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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693 + (처사인 천유(天遊) 정지승(鄭之升)은 시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숙부인 고 … 처사인 천유(天遊) 정지승(鄭之升)은 시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숙부인 고옥(古玉) 정작(鄭碏)이 일찍이 그의 재주가 출중하다고 칭찬하며 말하기를,</br></br>새가 우니 봄은 뜻이 있고 / 鳥啼春有意</br>꽃이 지니 비가 무정하네 / 花落雨無情</br></br>라고 한 것은 실로 선어(仙語)가 아니냐고 하였다.</br>나의 소견으로는 상구(上句)는 아동들이 암송하는 연구(聯句)에 가까운데, 고옥이 이를 들어 말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일찍이 들으니, 임백호(林白湖)가 천유의 한 절구를 낭송하여 이르기를,</br></br>풀에는 왕손의 한 스며들고 / 草入王孫恨</br>꽃은 두견새 시름 더 하네 / 花添杜宇愁</br>정주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 汀洲人不見</br>바람에 목란주만 흔들리네 / 風動木蘭舟</br></br>라고 한 것은 근세의 절창이며 그 자신도 이에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은 과연 그렇다.</br>천유는 본래 서울 사람으로, 젊을 때 세상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 용담(龍潭 전북 진안군 소재)의 첩첩 산 속에 터를 잡아 초당(草堂)을 짓고 총계(叢桂)라고 편액하고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를 잡아 초당(草堂)을 짓고 총계(叢桂)라고 편액하고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 E518 + (첨지 조경의 첩 이씨는 호가 옥봉이다. '그 사람을 여강으로 보내며 짓다'에, ""라 하였다. '사람이 와준 것에 감사하며'시에, ""라 하였다. 음수는 바로 거처하던 곳이다. 그 '노산묘'시에, ""라 하였고 또 '규중의 정'시에, ""라 하였다. 시가 아름답다.)
- E573 + (최인범은 자가 덕규로 내가 어릴 때의 친구였다. 문장을 잘해서 서문과 기문은 … 최인범은 자가 덕규로 내가 어릴 때의 친구였다. 문장을 잘해서 서문과 기문은 고문에 가까웠다. 정시(庭試)에서 지은 제천주즙부가 세상에 알려졌는데, 이 또한 보통의 과거문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전적으로 시에 공을 들여 과거를 위한 글에는 세세히 마음쓰지 않았다. 등과한 지 몇 해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후에 유고가 흩어져 없어져서, 지금은 조금도 없고 다만 그가 일찍이 스스로 자부하던 것을 기억할 뿐이다. "" 또 이르기를, ""라 하였다. 나는 그때 나이가 아직 어려서 그 공교하고 졸렬한 바를 알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최인범의 사운시 네 수를 하곡 허봉에게 보여주니, 허봉이 말하기를, "네 수 중 네 수가 모두 동문선에 들어갈 만하다" 했다. 허봉은 스스로 자부하는 바가 있는 사람으로, 그의 논시는 반드시 구차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가 시로 일가를 이루었음을 점칠 수 있다.반드시 구차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가 시로 일가를 이루었음을 점칠 수 있다.)
- E228 + (추강 남효온이 육신전을 지었는데 그 이개전에, 수레에 실려 떠날 때 시를 지 … 추강 남효온이 육신전을 지었는데 그 이개전에, 수레에 실려 떠날 때 시를 지었다. "" 박팽년전에, 세조가 영의정으로 부중에서 연회를 베풀 적에 박팽년이 시를 지었다. ""성삼문전에는 어떤 사람이 그 아래에 주를 달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수레를 맞아 떠나며'에, ""라 하였다. 내가 금헌휘언을 상고하니 손궤는 송잠계의 고제이다. 죄를 받아 형장에서 입으로 시 한 수를 읊었다. "" 이로 미루어보면 성삼문의 작품이 아님이 명백하니, 실로 주석을 단 사람의 잘못이다.루어보면 성삼문의 작품이 아님이 명백하니, 실로 주석을 단 사람의 잘못이다.)
- E230 + (추강 남효온이 한선선생 김굉필의 일을 서술하여 말하였다. 대유 김굉필은 점필 … 추강 남효온이 한선선생 김굉필의 일을 서술하여 말하였다. 대유 김굉필은 점필재 김종직에게서 학문을 받았는데, 삼가 행하는 데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평상시 반드시 관대를 착용하고, 인정(人定) 후에 잠자리에 들며, 닭이 울면 일어났으며 손에서 『소학』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국가 일을 물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소학 동자가 어찌 대의를 알겠는가' 하였다. 서른 살 이후에야 비로소 다른 책들을 삼가 읽기 시작하였다. 나이가 더해갈수록 도가 더욱 높아졌다. 세상을 돌이킬 수 없음과 도를 행할 수 없음을 깊이 알아 광채를 감추고 자취를 숨겼으나, 사람들이 또한 그것도 알았다.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역시 일을 말해 올리지 않자 김굉필이 시를 올렸다.""선생이 운을 맞추어 화답하였다. "" 이로부터 비로소 김종직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맞추어 화답하였다. "" 이로부터 비로소 김종직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 E059 +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양촌(陽村)에 이어 문형(文衡)을 맡았으나 문 …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양촌(陽村)에 이어 문형(文衡)을 맡았으나 문장은 나약하였다. 문사 김구경(金久冏)은 시를 잘 짓기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항상 춘정이 지은 시를 보고 입을 막고 크게 웃었다. 하루는 춘정이 휴가를 얻어 시골에 있는 별장에서 놀면서 우연히 시 한 구절을 지었는데,</br>허백한 것이 하늘을 이으니 강가엔 새벽이 되었고 / 虛白連天江渚曉</br>암황한 것이 이 땅에 서리니 들에는 버들가지 늘어진 봄이 왔구나 / 暗黃浮地柳郊春</br>하고, 아름다운 연구(聯句)를 얻었다고 자부하며 장차 상경하여 임금께 상주(上奏)하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구경에게 말했더니, 구경은 말하기를, “기가 아주 졸렬한데 만약 이 시를 상주한다면 이는 임금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옛날에 지은 시에,</br>역정에서 술잔을 잡으니 산이 문 앞에 당(當)해 있고 / 驛亭把酒山當戶</br>강군에서 시를 읊조리니 비는 배에 가득 차는도다 / 江郡哦詩雨滿船</br>라고 한 것이 있으니, 이런 것이 상주함직한 시이다.”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춘정에게 알리니, 춘정은 말하기를, “당(當) 자가 온당치 못하니 임(臨) 자로 고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그 사람이 또 이를 구경에게 얘기하니, 구경은, “사람들이 춘정은 시를 알지 못한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고시(古詩)에,</br>남산이 문에 당하니 더욱 분명하도다 / 南山當戶轉分明</br>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그 사람이 또 춘정에게 말하니, 춘정은, “고시에,</br>청산이 황하에 임(臨)하였도다 / 靑山臨黃河</br>하지 않았는가. 구경 그 자신이 시를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내가 지은 것을 비웃는다.” 하였다. 그 자신이 시를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내가 지은 것을 비웃는다.” 하였다.)
- E058 + (충선왕(忠宣王)은 오랫동안 원 나라에 머물고 있어서 정든 사람이 있었더니, … 충선왕(忠宣王)은 오랫동안 원 나라에 머물고 있어서 정든 사람이 있었더니, 귀국하게 되자 정인(情人)이 쫓아오므로 임금이 연꽃 한 송이를 꺾어주고 이별의 정표로 하였다. 밤낮으로 임금이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여 익재(益齋)를 시켜 다시 가서 보게 하였다. 이익재가 가보니 여자는 다락 속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지를 않아 말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억지로 붓을 들어 절구 한 수를 쓰는데,</br>보내주신 연꽃 한 송이 / 贈送蓮花片</br>처음엔 분명하게도 붉더니 / 初來的的紅</br>가지 떠난 지 이제 며칠 / 辭枝今幾日</br>사람과 함께 시들었네 / 憔悴與人同</br>하였다. 익재가 돌아와서, “여자는 술집으로 들어가 젊은 사람들과 술을 마신다는데 찾아도 없습니다.”고 아뢰니, 임금이 크게 뉘우치며 땅에 침을 뱉었다. 다음해의 경수절(慶壽節 왕의 생일)에 이익재가 술잔을 올리고는 뜰아래로 물러나와 엎드리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연유를 물으므로 이익재는 그 시를 올리고 그때 일을 말했다. 임금은 눈물을 흘리며, “만약 그날 이 시를 보았더라면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돌아갔을 것인데, 경이 나를 사랑하여 일부러 다른 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사랑하여 일부러 다른 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 E208 + (충암(冲庵) 김정(金淨)이 시와 문장을 잘 짓는다고 일세에 이름이 났는데, … 충암(冲庵) 김정(金淨)이 시와 문장을 잘 짓는다고 일세에 이름이 났는데, 저술이 유실되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다. 그 늦게 바라보는 시[晩望詩]에 말하기를,</br>가을 그늘 일어 어두워지는데 / 秋陰起將暝</br>멀리 바라보며 싸리 사립에 기대었네 / 迢遞倚荊扉</br>빈 숲에 귀신 도깨비 슬프고 / 虛莽虁魅悄</br>어두컴컴한 연기에 섬들이 희미하다 / 冥煙島嶼微</br>눈은 외로운 새를 뚫어지듯이 바라보고 / 眼穿孤鳥盡</br>생각은 조각 구름을 쫓아 의지한다 / 思逐片雲依</br>한 거룻배가 어찌 멀까마는 / 一葦豈云遠</br>사람이 멀어 스스로 돌아가지 못한다 / 人遐自未歸</br>하였고, 강남 시(江南詩)에 이르기를,</br>강남의 쇠잔한 꿈 낮에 편안하여 / 江南殘夢晝厭厭</br>근심은 꽃다운 나날을 쫓아 날마다 더해진다 / 愁遂年芳日日添</br>암수 제비 오는 때에 봄은 저물려 하고 / 雙燕來時春欲暮</br>살구꽃 가랑비 겹발에 내린다 / 杏花微雨下重簾</br>하였고, 감흥시(感興詩)에는 말하기를,</br>떨어지는 달은 거친 들에 임하고 / 落月臨荒野</br>찬 까마귀는 늦은 마을에 내려 앉네 / 寒鴉下晩村</br>빈 숲에 연깃불이 썰렁하니 / 空林煙火冷</br>가난한 집에 사립문을 가리웠다 / 白屋掩荊門</br>하였다.썰렁하니 / 空林煙火冷 가난한 집에 사립문을 가리웠다 / 白屋掩荊門 하였다.)
- E739 + (태관 홍만종은 일찍이 병으로 독서를 폐하여 전문적으로 시에 공을 들이지 못하 … 태관 홍만종은 일찍이 병으로 독서를 폐하여 전문적으로 시에 공을 들이지 못하였으나 동명 군평 정두경에게 배웠다. 그러므로 그 시는 향기가 배고 색채로 물들었으며 격조가 청준하였다. 그의 채련곡 시에, ""라 하였다. 정두경이 이를 보고 말했다. "이는 성당의 말이니, 내가 마땅히 의발을 그대에게 전하겠다." 나는 늘 그의 수종사 시를 좋아하였다. ""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매우 뛰어나서 당인의 경취를 얻었다. 홍만종이 일찍이 나에게 말했다. "만약 내가 어르신처럼 독서를 하였다면 어찌 지금처럼 변변치 않겠습니까." 대개 자신이 많이 읽지 못한 것을 한탄한 것인데, 비록 많이 읽은 사람이 시를 짓는다 하여도 어찌 능히 이런 말을 지어내겠는가.록 많이 읽은 사람이 시를 짓는다 하여도 어찌 능히 이런 말을 지어내겠는가.)
- E382 +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벼슬을 버리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실 때, 송강이 뒤 …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벼슬을 버리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실 때, 송강이 뒤따라 강가에서 선생을 보냈다. 그 전별시에.</br>안위는 아랑곳없이 나라를 떠나가는 날 / 安危去國日</br>풍우를 무릅쓰고 성을 나가는 사람이 되었도다 / 風雨出城人</br>떠나는 마음은 봄풀같이 무럭무럭 자라 / 離思如春草</br>강남 가는 곳마다 새로웠으리 / 江南處處新</br>하고, 또 한 수 지어 보내기를,</br>뒤따라 광릉까지 와 보니 / 追至廣陵上</br>신선 배는 이미 어디 갔는지 아득하구나 / 仙舟已杳冥</br>봄바람에 한없는 생각을 안고 / 春風無限思</br>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름이여 / 斜日獨登亭</br>하였다.각을 안고 / 春風無限思 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름이여 / 斜日獨登亭 하였다.)
- E564 + (퇴계 이황이 일찍이 남명 조식과 함께 연회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황이 말했 … 퇴계 이황이 일찍이 남명 조식과 함께 연회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황이 말했다. "주색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술은 오히려 참기 쉽지만 색욕은 참기 어렵다. 소강절의 시에 '색은 능히 사람을 탐닉하게 한다(色能使人嗜)'라 하였으니, 역시 그 참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자네는 색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식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색욕에 있어서는 패전한 장군이니, 묻지 말아주시오." 이황이 말했다. "나는 젊었을 때에는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었지만, 중년 이후로는 자못 참고 있으니, 자제력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송익필도 자리에 있었는데, 지위는 낮지만 글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송익필이 말했다. "소생이 일찍이 읊은 것이 있사온데, 대인의 한 번 들어주심을 바랍니다." 이에 외워서 들려주었다. 시는 이러하였다."" 용사한 뜻이 깊고 절실하였다. 이황이 읊으며 칭찬하였고 조식은 웃으며 말했다. "이 시는 패군장의 경계로 삼기에 적합하다."하였고 조식은 웃으며 말했다. "이 시는 패군장의 경계로 삼기에 적합하다.")
- E061 + (파주(坡州) 서교(西郊)는 황폐하여 사람이 살지 못했는데, 정당(政堂) 안목 … 파주(坡州) 서교(西郊)는 황폐하여 사람이 살지 못했는데, 정당(政堂) 안목(安牧)이 처음으로 넓게 밭을 개간하고 큰 집을 짓고 살았다. 정당이 시를 잘하여 한 구(句)를 짓기를,</br>목동의 피리 소리 긴 포서 밖에 들리고 / 牧笛一聲長浦外</br>고깃배의 두어 점 등불이 낙암 앞에 보이도다 / 漁燈數點洛岩前</br>하였다. 그 손자 원에 이르러 지극하게 창성하였는데, 안팎으로 차지한 밭이 무려 수만 경(頃)이나 되고 노비도 백여 호나 되었다. 늙은 고목 천여 그루가 10리에 그늘을 이루고 거위와 황새가 그 사이에서 울고 떠들었다. 공은 매를 팔 위에 올려놓고 누런 개를 데리고 매일 왕래함을 낙으로 삼았다. 지금도 남은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는데 모두 그 자손이다.은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는데 모두 그 자손이다.)
- E523 + (판서 윤현이 충청도 방백이 되었을 때에 청주에 마음을 둔 사람이 있었다. 이후에 시 한수를 짓기를, ""라 하였다. 오직 결구만이 좋은 듯하다.)
- E640 + (하서가 죽은 후 영남(嶺南)의 하양(河陽)에 오세억(吳世億)이란 사람이 있었 … 하서가 죽은 후 영남(嶺南)의 하양(河陽)에 오세억(吳世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소생하여 말하기를,</br>“꿈에 천부(天府)에 갔었는데 붉은 옷 입은 저승 사자가 소원(小院)으로 데리고 가니 거기에 윤건(綸巾)을 쓴 학사가 있어 김하서라고 하면서 ‘너는 금년에 하늘에 오름이 합당치 않으니 나가 힘써 행실을 닦으라.’ 하며 시로써 보냈는데 그 시는</br>세억은 그 이름, 대년(大年)은 그 자(字)인데 / 世億其名字大年</br>천문(天門) 열고 들어와 자미 신선 뵈었더라 / 排門來謁紫微仙</br>일흔 일곱 지난 뒤에 서로 다시 볼지니 / 七旬七後重相見</br>인간 세계 돌아가 함부로 전치 말라 / 歸去人間莫浪傳”</br>고 하였다.</br>세억은 효자였는데, 그 후 과연 77세에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 하였다. 세억은 효자였는데, 그 후 과연 77세에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
- E568 + (학관 박지화는 호가 수암으로 시와 문이 모두 뛰어났다. 일찍이 부마 광천위의 만사를 지었는데 시인 정지승이 칭찬을 그치지 않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문벌이 비록 비천하지만 시인으로써의 지위는 최고이다." 시는 다음과 같다. "")
- E685 + (학사 이동악(李東岳)의 시격은 혼후(渾厚)하고 농려(濃麗)하였다. 실로 세상 … 학사 이동악(李東岳)의 시격은 혼후(渾厚)하고 농려(濃麗)하였다. 실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시재로 가작(佳作)은 이루 다 기억할 수 없다. 그가 추성(秋城 전라남도 담양의 옛 명칭)을 다스릴 때 나와 함께 면앙정(俛仰亭)에 올라가 시를 지었다. 내가 감히 당돌하게도 먼저 지었는데 함련에 이르기를,</br></br>저녁놀 잠길 제 평야가 넓고 / 殘照欲沈平楚闊</br>태허는 막힘없어 뭇 산이 높네 / 太虛無閡衆峯高</br></br>하고서, 스스로 뛰어난 시어를 얻었다고 여겼다. 동악이 차운하여 이르기를,</br></br>서쪽을 조망하매 천원은 끝없고 / 西望川原何處盡</br>남녘의 형승은 이 정자가 으뜸 / 南來形勝此亭高</br></br>하였는데, 하구(下句)는 은연히 두보의 ‘해우에선 이 정자가 예스럽네〔海右此亭古〕’와 어세(語勢)가 대략 흡사하니, 가히 ‘목과를 던져 주고 경거(瓊琚)로 돌려받았다’고 이를 만하다.</br>천사(天使) 고천준(顧天俊)이 왔을 때, 그는 빈상(擯相 원접사(遠接使)) 월사(月沙) 이공의 막하로서 용만(龍灣)에 도착하여 통군정(統軍亭)에 올라 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유월 용만에 장맛비 개어 / 六月龍灣積雨晴</br>새벽에 홀로 통군정에 올랐네 / 淸晨獨上統軍亭</br>망망한 대야에 천기가 떠 있고 / 茫茫大野浮天氣</br>굽이굽이 장강은 지형을 가르네 / 曲曲長江裂地形</br>세상 백년에 사람은 흡사 개미요 / 宇宙百年人似蟻</br>산하 만리에 국토는 부평초로다 / 山河萬里國如萍</br>문득 백학이 서쪽으로 나는 걸 보니 / 忽看白鶴西飛去</br>요양 땅 옛 정씨가 아닐는지 / 疑是遼陽舊姓丁</br></br>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대가(大家)의 솜씨가 아니겠는가./ 疑是遼陽舊姓丁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대가(大家)의 솜씨가 아니겠는가.)
- M067 + (한간이 그린 말이 참말이고,<br>소식이 지은 시는 그림을 보는 것 같네.<br>세상에는 백락도 없고 또 한간도 없으니,<br>이 시와 이 그림을 누가 볼 수 있겠는가.<br>)
- E241 + (허국과 위시량이 왔을 때,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원접사로 하여금 종계 등의 … 허국과 위시량이 왔을 때,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원접사로 하여금 종계 등의 변무에 대해 차근차근 알리게 하되, 목은집 중에서 환조대왕 및 이인복 묘비를 보여주고, 또한 말하기를 '이것을 보면 국조 이성계와 이인임이 하나의 이씨가 아님을 스스로 변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라"고 하였다. 대개 이인복이 이인임의 형이기 때문이었다. 허국이 읽어보고 말했다. "문장이 매우 좋다. 이 사람의 시편을 보고 싶다" 홍순언이 대답하였다. "시집은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벽루에 제영하여 지은 시가 있습니다." 허국이 답했다. "그대가 시험삼아 써보라" 순언이 곧 써내었다. "" 이 시를 올리니, 허위가 오래도록 읊어보다가 말했다. "그대 나라에 어찌 이와 같은 시가 있는가?" 그 말은 우리나라를 가볍게 여기는 듯하나, 마음으로는 목은 이색의 시에 탄복한 것이다.리나라를 가볍게 여기는 듯하나, 마음으로는 목은 이색의 시에 탄복한 것이다.)
- E409 + (허초당(許草堂 허엽(許曄))의 딸이자 김 정자 성립(金正字誠立)의 처로서 스 … 허초당(許草堂 허엽(許曄))의 딸이자 김 정자 성립(金正字誠立)의 처로서 스스로 경번당(景樊堂)이라고 호를 지은 여류(女流)의 시집이 세상에 간행되었는데 어느 시편을 보아도 놀랄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다. 그 중에서도 전해 오는 광한전(廣寒殿) 상량문(上樑文)은 무척 아름답고 청건(淸健)하여 사걸(四傑 초당(初唐)의 왕발(王勃)ㆍ양형(楊炯)ㆍ노조린(盧照隣)ㆍ낙빈왕(駱賓王)을 말함)의 작품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런데 다만 시집에 실려 있는 것 가운데 가령 유선시(游仙詩)같은 것은 태반이 옛 사람의 시편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일찍이 그 근체시(近體詩) 2구를 보건대,</br>금방 얼굴 화장하고 또 거울 쳐다보고 / 新粧滿面猶看鏡</br>못다 꾼 꿈 마음 걸려 누각에서 서성이네 / 殘夢關心懶下樓</br></br>라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옛 사람이 지은 시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녀의 남동생 허균(許筠)이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편을 표절(剽竊)하여 슬쩍 끼워넣은 것이다.’고 하는데, 이 말이 그럴 듯하기도 하다(剽竊)하여 슬쩍 끼워넣은 것이다.’고 하는데, 이 말이 그럴 듯하기도 하다)
- E328 + (현감 이희안(李希顔)과 남명 조식은 다 유일(遺逸)로 등용되었는데, 조식은 … 현감 이희안(李希顔)과 남명 조식은 다 유일(遺逸)로 등용되었는데, 조식은 누차 불러도 응하지 않았고, 이희안은 전후 세 번이나 임명되었다. 조식은 시를 주었는데, 대개 조롱한 말이었다.</br>산해정 속에서 꿈이 몇 번이던고 / 山海亭中夢幾回</br>황강에 늙은 사람은 눈이 뺨에 가득하네 / 黃江老漢雪盈腮</br>반평생 세 번이나 조회하러 갔으나 / 半生三度朝天去</br>군왕의 얼굴도 못 보고 왔네 / 不見君王面目來</br>이상의 시에 산해(山海)는 조식의 정자 이름이요, 황강(黃江)은 대개 이희안을 가리킨 것이리라.海)는 조식의 정자 이름이요, 황강(黃江)은 대개 이희안을 가리킨 것이리라.)
- E243 + (호음 정사룡 공이 일찍이 관동에 사신으로 가서 곳곳에서 시를 지어서 '관동일 … 호음 정사룡 공이 일찍이 관동에 사신으로 가서 곳곳에서 시를 지어서 '관동일록'이 있다. 후에 내가 공을 모시고 일록을 보았는데 '광릉에서 일찍 나오다' 시에 ""구가 있었다. 내가 말했다. "밤중에 우는 닭을 황계라고 합니다" 공이 말했다. "거친 촌닭을 말한 것이다" 내가 말했다. "음양서에 이르기를 '밤중에 우는 닭을 황계라고 하는데, 울면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조척이 한밤중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유곤을 발로 차서 깨우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쁜 소리가 아니다. 대개 밤중에 우는 닭은 본래 나쁜 소리이지만 나쁜 소리가 아니라 하는 것은 천하가 이미 어지러워졌으므로 우리 두 사람이 공업을 세울 수 있다는 뜻이다'라 하였습니다." 공이 말했다. "그렇다" 하고, 즉시 글 쓰는 사람에게 '荒' 자를 '村' 자로 고치게 하였다. 근래에 공의 두 아들이 공의 문집을 간행함에 여전히 '荒' 자로 되어 있었는데, 아마 고치지 않은 본을 근거로 하여 인쇄한 것이 아닐까 한다.어 있었는데, 아마 고치지 않은 본을 근거로 하여 인쇄한 것이 아닐까 한다.)
- E373 +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그 전에 〈남강(南江)〉 〈입석(立石)〉 〈귀 …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그 전에 〈남강(南江)〉 〈입석(立石)〉 〈귀암(龜巖)〉세 시를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산해정에서 본 것을 읊은 시인 까닭에, 선군께서 원주 목사(原州牧使) 박공(朴公)에게 가 얻어다가 정자에 써 달았다. 〈남강〉의 시에,</br>맑은 놀이 뒤 개울 끝까지 가고 / 淸遊窮後浦</br>아름다운 구경 다시 남강에서 하누나 / 佳賞復南江</br>통발을 벗어난 고기 뛰는 놈 하나 / 跋扈魚跳一</br>사람 스친 기러기 나는 건 한 쌍 / 衝人雁飛雙</br>구름 열리니 하늘이 산을 놓았고 / 雲開天縱岳</br>봉우리 이지러졌는데 햇살이 창을 쬐이네 / 峯缺日烘窓</br>늦은 잔 거나히 취하니 / 晩酌成堪醉</br>나그네의 수심 어느덧 사라져 가누나 / 羇愁又受降</br>하였고, 〈입석(立石)〉의 시에는,</br>아름다운 아가씨를 깎아 멧부리에 옮겨 두었나 / 夸娥剖劂移山岳</br>눈이 치솟고 구름이 쌓여서 바다에 던졌는가 / 雪矗雲堆擲海中</br>호랑이는 움키고 용은 잡아당기고 사람은 마주 섰으니 / 虎攫龍拏人偶立</br>총석정(叢石亭)만이 희한한 꾸밈 독점하지는 못하리라 / 未應叢石擅奇功</br>하였으며, 〈귀암(龜巖)〉의 시에는,</br>먼 곳에 돌아다니는데 알아주는 이 없고 / 驅馳天畔少知音</br>다락에 오르니 고향 생각 간절하구나 / 感謝登樓動越吟</br>머리를 돌려 구봉에 푸른 구름이 합함을 보고 / 回首龜峯碧雲合</br>햇가에 일 없이 홀로 마음만 걸리네 / 日邊無事獨關心</br>하였다.回首龜峯碧雲合 햇가에 일 없이 홀로 마음만 걸리네 / 日邊無事獨關心 하였다.)
- E628 + (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 … 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br>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 때 / 昔年窮寇此殲亡</br>혈전 벌인 신검(神劍)에는 붉은 빛깔 둘렸다네 / 鏖戰神鋒繞紫芒</br>한의 깃대 꽂힌 흔적 돌 틈에 남아 있고 / 漢幟豎痕餘石縫</br>얼룩진 옷 적신 피는 노을 빛을 물들이네 / 斑衣漬血染霞光</br>소슬바람 살기 띠어 수풀 뫼는 엄숙하고 / 商聲帶殺林巒肅</br>도깨비불 음기 타니 성루는 묵어졌네 / 鬼燐憑陰堞壘荒</br>동방 사람 어육(魚肉) 면킨 우 임금의 덕일진댄 / 東土免魚由禹力</br>소신이 해를 그려 어찌 감히 칭찬하리 / 小臣摸日敢揄揚</br>기걸(奇杰)하고 혼중(渾重)하니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절강(浙江)의 오명제(吳明濟)가 이 시를 보고 비평하기를,</br>“그대의 재주는 용을 잡을 만한데 도리어 개를 잡고 있으니 애석하다.”</br>고 했는데 대개 당시(唐詩)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
- E400 + (홍 상국 섬(洪相國暹)의 자(字)는 퇴지(退之)요 호는 인재(忍齋)로서 의정 … 홍 상국 섬(洪相國暹)의 자(字)는 퇴지(退之)요 호는 인재(忍齋)로서 의정(議政) 언필(彦弼)의 아들이다. 젊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모함에 떨어져 정형(庭刑)을 받고 흥양(興陽)으로 유배되었는데, 안로가 망하자 마침내 크게 현달(顯達)하였다. 그가 형을 받을 때 어떤 사람이 소 찬성 세양(蘇贊成世讓)에게 말하기를 “퇴지가 여기에서 끝나게 되다니 애석하다.”고 하였는데, 찬성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필시 앞길이 유망하게 될 것인데 어찌 갑자기 죽겠는가.” 하자, 그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물으니, 찬성이 말하기를 “전일 염여퇴(灔澦堆 중국 양자강 구당협(瞿唐峽) 상류의 큰 암석이 있는 곳)라는 제목의 과제시(課製詩) 결구(結句)에서 그가 ‘원숭이 끊임없이 울어대면서 급한 여울 올라가는 나를 전송하누나[淸猿啼不盡送我上危灘].’라고 하였는데, 이런 시구를 지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홍섬이 마침내 의정부에 정승으로 들어가 20년 동안이나 지내다가 나이 82세에 죽었으니, 시를 통해서도 이처럼 사람의 궁달(窮達)을 점칠 수 있는 것인가.죽었으니, 시를 통해서도 이처럼 사람의 궁달(窮達)을 점칠 수 있는 것인가.)
- E587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사신의 작품들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감히 가리지 못하고 받아서 간행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 사신 중에 글을 잘한다 일컫는 자는 필경 공용경인데 주지번에게 그를 물으니 일찍이 성명을 듣지 못했다 한다. 기순과 당고는 시어가 아름답고 굳세지만 또한 시가에 대하여 능한 사람은 아니다. 장녕은 다소 청려한 듯하나 또한 취약하여 골격이 없어서 끝내 소가에 귀결된다. 주지번의 시는 조잡하여 형태가 없으니 오히려 사신 웅화의 위약함만도 못하다. 그 밖의 사람들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 문인들이 매번 수창할 적에 대부분 미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대소정편의 다름이 있다. 원접사 서거정이 기순에 대해 감히 선창하기를 마치 도전하는 듯하게 하였지만 결국 ""구에 곤란을 겪었다. 율곡 이이가 조롱하여 말하기를 "사가 서거정은 씨름하는 사람과 같으니 먼저 다리를 걸고 후에 땅에 넘어뜨린다." 아랫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는 마땅히 받들어 접대하고 수창하여야 할 따름인데 어찌 감히 선창하겠는가? 이는 참으로 식자의 말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 그 시절 문인들 중 다소 시에 능한 자들을 모아서 수답하게 하였는데 그 택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사신의 웃음을 산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정사룡은 비록 시짓는 장수라 칭하지만 그 시가 이루어진 시에 견강부회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 오직 이행만이 혼연히 글을 완성하였으나 격조가 매우 비루하여 과체시의 류에 불과하였다. 지을 때마다 잠시 집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응수하였는데 그 대구가 잘 어울려 흠이 없었으니 평소에 익숙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소세양과 이희보는 비록 당시의 종사에게는 굴복하였으나 지금 세상에 동문을 읽고 사운시를 익히는 유근과 같은 자와는 함께 논할 수 없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 E743 + ("" 시는 누가 지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참으로 광대의 말이니 비루하고 가소롭다. 흰 갈매기가 어찌 사람과 수답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세상에는 시를 아는 이가 드물어서 모두 칭송하여 명작이라 하고 혹은 내가 지은 것이라 여기니 배를 잡고 웃을 일이다.)
- E742 + ("" 이는 곧 광대의 농담으로 실로 침을 뱉고 버릴 만하다. 혹 전해지기를 봉래 양사언의 시라 하는데 결코 그가 지은 것이 아님을 안다. 그의 시집 중에 과연 이러한 시가 있는가.)
- E004 +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 …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었고, 또《계원필경(桂苑筆耕)》10권을 간행하였다. 나는 일찍이 중국 사람은 포용력이 넓어서 외국 사람의 글이라고 경홀하게 여기지 않고, 이미 사책에 실었을 뿐더러, 또 그 문집이 세상에 행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 갸륵하게 여겼다. 그러나 문예열전(文藝列傳)에 최치원을 위하여 특별히 그 전(傳)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 뜻을 모르겠다. 혹 그의 사적이 전을 설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겨서일까? 최치원은 12세에 바다를 건너 당 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여 한 번 과거를 보아 갑과로 급제하였고, 드디어 고변(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서는 황소에게 격문을 보내니 황소의 기가 꺾였으며, 뒤에 벼슬이 도통순관 시어사(都統巡官侍御史)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려 할 때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이 유선가(儒仙歌)를 주었는데, 그 한 구에, </br></br><div class="poetry-text">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br></br>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네</div></br></br>하였고, 그의 자서(自敍)에도, “무협 중봉(巫峽重峯)의 해에 보잘것없는 몸으로 중국에 들어 왔고, 은하 열수(銀河列宿)의 해에 비단옷 입고 고국에 돌아왔다.” 하였으니, 대개 열두 살에 당 나라로 들어갔다가 스물여덟 살에 고국으로 돌아왔음을 말한 것이다. 그 행적이 이처럼 뚜렷하니, 이것으로 전을 설치한다면 예문지에 실린 심전기(沈佺期)ㆍ유병(柳幷)ㆍ최원한(崔元翰)ㆍ이빈(李頻) 등의 반장 정도되는 열전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만약 외국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지(志)에는 써야 할 것이다. 번진호용열전(藩鎭虎勇列傳)에서는 이정기(李正己)ㆍ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다 고려 사람인데도 각각 그 전을 만들어 그 사실을 소상하게 기록했는데, 어째서 문예열전에서만 최치원을 위하여 그 전을 설치하지 않았는가? 내가 사의(私意)로 헤아리건대, 옛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시기함이 없지 않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의 외로운 몸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사들을 압도했음에랴. 만일 전을 설치하여 바른 대로 그 사적을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
- E180 +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 …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따라와 송별하기에 내가 시를 지어 주기를,</br>봄 내내 병중에서 보내다가 / 一春都向病中過</br>이별하기 어려운 것 넌들 어찌 하리 / 難思無端奈爾何</br>침상에서 몇 번이나 눈썹을 찡그렸고 / 枕上幾回眉蹙黛</br>술자리에서는 그저 애교의 눈웃음이었네 / 酒邊空復眼橫波</br>객사에 늘어진 버들 애타게 보며 / 愁看客舍千絲柳</br>참고 양관의 한 곡조 들어 주소 / 忍聽陽關一曲歌</br>문밖에 해가 져도 떠나지 못하겠으니 / 門外日斜猶未發</br>좌중에 누가 고민이 많음을 알아주랴 / 座間誰是暗然多</br>하였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내가 첩(妾)을 잃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전주 기생 금개가 일찍이 사람을 따라 상경했다가 그 사람이 죽어 과부로 지내는데, 마침 공의 첩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옛정을 사귀고자 한다.” 하기에, 내가 허락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사고가 있어서 이루지 못하였으니, 헤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도 운수가 있는가 보다.있어서 이루지 못하였으니, 헤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도 운수가 있는가 보다.)
- E218 + (가정 신축년에 내가 하절사(賀節使)를 따라 연경에 갔을 때, 때마침 무종(武 … 가정 신축년에 내가 하절사(賀節使)를 따라 연경에 갔을 때, 때마침 무종(武宗)의 황후가 돌아갔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도 반열(班列)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나아가 곡(哭)하였다. 어느 날 일찍 사문(社門) 밖에 임시로 앉아 있는데, 중국 관원들이 많이 와서 극우(隟宇)에 앉아 있었다. 한 벼슬아치가 역사(譯士) 홍겸(洪謙)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시를 지을 수 있는가.” 하니 홍겸이, “어젯밤에 비가 조금 내려 나그네의 회포가 쓸쓸하여 우연히 절구 한 수를 지었다.”고 하였더니, 그 벼슬아치가 매우 간곡히 보여 달라고 하였다. 홍겸이 최고운(崔孤雲)의 시를 써서 보여 주었는데,</br>가을 바람에 비록 애써 읊었으나 / 秋風雖苦吟</br>세상에 알아 주는 사람이 적구나 / 世俗少知音</br>창밖은 비내리는 한밤중인데 / 窓外三更雨</br>등잔 앞에서 먼 고향 생각에 잠겨 있네 / 燈前萬里心</br>하였다. 벼슬아치가 가지고 가서 그 상관에게 보였더니, 다투어 벼슬아치를 보내 적어 갔다. 한참 손님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심지어 과일과 차를 가지고 와서 위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붓을 들어 홍겸에게 주면서, “그대, 다시 한 수 지어 달라.” 하니, 홍겸이 나를 가리키며, “저 분도 시를 잘 지으니 가서 청하여 보라.” 하니, 드디어 나에게 구하였다. 내가 종이에 쓰기를, “조충전각(雕虫篆刻 자질구레하게 문장의 문구를 수식함)은 본래 장부의 할 일이 아니다. 하물며 국상(國喪)을 당하였는데, 어찌 풍월을 읊을 때냐. 그래도 원한다면 길에서 지은 것이 있으니, 그 중의 절구 하나를 보여 주리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이에, “탕참(湯站)에 이르러 사람을 동쪽으로 돌려보내다.”라는 시를 썼는데, 그 시는,</br>송골산 앞 길에서 / 松鶻山前路</br>그대는 동으로 나는 서쪽으로 헤어지네 / 君東我馬西</br>집에 편지 써 보내려고 / 欲題家信去</br>종이를 대하니 생각이 도리어 아득하구나 / 臨紙意還迷</br>하였다. 서로 돌아보며 베껴 쓰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어찌 풍월을 읊을 때이냐.”의 말을 가리켜 탄복하기를, “참으로 예의를 아는 나라로다.” 하였다.냐.”의 말을 가리켜 탄복하기를, “참으로 예의를 아는 나라로다.” 하였다.)
- E240 + (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 … 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 율시가 적혀 있다고 하였다 "" 보고 들은 자들이 정자의 들보가 극히 높아서 시인이 시를 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반드시 귀신이 쓴 시라고 여겼다. 도성 아래가 소란스러우며,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말하기를, 들보의 시가 이제 없고 글씨는 원의 벽에 있다고 하니, 더욱 괴이하게 여겼다. 내가 분변하여 말하기를, "이른바 들보에 제시했다는 것은 본래 그런 일이 없었고, 다만 원의 벽에 쓰여 있었는데 전하는 자가 잘못한 것이다. 어찌 일찍이 들보에 있었다가 지금은 벽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 시를 호음 정사룡 선생에게 보였더니, "시가 심히 졸렬하고 속되며, 또한 장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불자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E279 + (가정(嘉靖) 병진년 무렵에 명(明) 나라 사람 유응기(劉應箕)가 왜구(倭寇) … 가정(嘉靖) 병진년 무렵에 명(明) 나라 사람 유응기(劉應箕)가 왜구(倭寇)에게 잡혀 배 안에 감금되었다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사로잡혀 서울에 왔다.</br>그가 시를 지었다.</br>전쟁을 원망하지 하늘을 원망하랴 / 只怨干戈不怨天</br>고국 떠나 길은 천리 만리 / 離鄕去國路千千</br>근심에 싸인 병골은 쇠한 운명 슬프고 / 愁纒病骨哀衰運</br>눈물 홍안에 뿌려 젊은 나이 우노나 / 涙洒紅顔泣盛年</br>달 보며 고향 생각 서쪽 국경 밖이요 / 見月思歸西塞外</br>구름 보며 마음은 북당 앞으로 달리누나 / 看雲心逐北堂前</br>모구의 칡을 보니 세월 얼마 흘렀는고 / 旄丘見葛何多日</br>고생으로 외로운 몸 여기서 곤욕 당하네 / 尾瑣孤身因此邊</br>이 재상(李宰相) 아계공(鵝溪公)이 젊었을 때 이 시에 차운하여 지었다.</br>곤의 바다 고래 물결 하늘에 닿아 아득하고 / 鯤海鯨波杳接天</br>남쪽 형국(초 나라 땅) 아득하니 몇 삼천 리 되는고 / 南荊迢遞幾三千</br>이국 땅에 유리하니 오직 외로운 그림자만 / 流離異國惟孤影</br>타향에 굴러굴러 한창 어린 나이로다 / 飄泊他鄕是弱年</br>나비꿈 때때로 국경 밖에 전하지만 / 蝶夢有時傳塞外</br>기러기 편지는 집 앞에 닿을 길이 없네 / 雁書無路抵家前</br>알겠노라 그대의 밤마다 어버이 그리는 생각 / 知君夜夜思親處</br>가을비 쓸쓸히 객침가를 적셔주리 / 秋雨蕭蕭客枕邊</br>당시 유(劉)의 나이 15~16세요, 아계공의 나이는 17~18세여서 나이는 모두 어렸으나 시는 이미 문장을 이루었다. 자고로 일찍 현달한 사람은 반드시 숙성(夙成)하는 법이다. 아계는 지금 재상(宰相)이 되었는데, 유응기도 역시 현달하였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급제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하니, 과연 그런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이는 급제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하니, 과연 그런지 아닌지 알 수 없다.)
- E366 + (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의 누제(樓題)는 모두 쌍(雙)과 창(窓) 두 자 … 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의 누제(樓題)는 모두 쌍(雙)과 창(窓) 두 자를 써서 지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양창해 선생 것이 더욱 좋다.</br>푸른 바다 붉은 무리 둥근 해의 반을 줄그었는데 / 碧海暈紅規日半</br>이끼 푸르고 바위 흰데 연기와 갈매기 짝지어 가네 / 蒼苔巖白煙鷗雙</br>금과 은으로 꾸민 대 위에 외로이 휘파람 부니 / 金銀臺上發孤嘯</br>넓고 넓은 천지 창으로 들어오네 / 天地浩然開入窓</br>이 시를 어떤 사람이 전하다가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공에게 보이니 말하기를, “혹 득의하여 이처럼 지을 만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반드시 이 시보다 나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우리 아버지께서도 이 운을 사용하여 지으시기를,</br>가랑비에 흰 갈매기 쌍쌍이 날고 / 疎雨白鷗飛兩兩</br>해질 녘 고깃배는 쌍쌍이 떴네 / 夕照漁艇泛雙雙</br>바다에서 돋는 해를 맞고자 / 擬看暘谷金烏出</br>정각의 동쪽 문을 두지 않았네 / 畵閣東頭不設窓</br>하였는데,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였다. 김첨경(金添慶)공이 관찰사였을 때에 지은 시 두 수가 있다. 그 하나는</br>아깝다 홍문(鴻門)에서 구슬 한말[玉斗] 깨뜨린 것이 / 可惜鴻門玉斗撞</br>조각조각 흩어져서 한 쌍 두 쌍 못 맞추네 / 紛紛片片不論雙</br>변해 흰 새가 되어 천백 떼를 이루어 / 化成白鳥群千百</br>해돋이 객 창가에 시끄럽게 울어대네 / 日出呶呶鬧客窓</br>이며, 또 하나는,</br>좋은 경치 하도 많아 좌우 부딪치는데 / 好景紛紛左右撞</br>말 머리엔 미인들도 쌍쌍이 보이는구나 / 馬頭紅粉亦雙雙</br>다음 구절은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그 뒤에 글을 쓰기를,</br>가소롭다 김문길이 / 可笑金文吉</br>정신 없이 좌우에 부딪치네 / 紛紛左右撞</br>하니, 듣는 사람이 조소하였다.吉 정신 없이 좌우에 부딪치네 / 紛紛左右撞 하니, 듣는 사람이 조소하였다.)
- E173 + (갑신년 여름에 내가 좌참찬이 되었을 때, 영의정에는 박순, 좌의정에는 노수신 … 갑신년 여름에 내가 좌참찬이 되었을 때, 영의정에는 박순, 좌의정에는 노수신, 우의정에는 정유길이며, 우찬성에는 정철과 나였는데, 모두 장원 급제를 하였다. 3공(三公 박순ㆍ노수신ㆍ정유길)은 모두 대제학을 지냈고, 찬성(정철)은 이때 제학을 겸하고 있었으며, 나도 일찍이 제학을 지냈으니, 이 다섯 사람은 한때 동료로서 성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br>담담한 정승청에 장원들만 모였으니 / 潭潭相府會龍頭</br>인간 성사로 비교하기 드무네 / 盛事人間罕比侔</br>한때 규와 벽처럼 빛난다고들 말하는데 / 爭道一時奎璧煥</br>나 같은 용렬한 사람이 명류에 끼임이 부끄럽네 / 只慙庸品厠名流</br>하니, 찬성이 화답하기를,</br>5학사에 5장원이 있고 보니 / 五學士爲五壯頭</br>내 이름 비교도 안 되네 / 聲名到我不相侔</br>다만 좋은 일에는 분별이 없는 듯하니 / 只應好事無分別</br>당시 제일류라 하리로다 / 等謂當時第一流</br>하였다. 듯하니 / 只應好事無分別 당시 제일류라 하리로다 / 等謂當時第一流 하였다.)
- E096 + (경진년(1460, 세조6)에 북방을 정벌할 때에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 … 경진년(1460, 세조6)에 북방을 정벌할 때에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가 상장(上將)이 되었다. 하루는 막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문충공이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많은 사람 중에 시를 지어 오늘의 뜻을 묘사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를 뽑아 상객(上客)으로 삼겠노라.” 하였다. 별시위(別侍衛) 박휘겸(朴撝謙)이란 사람이 즉석에서 읊기를,</br>십만의 용맹한 군사 수루를 에워쌌는데 / 十萬貔貅擁戍樓</br>밤 깊은 변방 달빛 여우 갖옷에 싸늘하네 / 夜深邊月冷狐裘</br>한 줄기 긴 피리 소리 어디서 들려오는가 / 一聲長笛來何處</br>정부의 만리 시름을 불어서 다 없애주네 / 吹盡征夫萬里愁</br>하니, 문충공이 기뻐하여 그를 뽑아 상객으로 삼았다. 박휘겸이 이로 인해 시명(詩名)을 얻게 되었다.그를 뽑아 상객으로 삼았다. 박휘겸이 이로 인해 시명(詩名)을 얻게 되었다.)
- E522 + (계랑은 부안의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었다. 일찍이 한 나그네가 그녀의 이름을 듣고 시를 지어 희롱하였다. 계랑이 즉시 차운하기를, ""라 하였다. 그 사람이 기뻐하지 않으며 떠나갔다. 계랑은 평소 거문고와 시를 좋아하였으며, 죽을 적에 거문고를 같이 묻었다 한다.)
- E750 + (고금의 학문에 힘쓰는 선비들은 모두 부지런함으로써 이루지 않은 이가 없다. … 고금의 학문에 힘쓰는 선비들은 모두 부지런함으로써 이루지 않은 이가 없다. 우리나라의 문장이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 독서를 많이 한 사람 또한 역력히 헤아릴 수가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괴애 김수온은 문을 닫아걸고 독서하면서 밖을 내다보지도 않아서 마루를 내려와 낙엽을 보고는 비로소 가을임을 알았다 한다. 허백당 성현은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암송하면서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아 변소에 가서 돌아오기를 잊기도 하였다. 김일손은 한유의 글을 천 번 읽었고 윤결은 맹자를 천 번 읽었으며 소재 노수신은 논어와 두시를 이천 번 읽었고 백호 임제는 중용을 팔백 번 읽었으며 간이 최립은 한서를 오천 번을 읽었으며 특히 항적전을 일만 번 읽었다. 창주 차운로는 주역을 오백 번 읽었고 동악 이안눌은 두시를 수천 번 읽었으며 어우 유몽인은 장자와 유종원의 문장을 천 번 읽었고 동명 군평 정두경은 사마천의 사기를 수천 번 읽었다. 나는 성질이 노둔하여 읽는 바 공부를 다른 사람의 배로 하였다. 사기, 한서, 한유, 유종원과 같은 것을 모두 베껴서 읽기를 만여 번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백이전으로 일억일만삼천 번에 이르도록 읽었다. 마침내 나의 작은 집을 억만재라 하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지난 경술년(1670)에 시절이 가뭄을 만나 팔도에 흉년이 들었고 다음해에는 크게 기근과 역병이 돌아서 도읍과 시골에 시체가 쌓였는데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금년에 죽은 사람과 그대의 책을 읽은 숫자 중에 어느 것이 많은가?" 대개 나의 독서를 희롱한 것이다.책을 읽은 숫자 중에 어느 것이 많은가?" 대개 나의 독서를 희롱한 것이다.)
- E435 + (고려 때 최충의 시에, ""라 하였다. 이 시를 세상에서 아름답다 하였는데, 다만 '未傳人' 석 자가 마땅치 않다. 어떤 사람은 최충이 아니라 최항의 시라 한다.)
- E361 + (고려 말에 어떤 고상한 선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아니 … 고려 말에 어떤 고상한 선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아니하면서 강 위에 자리 잡고 살았다. 죽은 뒤에 벼슬아치 몇 사람이 그의 옛집을 찾았더니, 벽 위에 그가 지은 시가 붙어 있었는데, 긁혀 떨어져 다만 한 구절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글에,</br>파초(芭蕉) 소리가 문발 밖에서 들리니 산 비가 오는 줄 알겠고 / 蕉鳴薄外知山雨</br>배 돛대가 봉우리 끝에서 나오니 바닷 바람이 부는 것을 짐작하겠다 / 帆出峯頭見海風</br>하였다. 이 글을 본 벼슬아치들이 한참 동안 읊조리더니, 서로 말하기를, “섬돌 아래 파초란 말을 보고 윗 구절을 알만 하지만 재 돛을 보고 바닷바람이 부는 것을 짐작한다는 것은 모르겠다.” 하였다. 조금 지나서 앞 포구에 홀연히 한 척의 배가 돛에 바람을 잔뜩 안고 봉우리 밖에서 점점 나왔다. 이것을 보게 되면, 배는 해구로부터 올라오는 것이다. 밖에서 점점 나왔다. 이것을 보게 되면, 배는 해구로부터 올라오는 것이다.)
- E360 + (고려(高麗) 의종(毅宗) 때에 청교역(靑郊驛)에서 검정 소를 바쳤는데, 의종 … 고려(高麗) 의종(毅宗) 때에 청교역(靑郊驛)에서 검정 소를 바쳤는데, 의종은 시신(侍臣)들에게 이것을 글제로 하여 시짓기를 명했다. 방(房) 자와 당(堂) 자를 운으로 짓게 하였는데, 시 한 구절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br>흑 모란꽃이 설당에 이르렀다 / 黑牧丹花到雪堂</br>라는 구절이 그 가운데서 약간 좋았다. 어떤 시 잘 짓는 선비 한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시를 지었는데, 그 경구(警句)에,</br>함곡에서 새벽에 돌아오니 붉은 기운을 탔고 / 函谷曉歸乘紫氣</br>도림에 봄이 되니 홍방을 밟더라 / 桃林春放踏紅房</br>하였다. 이것을 왕이 보고 탄미(歎美)한 나머지, 마침내 그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다.이것을 왕이 보고 탄미(歎美)한 나머지, 마침내 그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다.)
- E512 + (고려의 중 신탄은 곡성 사람이다. 그의 '조춘'시에, ""라 하였다. 또 '영동으로 놀러 가며'시에, ""라 하였다. 관동으로 놀러 가려던 사람이 있었는데 신탄의 이 구를 듣고는 이미 다녀온 듯하다 말하며 드디어 여행가기를 그만두었다.)
- E359 +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이 말하기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시의 격조는 매우 높다. 그의 시재를 열 사람이 갈라서 하나만 가지더라도 충분히 대제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진심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 E369 + (고성군(高城郡) 객사(客舍)에 제영(題詠)이 대단히 많다. 나의 아버지께서 … 고성군(高城郡) 객사(客舍)에 제영(題詠)이 대단히 많다. 나의 아버지께서 지은 시에,</br>봉래산 바람과 햇빛이 속세를 떠나 / 蓬萊風日隔塵寰</br>기화와 요초가 눈 속에 피었구나 / 瑤草琪花耐雪寒</br>모래 쌓이니 삼천리가 은세계요 / 沙積三千銀世界</br>다락 높았으니 열두 옥난간이네 / 樓高十二玉欄干</br>햇빛이 푸른 바다에 비추어 드니 금거울을 연 듯하고 / 照人碧海開金鏡</br>손님을 공경하여 신선산도 돌관을 썼구나 / 敬客仙山戴石冠</br>아득한 연하는 수은 반죽과 같은데 / 縹渺煙霞多煉汞</br>곤륜에 어찌 홀로 참란이 있는가 / 崑崙何獨有驂鸞</br>하였다. 양창해가 이에 차운하여 짓기를,</br>참을 찾다 잘못하여 신선 지경에 들어오니 / 尋眞誤入羽人寰</br>백옥 같은 높은 누가 은하수에 닿았네 / 白玉高樓倚廣寒</br>창을 여니 안개 낀 하늘이 거울 속에 있고, / 窓拓烟千生鏡裏</br>뜰 앞 흐름에는 반짝이는 별이 강가에 떨어지네 / 砌流星漠落江干</br>주인은 예부터 요력(堯曆)을 나누어 줄줄 아는데 / 主人舊識頒堯曆</br>손님은 새로이 변한 초나라 관(冠)을 전하더라 / 客子新傳變楚冠</br>이태백의 하목(霞鶩) 자(字)를 달만한데 / 可戀謫仙霞鶩字</br>은 갈고리와 철 노끈에 난조 새가 춤추네 / 銀鉤鐵索舞廻鸞</br>하였다.仙霞鶩字 은 갈고리와 철 노끈에 난조 새가 춤추네 / 銀鉤鐵索舞廻鸞 하였다.)
- E698 + (교관(敎官) 권필(權韠)의 호는 석주(石洲)이다. 시벽(詩癖)이 있어 과업( … 교관(敎官) 권필(權韠)의 호는 석주(石洲)이다. 시벽(詩癖)이 있어 과업(科業)을 일삼지 않았다. 그의 시는 노두(老杜)를 조종(祖宗)으로 삼고 간재(簡齋)를 답습하여 어의(語意)가 지극하고 구법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당시 시에 능한 사람들이 모두 추숭하여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근세에 성명(盛名)을 얻은 시인들 중 석주가 으뜸이 되었다. 들으니, 중국인이 동국(東國)의 시를 간행할 때 석주의 장률 몇 수가 들어갔다고 한다. 그중 한 수에 이르기를,</br></br>강가에 뚜우- 호각 소리 들리는데 / 江上嗚嗚聞角聲</br>북두성 자루는 강에 꽂혀 강물이 맑네 / 斗柄揷江江水明</br>아침조수 언덕을 침노하니 오리들 요란하고 / 早潮侵岸鴨鵝亂</br>먼 집엔 등불 켜져 다듬이 소리 울리네 / 遙舍點燈砧杵鳴</br>나그네 문을 나서니 달 지려 하고 / 客子出門月初落</br>뱃사람 돛을 거니 바람 일려 하네 / 舟人挂席風欲生</br>서주의 천리 길 여기서부터 가노니 / 西州千里自此往</br>긴 여정 험난한 길 어느 때나 평탄해질까 / 長路險艱何日平</br></br>하였는데, 파산(坡山 파주)에서 강도(江都 강화도)로 가려고 할 때 지은 것이다. 이 한 편만을 보아도 그의 재능이 뛰어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폐조(廢朝 광해군)때에 유씨(柳氏)의 여러 사람이 내세(內勢 광해비 유씨)를 빙자하여 멋대로 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니, 당시의 조정 신하들이 모두 아첨하고 애걸하였다. 지평(持平) 임숙영(任叔英)이 그때 거자(擧子 과거 보는 선비)로 대책문(對策文)을 지었는데, 촉휘(觸諱 꺼리는 것을 범함)하는 말이 많아 삭과(削科)를 당하려다가 다행히 중지하였다. 이에 석주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청청한 궁류에 꾀꼬리 어지러이 나는데 / 宮柳靑靑鶯亂飛</br>성 가득 벼슬아치 봄빛에 아첨하네 / 滿城冠蓋媚春輝</br>조정에선 모두 태평성대 축하하지만 / 朝家共賀昇平樂</br>누가 직언을 포의에서 나오게 했는고 / 誰遣危言出布衣</br></br>하였다. 그 후에 별시(別試)가 있어 박자흥(朴自興)이 등제(登第)하였는데, 박자흥의 부친 박승종(朴承宗)과 박자흥의 장인 이이첨(李爾瞻)이 고관(考官)을 했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순사(循私 사사로움에 따름)를 감히 거론하지 못하였다. 그때에 허균(許筠) 또한 시관(試官)으로서 자신의 조카 허아무개(허요(許窑))가 지은 글을 취하여 방(榜) 안에 넣었다가 죄를 입어 멀리 귀양을 갔다. 석주가 또 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과거급제 사사로운 정 있었다 한들 / 設令科第有私情</br>아들 사위 동생 중 조카가 제일 가벼운데 / 子壻弟中姪最輕</br>허균에게만 이 죄를 감당케 하니 / 獨使許筠當此罪</br>세간에 공도 행하긴 과연 어렵구나 / 世間公道果難行</br></br>하였다. 폐조에 이르러 역옥(逆獄 역적에 관련된 옥사)을 친국(親鞠)할 때 이 두 편의 시가 죄인의 서찰 가운데서 나오니, 석주는 시안(詩案) 때문에 형벌을 받고, 끝내는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석주를 들쳐 메고 동성(東城) 밖의 인가로 나왔는데, 나와 조현부(趙玄夫)가 함께 따라가 행구(行具)를 꾸려 주었다. 주인집 판영(板櫺) 위에 초서(屮書)로 이장길(李長吉 이하(李賀, 790~816))의 시〈장진주(將進酒)〉끝 4구를 보았는데 ‘권(勸)’ 자가 ‘권(權)’ 자로 되어 있었으니, 사실 잘못 쓴 데서 나온 것이었다.</br>때는 정히 늦봄이라, 도화(桃花)가 뜰에 가득하였다. 석주는 죽음에 임하여 석잔 술을 연거푸 마시더니 해가 질 무렵에 눈을 감았다. 한 글자 잘못 쓰인 것이 우연히 참언(讖言)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지 아니한가. 잘못 쓰인 것이 우연히 참언(讖言)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지 아니한가.)
- E155 + (궁녀로 지내다가 밖으로 나온 사람이 상자에 보통이 아닌 편지를 가지고 있었는 … 궁녀로 지내다가 밖으로 나온 사람이 상자에 보통이 아닌 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로 "", 또 "", 또 "", 또 "", 또 "" 등등이 있었다. 이를 본 사람은 성종이 평소에 희롱삼아 붓을 들었다가 버린 것들임을 알았다. 절구 두 수는 틀림없이 그림에 제한 시일 것인데 누구의 것인지는 모른다. 나머지는 모두 월산대군에게 준 편지의 초고이다. 성종이 늘 원산대군을 안으로 불러들여 만나고 나갈 적에 편지를 주어 시를 주고받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대개 형제의 우애가 이처럼 돈독하였다.어 시를 주고받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대개 형제의 우애가 이처럼 돈독하였다.)
- M019 + (귀는 귀머거리되려 하고 입은 벙어리되려 하니 / 耳欲爲聾口欲瘖 곤궁한 처지에 더욱 세정을 안다 / 窮途益復世情諳 뜻과 같지 않은 일은 십에 팔구나 되고 / 不如意事有八九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열에 한둘도 없다 / 可與語人無二三 사업은 고기처럼 하기를 기약하고 / 事業皐夔期自比 문장은 반마처럼 하려 하였는데 / 文章班馬擬同參 연래에 신명을 점검하니 / 年來點檢身名上 전현에 미치지 못한 게 바로 나의 부끄러움이네 / 不及前賢是我慙)
- E171 + (그 뒤 시강(侍講) 동월(董越)이 왔을 때 행차가 평양까지 와서 풍월루(風月 … 그 뒤 시강(侍講) 동월(董越)이 왔을 때 행차가 평양까지 와서 풍월루(風月樓)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안찰사로 있던 성허백당(成虛白堂)은 모습이 훌륭하지 못하였다. 동월이 안찰사를 주(州)의 관리인 줄 알고 그렇게 대수롭게 보지 않았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시를 짓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시에 화답하였다. 성허백이 지은 시에,</br>붉은 비 뜰에 가득한데 복사꽃 이미 떨어졌고 / 紅雨滿庭桃已謝</br>파란 연잎 물결에 점 일으키며 연꽃이 처음 떠오르더라 / 靑錢點水藕初浮</br>하였다. 동월이 이것을 보고 정색하고는, “이런 사람이 어째서 주(州)의 관리밖에 못하고 있는가.” 하니, 반접사(伴接使)인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이, “우리 나라에서는 풍화(風化)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하여 조정에서 으뜸가는 사람들을 뽑아서 주관(州官)으로 삼습니다.” 하였다. 동월의 풍월루기(風月樓記)에, “관찰사가 속으로 빼어나고 문아(文雅)하다.” 한 것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가 돌아갈 무렵 압록강에서 전별 잔치를 할 때에 쌍방이 모두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빛이 있었다. 충정공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는데,</br>푸른 연기는 고요하게 떠 있고 풀은 무성한데 / 靑煙漠漠草離離</br>바로 강두에서 석별할 때라 / 正是江頭惜別時</br>말없이 서로 보는 정 한 없으니 / 黙黙相看無限意</br>이생에 어디에서 다시 만나 즐길고 / 此生何處更追隨</br>하였다. 두 중국 사신이 서로 보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렸으니, 정말 정과 뜻이 한가지로 통하는 것은 풍속과 지역의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정말 정과 뜻이 한가지로 통하는 것은 풍속과 지역의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 E048 + (그 뒤에 급사중 진가유(陳嘉猷)가 우리나라에 와서 기자묘(箕子廟)를 보고 지은 시에, 포락(炮烙)하는 연기가 날아 왕기가 쇠하니 / 炮烙煙飛王氣衰 미친 체하는 마음을 거문고나 알아줄까 / 佯狂心事有琴知 그의 말씀은 천년을 전하여 〈홍범〉에 남아 있고 / 言垂千載存洪範 이제 사람이 삼한에 와서 구사(舊祠)를 뵙는다 / 人到三韓謁舊祠 하였다. 사람됨이 용모가 아름답고 수염이 그림과 같아서 진실로 인물과 재주가 모두 아름다웠다.)
- E051 + (그 뒤에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이 행인(行人) 장근(張瑾)과 함께 … 그 뒤에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이 행인(行人) 장근(張瑾)과 함께 와서 문묘(文廟)에 갔다. 호부는 순근(純謹) 화이(和易)하고 시와 부를 잘하였는데, 임금이 매우 후하게 대접하니 호부가 임금의 의채(儀采)를 흠모하여, “참다운 천인(天人)이다.” 했다. 노선성(盧宣城 노사신(盧思愼))과 서달성(徐達成)이 관반(館伴)이 되고 내가 홍겸선(洪兼善)ㆍ이차공(李次公)과 더불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대기하고 있을 적에 서달성이 말하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데 이는 모두 오래 전부터 지어둔 것일 것이다. 내가 먼저 시를 지어 차운하라고 청하면 반드시 그가 크게 낭패할 것이다.” 하였다. 한강에서 놀던 날 제천정(濟川亭)에 오르자 달성이 시 몇 수를 내보이면서, “대인의 뛰어난 운을 제가 도저히 화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서투른 글을 엮으니 화답을 바랍니다.” 하니, 호부가 미소하면서 한 번 보고 붓을 들어 내리쓰는데, 그 글에 고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br>백제의 지형은 물에 임하여 다하였고 / 百濟地形臨水盡</br>오대의 천맥은 하늘에서 왔다 / 五臺泉脈自天來</br>라는 글귀라든가</br>고루에 기대었으나 정을 다하지 못해 / 倚罷高樓不盡情</br>다시 춘색을 끌어당겨 밝은 허공에 띄우네 / 又携春色泛空明</br>사람은 죽엽배 속에서 취하고 / 人從竹葉杯中醉</br>배는 양화도 어구를 향해 가로지르네 / 舟向楊花渡口橫</br>라는 글귀 같은 것이다. 또 〈강지수사(江之水辭)〉를 지으면서 배를 타고 잠령(蠶嶺 남산(南山))까지 흘러내려 가도록 글 읊는 것을 그치지 않으니, 달성이 담이 내려 앉아 사모(紗帽)를 젖혀 쓰고 길게 신음할 뿐이요, 김문량(金文良)은 혀를 내민 채 거두지도 못하고서, “노적(老賊)이 너무 심하게 사람을 속였구나. 근래에 내가 침[針灸]를 맞지 않아서 시사(詩思)가 메말라 이와 같은 괴로움을 받을 따름이다.” 하고, 한마디도 말을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로움을 받을 따름이다.” 하고, 한마디도 말을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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