”</br>하였다. 한상 형윤(韓相亨允)은 농담을 잘하였었는데,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br>“참으로 천하의 반분에다가 악양루로 값을 더 주고 바꾸기로 한다면 그대의 교환하는 일을 모름지기 애써 이루려 할 것이오.”</br>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재미있는 일이라고 하여 전하였었다. 그가 작고하니, 용재(容齋)는 만사를 이렇게 지었다.</br>한 골짝도 천하의 반을 당하는데 / 一壑自當天下半</br>율정을 어찌 악양루와 바꿀쏘냐 / 栗亭寧換岳陽樓 당하는데 / 一壑自當天下半 율정을 어찌 악양루와 바꿀쏘냐 / 栗亭寧換岳陽樓)
- E033 + (상서 김신윤이 의종 경인년 9월 9일에 이런 시를 지었다.<div cl … 상서 김신윤이 의종 경인년 9월 9일에 이런 시를 지었다.<div class="poetry-text">[[M058|<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임금의 수레 아래서 풍운이 일어나,</br></br>사람 죽인 것이 흩어져 있는 삼 베듯했네.</br></br>그러나 좋은 때를 저버릴 수 없어,</br></br>흰 술에 국화를 띄우네.</div><div class="critique-text">[[C036|<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이 시를 통해 당시의 일이 어찌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늙은이의 마음은 크고 구애됨이 없어 범상하지 않다.</div>;/div>)
- E383 + (송강이 암행어사가 되어, 북쪽 변방(함경도 지방)으로 갈 때에 단가(短歌)한 … 송강이 암행어사가 되어, 북쪽 변방(함경도 지방)으로 갈 때에 단가(短歌)한 수를 지었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명종대왕이 돌아가시니, 아마 그 노래가 참서(讖書)인 모양이다. 계미년 봄에 송강이 관풍사(觀風使)로 순찰하는 길에 길주(吉州)에 이르렀더니, 늙은 기생 하나가 그 단가를 불렀다. 취한 김에 이것을 두고 칠언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br>스무 해 앞서 부른 새하곡이 / 二十年前塞下曲</br>어느 해에 이 기생들 와중에 떨어졌는가 / 何年落此妓林中</br>외로운 신하 아직 죽지 못하여 먼 하늘가에서 짓는 눈물을 / 孤臣未死天涯淚</br>강릉을 바라보며 새벽바람에 뿌려 볼까 하노라 / 欲向康陵洒曉風</br>하였다.涯淚 강릉을 바라보며 새벽바람에 뿌려 볼까 하노라 / 欲向康陵洒曉風 하였다.)
- E035 + (송나라 때 [[T029|<span class="keyword topic">정월 대보름날</span>]] 궁궐 안에서 임금의 시를 내보였다. … 송나라 때 [[T029|<span class="keyword topic">정월 대보름날</span>]] 궁궐 안에서 임금의 시를 내보였다. 재상, 양제, 삼관에서 모두 응제하여 성대한 행사가 되었는데, 왕기공은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M063|<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한 쌍의 봉황이 구름 속에서 임금의 수레 부축하여 내려오고,</br>여섯 마리 자라가 바다 위에서 산을 끌고 오는구나.</div></br><div class="critique-text">[[C039|<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이 시가 가장 전려한 것으로 뽑혔다.</div></br>우리나라의 등석일에 지은 문기장자시에서 이규보는 이렇게 읊었다.</br><div class="poetry-text">[[M064|<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세 번 만세를 부르니 삼신산이 용솟아 오르고,</br>천년에 한 번 익는 바다 과일이 왔네.</div></br><div class="critique-text">[[C040|<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이 시는 왕기공의 시와 나란히 앞을 다툴 만하다.</div></br>지금 예천의 일재 권한공은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M065|<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남산이 상서로움을 빚어 은항아리에 담고,</br>북두칠성이 자루를 돌려 옥잔에 따르네.</br>수많은 갈고 북소리에 봄이 무르녹고,</br>천 개 연등에 달이 오고 가는 듯.</div></br>평리 백원항도 또한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M066|<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하늘에 달빛 가득하고 땅엔 피리소리 들려오는데,</br>하룻밤 봄이 금수산에 열렸네.</div></br><div class="critique-text">[[C041|<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그는 스스로 자기의 시가 권한공의 것보다 훨씬 떨어진다고 했다.</div>)
- E677 + (수호(垂胡) 임기(林芑)는 많은 서적을 읽었고 겸하여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을 … 수호(垂胡) 임기(林芑)는 많은 서적을 읽었고 겸하여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을 지녔다. 그래서 무릇 구류백가(九流百家) 및 기서고문(奇書古文)을 눈으로 섭렵하고 입으로 외우지 않는 것이 없었다.</br>일찍이 서울에서 문인재자(文人才子)들이 모두 그의 집에 모여 각자의 견문(見聞)을 수호에게 문난(問難 질문)하였다. 수호가 좌우를 보면서 묻는 대로 즉답하는데 의혹스러운 곳이 없어서, 마치 쏟아지는 강물이나 흐르는 수은 같아 그침이 없었다. 호음(湖陰)은 늘 그를 가리키며 ‘걸어 다니는 비서〔行秘書〕’라고 말하였다.</br>호음은 술자리에서 많은 시를 지었는데 때때로 그 용사(用事)가 이해할 수 없는 곳이 있었으니, 대개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수호가 일찍이 사적인 자리에서 호음을 모시고 있다가 물어 보기를,</br>“상공(相公)의 시는 자주 위어(僞語)로 사람을 속이는데 후세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십니까?”</br>하였다. 호음이 대답하기를,</br>“세간에 당신같이 안목을 기른 자가 몇이겠는가. 희작(戱作)은 사고(私稿)에는 등재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후인의 눈에 띄겠는가.”</br>하였다. 마침내 서로 한바탕 웃었다.</br>호음은 병이 위독하자 수호에게 부탁하기를,</br>“그대가 꼭 내 시에 주를 달아 주게.”</br>하였다. 수호는 이를 허락하였다. 십여 년 후에 호음의 시고가 세상에 간행되었는데 주가 없었다. 가군(家君 아버님)이 수호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br>“제가 일찍이 그의 시를 수습하여 이미 한 권에 주를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에 용사와 문자가 대체로 거듭나오는지라 취하여 두루 열람해 본 즉 거듭나오는 곳이 갈수록 더욱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만두게 되었습니다…….”</br>하였다. 수호는 비록 이같이 박학했지만, 다만 시를 익히지도 않았고, 또한 즐겨 짓지도 않았다.</br>임신년(1572, 선조5)에 조사(詔使 중국 사신)를 맞이할 때 임기는 일기관(日記官)으로 임당(林塘)을 따라 용만(龍灣)에 갔다. 학사 습재(習齋) 권벽(權擘)이 조사의 시를 차운하여</br></br>중선루 위에서 북쪽으로 옷깃을 열고 / 仲宣樓上開襟北</br>자미 시 가운데 서쪽으로 길머리 했네 / 子美詩中首路西</br></br>라는 구절을 지었다. 수호가 말하기를,</br>“‘누상(樓上)’을 고쳐 ‘부리(賦裏)’로 하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br>하였다. 임당이 가군을 보며 말하기를,</br>“저 부리를 치는 것이 좋겠소.”</br>하기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포복절도하였다. 우리 동방의 말에 부리〔喙〕와 ‘부리(賦裏)’의 음이 같은 까닭이었다.</br>그러나 증다산(曾茶山)의 시 〈송증굉수천태(茶山送曾宏守天台)〉의 함련(頷聯)에서,</br></br>흥공의 부 가운데 운하가 붉고 / 興公賦裏雲霞赤</br>자미의 시 중에 도서가 푸르네 / 子美詩中島嶼靑</br></br>하였으니, 수호가 어찌 근거 없이 이 말을 하였겠는가. / 子美詩中島嶼靑 하였으니, 수호가 어찌 근거 없이 이 말을 하였겠는가.)
- E288 + (옛날 책사종(翟嗣宗)이 회남위(淮南尉)로 있었는데, 그때 감사(監司)에게 매 … 옛날 책사종(翟嗣宗)이 회남위(淮南尉)로 있었는데, 그때 감사(監司)에게 매우 곤욕을 당하였다. 역관(驛館)에서 거미를 제목으로 시 한 수를 지었다.</br>실을 짜며 왕래하니 북같이 빠른데 / 織絲來往疾如梭</br>늘 공중에 올라 그물 만들기 좋아하네 / 長愛騰空作網羅</br>남을 해칠 몸과 마음 매우 적지마는 / 害物身心雖甚少</br>하늘에 늘어진 그물도 또한 많지 않구나 / 漫天網紀亦無多</br>숲 사이 자는 새들 너를 미워하지마는 / 林間宿鳥應嫌汝</br>발 아래 나는 벌레 그가 가장 너를 두려워한다 / 簾下飛虫最懼汝</br>사마귀가 매미 잡는 것 배우지 말지어다 / 莫學螳螂捕蟬□</br>모름지기 알아야지. 참새가 너를 잡을 줄을 / 須知黃雀奈君何</br>임자중(林子中)이 그를 불러 경박한 시를 짓지 말라고 꾸짖었다. 우리 동방(東方)에도 역시 무사(武士) 이장길(李長吉)이 있었는데, 그가 의흥 현감(義興縣監)으로 있을 때 백성들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br>자하 자하 또 자하야 / 子賀子賀復子賀</br>관탕 민재 모두 비우고 / 官帑民財一倂空</br>오직 강산은 옮기지 못하여 / 惟有江山移不得</br>화공을 명하여 병풍 위에 그렸네 / 命工圖畫上屛風</br>자하(子賀)는 장길의 자(字)다. 근년에 어떤 사람이 장편을 지어 종루(鐘樓) 기둥에 걸어서 낱낱이 조정 사대부(士大夫)를 헐뜯었으니, 진실로 조정에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니면 바로 천박하고 경솔한 사람일 것이다. 시는 비록 볼 만하였으나, 실로 책사종(翟嗣宗)의 죄인인 것이다. 것이다. 시는 비록 볼 만하였으나, 실로 책사종(翟嗣宗)의 죄인인 것이다.)
- E397 + (우리 나라에 대단한 문장가들이 많이 배출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식대로 … 우리 나라에 대단한 문장가들이 많이 배출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식대로 하려고만 힘썼을 뿐 당(唐) 나라 때의 작품에서 모범을 취해보려고 노력한 작품조차 극히 드문 실정이다. 그런데 충암(沖菴 김정(金淨))과 망헌(忘軒 이주(李冑)) 이후로는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 등 몇 사람이 가장 저명하다. 충암의 시 가운데 사람들의 입으로 전송(傳誦)되어 오는 것이 원래 많은데, 가령</br></br>강남 땅 못다 꾼 꿈 고요한 대낮인데 / 江南殘夢晝厭厭</br>꽃다운 해 날마다 시름만 더해가네 / 愁逐年芳日日添</br>꾀꼬리 제비 오지 않고 봄날 또 저무는데 / 鶯燕不來春又暮</br>살구꽃에 이슬비 발을 도로 내려놓네 / 杏花微雨下重簾</br></br>이라고 한 것이나, 또</br></br>가을 바람 낙엽지는 금강의 가을인데 / 西風木落錦江秋</br>연무 덮인 모래섬 바라보면 시름겨워 / 煙霧蘋洲一望愁</br>해 저물녘 술은 깨고 사람은 멀리 떠나는데 / 日暮酒醒人去遠</br>감당 못할 이별 생각 강 누각에 가득하네 / 不堪離思滿江樓</br></br>라고 한 시 등은 당 나라 사람들의 시집 속에 놔두어도 쉽게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망헌의 시 가운데</br></br>통주는 천하의 절경이라 / 通州天下勝</br>누각들 하늘에 솟았구나 / 樓觀出雲霄</br>저자엔 금릉의 물화(物貨) 가득하고 / 市積金陵貨</br>물줄기 양자강에 합류하네 / 江通楊子潮</br>가을이라 까마귀떼 물가에 내려 앉고 / 飢鴉秋落渚</br>저녁이라 외로운 새 요동으로 돌아간다 / 獨鳥暮歸遼</br>말 탄 이 내 몸 천리 길 나그네라 / 鞍馬身千里</br>정자 올라 바라보는 멀고 먼 고국땅 / 登臨故國遙</br></br>라고 한 것 역시 충암에 버금가는 시라고 하겠다. 최(崔)의 시에,</br></br>지난 해 절 언덕에 배를 갖다 대놓고는 / 去歲維舟蕭寺岸</br>꽃 꺾어 물가에서 전송을 하였었지 / 折花臨水送行人</br>이별 슬픔 저 산승은 아는지 모르는지 / 山僧不管傷離別</br>문을 닫고 무단히 또 봄 한 철을 보내누나 / 閉戶無端又一春</br></br>이라고 한 것이나, 백(白)의 시에,</br></br>못 속엔 붉은 연꽃 바람이 집에 가득터니 / 紅藕一池風滿院</br>나무마다 매미 소리 비가 마을로 몰려가네 / 亂蟬千樹雨歸村</br></br>이라고 한 것이나, 이(李)의 시에,</br></br>병객의 외로운 배 달빛만 밝게 비춰주고 / 病客孤舟明月在</br>노승의 적막한 절 꽃잎만 많이 져 있구나 / 老僧深院落花多</br></br>라고 한 표현들은 한 번 음미하면 그 맛을 알 수가 있다. 老僧深院落花多 라고 한 표현들은 한 번 음미하면 그 맛을 알 수가 있다.)
- E071 + (중 둔우(屯雨)는 환암(幻庵 혼수(混修))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학 … 중 둔우(屯雨)는 환암(幻庵 혼수(混修))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써 경전(經傳)을 탐독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뜻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또 시에도 능하여 시사(詩思)가 청절하여 목은(牧隱)ㆍ도은(陶隱) 등 선생과 더불어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 아조(我朝)에서는 불교를 숭상하지 않아 명가의 자제는 머리를 깎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승려로서 글을 아는 자가 없어 사(師)의 이름이 더욱 나타났으며 사방의 학자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고, 집현전의 선비들도 모두 탑하(榻下)에 나아가 글을 물으니, 성대하게 유석 사림(儒釋士林)의 사표가 되어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나의 백형과 중형이 일찍 회암사(檜巖寺)에서 글을 읽을 때, 사의 나이가 90여 세였는데 용모가 맑고 파리하며, 기체가 여전히 강하여 혹은 이틀쯤 밥을 먹지 않아도 그다지 배고파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밥을 올리면 혹은 몇 그릇을 다 먹되, 또한 배부른 빛이 없고 며칠이 지나도록 변소에 가지 아니하며, 항상 빈 방에 우뚝 앉아서 옥등을 달고 깨끗한 책상을 놓고, 밤새도록 책을 보아 작은 글자까지 하나하나 연구하며 졸거나 드러눕는 일이 없으며, 사람을 물리쳐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부를 일이 있으면 손으로 소쟁(小錚)을 쳐서 제자들이 수응하도록 하였으며, 큰소리를 지르지 아니하였다. 일본 국사인 중 문계(文溪)가 시를 구하여 진신(縉紳) 중에서 시를 지은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었는데, 사도 또한 명을 받들어 시를 지었다. 그 시에,</br>수국고정 / 水國古精</br>상쾌한 무위의 사람이로다 / 灑然無位人</br>빨리 달리는 것도 응당 스스로 그칠 것이요 / 火馳應自息</br>고목처럼 섰으니 다시 누구와 친하리오 / 柴立更誰親</br>풍악에는 구름이 발 아래에서 일고 / 楓岳雲生屨</br>분성에는 달빛이 성문에 가득하도다 / 盆城月滿闉</br>바람 맞은 돛은 해천이 넓고 / 風帆海天闊</br>매류는 고원의 봄이로구나 / 梅柳故園春</br>하였다. 당시에 춘정(春亭)이 문형(文衡)을 주관(主管)하였는데, 쇄연무위(灑然無位)의 글귀를 고쳐서 “소연절세인(蕭然絶世人 쓸쓸히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이라 하니, 스승이 말하기를, “변공(卞公)은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로다. 소연(蕭然)이 어찌 쇄연(灑然)만 하며, 절세(絶世)가 어찌 무위(無位)만 하겠는가. 이것은 자연무위(自然無爲)의 뜻을 깎아 없앨 뿐이로다.”하고, 항상 문사를 보면 섭섭해 마지않았다. 지금 천봉집(千峯集)이 세상에 전해진다.상 문사를 보면 섭섭해 마지않았다. 지금 천봉집(千峯集)이 세상에 전해진다.)
- E334 +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에 정당매(政堂梅)가 있었는데, 세상에서 강통정(姜通亭 이름은 회백(淮伯))이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조남명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절은 헐어지고 중은 파리하고 산 돌은 오래되었으니 / 寺破僧羸山石古 선생이 본래부터 집지을 만한 곳 못 되어라 / 先生自是未堪家 조화옹이 한매의 일을 그르치어 / 化工定誤寒梅事 어제도 꽃피고 오늘도 꽃 피었네 / 昨日開花今日花 대개 그의 시절을 조롱한 것이다.)
- E325 +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은 천품이 매우 뛰어나게 영특하였다. 시문을 …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은 천품이 매우 뛰어나게 영특하였다. 시문을 일찍이 뜻에 두지 않았으나 손에서 나오면 반드시 아름다웠다. 〈병회부(病懷賦)〉라는 것이 있는데 신기재(申企齋)는 항시 한 통을 써서 벽에 붙여 놓고 읽었으며, 이용재(李容齋)는 또한 말하기를,</br>“형이 힘써 배워 그 재주를 확충하였더라면 우리 무리는 감히 바랄 수 없을 것이다.”</br>하였었다.</br>일찍이 남산 기슭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br>뉘 집에 도가 있어 충천할 수 있는고 / 誰家有道可冲天</br>요리하면 문득 그렇지 않음을 알리 / 料理終知却不然</br>시험삼아 산속에 들어 베개 높이고 누웠으니 / 試向山中高枕臥</br>이 몸 한가한 데가 즉 신선일세 / 此身閑處卽神仙</br>또 강정(江亭)에 놀면서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br>한강 가 좋은 곳을 다투어 차지하여 / 爭占名區漢水濱</br>강을 향해 단장된 누대가 몇 군데나 되는고 / 樓臺幾處向江新</br>붉은 난간이 대저 고요한 데가 많으니 / 朱欄大抵多空寂</br>술 들고 올라 앉으면 곧 주인이라네 / 携酒來憑是主人</br>뜻을 얽은 것이 다 사리가 달통하여 세상을 경계하는 뜻이 있었다. 상(尙) 정승의 매형이었는데, 그는 매양 말하기를,</br>“형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그 시는 《여지승람》이나 《동문선》에 수록 되어도 부끄러움이 없는데, 그때에 수록되지 못하였으니 또한 천명이다.”</br>하였다.도 부끄러움이 없는데, 그때에 수록되지 못하였으니 또한 천명이다.” 하였다.)
- E214 + (가정 병신년에 내가 원영사(遠迎使) 퇴휴당(退休堂) 소(蘇) 정승을 따라 의 … 가정 병신년에 내가 원영사(遠迎使) 퇴휴당(退休堂) 소(蘇) 정승을 따라 의주(義州)에 머무르고 있을 때, 공이 취승정(聚勝亭)에서 휘자(暉字) 운으로 시를 지으려고 한참 동안을 고심하다가 말하기를, “여러 분의 시에 ‘낙휘(落暉)ㆍ석휘(夕暉)ㆍ사휘(斜暉)ㆍ모휘(暮暉)ㆍ조휘(朝暉)로 운을 단 것이 많은데, 중첩되고 정교(精巧)하지 못하다. 이제 한 구를 얻었는데,</br>맑은 강이 비단과 같으니 사현휘네 / 澄江如練謝玄暉</br>하였으니 옛 압운(押韻)을 답습하지 않은 것 같으나 그 대구(對句)가 어렵다.”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황산곡(黃山谷)의 시에</br>서릿달이 금사를 끌어당긴다 / 霜月掣金蛇</br>는 구가 있는데, 만약</br>서릿달이 뱀을 끌어당김은 황태사로다 / 霜月掣蛇黃太史</br>라고 한다면 쓸 만 하지만, 황산곡의 구가 맑은 강이 비단과 같다는 것이 천고에 회자(膾炙)되는 것만은 못합니다. 한퇴지(韓退之)의 시에,</br>초생달이 갈아 놓은 낫 같다 / 新月似磨鎌</br>하였으니, 이것으로 저것과 대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공이 “됐다.” 하고, 드디어 읊기를,</br>초생달이 낫과 같음은 한리부로다 / 新月似鎌韓吏部</br>하고, 이어 전편(全篇)을 지었다. 그때는 마침 보름을 지난 뒤라 초생달이 아님을 꺼려 뒤에 초승이 되기를 기다려 써서 사람들에게 보였으나 소공이 체직되어 왔으므로 정자(취승정(聚勝亭))에 현판으로 써서 달지는 않았다.이 체직되어 왔으므로 정자(취승정(聚勝亭))에 현판으로 써서 달지는 않았다.)
- E218 + (가정 신축년에 내가 하절사(賀節使)를 따라 연경에 갔을 때, 때마침 무종(武 … 가정 신축년에 내가 하절사(賀節使)를 따라 연경에 갔을 때, 때마침 무종(武宗)의 황후가 돌아갔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도 반열(班列)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나아가 곡(哭)하였다. 어느 날 일찍 사문(社門) 밖에 임시로 앉아 있는데, 중국 관원들이 많이 와서 극우(隟宇)에 앉아 있었다. 한 벼슬아치가 역사(譯士) 홍겸(洪謙)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시를 지을 수 있는가.” 하니 홍겸이, “어젯밤에 비가 조금 내려 나그네의 회포가 쓸쓸하여 우연히 절구 한 수를 지었다.”고 하였더니, 그 벼슬아치가 매우 간곡히 보여 달라고 하였다. 홍겸이 최고운(崔孤雲)의 시를 써서 보여 주었는데,</br>가을 바람에 비록 애써 읊었으나 / 秋風雖苦吟</br>세상에 알아 주는 사람이 적구나 / 世俗少知音</br>창밖은 비내리는 한밤중인데 / 窓外三更雨</br>등잔 앞에서 먼 고향 생각에 잠겨 있네 / 燈前萬里心</br>하였다. 벼슬아치가 가지고 가서 그 상관에게 보였더니, 다투어 벼슬아치를 보내 적어 갔다. 한참 손님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심지어 과일과 차를 가지고 와서 위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붓을 들어 홍겸에게 주면서, “그대, 다시 한 수 지어 달라.” 하니, 홍겸이 나를 가리키며, “저 분도 시를 잘 지으니 가서 청하여 보라.” 하니, 드디어 나에게 구하였다. 내가 종이에 쓰기를, “조충전각(雕虫篆刻 자질구레하게 문장의 문구를 수식함)은 본래 장부의 할 일이 아니다. 하물며 국상(國喪)을 당하였는데, 어찌 풍월을 읊을 때냐. 그래도 원한다면 길에서 지은 것이 있으니, 그 중의 절구 하나를 보여 주리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이에, “탕참(湯站)에 이르러 사람을 동쪽으로 돌려보내다.”라는 시를 썼는데, 그 시는,</br>송골산 앞 길에서 / 松鶻山前路</br>그대는 동으로 나는 서쪽으로 헤어지네 / 君東我馬西</br>집에 편지 써 보내려고 / 欲題家信去</br>종이를 대하니 생각이 도리어 아득하구나 / 臨紙意還迷</br>하였다. 서로 돌아보며 베껴 쓰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어찌 풍월을 읊을 때이냐.”의 말을 가리켜 탄복하기를, “참으로 예의를 아는 나라로다.” 하였다.냐.”의 말을 가리켜 탄복하기를, “참으로 예의를 아는 나라로다.” 하였다.)
- E240 + (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 … 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 율시가 적혀 있다고 하였다 "" 보고 들은 자들이 정자의 들보가 극히 높아서 시인이 시를 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반드시 귀신이 쓴 시라고 여겼다. 도성 아래가 소란스러우며,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말하기를, 들보의 시가 이제 없고 글씨는 원의 벽에 있다고 하니, 더욱 괴이하게 여겼다. 내가 분변하여 말하기를, "이른바 들보에 제시했다는 것은 본래 그런 일이 없었고, 다만 원의 벽에 쓰여 있었는데 전하는 자가 잘못한 것이다. 어찌 일찍이 들보에 있었다가 지금은 벽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 시를 호음 정사룡 선생에게 보였더니, "시가 심히 졸렬하고 속되며, 또한 장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불자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E295 + (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 … 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예부(禮部)를 관광(觀光)하는데, 절강(浙江)의 서생(書生) 5~6인이 먼저 와 있었다. 땅에 글을 적어 서로 문답하고, 한 절구를 지어보였다.</br>중국 조정 예부에 부평같이 모였으니 / 天朝禮部風萍集</br>천리의 관광객은 각각이 다른 고향 / 千里觀光各異鄕</br>가장 괴로운 건 내일 아침 이별하면 / 最苦明朝又分手</br>푸른 하늘 가을 숲이 정히 푸르리 / 碧天秋樹正蒼蒼</br>내가 곧 그 시의 운에 따라 지었다.</br>서리 바람 나무에 불어 성겨 누른 잎 떨어지니 / 霜風吹樹隕疏黃</br>소슬한 찬 소리에 고향 생각 괴롭도다 / 蕭瑟聲寒苦憶鄕</br>같은 나그네로 내가 가장 먼 곳이니 / 同作旅遊吾最遠</br>바다 하늘 나직한데 흩어진 산 푸르구나 / 海天低襯亂山蒼</br>서로 끌며 몰려와 보고는 선생이라 불렀다. 내가 사양하여 말하기를,</br>“중국 선비들의 과분한 칭찬이 이미 감사한데, 또 선생은 무슨 말입니까?”</br>하니, 답하기를,</br>“재주를 보는 것이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br>하였다. 이번 걸음에 무령현(撫寧縣) 벽에 한 율시를 지어 붙였다. 그 1 연(聯)에,</br>말 통하려고 땅에 글 쓰기 번거롭고 / 通言煩畫地</br>악을 보러 중국을 방문한 것 기쁘다 / 觀樂喜朝天</br>하였다. 그후 임술년간에 한 압마관(押馬官)이 와서 말하기를,</br>“어떤 현의 관사가 다 낡아 다시 지었는데, 그 시를 쓴 구벽(舊壁)은 완연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br>하였다. 케케묵고 누추한 시에서 뭐 취할 것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
- E486 + (감사 신응시는 시로 이름이 있었다. 일찍이 고성에서 시를 지었다. "" 청천시는 아래와 같다. "" 병랑을 위한 시는 아래와 같다. "" 또 선조대왕이 상을 치를 때 응제하여 지은 두견시에, ""라 하였다. 순회세자의 만시는 ""라 하였다. 그 때에 이 시들을 아름답다고 여겼다.)
- E485 + (강극성이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파면당한 때에 시를 지었다. "" 명종이 이를 듣고 감탄하여 특별히 명하여 다시 서용하였으니, 대개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 E522 + (계랑은 부안의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었다. 일찍이 한 나그네가 그녀의 이름을 듣고 시를 지어 희롱하였다. 계랑이 즉시 차운하기를, ""라 하였다. 그 사람이 기뻐하지 않으며 떠나갔다. 계랑은 평소 거문고와 시를 좋아하였으며, 죽을 적에 거문고를 같이 묻었다 한다.)
- E565 + (고경명은 자가 이순이다. 광주에서 벼슬하기 전에 서익이 인근 고을의 태수였다 … 고경명은 자가 이순이다. 광주에서 벼슬하기 전에 서익이 인근 고을의 태수였다. 한 승려가 서익과 친분이 있어 그 고을에 여러 날 머물다가 광주로 가서 고경명을 찾아보려 했다. 서익이 말했다. "내가 모월 모일에 고경명 군을 찾아뵐 예정이니, 안부를 정중히 전해달라." 승려가 광주에 가서 고경명을 뵙고 서익의 말을 전했다. 고경명이 그를 매우 정중히 대접하며 시첩 중의 시를 주고 말했다. "서군수께서 근일에 어떤 시를 지으셨는가?" 승려가 말했다. "사운시 네 수를 지으셨습니다." "그대는 그 운을 기억하는가?" "기억합니다. 대개 '운(雲)', '분(濆)' 등의 글자를 운으로 삼았습니다." 고경명이 생각하기를, 군수가 오면 반드시 시주(詩酒)로 도전해올 것이다. 그의 재주를 헤아려보니 현장에서 즉석으로 대응할 수 없을 것이므로, 반드시 미리 여러 수를 지어놓고 나를 곤란하게 만들려 할 것이다. 이른바 네 수는 반드시 그날 주연에서 필요할 것이다. 하여 고경명도 그 운을 사용하여 미리 여섯 수를 지어 놓고 기다렸다. 그 날이 되자, 서익이 과연 술을 지고 약속대로 왔다. 술이 반쯤 취했을 때, 서익이 말했다. "잉어를 낚을 때는 새우를 쓰고, 사슴을 잡을 때는 미끼 사슴을 쓴다 하니, 내가 마땅히 먼저 시작해야겠다." 그리하여 오언율시 사운시 한 수를 썼는데, 바로 승려가 말한 그 운이었다. 고경명이 마치 시상을 구상하는 것처럼 화운시 한 수를 지었다. 서익이 다시 그 운을 써서 한 수를 짓자, 고경명이 즉시 차운했다. 이렇게 해서 이미 지어 온 네 수를 다 마쳤다. 이어서 큰 잔으로 서로 권하며 이미 여러 순배를 돌렸지만 아직 취하지 않았다. 고경명이 말했다. "예에는 답하지 않음이 없다 하니, 나도 이것으로 보답하겠다." 또 그 운을 써서 시를 지었는데, ""라는 구절이 있었고 나머지는 잊어버렸다. 서익이 두려워하여 눈을 감고 잔을 던지며 취한 척 하고는 일어나서 돌아보겠다고 핑계를 대며 시녀로 하여금 부축하게 한 다음, 이미 옷을 털고 말을 타고는 가버렸다.며 시녀로 하여금 부축하게 한 다음, 이미 옷을 털고 말을 타고는 가버렸다.)
- E750 + (고금의 학문에 힘쓰는 선비들은 모두 부지런함으로써 이루지 않은 이가 없다. … 고금의 학문에 힘쓰는 선비들은 모두 부지런함으로써 이루지 않은 이가 없다. 우리나라의 문장이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 독서를 많이 한 사람 또한 역력히 헤아릴 수가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괴애 김수온은 문을 닫아걸고 독서하면서 밖을 내다보지도 않아서 마루를 내려와 낙엽을 보고는 비로소 가을임을 알았다 한다. 허백당 성현은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암송하면서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아 변소에 가서 돌아오기를 잊기도 하였다. 김일손은 한유의 글을 천 번 읽었고 윤결은 맹자를 천 번 읽었으며 소재 노수신은 논어와 두시를 이천 번 읽었고 백호 임제는 중용을 팔백 번 읽었으며 간이 최립은 한서를 오천 번을 읽었으며 특히 항적전을 일만 번 읽었다. 창주 차운로는 주역을 오백 번 읽었고 동악 이안눌은 두시를 수천 번 읽었으며 어우 유몽인은 장자와 유종원의 문장을 천 번 읽었고 동명 군평 정두경은 사마천의 사기를 수천 번 읽었다. 나는 성질이 노둔하여 읽는 바 공부를 다른 사람의 배로 하였다. 사기, 한서, 한유, 유종원과 같은 것을 모두 베껴서 읽기를 만여 번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백이전으로 일억일만삼천 번에 이르도록 읽었다. 마침내 나의 작은 집을 억만재라 하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지난 경술년(1670)에 시절이 가뭄을 만나 팔도에 흉년이 들었고 다음해에는 크게 기근과 역병이 돌아서 도읍과 시골에 시체가 쌓였는데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금년에 죽은 사람과 그대의 책을 읽은 숫자 중에 어느 것이 많은가?" 대개 나의 독서를 희롱한 것이다.책을 읽은 숫자 중에 어느 것이 많은가?" 대개 나의 독서를 희롱한 것이다.)
- E443 + (고려 말에 조운흘이 퇴거하여 광주의 몽촌으로 갔다. 하루는 죄를 입어 귀양온 사람을 보고 시를 지었다. "")
- E132 + (고려 문성공 안향이 일찍이 시를 지어 학궁에 쓰기를, ""라 하였다. 개연히 … 고려 문성공 안향이 일찍이 시를 지어 학궁에 쓰기를, ""라 하였다. 개연히 유교를 흥기하는 것을 그의 사명으로 여겨 개연히 사문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성균관에 노비 백 명을 바쳤다. 죽은 후 문묘에 배향되었고, 곳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지금까지도 공의 자손이 연이어 십 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고 있으니, 그 보답을 받은 셈이다. 공이 합포의 진무사로 있은 지 몇 개월 만에 조정에서 인재를 뽑게 되어 급히 불러들여 시험관을 맡게 되었다. 그 때 장마로 물이 불어나서, 공이 간신히 성주에 도착하여 동암 이진에게 증별하는 시를 지었다. ""공의 부자가 연이어 합포의 도절제사가 되었고, 구대손 안침 또한 절도사가 되었다. 공의 시를 차운하여 썼다."" 되었고, 구대손 안침 또한 절도사가 되었다. 공의 시를 차운하여 썼다."")
- E145 + (고려의 승려 신준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서하 … 고려의 승려 신준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서하 임춘도 역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학사 미수 이인로가 평하기를, 두 공의 작품은 처음에 서로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말을 토해내는 것이 처량하고 애절하여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하였다. 나는 이를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앞의 시는 사물을 읊었으나 섬약함에 빠졌고, 뒤의 시는 정감을 말했으나 구법이 호장하니, 기상이 서로 같지 않은데 이를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함은 어찌하여서인가? 임춘의 시는 본래 구양공 구양수의 ""에서 나온 것이니, 그 뜻을 훔쳤을 뿐 아니라 그 말까지 훔친 것이다. ""에서 나온 것이니, 그 뜻을 훔쳤을 뿐 아니라 그 말까지 훔친 것이다.)
- E514 + (고려의 충선왕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갈 적에 한 미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동쪽으로 돌아갈 때 길에서 연꽃 한 송이를 따서 그녀에게 보내어 작별의 뜻을 전했다. 그녀가 감사의 뜻으로 시를 지었다. "" 그 시의 말이 부드럽고 음미할 만하다. 상세한 일은 용재총화에 보인다.)
- E484 + (고산 이굉은 어렸을 적부터 재능으로 이름이 있었다. 하루는 친구를 데리고 세심대에 놀러갔는데, 그곳의 주인 이형성이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공이 벽에 시를 썼다. "" 사람들이 모두 이를 전하였다. 이형성이 이를 병통으로 여겨, 성대하게 차리고는 공을 맞이하여 앞의 시를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붓을 들어 시를 고쳤다. "" 또 용문산에 놀러 가서 한 연을 지었다. "")
- E372 + (고성(高城)에는 옛날부터 가볼 만한 명승지가 없었다. 병인년 겨울에 아버지께 … 고성(高城)에는 옛날부터 가볼 만한 명승지가 없었다. 병인년 겨울에 아버지께서 고성에 부임하시자, 다음 해 봄에 바로 관아 뒤 가시밭 가운데서 한군데 절승지(絶勝地)를 얻게 되어, 높은 곳을 평평하게 고르고 정자를 지었다. 서쪽은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이 쳐다보이는데, 천봉(千峯)이 한눈에 들어오며, 열흘 안 걸려 닿을 수 있고, 동쪽은 바다에 임하였는데, 거리가 10리도 못 되고, 남쪽은 남강을 수백 보 앞에다 굽어보며, 북쪽은 36봉이 바라보인다. 아래 제일 기승(奇勝)은 선군(先君)께서 기문을 짓고, 또 십영(十詠)을 지었으며, 양창해도 십영을 짓고 또 여기에 발문(跋文)을 지었는데, 문인들로 화답하는 분들이 많았다. 석봉(石峯) 한호(韓濩)는 거기에 액자를 크게 썼는데, 바로 해산정(海山亭)이다.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시를 보냈는데,</br>새로이 제일가는 강산을 열어 / 聞說新開第一區</br>바다와 산을 영동 한쪽 높이달았다는 말을 들었네 / 海山高揭嶺東陬</br>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두었던 모든 것이 눈앞에 나타나니 / 天慳地秘森呈露</br>시흥(詩興)이 나면 그 누가 넓다 하여 이 경치를 거두지 못하랴 / 詩興何人浩莫收</br>하였고, 감사(監司) 김여경(金餘慶)이 시를 짓기를,</br>이제 와서야 비로소 물 되기가 어려움을 믿겠네 / 今來始信難爲水</br>이 산 밖에 다시 좋은 산이 있다고 누가 말하리 / 此外誰言更有山</br>조그만 마음이 저같이 큰 것을 용납하니 / 方寸容他如許大</br>이번 행차가 말발굽 사이에 있음이 아니라네 / 玆行不在馬蹄間</br>하였다. 국상(國相) 윤두수(尹斗壽)의 시에,</br>삼일포(三日浦)에 조각배 띄우니 / 三日湖中泛小舟</br>한 갈피 좋은 곳 이루어 물과 구름이 한가롭네 / 一區形勝水雲悠</br>일찍이 자주 놀던 곳 기억을 더듬어 써오니 / 書來曾憶重遊處</br>서른여섯 봉우리마다 가을 다함 없네 / 三十六峯無盡秋</br>하였고, 남언경(南彦經) 공의 시에,</br>가을 달에 남강이 넓고 / 秋月南江闊</br>서리 단풍은 북령에 높았더라 / 霜楓北嶺高</br>꿈속에 늘 그리는 그곳 / 夢魂長繞處</br>갈대밭에 바람도 우수수하겠지 / 蘆荻吹蕭蕭</br>하였다. 황윤길(黃允吉)공의 시에</br>희한한 서른 봉우리 아흔 호수는 / 三十奇峯九十湖</br>네 신선 거닐던 날 몰래 놀던 곳 / 四仙當日秘名區</br>티끌 낀 소매 깨끗해짐을 문득 깨닫겠구려 / 尋眞斗覺塵襟淨</br>이 몸이 도리어 그림 가운데 있지 않나 의심이 나네 / 身世還疑入畵圖</br>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이 나네 / 身世還疑入畵圖 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
- E576 + (고죽 최경창이 절을 찾아 산골짜기에 들어갔다가 홀연 길을 잃고는 입으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그 길을 잃고 헤매는 괴로움과 서러운 한이 말의 바깥에 있으니 읊으면 서러워진다.)
- E699 + (교관(敎官) 성여학(成汝學)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의 생질(甥姪)이다 … 교관(敎官) 성여학(成汝學)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의 생질(甥姪)이다. 어렸을 적부터 시벽(詩癖)이 있어 시에 힘쓴 지 이미 오래되어 가는 곳마다 가구(佳句)를 지었다. 그의 시구,</br></br>풀잎 이슬에 벌레 소리 젖고 / 草露蟲聲濕</br>숲 바람에 새 꿈도 위태롭네 / 林風鳥夢危</br></br>는 사람들이 칭찬하였고,</br></br>얼굴은 그의 벗만 알 뿐이요 / 面唯其友識</br>먹는 일도 장부의 슬픔일세 / 食爲丈夫哀</br></br>한 것은 궁어(窮語)이다.</br>내가 일찍이 그의 집에 왕래하곤 하였는데, 항상 그가 떨어진 옷에 작은 두건을 쓰고 귀밑 가득 머리털이 센 채로, 홀로 한 칸 서재에 기대어 종일토록 동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으니, 진실로 일세의 궁사(窮士)였다. ‘시가 사람을 궁색하게 한다〔詩能窮人〕’는 말은 아마도 성 교수(成敎授)를 위해 나왔을 것이다.게 한다〔詩能窮人〕’는 말은 아마도 성 교수(成敎授)를 위해 나왔을 것이다.)
- E717 + (권협은 포의의 가난한 선비로 석주 권필의 아우이며 호는 초루이다. 그의 '송 … 권협은 포의의 가난한 선비로 석주 권필의 아우이며 호는 초루이다. 그의 '송도를 회고하며' 절구시 한 수는 다음과 같다. "" 이 시가 한때 널리 회자되었다. 권협이 일찍이 삼각산 승가사에 유람을 갔는데 때마침 여러 명사들이 와서 모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권협이 자리에서 시에 대해 태연하게 이야기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업신여기며 말했다. "오늘은 이름난 관리들의 모임인데 저 서생이 어찌 당돌하게 끼어드는가." 권협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의 벼슬이 어찌 나의 한 구절에 겨루겠는가." 여러 명사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구를 읊어 주기를 청하였다. 권협이 즉시 낭랑하게 ""의 구절을 읊으니 여러 명사들이 이에 크게 놀라 상석에 모시고 공경하고는 하루종일 취하도록 마셨다.명사들이 이에 크게 놀라 상석에 모시고 공경하고는 하루종일 취하도록 마셨다.)
- E714 + (근래에 여러 유생들이 박연폭포 아래에서 모여 이야기하며 함께 시를 지었다. … 근래에 여러 유생들이 박연폭포 아래에서 모여 이야기하며 함께 시를 지었다. 어떤 객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으나 지팡이를 짚고 왔으며 의관이 남루하였다. 여러 유생들이 그 사람을 업신여기며 말했다. "그대는 시를 지을 수 있는가?" "그렇다" 이에 먼저 ""의 구를 썼다. 여러 유생들이 냉소하며 말했다. "그대의 시가 어찌 이리 공력을 아끼는가?" 대개 그가 온전히 고인의 구를 쓴 것을 조롱한 것이다. 객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웃지 마시고, 다만 결구를 보라." 즉시 끝을 이어 말했다. "" 온 자리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박연의 형세를 이 시에서 다하였으니 우리들은 더 지을 것이 없다." 마침내 붓을 놓았다. 혹은 그 객이 바로 사인 정민수라 한다. 송도 박연 폭포의 기이하고 장대함이 나라 안에 이름났다. 내가 일찍이 친히 박연을 보고서야 이백의 "" 구가 잘 형용된 것임을 말했다. 정순붕의 시에, ""라 하였고, 오산 차천로의 시에, ""라 하였다. 비록 은하(銀河) 두 글자를 쓰지 않았으나 청홍(晴虹)과 백련(白練) 또한 고어이다. 대개 위의 시는 의미가 좋으나 구절이 졸렬하고, 아래의 시는 구가 호장하나 의미가 적다.는 의미가 좋으나 구절이 졸렬하고, 아래의 시는 구가 호장하나 의미가 적다.)
- E238 + (금남 최부의 문사는 간고하나 시는 그의 장처가 아니다. 그럼에도 일찍이 송감을 읽고 절구시를 지었다. "" 이 시를 읽는 사람은 그 강개하고 분려한 기상에 감탄하게 된다.)
- E143 + (금대사는 두류산(지리산)을 정면으로 대하여 천왕봉을 위시한 여러 봉우리와 마 … 금대사는 두류산(지리산)을 정면으로 대하여 천왕봉을 위시한 여러 봉우리와 마주하고 있어 마치 병풍을 늘어놓은 것 같이 극히 맑고 아름답다. 갑오년(1474) 여름에 극기 유호인와 함께 유람하였는데, 유호인이 장율을 지었다. 그 중 ""라는 구절이 있었다. 갑진년(1484) 겨울 내가 함양 군수가 되었을 때 국이 박광우가 찾아와서 금대사에 놀러가자고 청했다. 내가 유호인을 데리고 다시 유람하면서 등불을 밝히고 차를 마시며 밤새도록 한담하였는데, 수창한 것이 매우 많았다. 유호인의 경구들은 많이 당시 사람들에게 전송되었는데, '길가의 석불을 읊으며' ""라 하였고, '쇄천을 노닐며'에 ""라 하였다. 그 전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쇄천을 노닐며'에 ""라 하였다. 그 전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 E237 + (기수 최익령은 강릉 경포대 근처에 살고 있었다. 기재 신광한이 삼척의 현감으 … 기수 최익령은 강릉 경포대 근처에 살고 있었다. 기재 신광한이 삼척의 현감으로 있을 때, 경포에서 최익령의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고자 하였다. 마침 주인이 외출 중이어서 일단 바깥채에 머물렀다. 밤이 깊어갈 무렵, 한 줄기 불빛이 사람을 따라오는 것이 보이고 마을 개들이 모두 짖었다. 최씨 집 하인이 알리기를, "주인어른이 오십니다"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익령이 급히 들어와 안부를 묻자, 신광한이 시를 지었다. "" 그 후 관동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여러 번 이 운에 차운하여 큰 시첩을 만들었는데, 보는 이들이 모두 신광한의 시를 절창이라고 하였다. 몇 년이 지나 최익령이 선공감의 역으로 서울에 머물게 되어 거의 십 년을 지냈다. 하루는 시첩을 평소 친하던 서생에게 보여주며 차운을 청하자, 그가 제하기를, ""라 하였다. 최익령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 시야말로 참으로 나에게 금침이 되는 말이로구나."라 하였다.말하기를, "이 시야말로 참으로 나에게 금침이 되는 말이로구나."라 하였다.)
- E195 + (김시습이 유양양(柳襄陽)에게 보낸 편지가 수백 마디나 되는데, 그 대략은 다 … 김시습이 유양양(柳襄陽)에게 보낸 편지가 수백 마디나 되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나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능히 글을 알아서 일가 할아버지 최치운(崔致雲)이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세 살에 글을 지을 수 있어,</br>복숭아는 붉고 버들은 푸르러 봄이 저물었도다 / 桃紅柳綠三春暮</br>구슬은 푸른 바늘로 꿰었으니 솔잎의 이슬이로다 / 珠貫靑針松葉露</br>등의 구절을 지었다. 다섯 살에 《중용(中庸)》ㆍ《대학(大學)》을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읽었으며, 사예(司藝) 조수(趙須)가 자(字)를 열(說)로 지어 주었으며, 정승 허조(許稠)가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니 노(老) 자로 시를 지으라.’ 하기에, 나는 곧</br>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이 늙지 않았도다 / 老木開花心不老</br>하였더니, 허정승이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기를, “이 아이는 이른바 신동(神童)이다.” 하였다. 세종이 이 말을 듣고 대언사(代言司 승정원)에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명하여 시험하게 하였다.</br>지신사가 무릎 위에 안고 벽화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며, ‘네가 시를 지을 수 있느냐.’ 하기에, 나는 곧 대답하기를,</br>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는고 / 小亭舟宅何人在</br>하였다. 이렇게 하여 매우 많은 글과 시를 지었다.있는고 / 小亭舟宅何人在 하였다. 이렇게 하여 매우 많은 글과 시를 지었다.)
- E552 + (김정은 과거에 급제하여 시명이 있었고, 절조가 특별하여 선비들이 우러러 사모 … 김정은 과거에 급제하여 시명이 있었고, 절조가 특별하여 선비들이 우러러 사모하였다. 남곤은 문장과 절행이 당시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았으나, 사류들이 그를 천하게 여겨 모두 소인이라고 불렀다. 남곤이 직제학이 되었을 때, 김정은 여전히 유생이었다. 친구 집에서 만났는데, 김정이 마침 크게 취해서 자리에 토하고 누워 있었다. 남곤이 오는 것을 보고도 예의를 지키지 않자, 주인이 찡그리며 일어나라고 했다. 그제야 머리를 풀어헤치고 앉아서 눈을 부릅뜨고 남곤을 보며 말했다. "무슨 놈의 어린아이가 와서 내 꿈을 깨우는가?" 남곤이 극진히 공경하며 대하며 말했다. "선생의 명성을 들으니 늘 책 속의 인물 같았습니다. 한 번 뵙고자 했으나 인연이 없었는데, 교묘하게 오늘 뵐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제가 새로 망천도 병풍을 얻었으니, 다행히 좋은 시를 얻어 병풍 머리를 장식하게 해주십시오." 이어서 종을 시켜 집에서 가져오게 했다. 김정은 취중에 먹물을 술처럼 휘날렸으니, 별로 사양하지 않고 또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서 바로 시를 지었다. "" 대개 어떤 사람이 술병을 지고 다리를 건너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남곤이 거듭 읊으며 좋다고 칭찬하고, 부끄러워하며 사례하고 떠났다.것이다. 남곤이 거듭 읊으며 좋다고 칭찬하고, 부끄러워하며 사례하고 떠났다.)
- E310 + (김하서(金河西)가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 한 구를 지었다. 영산홍이 사양 속에 비치고 / 映山紅映斜陽裏 오래도록 이 대구를 찾지 못하다가, 하루는 좌랑 이후백(李後白)이 찾아 왔기에 말하였더니, 그가 지황(地黃)이 뜰에 난 것을 보고 이렇게 지었다. 생지황이 가는 빗속에 났네 / 生地黃生細雨中 하서는 그럴싸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