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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st of all pages that have property "TextKor" with value "복양(濮陽) 오세재 덕전(吳世才德全)은 시를 힘차고 준수하게 지었다. 그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 퍽 많지만, 강운(强韻)을 달아서 지은 것은 못 봤다.". Since there have been only a few results, also nearby values are displa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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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581  + (정지승이 어릴 적에 아직 가정을 이루지 않고 기생과 사사로이 지냈다. 부모가정지승이 어릴 적에 아직 가정을 이루지 않고 기생과 사사로이 지냈다. 부모가 학업에 방해될까 염려하여 관과 신을 빼앗고 밀실에 가두었다. 그의 친구가 여자의 편지를 보내오자 정지승이 시로 답했다. "" 정지승이 그 외삼촌을 따라 덕천에 가서 비로소 어천의 찰방과 사귀었다. 간찰로 서로 안부를 물었는데 세속에서 쓰는 서간문으로 시를 지었다. "" 그 발한 바 말이 모두 시가 되니, 재기가 넘쳐흐르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 때에 승려가 소요산에서부터 향산으로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정지승이 덕천 도중에서 만나 그 시권에 제하였다. "" 향산과 소요산은 내가 사랑하고 완상하는 곳이어서 더욱 이 시를 잊지 못한다. 애석하구나. 이러한 사람이 이와 같은 재주가 있었음에도 이름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었으니 매우 탄식할 만하다. 재주가 있었음에도 이름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었으니 매우 탄식할 만하다.)
  • E519  + (조원의 첩 이씨는 문장을 잘 지었다. 한 촌부의 남편이 소를 훔친 죄로 옥에조원의 첩 이씨는 문장을 잘 지었다. 한 촌부의 남편이 소를 훔친 죄로 옥에 갇혔다. 이씨가 그 소장의 말미에 쓰기를, ""라 하였다. 태수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마침내 석방하였다. 요산당외기를 보면, 이백이 벼슬하기 전에 소를 끌고 현령의 당 아래를 지나갔는데 현령의 아내가 노하여 꾸짖었다. 이백이 시로 사죄하기를, ""라 하였다. 현령이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또 이 구절은 시학대성에도 나오는데, 이 구를 소를 훔친 일에 용사하였으니 기뻐할 만하다.시학대성에도 나오는데, 이 구를 소를 훔친 일에 용사하였으니 기뻐할 만하다.)
  • E157  + (조위가 구성 공관에 묵으면서 매화를 꺾고 희롱삼아 절구를 지었다. "", 직지사에 묵으면서, "" 이 시들은 어렸을 적에 지은 것이지만 청경하여 즐길 만하다. 만년에 의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지은 시에, "", 라 하였고 또 종제 함창 군수 조존신에게 주는 시에, ""라 하였다.)
  • E504  + (종실 석양정 이정이 고성에서 시를 지었다. "" 또 사문 박경신이 구월산에서 시를 지었다. "" 두 시가 비슷하게 뛰어나다.)
  • E515  + (종실 숙천령 이기의 아내는 시에 능했다. 어렸을 적에 '비를 읊다'에서, ""라 하였고 또 선조대왕이 처음 즉위했을 때 행렬을 보고 시를 지었다. "")
  • E737  + (주서 신의화는 사부에 공교하고 또 시를 잘했다. 등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서 신의화는 사부에 공교하고 또 시를 잘했다. 등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하였다. 어릴 때 그의 외사촌형인 김석주와 함께 동호전사에서 학업을 하였다. 하루는 밤에 가을 소리가 쓸쓸히 들려 혹 비가 지나갔는지 의심하고 또 낙엽으로 의심하기도 하였다. 신의화와 김석주가 각각 베개맡에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신의화의 시는 다음과 같다. "" 김석주의 시는 다음과 같다. "" 신의화의 시는 맑은 운율이 사랑스럽고, 김석주의 시는 고풍스러운 기운을 따르기 어렵다. 다만 뜻을 쓴 것이 조탁한 것 같다.시는 고풍스러운 기운을 따르기 어렵다. 다만 뜻을 쓴 것이 조탁한 것 같다.)
  • E071  + (중 둔우(屯雨)는 환암(幻庵 혼수(混修))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학중 둔우(屯雨)는 환암(幻庵 혼수(混修))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써 경전(經傳)을 탐독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뜻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또 시에도 능하여 시사(詩思)가 청절하여 목은(牧隱)ㆍ도은(陶隱) 등 선생과 더불어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 아조(我朝)에서는 불교를 숭상하지 않아 명가의 자제는 머리를 깎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승려로서 글을 아는 자가 없어 사(師)의 이름이 더욱 나타났으며 사방의 학자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고, 집현전의 선비들도 모두 탑하(榻下)에 나아가 글을 물으니, 성대하게 유석 사림(儒釋士林)의 사표가 되어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나의 백형과 중형이 일찍 회암사(檜巖寺)에서 글을 읽을 때, 사의 나이가 90여 세였는데 용모가 맑고 파리하며, 기체가 여전히 강하여 혹은 이틀쯤 밥을 먹지 않아도 그다지 배고파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밥을 올리면 혹은 몇 그릇을 다 먹되, 또한 배부른 빛이 없고 며칠이 지나도록 변소에 가지 아니하며, 항상 빈 방에 우뚝 앉아서 옥등을 달고 깨끗한 책상을 놓고, 밤새도록 책을 보아 작은 글자까지 하나하나 연구하며 졸거나 드러눕는 일이 없으며, 사람을 물리쳐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부를 일이 있으면 손으로 소쟁(小錚)을 쳐서 제자들이 수응하도록 하였으며, 큰소리를 지르지 아니하였다. 일본 국사인 중 문계(文溪)가 시를 구하여 진신(縉紳) 중에서 시를 지은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었는데, 사도 또한 명을 받들어 시를 지었다. 그 시에,</br>수국고정 / 水國古精</br>상쾌한 무위의 사람이로다 / 灑然無位人</br>빨리 달리는 것도 응당 스스로 그칠 것이요 / 火馳應自息</br>고목처럼 섰으니 다시 누구와 친하리오 / 柴立更誰親</br>풍악에는 구름이 발 아래에서 일고 / 楓岳雲生屨</br>분성에는 달빛이 성문에 가득하도다 / 盆城月滿闉</br>바람 맞은 돛은 해천이 넓고 / 風帆海天闊</br>매류는 고원의 봄이로구나 / 梅柳故園春</br>하였다. 당시에 춘정(春亭)이 문형(文衡)을 주관(主管)하였는데, 쇄연무위(灑然無位)의 글귀를 고쳐서 “소연절세인(蕭然絶世人 쓸쓸히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이라 하니, 스승이 말하기를, “변공(卞公)은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로다. 소연(蕭然)이 어찌 쇄연(灑然)만 하며, 절세(絶世)가 어찌 무위(無位)만 하겠는가. 이것은 자연무위(自然無爲)의 뜻을 깎아 없앨 뿐이로다.”하고, 항상 문사를 보면 섭섭해 마지않았다. 지금 천봉집(千峯集)이 세상에 전해진다.상 문사를 보면 섭섭해 마지않았다. 지금 천봉집(千峯集)이 세상에 전해진다.)
  • E731  + (중구 박장원은 문재가 일찍 이루어졌다. 열두살 때 아버지의 벗 중에 임자년(중구 박장원은 문재가 일찍 이루어졌다. 열두살 때 아버지의 벗 중에 임자년(1552)에 태어난 이가 귀양을 가게 되어 이별의 자리에서 여러 어른들이 박장원에게 시를 짓도록 하였다. 박장원이 즉시 제하여 시를 지었다. "" 박장원 또한 임자년에 태어났으므로 이렇게 지은 것이다. 사람들이 기이한 신동이라고 칭하였다. 박장원이 일찍이 정언으로 월과를 지어 올린 반포조 시 한 절구에, ""라 하였다.인조가 그 시를 보고 전교하였다. "이 사람의 부모가 생존하여 있는가?" 승지가 회계하였다. "이 사람은 편모만 있습니다." 다시 전했다. "그 절구를 보니 효성이 범상치 않다. 한 집안의 충효가 사람을 감탄하게 한다. (효도에 대한) 바람과 나무의 비유는 옛사람도 슬퍼한 바이니 해당 관청에 명하여 좋은 쌀과 베를 주어서 대접하지 못하는 아픔을 면하도록 하여라." 이는 실로 특별한 대우이다. 대개 박장원의 외조부 심공 심현이 전 도정으로서 나이 일흔에 정축년(1637)의 난을 만나 종묘사직을 따라 강화도로 들어갔는데, 적병이 이미 갑곶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붓을 구하여 유소를 쓰고 부부가 함께 목을 매어 죽었다. 박장원이 그 소를 올리니 인종이 보시고 가상하게 여겨 그 마을에 정문을 내렸다. 그러므로 위의 교서에서 한 집안의 충효라 한 것이다. 중구의 호는 구당으로, 나와 친하게 지냈다. 한 집안의 충효라 한 것이다. 중구의 호는 구당으로, 나와 친하게 지냈다.)
  • E297  + (중국 사신 왕경민(王敬民)의 ‘새벽에 출발하여 조서를 반포하러 가다[早行頒詔중국 사신 왕경민(王敬民)의 ‘새벽에 출발하여 조서를 반포하러 가다[早行頒詔]’라는 시에,</br>천자의 위엄이 지척에 계신 듯 두터운 정으로 조서를 반포하니 / 天威咫尺頒殊渥</br>동국의 의관들이 모두들 절하며 조아리네 / 東國衣冠盡拜稽</br>하니, 원접사(遠接使) 율곡(栗谷) 이이(李珥) 상공이 그 운에 차운하여 지었다.</br>은은한 만세 소리 상서로운 안개 드날리니 / 殷殷呼嵩騰瑞霧</br>삼한의 머리들이 일시에 조아리네 / 三韓厥角一時稽</br>대개 계(稽) 자는 다 측성(仄聲)으로 쓰이는데, 왕공이 이미 틀린 것을 율곡이 따라 틀리게 썼으니, 어째서일까? 내가 그 시를 상공에게 평하니, 상공이 곧 운자를 바꾸었다. 그러므로 《황화집(皇華集)》에 실은 것은 초고와 다른 것이다. 율곡은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박식 다문(博識多聞)한데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이렇게 착오하여 웃음거리를 면치 못할 뻔하였는데, 하물며 재주가 율곡에 미치지 못하면서 이 임무를 맡은 자는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율곡에 미치지 못하면서 이 임무를 맡은 자는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 E713  + (중국 사신 태사 주지번이 한강에 유람하면서 장편시 한 수를 지었다. 수괴인 중국 사신 태사 주지번이 한강에 유람하면서 장편시 한 수를 지었다. 수괴인 유영경으로 하여금 차운하게 하였는데 그때 동고 최립이 제술관으로 대신 지어 주었다. 그 구절에, ""라 하였다. 원접사 서경 유근이 이를 보고 왕경 두 글자를 고쳐서 장안으로 바꾸자 최립이 은밀하게 이를 비웃었다. 주지번에게 올리자 주지번이 크게 탄복하고 칭찬하면서 '장안' 두 글자를 집어내어 말했다. "장안은 본래 너희 땅 말이 아니며 또한 위약하니 왕경 두 글자가 온당함만 못하다. 유근이 듣고 깊이 부끄러워하였다. 최립의 시 한 연에, ""라 하였으니, 이는 원접사 일행에게 부친 시이다. 이러한 사람을 빈사로 삼아서 곧바로 중국 사신을 맞이하도록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을 빈사로 삼아서 곧바로 중국 사신을 맞이하도록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 E334  +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에 정당매(政堂梅)가 있었는데, 세상에서 강통정(姜通亭 이름은 회백(淮伯))이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조남명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절은 헐어지고 중은 파리하고 산 돌은 오래되었으니 / 寺破僧羸山石古 선생이 본래부터 집지을 만한 곳 못 되어라 / 先生自是未堪家 조화옹이 한매의 일을 그르치어 / 化工定誤寒梅事 어제도 꽃피고 오늘도 꽃 피었네 / 昨日開花今日花 대개 그의 시절을 조롱한 것이다.)
  • E533  + (참봉 유석준은 나의 매형이다. 일찍이 호서 지방을 유람하다가 여관에서 이달을 만났다. 차고 있던 칼이 매우 좋아서 이달이 이를 탐냈다. 유석준이, "그대가 시를 잘 짓는다 들었으니 만약 즉석에서 시를 읊어 준다면 마땅히 이를 드리겠습니다." 이달이 즉시 한 구 시를 지었다. "" 이에 크게 기뻐하며 시가 완성되기도 전에 바로 칼을 풀어 그에게 주었다. 그 운에 차하여 시를 지었으니, ""라 하였다. 그 호방함이 이와 같았다.)
  • E546  + (참판 박민헌이 '촉석루 시에 차운하여'에서, ""라 하였다. 다른 차운한 사람들이 모두 이에 미치지 못했다. 공은 당세에 시명이 있었으며 시학은 두보를 온전히 배웠다. 그러나 그의 사고 가운데 여러 작품들을 보면 모름지기 사람들의 뜻에 만족스럽지 못하다. 믿을 만하구나, 보는 것이 듣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 E558  + (채수에게 손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무일이었다. 나이가 겨우 다섯여섯 살일 때 채수가 밤에 채무일을 안고 누우면서 먼저 한 구를 지었다. "" 무일로 하여금 대구를 짓게 했다. 대답하기를, ""라 했다. 채수가 또 눈 속에서 무일을 업고 다니면서 한 구를 지었다. "" 말이 끝나자 무일이 대답하기를, ""라 했다.)
  • E228  + (추강 남효온이 육신전을 지었는데 그 이개전에, 수레에 실려 떠날 때 시를 지추강 남효온이 육신전을 지었는데 그 이개전에, 수레에 실려 떠날 때 시를 지었다. "" 박팽년전에, 세조가 영의정으로 부중에서 연회를 베풀 적에 박팽년이 시를 지었다. ""성삼문전에는 어떤 사람이 그 아래에 주를 달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수레를 맞아 떠나며'에, ""라 하였다. 내가 금헌휘언을 상고하니 손궤는 송잠계의 고제이다. 죄를 받아 형장에서 입으로 시 한 수를 읊었다. "" 이로 미루어보면 성삼문의 작품이 아님이 명백하니, 실로 주석을 단 사람의 잘못이다.루어보면 성삼문의 작품이 아님이 명백하니, 실로 주석을 단 사람의 잘못이다.)
  • E460  + (충청수영의 영보정은 승경이 제일이다. 자고로 제영한 시가 심히 많은데, 오직 박은의 "" 한 연이 가장 회자된다. 나 또한 연구 하나를 지었다. "" 실로 무염을 화장시켜 서시의 앞에 내놓은 것과 같다.)
  • E721  + (태천 김지수는 호를 천태산인이라 하였으며 일찍이 태능과 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태능이 찾아오자 김지수가 시를 지었다. "" 태능이 읊으며 말했다. "수구는 당시에 가깝고, 삼사 구는 송시에 젖어들었다." 김지수가 태능에게 그가 지은 작품을 읊도록 하였다. 태능이 절구 한 수를 읊었다. "" 김지수가 말했다. "그대의 시 네 구는 과연 모두 당시로구나."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 E331  + (통사(通事) 정화(鄭和)는 문익공(文翼公) 광필(光弼)의 서자(庶子)다. 문통사(通事) 정화(鄭和)는 문익공(文翼公) 광필(光弼)의 서자(庶子)다. 문익공의 집에 매화나무가 있었는데, 공의 수신(壽辰)이 바로 매화가 필 때였다. 뒤에 대제학 정유길(鄭惟吉)이 여러 일가들과 이 나무 밑에서 술을 들며 각기 시를 지어 감상하였는데, 정화가 먼저 시를 지었다.</br>삼십 년 전에 이 매화를 기억하니 / 三十年前識此梅</br>해마다 오래도록 수연 때에 피었네 / 年年長向壽筵開</br>지금 풍상에 꺾여진 뒤로 / 至今催折風霜後</br>매양 꽃필 때 되면 차마 오지 못하네 / 每到花時不忍來</br>이에 여러 손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붓을 놓았다.하네 / 每到花時不忍來 이에 여러 손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붓을 놓았다.)
  • E245  + (편수 한세능과 급사 진삼모가 한강에서 유람하며 시를 지었다. 판서 박충원이 편수 한세능과 급사 진삼모가 한강에서 유람하며 시를 지었다. 판서 박충원이 한세능의 시운에 차운하고, 또 별도로 한 편을 지었다. """" 또 제시 아래에 썼다. "박충원이 옛날 정묘년(1567)에 외람되이 원접사를 맡아 해악 노선생 허국을 강가에서 영접하였다. 이제 또 두 대인을 개경에서 영위하는데, 상대인이 앞으로 불러들여 허국의 안부 전언을 전해주었다. 이는 옛날의 배시한 뜻을 잊지 않음이니, 실로 해외의 변변찮은 사람에게 큰 영광이다. 그래서 고운에 차운하되 그 참람됨을 잊고 또 한 율시에 차운하여 구구한 뜻을 기탁하였다. 본국의 선비를 잊지 않고 차운하여 멀리 보내었으니, 또한 정중하지 않은가?"본국의 선비를 잊지 않고 차운하여 멀리 보내었으니, 또한 정중하지 않은가?")
  • E570  + (하곡 허봉은 성품이 색을 좋아하였다.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처음 돌아왔을 적에하곡 허봉은 성품이 색을 좋아하였다.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처음 돌아왔을 적에 심일추의 집 계집종 덕개와 자못 정을 통했다. 홍가신은 유자였는데, 바람난 말이라며 이를 비꼬고 그의 동생 홍경신으로 하여금 붓을 잡고 운을 부르게 하여, 자리에서 즉석으로 풍마인(風馬引)을 지었다. 생각을 얽어매지 않고 연이어 소리내어 읊었는데, 그 말은 다음과 같았다."" 또 일찍이 기마를 보내어 덕개를 불렀으나, 덕개가 그 주인에게 붙잡혀 이르지 못하자, "슬퍼하는 계집종"으로 제목을 삼아 경신 형제가 또 이를 읊어서 장단구를 지었다. "" 그 시짓기가 민첩하고 호방한 것이 이와 같았다. 하곡집에 실리지 않았으므로 이에 기록한다.첩하고 호방한 것이 이와 같았다. 하곡집에 실리지 않았으므로 이에 기록한다.)
  • E325  +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은 천품이 매우 뛰어나게 영특하였다. 시문을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은 천품이 매우 뛰어나게 영특하였다. 시문을 일찍이 뜻에 두지 않았으나 손에서 나오면 반드시 아름다웠다. 〈병회부(病懷賦)〉라는 것이 있는데 신기재(申企齋)는 항시 한 통을 써서 벽에 붙여 놓고 읽었으며, 이용재(李容齋)는 또한 말하기를,</br>“형이 힘써 배워 그 재주를 확충하였더라면 우리 무리는 감히 바랄 수 없을 것이다.”</br>하였었다.</br>일찍이 남산 기슭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br>뉘 집에 도가 있어 충천할 수 있는고 / 誰家有道可冲天</br>요리하면 문득 그렇지 않음을 알리 / 料理終知却不然</br>시험삼아 산속에 들어 베개 높이고 누웠으니 / 試向山中高枕臥</br>이 몸 한가한 데가 즉 신선일세 / 此身閑處卽神仙</br>또 강정(江亭)에 놀면서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br>한강 가 좋은 곳을 다투어 차지하여 / 爭占名區漢水濱</br>강을 향해 단장된 누대가 몇 군데나 되는고 / 樓臺幾處向江新</br>붉은 난간이 대저 고요한 데가 많으니 / 朱欄大抵多空寂</br>술 들고 올라 앉으면 곧 주인이라네 / 携酒來憑是主人</br>뜻을 얽은 것이 다 사리가 달통하여 세상을 경계하는 뜻이 있었다. 상(尙) 정승의 매형이었는데, 그는 매양 말하기를,</br>“형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그 시는 《여지승람》이나 《동문선》에 수록 되어도 부끄러움이 없는데, 그때에 수록되지 못하였으니 또한 천명이다.”</br>하였다.도 부끄러움이 없는데, 그때에 수록되지 못하였으니 또한 천명이다.” 하였다.)
  • E567  + (하응림은 나이가 겨우 열 살 때에 기이한 아이로 일컬어졌다. 어떤 어른이 죽쟁이를 가리키며 시제로 삼고 운을 부르자 즉석에서 응답하기를, ""라 하였다. 그가 소년 시절 급제한 뒤에 당시에 재주를 논하는 사람들이 하응림을 최고로 꼽았다. 일찍이 서교에서 손님을 전송하며 시를 지었다. "" 당시에 ""와 함께 칭송받았는데, 식자들은 혹 그의 수명이 길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 E685  + (학사 이동악(李東岳)의 시격은 혼후(渾厚)하고 농려(濃麗)하였다. 실로 세상학사 이동악(李東岳)의 시격은 혼후(渾厚)하고 농려(濃麗)하였다. 실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시재로 가작(佳作)은 이루 다 기억할 수 없다. 그가 추성(秋城 전라남도 담양의 옛 명칭)을 다스릴 때 나와 함께 면앙정(俛仰亭)에 올라가 시를 지었다. 내가 감히 당돌하게도 먼저 지었는데 함련에 이르기를,</br></br>저녁놀 잠길 제 평야가 넓고 / 殘照欲沈平楚闊</br>태허는 막힘없어 뭇 산이 높네 / 太虛無閡衆峯高</br></br>하고서, 스스로 뛰어난 시어를 얻었다고 여겼다. 동악이 차운하여 이르기를,</br></br>서쪽을 조망하매 천원은 끝없고 / 西望川原何處盡</br>남녘의 형승은 이 정자가 으뜸 / 南來形勝此亭高</br></br>하였는데, 하구(下句)는 은연히 두보의 ‘해우에선 이 정자가 예스럽네〔海右此亭古〕’와 어세(語勢)가 대략 흡사하니, 가히 ‘목과를 던져 주고 경거(瓊琚)로 돌려받았다’고 이를 만하다.</br>천사(天使) 고천준(顧天俊)이 왔을 때, 그는 빈상(擯相 원접사(遠接使)) 월사(月沙) 이공의 막하로서 용만(龍灣)에 도착하여 통군정(統軍亭)에 올라 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유월 용만에 장맛비 개어 / 六月龍灣積雨晴</br>새벽에 홀로 통군정에 올랐네 / 淸晨獨上統軍亭</br>망망한 대야에 천기가 떠 있고 / 茫茫大野浮天氣</br>굽이굽이 장강은 지형을 가르네 / 曲曲長江裂地形</br>세상 백년에 사람은 흡사 개미요 / 宇宙百年人似蟻</br>산하 만리에 국토는 부평초로다 / 山河萬里國如萍</br>문득 백학이 서쪽으로 나는 걸 보니 / 忽看白鶴西飛去</br>요양 땅 옛 정씨가 아닐는지 / 疑是遼陽舊姓丁</br></br>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대가(大家)의 솜씨가 아니겠는가./ 疑是遼陽舊姓丁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대가(大家)의 솜씨가 아니겠는가.)
  • E494  + (한음 이덕형이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접반사가 되었다. 이 때 이여송이 왜적의 거짓 화의를 들어서 망설임을 면치 못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였다. 하루는 이여송이 적벽도를 내보이자 이덕형이 시를 지었다. "" 말에 법도와 풍자가 있으니, 이여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 E327  + (현령 성효원(成孝元)은 하산군(夏山君)의 조카다. 13~14세 때부터 병풍과현령 성효원(成孝元)은 하산군(夏山君)의 조카다. 13~14세 때부터 병풍과 족자를 능히 썼고, 이미 시부(詩賦)를 잘 지을 줄 알아 한때에 유명하므로, 공경들이 다투어 초대하여 글씨 써주기를 청하였다. 그는 끝내 급제하지 못하고 만년에 음직으로 용인의 수령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사람됨이 구속받지 않는 기남자(奇男子)이었다. 일찍이 원루에서 잠들었다가 꿈에 사모하던 사람을 보게 되어 이런 시를 지었다.</br>그리던 가인을 꿈속에 만나 / 情裏佳人夢裏近</br>옛 얼굴 초췌해진 것 서로 놀랐네 / 相驚憔悴舊形容</br>깨어보니 몸은 높은 누대 위에 누웠는데 / 覺來身在高樓上</br>바람은 긴 강을 치고 달은 봉우리에 숨었네 / 風打長江月隱峯</br>당시에 절창이라고 하였다.강을 치고 달은 봉우리에 숨었네 / 風打長江月隱峯 당시에 절창이라고 하였다.)
  • C012  + (복양(濮陽) 오세재 덕전(吳世才德全)은 시를 힘차고 준수하게 지었다. 그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 퍽 많지만, 강운(强韻)을 달아서 지은 것은 못 봤다.)
  • E039  + (<div class="critique-text">월암장로 산립은 <div class="critique-text">월암장로 산립은 시를 짓는데, 옛사람의 말을 많이 점화하였다.</div></br>다음 시를 보자.</br><div class="poetry-text">남쪽 수곡에 오면 도리어 어머니를 생각하고,</br>북쪽 송경에 이르면 다시 임금을 생각한다.</br>일곱 역과 두 강에 나귀는 작아,</br>문득 짐이 구름처럼 가볍지 않은 것이 싫어진다.</div></br>이 시는 곧 왕안석의 다음 시를 점화한 것이다.</br><div class="poetry-text">한구 위에서 어머니를 모시고,</br>백저의 음지 쪽에 집을 두었네.</br>달 밝은 밤에 두견새소리 들으니,</br>남북 두 곳이 모두 마음에 걸린다.</div></br>또 월암은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백악산 앞의 버드나무,<br> 안호사 안에 심었더니,<br> 봄바람 할 일 많아,<br> 한들한들 또 불어오네.<br></div></br>이 시는 즉 양거원의 다음 시를 점화한 것이다.</br><div class="poetry-text">거리의 버드나무 연기처럼 푸른 실가지,</br>말 세우고 그대 시켜 가지 하나 꺾었더니,</br>봄바람만이 그것이 아까운지,</br>은근히 다시 손안으로 불어오네.</div>이다. <div class="poetry-text">거리의 버드나무 연기처럼 푸른 실가지, 말 세우고 그대 시켜 가지 하나 꺾었더니, 봄바람만이 그것이 아까운지, 은근히 다시 손안으로 불어오네.</div>)
  • E214  + (가정 병신년에 내가 원영사(遠迎使) 퇴휴당(退休堂) 소(蘇) 정승을 따라 의가정 병신년에 내가 원영사(遠迎使) 퇴휴당(退休堂) 소(蘇) 정승을 따라 의주(義州)에 머무르고 있을 때, 공이 취승정(聚勝亭)에서 휘자(暉字) 운으로 시를 지으려고 한참 동안을 고심하다가 말하기를, “여러 분의 시에 ‘낙휘(落暉)ㆍ석휘(夕暉)ㆍ사휘(斜暉)ㆍ모휘(暮暉)ㆍ조휘(朝暉)로 운을 단 것이 많은데, 중첩되고 정교(精巧)하지 못하다. 이제 한 구를 얻었는데,</br>맑은 강이 비단과 같으니 사현휘네 / 澄江如練謝玄暉</br>하였으니 옛 압운(押韻)을 답습하지 않은 것 같으나 그 대구(對句)가 어렵다.”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황산곡(黃山谷)의 시에</br>서릿달이 금사를 끌어당긴다 / 霜月掣金蛇</br>는 구가 있는데, 만약</br>서릿달이 뱀을 끌어당김은 황태사로다 / 霜月掣蛇黃太史</br>라고 한다면 쓸 만 하지만, 황산곡의 구가 맑은 강이 비단과 같다는 것이 천고에 회자(膾炙)되는 것만은 못합니다. 한퇴지(韓退之)의 시에,</br>초생달이 갈아 놓은 낫 같다 / 新月似磨鎌</br>하였으니, 이것으로 저것과 대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공이 “됐다.” 하고, 드디어 읊기를,</br>초생달이 낫과 같음은 한리부로다 / 新月似鎌韓吏部</br>하고, 이어 전편(全篇)을 지었다. 그때는 마침 보름을 지난 뒤라 초생달이 아님을 꺼려 뒤에 초승이 되기를 기다려 써서 사람들에게 보였으나 소공이 체직되어 왔으므로 정자(취승정(聚勝亭))에 현판으로 써서 달지는 않았다.이 체직되어 왔으므로 정자(취승정(聚勝亭))에 현판으로 써서 달지는 않았다.)
  • E218  + (가정 신축년에 내가 하절사(賀節使)를 따라 연경에 갔을 때, 때마침 무종(武가정 신축년에 내가 하절사(賀節使)를 따라 연경에 갔을 때, 때마침 무종(武宗)의 황후가 돌아갔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도 반열(班列)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나아가 곡(哭)하였다. 어느 날 일찍 사문(社門) 밖에 임시로 앉아 있는데, 중국 관원들이 많이 와서 극우(隟宇)에 앉아 있었다. 한 벼슬아치가 역사(譯士) 홍겸(洪謙)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시를 지을 수 있는가.” 하니 홍겸이, “어젯밤에 비가 조금 내려 나그네의 회포가 쓸쓸하여 우연히 절구 한 수를 지었다.”고 하였더니, 그 벼슬아치가 매우 간곡히 보여 달라고 하였다. 홍겸이 최고운(崔孤雲)의 시를 써서 보여 주었는데,</br>가을 바람에 비록 애써 읊었으나 / 秋風雖苦吟</br>세상에 알아 주는 사람이 적구나 / 世俗少知音</br>창밖은 비내리는 한밤중인데 / 窓外三更雨</br>등잔 앞에서 먼 고향 생각에 잠겨 있네 / 燈前萬里心</br>하였다. 벼슬아치가 가지고 가서 그 상관에게 보였더니, 다투어 벼슬아치를 보내 적어 갔다. 한참 손님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심지어 과일과 차를 가지고 와서 위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붓을 들어 홍겸에게 주면서, “그대, 다시 한 수 지어 달라.” 하니, 홍겸이 나를 가리키며, “저 분도 시를 잘 지으니 가서 청하여 보라.” 하니, 드디어 나에게 구하였다. 내가 종이에 쓰기를, “조충전각(雕虫篆刻 자질구레하게 문장의 문구를 수식함)은 본래 장부의 할 일이 아니다. 하물며 국상(國喪)을 당하였는데, 어찌 풍월을 읊을 때냐. 그래도 원한다면 길에서 지은 것이 있으니, 그 중의 절구 하나를 보여 주리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이에, “탕참(湯站)에 이르러 사람을 동쪽으로 돌려보내다.”라는 시를 썼는데, 그 시는,</br>송골산 앞 길에서 / 松鶻山前路</br>그대는 동으로 나는 서쪽으로 헤어지네 / 君東我馬西</br>집에 편지 써 보내려고 / 欲題家信去</br>종이를 대하니 생각이 도리어 아득하구나 / 臨紙意還迷</br>하였다. 서로 돌아보며 베껴 쓰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어찌 풍월을 읊을 때이냐.”의 말을 가리켜 탄복하기를, “참으로 예의를 아는 나라로다.” 하였다.냐.”의 말을 가리켜 탄복하기를, “참으로 예의를 아는 나라로다.” 하였다.)
  • E240  + (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 율시가 적혀 있다고 하였다 "" 보고 들은 자들이 정자의 들보가 극히 높아서 시인이 시를 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반드시 귀신이 쓴 시라고 여겼다. 도성 아래가 소란스러우며,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말하기를, 들보의 시가 이제 없고 글씨는 원의 벽에 있다고 하니, 더욱 괴이하게 여겼다. 내가 분변하여 말하기를, "이른바 들보에 제시했다는 것은 본래 그런 일이 없었고, 다만 원의 벽에 쓰여 있었는데 전하는 자가 잘못한 것이다. 어찌 일찍이 들보에 있었다가 지금은 벽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 시를 호음 정사룡 선생에게 보였더니, "시가 심히 졸렬하고 속되며, 또한 장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불자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E279  + (가정(嘉靖) 병진년 무렵에 명(明) 나라 사람 유응기(劉應箕)가 왜구(倭寇)가정(嘉靖) 병진년 무렵에 명(明) 나라 사람 유응기(劉應箕)가 왜구(倭寇)에게 잡혀 배 안에 감금되었다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사로잡혀 서울에 왔다.</br>그가 시를 지었다.</br>전쟁을 원망하지 하늘을 원망하랴 / 只怨干戈不怨天</br>고국 떠나 길은 천리 만리 / 離鄕去國路千千</br>근심에 싸인 병골은 쇠한 운명 슬프고 / 愁纒病骨哀衰運</br>눈물 홍안에 뿌려 젊은 나이 우노나 / 涙洒紅顔泣盛年</br>달 보며 고향 생각 서쪽 국경 밖이요 / 見月思歸西塞外</br>구름 보며 마음은 북당 앞으로 달리누나 / 看雲心逐北堂前</br>모구의 칡을 보니 세월 얼마 흘렀는고 / 旄丘見葛何多日</br>고생으로 외로운 몸 여기서 곤욕 당하네 / 尾瑣孤身因此邊</br>이 재상(李宰相) 아계공(鵝溪公)이 젊었을 때 이 시에 차운하여 지었다.</br>곤의 바다 고래 물결 하늘에 닿아 아득하고 / 鯤海鯨波杳接天</br>남쪽 형국(초 나라 땅) 아득하니 몇 삼천 리 되는고 / 南荊迢遞幾三千</br>이국 땅에 유리하니 오직 외로운 그림자만 / 流離異國惟孤影</br>타향에 굴러굴러 한창 어린 나이로다 / 飄泊他鄕是弱年</br>나비꿈 때때로 국경 밖에 전하지만 / 蝶夢有時傳塞外</br>기러기 편지는 집 앞에 닿을 길이 없네 / 雁書無路抵家前</br>알겠노라 그대의 밤마다 어버이 그리는 생각 / 知君夜夜思親處</br>가을비 쓸쓸히 객침가를 적셔주리 / 秋雨蕭蕭客枕邊</br>당시 유(劉)의 나이 15~16세요, 아계공의 나이는 17~18세여서 나이는 모두 어렸으나 시는 이미 문장을 이루었다. 자고로 일찍 현달한 사람은 반드시 숙성(夙成)하는 법이다. 아계는 지금 재상(宰相)이 되었는데, 유응기도 역시 현달하였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급제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하니, 과연 그런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이는 급제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하니, 과연 그런지 아닌지 알 수 없다.)
  • E295  + (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예부(禮部)를 관광(觀光)하는데, 절강(浙江)의 서생(書生) 5~6인이 먼저 와 있었다. 땅에 글을 적어 서로 문답하고, 한 절구를 지어보였다.</br>중국 조정 예부에 부평같이 모였으니 / 天朝禮部風萍集</br>천리의 관광객은 각각이 다른 고향 / 千里觀光各異鄕</br>가장 괴로운 건 내일 아침 이별하면 / 最苦明朝又分手</br>푸른 하늘 가을 숲이 정히 푸르리 / 碧天秋樹正蒼蒼</br>내가 곧 그 시의 운에 따라 지었다.</br>서리 바람 나무에 불어 성겨 누른 잎 떨어지니 / 霜風吹樹隕疏黃</br>소슬한 찬 소리에 고향 생각 괴롭도다 / 蕭瑟聲寒苦憶鄕</br>같은 나그네로 내가 가장 먼 곳이니 / 同作旅遊吾最遠</br>바다 하늘 나직한데 흩어진 산 푸르구나 / 海天低襯亂山蒼</br>서로 끌며 몰려와 보고는 선생이라 불렀다. 내가 사양하여 말하기를,</br>“중국 선비들의 과분한 칭찬이 이미 감사한데, 또 선생은 무슨 말입니까?”</br>하니, 답하기를,</br>“재주를 보는 것이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br>하였다. 이번 걸음에 무령현(撫寧縣) 벽에 한 율시를 지어 붙였다. 그 1 연(聯)에,</br>말 통하려고 땅에 글 쓰기 번거롭고 / 通言煩畫地</br>악을 보러 중국을 방문한 것 기쁘다 / 觀樂喜朝天</br>하였다. 그후 임술년간에 한 압마관(押馬官)이 와서 말하기를,</br>“어떤 현의 관사가 다 낡아 다시 지었는데, 그 시를 쓴 구벽(舊壁)은 완연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br>하였다. 케케묵고 누추한 시에서 뭐 취할 것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
  • E366  + (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의 누제(樓題)는 모두 쌍(雙)과 창(窓) 두 자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의 누제(樓題)는 모두 쌍(雙)과 창(窓) 두 자를 써서 지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양창해 선생 것이 더욱 좋다.</br>푸른 바다 붉은 무리 둥근 해의 반을 줄그었는데 / 碧海暈紅規日半</br>이끼 푸르고 바위 흰데 연기와 갈매기 짝지어 가네 / 蒼苔巖白煙鷗雙</br>금과 은으로 꾸민 대 위에 외로이 휘파람 부니 / 金銀臺上發孤嘯</br>넓고 넓은 천지 창으로 들어오네 / 天地浩然開入窓</br>이 시를 어떤 사람이 전하다가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공에게 보이니 말하기를, “혹 득의하여 이처럼 지을 만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반드시 이 시보다 나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우리 아버지께서도 이 운을 사용하여 지으시기를,</br>가랑비에 흰 갈매기 쌍쌍이 날고 / 疎雨白鷗飛兩兩</br>해질 녘 고깃배는 쌍쌍이 떴네 / 夕照漁艇泛雙雙</br>바다에서 돋는 해를 맞고자 / 擬看暘谷金烏出</br>정각의 동쪽 문을 두지 않았네 / 畵閣東頭不設窓</br>하였는데,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였다. 김첨경(金添慶)공이 관찰사였을 때에 지은 시 두 수가 있다. 그 하나는</br>아깝다 홍문(鴻門)에서 구슬 한말[玉斗] 깨뜨린 것이 / 可惜鴻門玉斗撞</br>조각조각 흩어져서 한 쌍 두 쌍 못 맞추네 / 紛紛片片不論雙</br>변해 흰 새가 되어 천백 떼를 이루어 / 化成白鳥群千百</br>해돋이 객 창가에 시끄럽게 울어대네 / 日出呶呶鬧客窓</br>이며, 또 하나는,</br>좋은 경치 하도 많아 좌우 부딪치는데 / 好景紛紛左右撞</br>말 머리엔 미인들도 쌍쌍이 보이는구나 / 馬頭紅粉亦雙雙</br>다음 구절은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그 뒤에 글을 쓰기를,</br>가소롭다 김문길이 / 可笑金文吉</br>정신 없이 좌우에 부딪치네 / 紛紛左右撞</br>하니, 듣는 사람이 조소하였다.吉 정신 없이 좌우에 부딪치네 / 紛紛左右撞 하니, 듣는 사람이 조소하였다.)
  • E486  + (감사 신응시는 시로 이름이 있었다. 일찍이 고성에서 시를 지었다. "" 청천시는 아래와 같다. "" 병랑을 위한 시는 아래와 같다. "" 또 선조대왕이 상을 치를 때 응제하여 지은 두견시에, ""라 하였다. 순회세자의 만시는 ""라 하였다. 그 때에 이 시들을 아름답다고 여겼다.)
  • E485  + (강극성이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파면당한 때에 시를 지었다. "" 명종이 이를 듣고 감탄하여 특별히 명하여 다시 서용하였으니, 대개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 E043  + (결지는 과거에 합격하여 시를 잘 짓는다고 이름이 났는데, 출가하여 중이 된 결지는 과거에 합격하여 시를 잘 짓는다고 이름이 났는데, 출가하여 중이 된 뒤에 호를 취봉이라고 하였다. 그는 떨어지는 배꽃을 보고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옥 같은 용 백만 마리가 여의주 다투는 날에,</br>바다 밑 물귀신이 떨어진 비늘을 주워,</br>봄바람 부는 꽃시장에 몰래 팔아</br>봄신이 홍진에 흩어버리기 쉽다네.</div></br><div class="critique-text">시골 학생들이 지은 시라고 하겠다.</div></br>문정공 김구도 또한 “낙이화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펄펄 날아 춤추며 왔다갔다,</br>거꾸로 날리다가 가지에 올라 다시 피려 하네.</br>무단히 한 잎이 거미줄에 걸리니,</br>거미가 나빈 줄 알고 잡으러 오네.</div></br><div class="critique-text">작가의 표현 수단은 본래 각자 같지 않은 것이다.</div>러 오네.</div> <div class="critique-text">작가의 표현 수단은 본래 각자 같지 않은 것이다.</div>)
  • E522  + (계랑은 부안의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었다. 일찍이 한 나그네가 그녀의 이름을 듣고 시를 지어 희롱하였다. 계랑이 즉시 차운하기를, ""라 하였다. 그 사람이 기뻐하지 않으며 떠나갔다. 계랑은 평소 거문고와 시를 좋아하였으며, 죽을 적에 거문고를 같이 묻었다 한다.)
  • E565  + (고경명은 자가 이순이다. 광주에서 벼슬하기 전에 서익이 인근 고을의 태수였다고경명은 자가 이순이다. 광주에서 벼슬하기 전에 서익이 인근 고을의 태수였다. 한 승려가 서익과 친분이 있어 그 고을에 여러 날 머물다가 광주로 가서 고경명을 찾아보려 했다. 서익이 말했다. "내가 모월 모일에 고경명 군을 찾아뵐 예정이니, 안부를 정중히 전해달라." 승려가 광주에 가서 고경명을 뵙고 서익의 말을 전했다. 고경명이 그를 매우 정중히 대접하며 시첩 중의 시를 주고 말했다. "서군수께서 근일에 어떤 시를 지으셨는가?" 승려가 말했다. "사운시 네 수를 지으셨습니다." "그대는 그 운을 기억하는가?" "기억합니다. 대개 '운(雲)', '분(濆)' 등의 글자를 운으로 삼았습니다." 고경명이 생각하기를, 군수가 오면 반드시 시주(詩酒)로 도전해올 것이다. 그의 재주를 헤아려보니 현장에서 즉석으로 대응할 수 없을 것이므로, 반드시 미리 여러 수를 지어놓고 나를 곤란하게 만들려 할 것이다. 이른바 네 수는 반드시 그날 주연에서 필요할 것이다. 하여 고경명도 그 운을 사용하여 미리 여섯 수를 지어 놓고 기다렸다. 그 날이 되자, 서익이 과연 술을 지고 약속대로 왔다. 술이 반쯤 취했을 때, 서익이 말했다. "잉어를 낚을 때는 새우를 쓰고, 사슴을 잡을 때는 미끼 사슴을 쓴다 하니, 내가 마땅히 먼저 시작해야겠다." 그리하여 오언율시 사운시 한 수를 썼는데, 바로 승려가 말한 그 운이었다. 고경명이 마치 시상을 구상하는 것처럼 화운시 한 수를 지었다. 서익이 다시 그 운을 써서 한 수를 짓자, 고경명이 즉시 차운했다. 이렇게 해서 이미 지어 온 네 수를 다 마쳤다. 이어서 큰 잔으로 서로 권하며 이미 여러 순배를 돌렸지만 아직 취하지 않았다. 고경명이 말했다. "예에는 답하지 않음이 없다 하니, 나도 이것으로 보답하겠다." 또 그 운을 써서 시를 지었는데, ""라는 구절이 있었고 나머지는 잊어버렸다. 서익이 두려워하여 눈을 감고 잔을 던지며 취한 척 하고는 일어나서 돌아보겠다고 핑계를 대며 시녀로 하여금 부축하게 한 다음, 이미 옷을 털고 말을 타고는 가버렸다.며 시녀로 하여금 부축하게 한 다음, 이미 옷을 털고 말을 타고는 가버렸다.)
  • E750  + (고금의 학문에 힘쓰는 선비들은 모두 부지런함으로써 이루지 않은 이가 없다. 고금의 학문에 힘쓰는 선비들은 모두 부지런함으로써 이루지 않은 이가 없다. 우리나라의 문장이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 독서를 많이 한 사람 또한 역력히 헤아릴 수가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괴애 김수온은 문을 닫아걸고 독서하면서 밖을 내다보지도 않아서 마루를 내려와 낙엽을 보고는 비로소 가을임을 알았다 한다. 허백당 성현은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암송하면서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아 변소에 가서 돌아오기를 잊기도 하였다. 김일손은 한유의 글을 천 번 읽었고 윤결은 맹자를 천 번 읽었으며 소재 노수신은 논어와 두시를 이천 번 읽었고 백호 임제는 중용을 팔백 번 읽었으며 간이 최립은 한서를 오천 번을 읽었으며 특히 항적전을 일만 번 읽었다. 창주 차운로는 주역을 오백 번 읽었고 동악 이안눌은 두시를 수천 번 읽었으며 어우 유몽인은 장자와 유종원의 문장을 천 번 읽었고 동명 군평 정두경은 사마천의 사기를 수천 번 읽었다. 나는 성질이 노둔하여 읽는 바 공부를 다른 사람의 배로 하였다. 사기, 한서, 한유, 유종원과 같은 것을 모두 베껴서 읽기를 만여 번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백이전으로 일억일만삼천 번에 이르도록 읽었다. 마침내 나의 작은 집을 억만재라 하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지난 경술년(1670)에 시절이 가뭄을 만나 팔도에 흉년이 들었고 다음해에는 크게 기근과 역병이 돌아서 도읍과 시골에 시체가 쌓였는데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금년에 죽은 사람과 그대의 책을 읽은 숫자 중에 어느 것이 많은가?" 대개 나의 독서를 희롱한 것이다.책을 읽은 숫자 중에 어느 것이 많은가?" 대개 나의 독서를 희롱한 것이다.)
  • E443  + (고려 말에 조운흘이 퇴거하여 광주의 몽촌으로 갔다. 하루는 죄를 입어 귀양온 사람을 보고 시를 지었다. "")
  • E132  + (고려 문성공 안향이 일찍이 시를 지어 학궁에 쓰기를, ""라 하였다. 개연히고려 문성공 안향이 일찍이 시를 지어 학궁에 쓰기를, ""라 하였다. 개연히 유교를 흥기하는 것을 그의 사명으로 여겨 개연히 사문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성균관에 노비 백 명을 바쳤다. 죽은 후 문묘에 배향되었고, 곳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지금까지도 공의 자손이 연이어 십 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고 있으니, 그 보답을 받은 셈이다. 공이 합포의 진무사로 있은 지 몇 개월 만에 조정에서 인재를 뽑게 되어 급히 불러들여 시험관을 맡게 되었다. 그 때 장마로 물이 불어나서, 공이 간신히 성주에 도착하여 동암 이진에게 증별하는 시를 지었다. ""공의 부자가 연이어 합포의 도절제사가 되었고, 구대손 안침 또한 절도사가 되었다. 공의 시를 차운하여 썼다."" 되었고, 구대손 안침 또한 절도사가 되었다. 공의 시를 차운하여 썼다."")
  • E145  + (고려의 승려 신준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서하 고려의 승려 신준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서하 임춘도 역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학사 미수 이인로가 평하기를, 두 공의 작품은 처음에 서로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말을 토해내는 것이 처량하고 애절하여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하였다. 나는 이를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앞의 시는 사물을 읊었으나 섬약함에 빠졌고, 뒤의 시는 정감을 말했으나 구법이 호장하니, 기상이 서로 같지 않은데 이를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함은 어찌하여서인가? 임춘의 시는 본래 구양공 구양수의 ""에서 나온 것이니, 그 뜻을 훔쳤을 뿐 아니라 그 말까지 훔친 것이다. ""에서 나온 것이니, 그 뜻을 훔쳤을 뿐 아니라 그 말까지 훔친 것이다.)
  • E514  + (고려의 충선왕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갈 적에 한 미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동쪽으로 돌아갈 때 길에서 연꽃 한 송이를 따서 그녀에게 보내어 작별의 뜻을 전했다. 그녀가 감사의 뜻으로 시를 지었다. "" 그 시의 말이 부드럽고 음미할 만하다. 상세한 일은 용재총화에 보인다.)
  • E484  + (고산 이굉은 어렸을 적부터 재능으로 이름이 있었다. 하루는 친구를 데리고 세심대에 놀러갔는데, 그곳의 주인 이형성이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공이 벽에 시를 썼다. "" 사람들이 모두 이를 전하였다. 이형성이 이를 병통으로 여겨, 성대하게 차리고는 공을 맞이하여 앞의 시를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붓을 들어 시를 고쳤다. "" 또 용문산에 놀러 가서 한 연을 지었다. "")
  • E372  + (고성(高城)에는 옛날부터 가볼 만한 명승지가 없었다. 병인년 겨울에 아버지께고성(高城)에는 옛날부터 가볼 만한 명승지가 없었다. 병인년 겨울에 아버지께서 고성에 부임하시자, 다음 해 봄에 바로 관아 뒤 가시밭 가운데서 한군데 절승지(絶勝地)를 얻게 되어, 높은 곳을 평평하게 고르고 정자를 지었다. 서쪽은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이 쳐다보이는데, 천봉(千峯)이 한눈에 들어오며, 열흘 안 걸려 닿을 수 있고, 동쪽은 바다에 임하였는데, 거리가 10리도 못 되고, 남쪽은 남강을 수백 보 앞에다 굽어보며, 북쪽은 36봉이 바라보인다. 아래 제일 기승(奇勝)은 선군(先君)께서 기문을 짓고, 또 십영(十詠)을 지었으며, 양창해도 십영을 짓고 또 여기에 발문(跋文)을 지었는데, 문인들로 화답하는 분들이 많았다. 석봉(石峯) 한호(韓濩)는 거기에 액자를 크게 썼는데, 바로 해산정(海山亭)이다.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시를 보냈는데,</br>새로이 제일가는 강산을 열어 / 聞說新開第一區</br>바다와 산을 영동 한쪽 높이달았다는 말을 들었네 / 海山高揭嶺東陬</br>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두었던 모든 것이 눈앞에 나타나니 / 天慳地秘森呈露</br>시흥(詩興)이 나면 그 누가 넓다 하여 이 경치를 거두지 못하랴 / 詩興何人浩莫收</br>하였고, 감사(監司) 김여경(金餘慶)이 시를 짓기를,</br>이제 와서야 비로소 물 되기가 어려움을 믿겠네 / 今來始信難爲水</br>이 산 밖에 다시 좋은 산이 있다고 누가 말하리 / 此外誰言更有山</br>조그만 마음이 저같이 큰 것을 용납하니 / 方寸容他如許大</br>이번 행차가 말발굽 사이에 있음이 아니라네 / 玆行不在馬蹄間</br>하였다. 국상(國相) 윤두수(尹斗壽)의 시에,</br>삼일포(三日浦)에 조각배 띄우니 / 三日湖中泛小舟</br>한 갈피 좋은 곳 이루어 물과 구름이 한가롭네 / 一區形勝水雲悠</br>일찍이 자주 놀던 곳 기억을 더듬어 써오니 / 書來曾憶重遊處</br>서른여섯 봉우리마다 가을 다함 없네 / 三十六峯無盡秋</br>하였고, 남언경(南彦經) 공의 시에,</br>가을 달에 남강이 넓고 / 秋月南江闊</br>서리 단풍은 북령에 높았더라 / 霜楓北嶺高</br>꿈속에 늘 그리는 그곳 / 夢魂長繞處</br>갈대밭에 바람도 우수수하겠지 / 蘆荻吹蕭蕭</br>하였다. 황윤길(黃允吉)공의 시에</br>희한한 서른 봉우리 아흔 호수는 / 三十奇峯九十湖</br>네 신선 거닐던 날 몰래 놀던 곳 / 四仙當日秘名區</br>티끌 낀 소매 깨끗해짐을 문득 깨닫겠구려 / 尋眞斗覺塵襟淨</br>이 몸이 도리어 그림 가운데 있지 않나 의심이 나네 / 身世還疑入畵圖</br>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이 나네 / 身世還疑入畵圖 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
  • E576  + (고죽 최경창이 절을 찾아 산골짜기에 들어갔다가 홀연 길을 잃고는 입으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그 길을 잃고 헤매는 괴로움과 서러운 한이 말의 바깥에 있으니 읊으면 서러워진다.)
  • E699  + (교관(敎官) 성여학(成汝學)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의 생질(甥姪)이다교관(敎官) 성여학(成汝學)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의 생질(甥姪)이다. 어렸을 적부터 시벽(詩癖)이 있어 시에 힘쓴 지 이미 오래되어 가는 곳마다 가구(佳句)를 지었다. 그의 시구,</br></br>풀잎 이슬에 벌레 소리 젖고 / 草露蟲聲濕</br>숲 바람에 새 꿈도 위태롭네 / 林風鳥夢危</br></br>는 사람들이 칭찬하였고,</br></br>얼굴은 그의 벗만 알 뿐이요 / 面唯其友識</br>먹는 일도 장부의 슬픔일세 / 食爲丈夫哀</br></br>한 것은 궁어(窮語)이다.</br>내가 일찍이 그의 집에 왕래하곤 하였는데, 항상 그가 떨어진 옷에 작은 두건을 쓰고 귀밑 가득 머리털이 센 채로, 홀로 한 칸 서재에 기대어 종일토록 동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으니, 진실로 일세의 궁사(窮士)였다. ‘시가 사람을 궁색하게 한다〔詩能窮人〕’는 말은 아마도 성 교수(成敎授)를 위해 나왔을 것이다.게 한다〔詩能窮人〕’는 말은 아마도 성 교수(成敎授)를 위해 나왔을 것이다.)
  • E717  + (권협은 포의의 가난한 선비로 석주 권필의 아우이며 호는 초루이다. 그의 '송권협은 포의의 가난한 선비로 석주 권필의 아우이며 호는 초루이다. 그의 '송도를 회고하며' 절구시 한 수는 다음과 같다. "" 이 시가 한때 널리 회자되었다. 권협이 일찍이 삼각산 승가사에 유람을 갔는데 때마침 여러 명사들이 와서 모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권협이 자리에서 시에 대해 태연하게 이야기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업신여기며 말했다. "오늘은 이름난 관리들의 모임인데 저 서생이 어찌 당돌하게 끼어드는가." 권협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의 벼슬이 어찌 나의 한 구절에 겨루겠는가." 여러 명사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구를 읊어 주기를 청하였다. 권협이 즉시 낭랑하게 ""의 구절을 읊으니 여러 명사들이 이에 크게 놀라 상석에 모시고 공경하고는 하루종일 취하도록 마셨다.명사들이 이에 크게 놀라 상석에 모시고 공경하고는 하루종일 취하도록 마셨다.)
  • E714  + (근래에 여러 유생들이 박연폭포 아래에서 모여 이야기하며 함께 시를 지었다. 근래에 여러 유생들이 박연폭포 아래에서 모여 이야기하며 함께 시를 지었다. 어떤 객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으나 지팡이를 짚고 왔으며 의관이 남루하였다. 여러 유생들이 그 사람을 업신여기며 말했다. "그대는 시를 지을 수 있는가?" "그렇다" 이에 먼저 ""의 구를 썼다. 여러 유생들이 냉소하며 말했다. "그대의 시가 어찌 이리 공력을 아끼는가?" 대개 그가 온전히 고인의 구를 쓴 것을 조롱한 것이다. 객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웃지 마시고, 다만 결구를 보라." 즉시 끝을 이어 말했다. "" 온 자리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박연의 형세를 이 시에서 다하였으니 우리들은 더 지을 것이 없다." 마침내 붓을 놓았다. 혹은 그 객이 바로 사인 정민수라 한다. 송도 박연 폭포의 기이하고 장대함이 나라 안에 이름났다. 내가 일찍이 친히 박연을 보고서야 이백의 "" 구가 잘 형용된 것임을 말했다. 정순붕의 시에, ""라 하였고, 오산 차천로의 시에, ""라 하였다. 비록 은하(銀河) 두 글자를 쓰지 않았으나 청홍(晴虹)과 백련(白練) 또한 고어이다. 대개 위의 시는 의미가 좋으나 구절이 졸렬하고, 아래의 시는 구가 호장하나 의미가 적다.는 의미가 좋으나 구절이 졸렬하고, 아래의 시는 구가 호장하나 의미가 적다.)
  • E040  + (금나라 말엽에 시인 양비경이 단풍을 읊은 시는 이렇다. <div cla금나라 말엽에 시인 양비경이 단풍을 읊은 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바다 놀 비도 오지 않는데 수풀가에 깃들고,<br> 들불 바람도 안 부는데 나무 끝에 올랐네.</div></br>문진공 이장용도 또한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황폐한 절간 쓸쓸하여 가을 생각 괴롭고,<br> 얕은 산 두드러져 석양녘에 분명하다.</div></br><div class="critique-text">이 시를 보면 양비경이 늙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div>;/div> <div class="critique-text">이 시를 보면 양비경이 늙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div>)
  • E238  + (금남 최부의 문사는 간고하나 시는 그의 장처가 아니다. 그럼에도 일찍이 송감을 읽고 절구시를 지었다. "" 이 시를 읽는 사람은 그 강개하고 분려한 기상에 감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