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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st of all pages that have property "TextKor" with value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 Since there have been only a few results, also nearby values are displa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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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734  + (원택 신혼은 어려서부터 기이한 신동으로 세상에 이름났다. 이후에 안주 교수가 되어 관서로 부임하려 할 때 그의 어머니가 색을 경계하는 훈계를 하시고 그의 아내도 또한 경고하는 말을 하였다. 신혼이 희롱삼아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이 시를 세상에서 많이 전송하며 좋다 하였다. 그러나 제 4구의 처투풍류(妻妬風流) 네 글자는 자못 완곡함이 없는 말이다. 만약 이를 고쳐서 ""라 하면 맛이 있을 듯하다. 안목 있는 자의 평론을 기다린다.)
  • E571  + (이곡이 서장관으로 중국에 사신갈 때에 길가 청루 위에 네 명의 미인이 주렴 이곡이 서장관으로 중국에 사신갈 때에 길가 청루 위에 네 명의 미인이 주렴 안에서 은근하게 비쳐 보였다. 이곡을 향해 물을 뿌리자, 이곡이 즉시 주머니에서 흰 부채를 꺼내어 절구 하나를 써서 주었다. "" 이곡이 돌아올 때에 미인들이 향기로운 술과 좋은 안주를 준비하여 길에서 맞이하며 사례하였다. 근년에 서장관 조곡이 연경에 갈 때에 도중에 미인을 만났는데 얇은 비단으로 얼굴을 가리고 갔다. 조곡이 흰 부채에 절구 하나를 써서 주었다. "" 조곡은 탕아로, 그 집에 쫓아갔다. 그 미색은 절대적이고, 붉은 비단으로 바지를 만들어 입고는 조곡을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또 우리나라의 한 문사가 중원에 갈 때에 길에서 미인이 나귀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 선비가 문에 기대어 바라보며 두 구의 시를 붙여 미인에게 연구를 청했다. "" 미인이 나귀를 멈추고 이를 이어 주고는 떠났다. 그 두 구는 이러하였다. ""인이 나귀를 멈추고 이를 이어 주고는 떠났다. 그 두 구는 이러하였다. "")
  • E549  + (이색이 중국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급제하고 명성이 중국에 퍼졌다.이색이 중국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급제하고 명성이 중국에 퍼졌다. 어느 절에 이르렀는데, 절의 승려가 예를 갖추며 말했다. "동방의 문장가라는 소문을 익히 들었는데, 중국에서 제일 과에 급제했다니 오늘 다행히 뵙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한 사람이 떡을 가지고 와서 대접했다. 승려가 곧 한 구절을 지어 말했다. "" 라 하고 이색으로 하여금 대구를 짓게 했다. 승소는 곧 떡의 다른 이름이다. 이색이 창졸간에 대구를 짓지 못하고 사례하고 물러나며 말했다. "다른 날 다시 와서 보답하겠습니다." 후에 천 리 밖으로 멀리 유람하다가, 주인이 떡을 들고 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무엇입니까?" 답하기를 "객담입니다." 객담은 술의 다른 이름이다. 이색이 크게 기뻐하며 곧 전날의 구절에 대구를 지었다. "" 반년 후에 돌아와서 그 승려에게 이야기하니 승려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무릇 대구를 얻는 것은 정교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늦고 이름이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한 구절의 교묘함을 얻어서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와서 보답하니, 이것이야말로 기이함 중의 기이함입니다."를 멀다 하지 않고 와서 보답하니, 이것이야말로 기이함 중의 기이함입니다.")
  • E629  + (이익지(李益之)는 어릴 적에 두시(杜詩)를 호음(湖陰)에게 배웠는데 하루는 이익지(李益之)는 어릴 적에 두시(杜詩)를 호음(湖陰)에게 배웠는데 하루는 익지더러 서가 위의 여러 책을 가져오도록 명했다. 그리하여 호음이 그것을 보다가 《춘정집(春亭集)》이 나오니 땅에 던져버렸고, 《매계집(梅溪集)》은 펴보고 웃으며 덮었는데 대개 가볍게 여긴 것이었다. 오직 《점필재집(佔畢齋集)》만은 집어들고 익히 보기를 마지않았다. 익지가 엿보니 모두 뽑아서 줄을 그으니 대개 그들을 좋아하여 소재로 취해 시의 자료로 하려는 것이었다. 언젠가 평생에 가장 마음에 만족하게 여기는 시구를 물었더니</br>산 나무 함께 우니 바람 언뜻 일어나고 / 山木俱鳴風乍起</br>강물 소리 문득 높자 달이 홀로 걸렸네 / 江聲忽厲月孤懸</br>라는 구절을 사람들이 깎은 듯 아름답다고들 하고,</br>산꼭대기에 깜빡이는 별은 조각달과 빛 다투고 / 峯頂星搖爭缺月</br>나무 위에 움직이는 새는 깊은 떨기 숨는고야 / 樹顚禽動竄深蕞</br>라는 시구 역시 시상(詩想)은 교묘하지만 마침내</br>빗기운 노을 눌러 산은 문득 어두워지고 / 雨氣壓霞山忽暝</br>냇빛은 달을 받아 밤에도 밝구나 / 川華受月夜猶明</br>라 한 구절보다는 못하니, 이는 마치 신이 도운 것 같다고 말했다 한다.明 라 한 구절보다는 못하니, 이는 마치 신이 도운 것 같다고 말했다 한다.)
  • E618  + (이전 사람들은 점필재가 여강(驪江)에서 읊은, 십년간의 세상사는 홀로 읊는 이전 사람들은 점필재가 여강(驪江)에서 읊은,</br>십년간의 세상사는 홀로 읊는 시 속에 / 十年世事孤吟裏</br>팔월의 가을빛은 어지러운 숲 사이에 / 八月秋容亂樹間</br>라는 구절을 칭송해 왔다. 그러나 신륵사(神勒寺)에서 지은,</br>상방에서 종 울리니 여룡은 춤을 추고 / 上方鍾動驪龍舞</br>만 구멍에 바람 우니 철봉이 나래 치네 / 萬竅風生鐵鳳翔</br>라 한 구절의 홍량(洪亮)ㆍ엄중(嚴重)함만 같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우주를 버팀직한 시구이다. 그 보천탄즉사(寶泉灘卽事)에서는</br>복사꽃 띄운 물결이 몇 자나 높았는고 / 桃花浪高幾尺許</br>은석은 목까지 잠겨서 어딘지 모르겠네 / 銀石沒頂不知處</br>쌍쌍의 가마우지 여울돌을 잃고 / 兩兩鸕鶿失舊磯</br>물고기 물면 갈대숲으로 들어가네 / 銜魚却入菰蒲去</br>라 했는데 이는 가장 항고(伉高)하며, 《동경악부(東京樂府)》는 편편마다 모두 예스럽다.는 가장 항고(伉高)하며, 《동경악부(東京樂府)》는 편편마다 모두 예스럽다.)
  • M058  + (임금의 수레 아래서 풍운이 일어나, 사람 죽인 것이 흩어져 있는 삼 베듯했네. 그러나 좋은 때를 저버릴 수 없어, 흰 술에 국화를 띄우네.)
  • E038  + (장간공 장일의 승평연자루시는 이렇다. <div class="poetry장간공 장일의 승평연자루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바람과 달 처량한 영자루,</br>낭관이 한번 간 뒤 꿈조차 아득하다.</br>당시 좌중의 손들 늙음을 어찌 싫어하는가,</br>누대 위의 미인도 또한 흰 머리가 되었는데.</div> </br>밀직 곽예의 수강궁일요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여름엔 서늘하게 겨울엔 따듯하게 깨끗하고 살찌게 길렀는데,</br>무슨 일로 구름을 뚫고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가.</br>바다제비는 일찍이 낟알 한톨 주지 않았는데,</br>해마다 곁에 돌아와서 대들보 위를 날아다닌다.</div> </br>이승휴의 영운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한조각 홀연히 바다 속에서 생겨,</br>동서남북 가로세로 멋대로 다니네.</br>장마되어 마른 곡식 살린다 하면서,</br>공연히 중천의 햇빛과 달빛만 가리네.</div> </br>밀직 정윤의의 증렴사라는 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이른 새벽 말을 달려 외로운 성에 들어가니,</br>울타리가엔 사람 없고 살구만 익었구나.</br>뻐꾸기는 나라일 급한 줄도 모르고서,</br>수풀가에서 밭 갈라고 하루 종일 권하고 있네.</div> </br><div class="critique-text">이 시들은 사람들이 즐겨 일컫는 것이다.</div></br><div class="critique-text">그러나 장일의 시는 옛일이 느꺼워 지은 것이니 다른 뜻이 없다.</div></br><div class="critique-text">그 나머지 세 편은 모두 풍유를 간직하고 있는데</div></br><div class="critique-text">정윤의, 곽예의 시는 풍유가 드러나지 않고 완곡하다.</div>class="critique-text">그 나머지 세 편은 모두 풍유를 간직하고 있는데</div> <div class="critique-text">정윤의, 곽예의 시는 풍유가 드러나지 않고 완곡하다.</div>)
  • E253  + (적암(適菴) 조신(曺伸)이 황폐한 절에 들어가 율시 한 수를 지었다. 그 경련(頸聯)에, 길에는 올 가을 낙엽 덮였고 / 逕覆今秋葉 부엌에는 전일 불 때던 나무 남았네 / 厨餘去日樵 하였는데, 구법(句法)이 기기 절묘하여 사람들이 서로 전하며 읊었다. 그러나 적암이 스스로 자기 작품을 뽑은 것에는 이 시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젊어서 지어 만족스럽지 않아서 버린 것이나 아니겠는가?)
  • E201  + (정덕 기사년(1509, 중종 4) 무렵에 삼가 현령(三嘉縣令)이 있었는데, 정덕 기사년(1509, 중종 4) 무렵에 삼가 현령(三嘉縣令)이 있었는데, 그 성명을 잊어버렸으나 정사(政事)가 자못 탐혹(貪酷)하였다. 마침 병으로 죽어 관(棺)을 내어 발인하려고 하는데, 고을 사람이 관머리에 시를 써 붙이기를,</br>저승의 다섯 귀신이 뭇 백성을 학대하니 / 冥間五鬼虐烝民</br>염라대왕이 천라를 시켜 악독한 몸을 죽였구나 / 帝使天羅殺毒身</br>이제부터는 백성들의 시름과 원한이 끊겼으니 / 從此閭閻愁怨絶</br>요순시대의 태평한 봄 이로다 / 堯天舜日太平春</br>하였다. 관찰사가 그 말을 듣고, “현령이 참으로 나쁘다. 그러나 읍인(邑人)도 잘못하였다.” 하고, 그 시를 지은 자를 찾아서 잡으라고 하였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이 시를 살펴보건대, 비록 잘 짓지는 못했으나 재물을 탐하고 독직(瀆職)하는 자의 경계가 될 만하다. 잘 짓지는 못했으나 재물을 탐하고 독직(瀆職)하는 자의 경계가 될 만하다.)
  • E172  + (정덕(正德) 신사년에 가정(嘉靖) 황제가 즉위하자, 수찬(修撰) 당고(唐皐)정덕(正德) 신사년에 가정(嘉靖) 황제가 즉위하자, 수찬(修撰) 당고(唐皐) 등이 와서 등극(登極)의 조서를 선포할 때, 사신을 접대하였던 용재(容齋)이택지(李澤之) 가 처음 연회에서 자리를 같이하며 술잔을 들어 앞으로 내어 밀자, 당고가 팔을 뻗어 그 잔대를 잡고 약간 밀쳐서 물러서게 하니, 가까이 오는 것을 꺼리는 뜻이 있는 듯하였다. 당고의 음락시(飮酪詩)가 있었는데, 용재가 차운(次韻)하여,</br>왕가 8백 리에 비하면 / 若比王家八百里</br>서생이 너를 용서한 것이 또한 많다 / 書生貸汝亦云多</br>하였더니, 이때부터 교제가 밀접해지고 늘 시단의 노장이라고 칭찬하였다. 문장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요즈음 중국에 어떤 예부랑(禮部郞)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서적을 구입하는 것을 가혹하게 금지하고, 문장이 해외로 너무 많이 흘러나간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를 예의와 문헌이 있는 나라라고 하여 이적(吏狄)들처럼 낮추어 보지 않는 것은 이상과 같은 까닭이 있어서이니, 진실로 우리 나라 문인들로 하여금 중국에 들어가 여러 선비들 사이에서 고하(高下)를 정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저들에게 모두를 양보하겠는가. 고금에 우리를 이적들처럼 대우하지 않았던 것은 명확한 일이다.양보하겠는가. 고금에 우리를 이적들처럼 대우하지 않았던 것은 명확한 일이다.)
  • E045  + (정언 진화의 영류시는 이렇다. <div class="poetry-tex정언 진화의 영류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봉성 서쪽 가에 일만 가지 노란 버들,<br>봄 근심 묶어서 어두운 그늘을 만들었네.<br>끝없이 바람이 불고 또 불어,<br>연기와 비를 섞어 깊은 가을에 이르겠네.<br></div></br><div class="critique-text">이 시는 정치가 유렿다.</div></br>그런데 당나라 이상은의 유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일찍이 봄바람과 같이 춤자리를 휩쓸면서<br>개인 정원에서 즐겨 놀며 애를 태울 때<br>어찌 즐겨하랴! 가을이 되어<br>사양이 되었는데 매미까지 우는 것은.<br></div></br><div class="critique-text">진화의 시는 이 시를 본받아 지은 것이다.</div></br>그러나 황산곡이 말하기를, “<div class="poetry-text">남을 따라 계책을 세우면 끝내 남에게 뒤질 것이고, <br>스스로 일가를 이루어야 비로소 핍진할 것이다.</div>”고 하였는데 정말 그렇다. 것이다.</div> 그러나 황산곡이 말하기를, “<div class="poetry-text">남을 따라 계책을 세우면 끝내 남에게 뒤질 것이고, <br>스스로 일가를 이루어야 비로소 핍진할 것이다.</div>”고 하였는데 정말 그렇다.)
  • E169  + (조사(詔使) 예겸(倪謙)이 왔을 때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가 그와 조사(詔使) 예겸(倪謙)이 왔을 때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가 그와 더불어 교류하였다. 신숙주가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는데 그 표지에는 작은 해서(楷書) 글씨로 범옹(泛翁)문충공의 자(字) 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으니, 이것은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이 쓴 글씨였다. 예겸이 그것을 보고, “필법(筆法)이 아주 신묘한데 누가 쓴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문충(文忠)이 거짓말로, “나의 벗 강경우(姜景遇)가 쓴 것이오.” 라고 대답하였다. 예겸이 종이를 꺼내어 주며 그 사람의 글씨를 받아 줄 것을 청하였다. 문충이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의 글씨를 받아 주었더니, 예겸이 말하기를, “같은 사람의 글씨가 아닙니다.” 하였다. 세조가 이 말을 듣고, “왕손(王孫)과 공자(公子)는 건전한 문예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니 예술에 있어서 기피할 까닭이 무엇인가.” 하고, 비해당을 시켜 글씨를 써서 주도록 하였다. 그 후에 우리 나라 사람이 중국에 가서 좋은 글씨를 구하려 하면 중국 사람들이, “당신 나라에 제일가는 사람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멀리 와서 글을 구입하려 하오.” 하였다. 이래서 청지(淸之)비해당의 자(字) 의 글씨가 중국에서 중요시되게 된 것이다. 진감이나 예겸 같은 사람은 감식력(鑑識力)이 신같이 깊어서 한 자 한 구절을 보고도 능히 진짜와 가짜를 판별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귀한 존재였다.절을 보고도 능히 진짜와 가짜를 판별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귀한 존재였다.)
  • E349  + (조용문이 일찍이 문헌서원을 지나는데, 제생(諸生)들이 《심원록》을 가지고 제조용문이 일찍이 문헌서원을 지나는데, 제생(諸生)들이 《심원록》을 가지고 제명(題名)하기를 청하므로, 용문은 절구 한 수만을 써 주었다. 모두 서로 의아하여 누구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가 뒤에 비로소 들어 알고 보니, 바로 용문이 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br>나그네 길에 방황하며 오래 돌아가지 못하니 / 客路栖栖久未還</br>하늘이 서해의 산을 다 보게 하였네 / 天敎看盡西海山</br>성명을 서원에 남길 필요없는 것은 / 不須姓字留書院</br>미친 이름이 세상에 가득하기 때문이오 / 贏得狂名滿世間은 / 不須姓字留書院 미친 이름이 세상에 가득하기 때문이오 / 贏得狂名滿世間)
  • E648  + (조지세(趙持世 지세는 조위한(趙緯韓)의 자)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명(地名)조지세(趙持世 지세는 조위한(趙緯韓)의 자)는 일찍이</br>“우리나라 지명(地名)은 시(詩) 속에 들여와도 우아한 맛이 없다. 그러나 중국의,</br>대기는 운몽택을 쪄서 올리고 / 氣蒸雲夢澤</br>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네 / 波撼岳陽城</br>와 같은 시구를 보면 무릇 열 글자 중에서 여섯 글자가 지명이고, 그 위에 네 글자를 보탠 것이요, 그 힘쓴 곳은 다만 증(蒸)자와 감(撼)자, 이 두 글자뿐이니 시를 짓기가 어찌 수월하지 않은가.”</br>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또한 일리는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노 정승의 시인</br>길은 평구역에서 다해 버리고 / 路盡平丘驛</br>강물은 판사정에서 깊어진다네 / 江深判事亭</br></br>청파의 저녁에 버들빛 짙고 / 柳暗靑坡晩</br>백악의 봄날에 하늘은 맑네 / 天晴白嶽春</br>같은 구절은 또한 대단히 훌륭하다. 이것은 글귀 만드는 묘법에 있을 뿐이나 쇠로서 금을 만들기에 무엇이 해로우랴?것은 글귀 만드는 묘법에 있을 뿐이나 쇠로서 금을 만들기에 무엇이 해로우랴?)
  • E298  + (중국에 나만호(羅萬湖)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詩)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중국에 나만호(羅萬湖)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詩)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임오년(1582, 선조 15)에 황태자가 탄생하였을 때에 조서를 받들고 우리 나라에 오게 되었다가, 나이 늙었기 때문에 황홍헌(黃洪憲) 공과 바꾸게 되었다. 나(羅)의 ‘계문에서 사냥을 보다[薊門見獵]’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br>눈에 띄는 언덕들은 백 번 전쟁한 땅 / 滿目邱墟百戰餘</br>나그네 심정은 시든 풀처럼 처절하다 / 旅情衰草共悽如</br>차운 산 옛 토성에 가을 사냥 만났으며 / 寒山古堠逢秋獵</br>먼 물 외로운 등불에 밤 고기잡이 보이더라 / 遠水孤燈見夜漁</br>집은 소상강에 저녁 비도 많은 곳 / 家在瀟湘多暮雨</br>기러기 분포에서 날아오나 고향 편지 없더라 / 雁來湓浦少鄕書</br>친구는 한 번 이별에 삼천 리 / 故人一別三千里</br>슬프다 동과 서에 정처 없구나 / 惆悵東西未定居</br>구법(句法)이 원활하여 이른바 판자 위에 탄환(彈丸) 구르는 것같다. 이것은 전해 들은 것이고, 그의 작품을 많이 얻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이것은 전해 들은 것이고, 그의 작품을 많이 얻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 E203  + (지사(知事) 안침(安琛)의 영암군(靈岩郡)의 배회루(徘徊樓)에, 배회루 위에지사(知事) 안침(安琛)의 영암군(靈岩郡)의 배회루(徘徊樓)에,</br>배회루 위에 달이 배회하니 / 徘徊樓上月徘徊</br>나그네 배회함 또한 유쾌하도다 / 客子徘徊亦快哉</br>옥토끼는 몇 해나 선약을 찧고 / 玉兎幾年仙藥搗</br>소아(달의 딴 이름)는 어디에서 거울갑을 여는고 / 素娥何處鏡奩開</br>흔들리는 물결이 백 갈래로 흩어지는 동파수에 / 搖波散百東坡水</br>비친 그림자 셋이 되어 이태백의 잔이로다 / 對影成三太白杯</br>바로 밤중이 되니 하늘이 씻은 듯하고 / 直到夜深天似洗</br>바람이 불어 보내니 계향이 오도다 / 好風吹送桂香來</br>하였는데, 그 당시 가작(佳作)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파백태백삼(東坡百太白三)의 문구는 본래 이 문순공(李文順公)의 말이고, 또 안침의 창녕(昌寧)의 〈추월헌시(秋月軒詩)〉가 있는데, 그 한 연에,</br>흔들리는 물결은 흩어져 동파의 백 갈래가 되고 / 搖波散作東坡百</br>비친 그림자는 참으로 태백의 삼을 이루도다 / 對影眞成太白三</br>하였다. 무슨 새로운 말이라고 여러 번이나 썼는가.루도다 / 對影眞成太白三 하였다. 무슨 새로운 말이라고 여러 번이나 썼는가.)
  • E546  + (참판 박민헌이 '촉석루 시에 차운하여'에서, ""라 하였다. 다른 차운한 사람들이 모두 이에 미치지 못했다. 공은 당세에 시명이 있었으며 시학은 두보를 온전히 배웠다. 그러나 그의 사고 가운데 여러 작품들을 보면 모름지기 사람들의 뜻에 만족스럽지 못하다. 믿을 만하구나, 보는 것이 듣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 E059  +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양촌(陽村)에 이어 문형(文衡)을 맡았으나 문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양촌(陽村)에 이어 문형(文衡)을 맡았으나 문장은 나약하였다. 문사 김구경(金久冏)은 시를 잘 짓기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항상 춘정이 지은 시를 보고 입을 막고 크게 웃었다. 하루는 춘정이 휴가를 얻어 시골에 있는 별장에서 놀면서 우연히 시 한 구절을 지었는데,</br>허백한 것이 하늘을 이으니 강가엔 새벽이 되었고 / 虛白連天江渚曉</br>암황한 것이 이 땅에 서리니 들에는 버들가지 늘어진 봄이 왔구나 / 暗黃浮地柳郊春</br>하고, 아름다운 연구(聯句)를 얻었다고 자부하며 장차 상경하여 임금께 상주(上奏)하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구경에게 말했더니, 구경은 말하기를, “기가 아주 졸렬한데 만약 이 시를 상주한다면 이는 임금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옛날에 지은 시에,</br>역정에서 술잔을 잡으니 산이 문 앞에 당(當)해 있고 / 驛亭把酒山當戶</br>강군에서 시를 읊조리니 비는 배에 가득 차는도다 / 江郡哦詩雨滿船</br>라고 한 것이 있으니, 이런 것이 상주함직한 시이다.”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춘정에게 알리니, 춘정은 말하기를, “당(當) 자가 온당치 못하니 임(臨) 자로 고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그 사람이 또 이를 구경에게 얘기하니, 구경은, “사람들이 춘정은 시를 알지 못한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고시(古詩)에,</br>남산이 문에 당하니 더욱 분명하도다 / 南山當戶轉分明</br>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그 사람이 또 춘정에게 말하니, 춘정은, “고시에,</br>청산이 황하에 임(臨)하였도다 / 靑山臨黃河</br>하지 않았는가. 구경 그 자신이 시를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내가 지은 것을 비웃는다.” 하였다. 그 자신이 시를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내가 지은 것을 비웃는다.” 하였다.)
  • E216  + (충재(盅齋) 최숙생(崔淑生)의 의주 취승정시(聚勝亭詩)에, 말굽 같은 서해가충재(盅齋) 최숙생(崔淑生)의 의주 취승정시(聚勝亭詩)에,</br>말굽 같은 서해가 막다른 모퉁이에 이르렀는데 / 馬蹄西海到窮陲</br>백척 높은 정자 자미(북두의 북쪽 별)에 닿을 듯 / 百尺危亭近紫微</br>난간에 기대어 좋은 경치 바라보며 / 且倚雕欄看勝景</br>구슬발이 밝은 햇빛을 가리지 말라 하네 / 不敎珠箔障晴暉</br>가로지른 압록강이 하늘에 닿아 있고 / 江橫鴨綠兼天暉</br>버들개지 노랗게 비 맞아 살쪘구나 / 柳暗鵝黃着雨肥</br>문득 옥당을 생각하니 이 몸 만리 밖에 있는데 / 忽憶玉堂身萬里</br>봉래산 어느 곳에 오색 구름 나는고 / 蓬萊何處五雲飛</br>하였는데, 퇴휴당 소정승이 나에게 현판의 시를 읽게 하고 이 한 편에 이르러 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 늙은이의 시는 시다운 시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그러나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시에,</br>웅번 예부터 변방에 건장한데 / 雄藩自古壯邊陲</br>새로 지은 정자 산허리에 마주 섰네 / 新搆華亭對翠微</br>절역(멀리 떨어져 있는 땅)의 구름 안개 취한 눈에 들어오고 / 絶域雲煙來醉眼</br>성 마루에 핀 꽃버들은 봄빛을 자랑하네 / 層城花柳媚春凈</br>산을 두른 넓은 들 그림같이 푸르고 / 山圍廣野靑如畫</br>비 지난 긴 강은 푸르기가 더하네 / 雨過長江綠漸肥</br>참지 못하여 정자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 叵耐登臨還望遠</br>고향 생각 밤낮 없이 남쪽으로 날아가네 / 歸心日夜正南飛</br>하였는데, 나의 좁은 소견으로 본다면 조위의 시가 어찌 충재만 못하겠는가. 하였는데, 나의 좁은 소견으로 본다면 조위의 시가 어찌 충재만 못하겠는가.)
  • E564  + (퇴계 이황이 일찍이 남명 조식과 함께 연회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황이 말했퇴계 이황이 일찍이 남명 조식과 함께 연회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황이 말했다. "주색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술은 오히려 참기 쉽지만 색욕은 참기 어렵다. 소강절의 시에 '색은 능히 사람을 탐닉하게 한다(色能使人嗜)'라 하였으니, 역시 그 참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자네는 색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식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색욕에 있어서는 패전한 장군이니, 묻지 말아주시오." 이황이 말했다. "나는 젊었을 때에는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었지만, 중년 이후로는 자못 참고 있으니, 자제력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송익필도 자리에 있었는데, 지위는 낮지만 글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송익필이 말했다. "소생이 일찍이 읊은 것이 있사온데, 대인의 한 번 들어주심을 바랍니다." 이에 외워서 들려주었다. 시는 이러하였다."" 용사한 뜻이 깊고 절실하였다. 이황이 읊으며 칭찬하였고 조식은 웃으며 말했다. "이 시는 패군장의 경계로 삼기에 적합하다."하였고 조식은 웃으며 말했다. "이 시는 패군장의 경계로 삼기에 적합하다.")
  • E354  + (퇴계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 서울을 드나들 때 여주(驪江)의 범사정(泛槎亭)을퇴계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 서울을 드나들 때 여주(驪江)의 범사정(泛槎亭)을 지나다가 모재를 찾아 뵈었다. 《퇴계집》에, “모재를 만난 뒤로 비로소 정인군자(正人君子)의 도리를 알았다.” 하였다. 여주의 승려가 시축을 가지고 영남으로 퇴계를 찾아 뵈었는데, 그 시축에 모재와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두 노인의 절구가 있었다. 퇴계가 차운하기를,</br>두 노인 신선되어 떠난 지 몇 해이던가 / 二老仙遊知幾年</br>매화 피는 섣달에 승려가 나를 찾아왔네 / 僧來見我臘梅天</br>옛적 문하에 들어간 나그네 스스로 한탄하며 / 自嗟疇昔登門客</br>눈처럼 흰머리로 남은 시에 눈물 흘리네 / 淚灑遺篇雪滿顚</br>하였다.疇昔登門客 눈처럼 흰머리로 남은 시에 눈물 흘리네 / 淚灑遺篇雪滿顚 하였다.)
  • E687  + (학사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평사(評事 북평사(北評事))로 함경도(咸학사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평사(評事 북평사(北評事))로 함경도(咸鏡道)에 부임하자 손곡이 〈새하곡(塞下曲)〉 3수로 송별하였다. 그 첫 수에 이르기를,</br></br>도위가 군사를 나눠 밤에 적진 습격하니 / 都尉分軍夜斫營</br>한나라의 쇠북소리 변성을 진동하네 / 漢家金鼓動邊城</br>아침에 항복한 오랑캐 얘기 들으니 / 朝來更聽降胡說</br>서쪽 아래 음산에는 복병이 있다네 / 西下陰山有伏兵</br></br>하였는데, 한 때에 전하여 읊어졌다.</br>내가 일찍이 당나라 우곡(于鵠)의 시를 보니,</br></br>물 건너 오랑캐 말을 들으니 / 度水逢胡說</br>사막 북쪽에 복병이 있다네 / 沙陰有伏兵</br></br>라는 구절이 있었고, 권송계(權松溪 권응인(權應仁))의 시〈유해상인가(遊海上人家)〉에는,</br></br>갈매기가 잘못 난간에 날아드네 / 鷗飛誤入闌</br></br>라는 구절이 있었다. 또 나는〈하월호환취각(何月湖環翠閣)〉시에 나오는,</br></br>사금이 물을 차지하여 한가히 서로 따르다 / 沙禽占水閑相趁</br>성긴 발에 잘못 들어갔다 돌아나오네 / 誤入疏簾靜却廻</br></br>라는 구절도 보았다. 옛날에 유원보(劉原父)가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을 희롱하며 말하기를,</br>“영숙(永叔 구양수의 자(字))이 한유(韓愈)의 문장에서 공취(公取 공공연히 취함)한 것이 있고 절취(竊取 몰래 취함)한 것이 있는데, 공취한 것은 대강 셀 수 있지만 절취한 것은 셀 수가 없습니다.”</br>하였는데, 송계는 칠언 두 구절을 요약하여 오언 일구를 이루어 다만 그 뜻만을 취했을 뿐이니 절취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손곡은 고구(古句)를 완전히 베껴 거기에 몇 글자만 더해 한때에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자 했으니, 공취와 절취가 아니고 발총수(發塚手 무덤을 파헤친 솜씨)이다.고자 했으니, 공취와 절취가 아니고 발총수(發塚手 무덤을 파헤친 솜씨)이다.)
  • E628  + (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br>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 때 / 昔年窮寇此殲亡</br>혈전 벌인 신검(神劍)에는 붉은 빛깔 둘렸다네 / 鏖戰神鋒繞紫芒</br>한의 깃대 꽂힌 흔적 돌 틈에 남아 있고 / 漢幟豎痕餘石縫</br>얼룩진 옷 적신 피는 노을 빛을 물들이네 / 斑衣漬血染霞光</br>소슬바람 살기 띠어 수풀 뫼는 엄숙하고 / 商聲帶殺林巒肅</br>도깨비불 음기 타니 성루는 묵어졌네 / 鬼燐憑陰堞壘荒</br>동방 사람 어육(魚肉) 면킨 우 임금의 덕일진댄 / 東土免魚由禹力</br>소신이 해를 그려 어찌 감히 칭찬하리 / 小臣摸日敢揄揚</br>기걸(奇杰)하고 혼중(渾重)하니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절강(浙江)의 오명제(吳明濟)가 이 시를 보고 비평하기를,</br>“그대의 재주는 용을 잡을 만한데 도리어 개를 잡고 있으니 애석하다.”</br>고 했는데 대개 당시(唐詩)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
  • E587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사신의 작품들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감히 가리지 못하고 받아서 간행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 사신 중에 글을 잘한다 일컫는 자는 필경 공용경인데 주지번에게 그를 물으니 일찍이 성명을 듣지 못했다 한다. 기순과 당고는 시어가 아름답고 굳세지만 또한 시가에 대하여 능한 사람은 아니다. 장녕은 다소 청려한 듯하나 또한 취약하여 골격이 없어서 끝내 소가에 귀결된다. 주지번의 시는 조잡하여 형태가 없으니 오히려 사신 웅화의 위약함만도 못하다. 그 밖의 사람들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 문인들이 매번 수창할 적에 대부분 미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대소정편의 다름이 있다. 원접사 서거정이 기순에 대해 감히 선창하기를 마치 도전하는 듯하게 하였지만 결국 ""구에 곤란을 겪었다. 율곡 이이가 조롱하여 말하기를 "사가 서거정은 씨름하는 사람과 같으니 먼저 다리를 걸고 후에 땅에 넘어뜨린다." 아랫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는 마땅히 받들어 접대하고 수창하여야 할 따름인데 어찌 감히 선창하겠는가? 이는 참으로 식자의 말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 그 시절 문인들 중 다소 시에 능한 자들을 모아서 수답하게 하였는데 그 택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사신의 웃음을 산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정사룡은 비록 시짓는 장수라 칭하지만 그 시가 이루어진 시에 견강부회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 오직 이행만이 혼연히 글을 완성하였으나 격조가 매우 비루하여 과체시의 류에 불과하였다. 지을 때마다 잠시 집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응수하였는데 그 대구가 잘 어울려 흠이 없었으니 평소에 익숙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소세양과 이희보는 비록 당시의 종사에게는 굴복하였으나 지금 세상에 동문을 읽고 사운시를 익히는 유근과 같은 자와는 함께 논할 수 없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 C006  + (후세에 그에 대한 의신(疑信)이 결정되지 못하는데 혹자는, 동정에 달이 떨어지니 고운이 돌아간다 라는 글귀로 최치원의 저작이라는 증거를 댄다. 그러나 또한 그것으로는 단안을 내릴 수가 없다.)
  • C005  +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
  • E004  +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었고, 또《계원필경(桂苑筆耕)》10권을 간행하였다. 나는 일찍이 중국 사람은 포용력이 넓어서 외국 사람의 글이라고 경홀하게 여기지 않고, 이미 사책에 실었을 뿐더러, 또 그 문집이 세상에 행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 갸륵하게 여겼다. 그러나 문예열전(文藝列傳)에 최치원을 위하여 특별히 그 전(傳)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 뜻을 모르겠다. 혹 그의 사적이 전을 설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겨서일까? 최치원은 12세에 바다를 건너 당 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여 한 번 과거를 보아 갑과로 급제하였고, 드디어 고변(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서는 황소에게 격문을 보내니 황소의 기가 꺾였으며, 뒤에 벼슬이 도통순관 시어사(都統巡官侍御史)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려 할 때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이 유선가(儒仙歌)를 주었는데, 그 한 구에, </br></br><div class="poetry-text">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br></br>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네</div></br></br>하였고, 그의 자서(自敍)에도, “무협 중봉(巫峽重峯)의 해에 보잘것없는 몸으로 중국에 들어 왔고, 은하 열수(銀河列宿)의 해에 비단옷 입고 고국에 돌아왔다.” 하였으니, 대개 열두 살에 당 나라로 들어갔다가 스물여덟 살에 고국으로 돌아왔음을 말한 것이다. 그 행적이 이처럼 뚜렷하니, 이것으로 전을 설치한다면 예문지에 실린 심전기(沈佺期)ㆍ유병(柳幷)ㆍ최원한(崔元翰)ㆍ이빈(李頻) 등의 반장 정도되는 열전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만약 외국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지(志)에는 써야 할 것이다. 번진호용열전(藩鎭虎勇列傳)에서는 이정기(李正己)ㆍ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다 고려 사람인데도 각각 그 전을 만들어 그 사실을 소상하게 기록했는데, 어째서 문예열전에서만 최치원을 위하여 그 전을 설치하지 않았는가? 내가 사의(私意)로 헤아리건대, 옛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시기함이 없지 않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의 외로운 몸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사들을 압도했음에랴. 만일 전을 설치하여 바른 대로 그 사적을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
  • E222  + (가정 갑오년에 소퇴휴(蘇退休)가 진하사(進賀使)로 연경(燕京)에 갔는데, 서가정 갑오년에 소퇴휴(蘇退休)가 진하사(進賀使)로 연경(燕京)에 갔는데, 서반(序班)의 무리가 공이 문묘(文廟)에 배알한 것과 즉사(卽事)에 대한 두 시(詩)를 제독주사(提督主事)와 상서(尙書) 하언(夏言)에게 보이니, 하언이 보고 말하기를, “일찍 재주가 있는 줄을 알았다면 마땅히 특별한 예로 대접하였을 것을.” 하고, 드디어 자신의 시고(詩稿) 한 권을 주었다. 돌아와서 공이 그 일을 아뢰었다. 그때 이임(李任)이 대사간으로 있었는데, 논박하여 아뢰기를, “소모(蘇某)가 외람되게 추악한 시를 가지고 중국에 자랑하여 보였으니, 청컨대 그 죄를 추궁하소서.” 하였으나, 중종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 문묘에 배알한 시에 이르기를,</br>새벽에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고 소왕을 뵈오니 / 晨起衣冠謁素王</br>태평스러운 현송이 양양한 것이 기쁘도다 / 太平絃誦喜洋洋</br>덕이 높으니 천년의 향사를 폐하지 않고 / 德尊不廢千年享</br>도가 크니 두어 길의 담을 엿보기 어렵도다 / 道大難窺數仭墻</br>단 위의 살구 꽃은 붉은 것이 반은 떨어지고 / 壇上杏花紅半落</br>뜰 앞의 노송나무는 푸른 것이 줄을 이루었도다 / 庭前檜樹翠成行</br>평생에 다만 홍안을 노래할 줄만 알았는데 / 平生只會歌鴻雁</br>오늘날 돌북을 어루만지고 있다 / 今日摩挲石鼓傍</br>하였고, 그 즉사(卽事)의 시에 이르기를,</br>맞고 전송하는 잔치가 열흘 동안 열리니 / 宴開迎餞一旬間</br>3월 황주에 문득 돌아오지 못하였다 / 三月皇州却未還</br>버들개지는 쇠한 얼굴의 귀밑털보다 희고 / 柳絮白於衰容鬢</br>복숭아 꽃은 붉기가 미인의 얼굴보다 낫다 / 桃花紅勝美人顔</br>봄 수심은 암암하니 빈 객관에 머무르고 / 春愁黯黯延空館</br>돌아가는 흥은 편편하여 고향에 떨어진다 / 歸興翩翩落故山</br>조만간 공사를 마치게 되면 / 早晩句當公事了</br>옷을 털고 길게 휘파람 불며 진관을 나가리라 / 拂衣長嘯出秦關</br>하였다. 상고하건대, 이 시는 우연히 하공(夏公)의 눈에 띤 것이니 중국에 자랑하여 보였다는 것은 또한 지나치지 않은가. 하공이 마음으로 이미 허여(許與)하여 그의 시고까지 주었으니, 추악한 시로 볼 것은 아닐 것이다.허여(許與)하여 그의 시고까지 주었으니, 추악한 시로 볼 것은 아닐 것이다.)
  • E179  + (가정(嘉靖) 신해년 가을 내가 이부랑(吏部郞)으로서 관서(關西) 지방에 사명가정(嘉靖) 신해년 가을 내가 이부랑(吏部郞)으로서 관서(關西) 지방에 사명(使命)을 띠고 갔을 때에 기성(箕城 평양)의 기생 동정춘(洞庭春)과 정을 나누었다가 조정에 돌아왔는데, 그 후 동정춘이 편지를 보내기를, “님을 사모하나 보지 못하니, 생이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겠소. 차라리 죽어서 함께 묻히기라도 바라니, 멀지 않아 선연동(嬋娟洞)으로 가겠나이다.” 하였다. 선연동은 기성 칠성문(七星門) 밖에 있는 곳으로, 평양 기생이 죽으면 모두 여기에 장사지낸다. 내가 장난삼아 한 구를 지어 보냈으니,</br>종이 가득 쓴 글 모두 맹세한 말 / 滿紙縱橫摠誓言</br>나도 훗날 저승에서 만나기로 기약하네 / 自期他日共泉原</br>장부도 한번 죽음을 면하기 어려우니 / 丈夫一死終難免</br>마땅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어 보리 / 當作嬋娟洞裏魂</br>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동정춘이 병으로 죽었는지라, 내가 장난삼아 다시 율시 한 수를 짓기를,</br>생이별에 길이 슬픔에 젖었으니 / 生別長含惻惻情</br>어찌 사별까지 생각했으리. 문득 목이 맺히네 / 那知死別忽呑聲</br>부음을 듣자마자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 乍聞凶訃腸如裂</br>가만히 목소리와 용모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네 / 細憶音容淚自傾</br>편지 몇 번이고 패수에서 왔건마는 / 書札幾曾來浿水</br>꿈에도 기성에는 가지 못했네 / 夢魂無復到箕城</br>선연동에 묻힌다는 장난말이 예언이 되었으니 / 嬋娟戱語還成讖</br>저승에서 같이 지내자는 맹세 저버려 부끄럽소 / 愧我泉原負舊盟</br>하였더니, 벗들이 보고서 웃었다. 기미년 봄에 내가 호서(湖西) 지방 관찰사로 있을 때 참판 권응창(權應昌) 공이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어서 그의 서제(庶弟)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이 따라가 있었다. 내가 홍주에 가던 날 송계가 고을 사람에게 가르치던 가요율시(歌謠律詩) 두 수를 주었는데, 그 끝구에,</br>인생은 뜻대로 남북이 없는 것이니 / 人生適意無南北</br>선연동의 혼만 되려 하지 마소 / 莫作嬋娟洞裏魂</br>하였는데, 간절하고도 온당하여 의미가 있었으니, 그때 내가 홍주 기생 옥루선(玉樓仙)을 사랑하였으므로 송계의 시는 징험이 된다. 내가 홍주 기생 옥루선(玉樓仙)을 사랑하였으므로 송계의 시는 징험이 된다.)
  • E003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이 있다. 그러므로 동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이 있다. 그러므로 동방학자들은 모두 그를 유종(儒宗)으로 여긴다.<br />그가 지은 비파행(琵琶行) 한 수가 《당음(唐音)》유향(遺響)에 실려 있는데 작자는 무명씨로 적혀 있다. 후세에 그에 대한 의신(疑信)이 결정되지 못하는데 혹자는,<br /><div class="poem font-weight-light"><br /> 동정에 달이 떨어지니 고운이 돌아간다<br /></div><br />라는 글귀로 최치원의 저작이라는 증거를 댄다. 그러나 또한 그것으로는 단안을 내릴 수가 없다.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檄文) 한 편과 같은 것은 비록 사적(史籍)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죽이기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벌써 죽이기를 의논했다.’라는 대문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와서 무릎을 꿇었다 하니,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
  • E051  + (그 뒤에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이 행인(行人) 장근(張瑾)과 함께그 뒤에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祈順)이 행인(行人) 장근(張瑾)과 함께 와서 문묘(文廟)에 갔다. 호부는 순근(純謹) 화이(和易)하고 시와 부를 잘하였는데, 임금이 매우 후하게 대접하니 호부가 임금의 의채(儀采)를 흠모하여, “참다운 천인(天人)이다.” 했다. 노선성(盧宣城 노사신(盧思愼))과 서달성(徐達成)이 관반(館伴)이 되고 내가 홍겸선(洪兼善)ㆍ이차공(李次公)과 더불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대기하고 있을 적에 서달성이 말하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데 이는 모두 오래 전부터 지어둔 것일 것이다. 내가 먼저 시를 지어 차운하라고 청하면 반드시 그가 크게 낭패할 것이다.” 하였다. 한강에서 놀던 날 제천정(濟川亭)에 오르자 달성이 시 몇 수를 내보이면서, “대인의 뛰어난 운을 제가 도저히 화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서투른 글을 엮으니 화답을 바랍니다.” 하니, 호부가 미소하면서 한 번 보고 붓을 들어 내리쓰는데, 그 글에 고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br>백제의 지형은 물에 임하여 다하였고 / 百濟地形臨水盡</br>오대의 천맥은 하늘에서 왔다 / 五臺泉脈自天來</br>라는 글귀라든가</br>고루에 기대었으나 정을 다하지 못해 / 倚罷高樓不盡情</br>다시 춘색을 끌어당겨 밝은 허공에 띄우네 / 又携春色泛空明</br>사람은 죽엽배 속에서 취하고 / 人從竹葉杯中醉</br>배는 양화도 어구를 향해 가로지르네 / 舟向楊花渡口橫</br>라는 글귀 같은 것이다. 또 〈강지수사(江之水辭)〉를 지으면서 배를 타고 잠령(蠶嶺 남산(南山))까지 흘러내려 가도록 글 읊는 것을 그치지 않으니, 달성이 담이 내려 앉아 사모(紗帽)를 젖혀 쓰고 길게 신음할 뿐이요, 김문량(金文良)은 혀를 내민 채 거두지도 못하고서, “노적(老賊)이 너무 심하게 사람을 속였구나. 근래에 내가 침[針灸]를 맞지 않아서 시사(詩思)가 메말라 이와 같은 괴로움을 받을 따름이다.” 하고, 한마디도 말을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로움을 받을 따름이다.” 하고, 한마디도 말을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 C005  +
  • C046  + (그러나 장일의 시는 옛일이 느꺼워 지은 것이니 다른 뜻이 없다.)
  • E408  + (근래 규수(閨秀)의 작품으로는 조 승지 원(趙承旨瑗)의 첩인 이씨(李氏)의 것이 제일이다. 경치를 읊은 그녀의 시 중 1구에, 강물에 몸 담근 갈매기 꿈 하나 널찍하고 / 江涵鷗夢濶 하늘에 들어간 기러기 근심도 하 길구나 / 天入雁愁長 이라고 하였는데, 고금의 시인 가운데 이렇게 표현한 자는 아직 없었다.)
  • E736  + (근래의 젊은이 중에서 사백 김석주가 일찍부터 문명을 얻었으나 문장이 난삽한 근래의 젊은이 중에서 사백 김석주가 일찍부터 문명을 얻었으나 문장이 난삽한 병통이 있었다. 비록 몇 구의 말을 지어도 반드시 마음을 써서 깊이 생각하며, 초고를 여러 번 고치지 않으면 내놓지 않았다. 그의 시는 대개 조각하고 꾸민 것이 많은데, 우해 홍만종에게 차운한 시 여덟 편은 모두 좋다. 그 중 한 편은 이러하다. "" 극히 평담하고 고풍에 가깝다. 내가 일찍이 김석주를 만나 문학을 논할 때 김석주가 말했다. "내가 젊어서 많이 읽지 못하여 글쓰는 힘에 박차를 가할 수 없다. 비록 힘써 읽어서 그 병통을 고치려 하나 많은 업무로 겨를이 없으니 한스러울 뿐이다." 대개 김석주가 무릇 제술할 때에는 옛 저작을 모방하는 데이만 능할 뿐으로 큰 근원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므로 그가 이처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작법을 묘하게 이해하고 각 체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참으로 얻기 쉽지 않다. 작법을 묘하게 이해하고 각 체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참으로 얻기 쉽지 않다.)
  • E659  + (근일에는 이실지(李實之 실지는 이춘영(李春英)의 자)가 시문에 능하다. 그 근일에는 이실지(李實之 실지는 이춘영(李春英)의 자)가 시문에 능하다. 그 시가 비록 번잡한 것 같으나 기(氣)는 나름대로 창대(昌大)하여 작가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권여장(權汝章 여장은 권필(權韠)의 호)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다. 실지의 안목은 높아서 일세의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나와 여장ㆍ자민(子敏 이안눌(李安訥)의 자)만을 괜찮다고 여겼다. 그는, ‘허는 허세가 있고 권은 말랐으며 이는 융통성이 없다.’ 고 하였는데 역시 지당한 평론이다.고 권은 말랐으며 이는 융통성이 없다.’ 고 하였는데 역시 지당한 평론이다.)
  • E154  + (김시습의 자는 열경으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을 우습게 보면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였다. 그의 호는 동봉, 췌세옹, 매월당, 청한거사, 청은 등이며 만년에 환속하였다가 죽었다. 그의 '공암의 사준사에게 율시 이십사수를 주다' 시에, ""라 하였고, 또 "", 또 "", 또 "", 또 "", 또 "", 또 "", 또 "", 또 "", 또 "" 등등의 시가 있다.)
  • E024  + (나는 조칙(朝勅)을 받들어 변산(邊山)에서 벌목(伐木)하는 일을 맡아보았다.나는 조칙(朝勅)을 받들어 변산(邊山)에서 벌목(伐木)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벌목하는 일을 항시 감독하므로 나를 ‘작목사(斫木使)’라고 부른다. 나는 노상에서 장난삼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br>호위하는 수레 속에 권세 부리니 그 영화 뽐낼 만한데 / 權在擁車榮可詑</br>벼슬 이름 작목사라 하니 부끄럽기 그지없네 / 官呼斫木辱堪知</br>이것은 나의 하는 일이 지게꾼이나 나무꾼의 일과 같기 때문이다.</br>처음 변산에 들어가니 겹겹이 산봉우리가 솟았다 엎뎠다 구부렸다 폈다 하였고 옆에 큰 바다가 굽어보이고 바다 가운데 군산도(群山島)ㆍ위도(蝟島)가 있는데, 모두 조석으로 이를 수가 있었다. 해인(海人)들이 말하기를,</br>“순풍을 만나면 중국에 가는 것도 멀지 않다.”</br>하였다. 일찍이 주사포(主使浦)를 지날 때 밝은 달이 고개에 떠올라 모래 벌판을 휘영청 비추어서 기분이 상쾌하기에 고삐를 놓고 천천히 가며 앞으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침음(沈吟)하였더니 마부가 이상히 여겼였는데,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br>한 해 봄에 세 번이나 이 강가를 지나니 / 一春三過此江頭</br>왕사가 어찌 이렇게도 쉬지 못하게 하는고 / 王事何曾怨未休</br>만리라 장엄한 파도는 백마가 달리는 듯 / 萬里壯濤奔白馬</br>천년이라 늙은 나무는 푸른 교룡이 누웠는 듯 / 千年老木臥蒼虯</br>바닷바람은 만촌에서 나는 피리소리 전하고 / 海風吹落蠻村笛</br>모래에 비친 달빛은 포곡에 뜬 배를 맞이한다 / 沙月來迎浦谷舟</br>추동을 거느리고 가니 응당 나를 괴이하게 여기리라 / 擁去騶童應怪我</br>아름다운 경치 만날 적마다 오래 머무네 / 每逢佳景立遲留</br>나는 당초 시를 지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저절로 지어졌다. 당초 시를 지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저절로 지어졌다.)
  • E224  + (남추강이 한훤선생의 일을 씀에 말하길, 대유(大猷)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남추강이 한훤선생의 일을 씀에 말하길, 대유(大猷)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에게 수업하였고, 고상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었고,인정(人定)이 된 뒤라야 잠자리에 들고 닭이 울면 일어났으며, 손에서 《소학》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이 국가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소학》을 읽는 아이가 어찌 큰 의리를 알겠는가.” 하였다. 나이 30이 된 뒤에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고, 나이가 들수록 도가 더욱 높아졌기에 세상이 만회될 수 없고 도가 행해질 수 없음을 익히 알아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다. 그러나 사람들이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br>점필재 선생이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또한 국사를 건의하는 일이 없자, 대유가 시를 지어 올리기를, </br>도란 겨울에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 마심에 있거늘 / 道在冬裘夏飮氷</br>비 개면 가고 비 오면 멈춤이 어찌 전능한 일일까 / 霽行潦止豈全能</br>난초도 만약 세속을 따른다면 마침내 변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br>소는 밭 갈고 말은 탄다는 이치를 누가 믿으리까 / 誰信牛耕馬可乘</br>하였다. 선생이 화답하기를,</br>분에 넘치게 관직이 경대부에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伐氷</br>임금 바로잡고 세속 구제함을 내 어찌 능히 하랴 / 匡君救俗我何能</br>이로써 후배로 하여금 오졸함을 비웃게 했으니 / 從敎後輩嘲迂拙</br>구구한 권세의 벼슬길에는 나설 것이 못 되누나 / 勢利區區不足乘</br>하였으니, 대개 이를 싫어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나빠졌다.乘 하였으니, 대개 이를 싫어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나빠졌다.)
  • E012  + (내가 본래 시를 즐기는 것은 비록 포부(抱負)이기는 하나 병중에는 평일보다 내가 본래 시를 즐기는 것은 비록 포부(抱負)이기는 하나 병중에는 평일보다 배나 더 좋아하게 되니, 또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매양 흥이 날 때나 물(物)을 접촉했을 때에는 시를 읊지 않는 날이 없다. 그렇지 않으려 하여도 되지 않으니, 이것 또한 병이라고 말할 만하다. 일찍이 시벽편(詩癖篇)을 지어 뜻을 나타냈으니, 대개 스스로 상심한 것이다. 또 매일 한 끼니 식사는 두어 숟갈을 뜨는 데 불과하고 오직 술만 마실 뿐이라 항상 이것으로 걱정하였는데, 백낙천(白樂天)의《후집(後集)》에 실린 노경(老境)에 지은 것을 보았더니 병중에 지은 것이 많고, 술 마시는 것 또한 그러하였다. 그 한 시는 대략 이러하다. 내 또한 조용히 운명을 관찰하니 / 我亦定中觀宿命 평생의 부채는 바로 시가일러라 / 多生債負是歌詩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읊는 일에 미친 것이 / 不然何故狂吟詠 병난 뒤엔 병나기 전보다 더하겠는가 / 病後多於未病時 꿈에 얻은 시를 수작한 시는 이러하다. 어둡고 어두운 베이불 밑에 / 昏昏布衾底 병과 취함과 졸음이 서로 어울렸다 / 病醉睡相和 운모산(雲母散)을 먹는 데 대해 지은 시는 이러하다. 늦게 먹은 세 숟갈의 밥을 약이 녹이는구나 / 藥消日晏三匙食 그 나머지의 시도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이런 시를 보고난 다음에 너그럽게 생각하기를, “나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옛사람도 그랬다. 이것은 모두 숙부(宿負) 때문이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백공(白公)은 재직 중 병가를 내기를 1백 일이나 하였다. 나는 모일(某日)에 장차 퇴임을 청원할 터인데, 병가를 계산하면 1백 10일이니, 그것이 우연히 이처럼 서로 같다. 다만 부족한 것은 번소(樊素)와 소만(少蠻)일 뿐이다. 그러나 두 첩(妾)은 또한 공의 나이 68세 때 모두 내침을 당했으니 어찌 이때에 있었겠는가. 아, 재명(才名)과 덕망(德望)은 비록 백공에게 미치지 못한 그 거리가 매우 머나, 노경의 병중에 겪은 일들은 이따금 서로 같은 것이 많았다.” 하고, 따라서 그가 병중에 지은 시 열 다섯 수를 화답하여 다음과 같이 정을 서술한다. 노경에 세사를 잊고 평탄한 땅 밟았으니 / 老境忘懷履垣夷 낙천은 나의 스승이 될 만하이 / 樂天可作我之師 세상에 뛰어난 낙천의 재주에는 미치지 못하나 / 雖然與及才超世 병중에 시를 즐기는 것은 우연히 서로 같구나 / 偶爾相侔病嗜詩 그의 당년 퇴임하던 날짜를 비교해보면 / 較得當年身退日 나의 금년 퇴임하는 때와 같다 / 類余今歲乞骸時 낙구(落句)는 빠졌다.退日 나의 금년 퇴임하는 때와 같다 / 類余今歲乞骸時 낙구(落句)는 빠졌다.)
  • E010  + (내가 옛날 과거에 급제하던 해에 동년(同年)들과 통제사(通濟寺)에 놀러 갔었내가 옛날 과거에 급제하던 해에 동년(同年)들과 통제사(通濟寺)에 놀러 갔었다. 그때 나와 4~5인은 일부러 뒤떨어져서 말 안장을 나란히하고 천천히 가면서 시를 창화(唱和)하였다. 맨 먼저 지은 사람의 시운(詩韻)을 가지고 각기 사운시(四韻詩)를 지었다. 이 시는 이미 노상에서 입으로 부른 것이라 붓으로 쓸 만한 것이 있지도 않거니와, 또한 시인의 상어(常語)로 생각하여 아예 기억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두 번이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이 시가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사대부들에게 크게 칭송받는 바가 되었다.” 하고, 그 사람은, 나귀 그림자 속에 푸른 산이 저물고 / 蹇驢影裡碧山暮 외기러기 울음 속에 단풍지는 가을일러라 / 斷雁聲中紅樹秋 는 한 시구만을 외면서, “이 시구가 더욱 사랑을 받는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또한 믿지 않았다.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외로운 학은 어디 가고 하늘은 아득한고 / 獨鶴何歸天杳杳 다니는 사람 끊이지 않는데 길은 길구나 / 行人不盡路悠悠 라는 한 시구 만을 기억하고, “첫구와 끝구는 다 알지 못한다.” 하였다. 내가 비록 총명하지는 못하나 또한 매우 노둔한 사람은 아닌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 그때 갑작스레 짓고 조금도 유의하지 않아 우연히 잊어서일까. 전번 구양백호(歐陽伯虎)가 나를 찾아왔을 때 좌석에 있던 어떤 손이 이 시에 언급하고 이내 묻기를, “상국(相國)의 이 시가 대국에 전파되었다 하는데 진실입니까?” 하니, 구양백호는 선뜻 대답하기를,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두 화족(畫簇)을 만들어서 봅니다.” 하자, 그 손은 약간 의심하였다. 그러자 구양백호는, “그렇게 의심하신다면, 내가 명년에 환국하여 그림과 시의 전본(全本)을 싸가지고 와서 보여주겠습니다.” 하였다. 아, 과연 이 말과 같다면, 이는 실로 분에 넘치는 말이니 감당할 바 아니로다. 전에 부친 절구를 차운하여 구양백호에게 주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부끄럽도다! 구구한 이 한 수의 시는 / 慚愧區區一首詩 한 번 보아줌도 족한데 또 그림까지 그렸나 / 一觀猶足又圖爲 중국이 이처럼 외국을 차별하지 않음을 누가 알았으랴 / 誰知中國曾无外 명공께서 혹 속이는 것은 아닌지 / 無乃明公或有欺알았으랴 / 誰知中國曾无外 명공께서 혹 속이는 것은 아닌지 / 無乃明公或有欺)
  • E679  +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오언율시는 두보의 시 작법과 매우 비슷하다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오언율시는 두보의 시 작법과 매우 비슷하다. 하나의 글자, 한마디의 말이 모두 두보에서 나왔다. 그의</br></br>시서예를 배우지 못했으니 / 詩書禮學未</br>사십구 년 세월을 그르쳤네 / 四十九年非</br></br>라는 구절을 세상에서 모두 전하여 외지만, 사실은 두보의 시〈영월(詠月)〉에서 이른</br></br>나그네 수심 결에 보니 / 羈棲愁裏見</br>스물 네 번이나 밝았네 / 二十四回明</br></br>에서 나온 것이니, 모방에 뛰어나다고 이를 만하다. 두보의 장률은 종횡무진하고 웅건호탕하여 배운다고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동파(蘇東坡), 황정견(黃庭堅), 진사도(陳師道), 진여의(陳與義) 모두 두보의 시체를 감히 모방하지 못하였으니, 소재가 힘써 따르고자 하였으나 어려운 일이었다.</br>부윤(府尹) 강복성(康復誠)이 일찍이 소재에게서 시를 배웠는데, 소재가 말하기를,</br>“나와 호음(湖陰)은 시의 명성이 서로 비슷하여 세상에서는 그 우열을 분별하지 못하지. 나의 장률은 호음에게 미치지 못하고 호음의 단율은 나에게 미치지 못하니, 각각 장점이 있는 것뿐이라네.”</br>라고 하였다.단율은 나에게 미치지 못하니, 각각 장점이 있는 것뿐이라네.” 라고 하였다.)
  • E650  + (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ㆍ황지천(黃芝川 지천은 황정욱(黃廷彧)의 호)은 근대의 대가로서 둘 다 근체시(近體詩)에 솜씨가 뛰어나다. 노의 오언율시(五言律詩)와 황의 칠언율시(七言律詩)는 모두 1천년 이래의 절조이다. 그러나 장편시는 이만 못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 E026  + (대저 시란 뜻으로 주를 삼는 것이니 뜻을 베푸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대저 시란 뜻으로 주를 삼는 것이니 뜻을 베푸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미는 것이 그 다음 어렵다. 뜻은 기운으로 주를 삼는 것이니, 기운의 우열로 말미암아 곧 천심(淺深)이 있게 된다. 그러나 기운은 하늘에 근본한 것이니, 배워서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운이 약한 자는 문장을 수식하는 데 공을 들이고 뜻으로 우선을 삼지 않는다. 대개 문장을 다듬고 문구를 수식하면 그 글은 참으로 화려할 것이나, 속에 함축된 심후한 뜻이 없으면 처음에는 꽤 볼 만하지만, 재차 음미할 때에는 맛이 벌써 다한다. 시를 지을 때에는 먼저 낸 운자가 뜻을 해칠 것 같으면 운자를 고쳐 내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의 시를 화답할 경우에 만일 험한 운자가 있거든, 먼저 운자의 안치할 바를 생각한 다음에 뜻을 안배해야 한다.</br>시구 중에 대(對)를 맞추기가 어려운 것이 있으면, 한참 동안 침음(沈吟)해 보아서 능히 쉽게 얻을 수 없거든 곧 그 시구는 아낌없이 버리는 것이 좋다. 시를 구상할 때에 깊이 생각해 들어가서 헤어나지 못하면 거기에 빠지고, 빠지면 고착되고, 고착하면 미혹되고, 미혹하면 집착되어 통하지 못하게 되니, 오직 이리저리 생각하여 변화 자재하게 해야 원만하게 된다.</br>혹은 뒷글귀로 앞글귀의 폐단을 구제하기도 하고, 한 글자로 한 글귀의 안전함을 돕기도 하니, 이것은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글자로 한 글귀의 안전함을 돕기도 하니, 이것은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 E034  + (대축 오세재가 의종이 미행한 것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 <div cla대축 오세재가 의종이 미행한 것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어찌하여 날이 청명한데도,<br>검은 구름 낮게 땅에 깔리었는가,<br>도성 사람들 가까이 마오.<br>용이 이 속으로 다닌다오.</div></br>그는 또 남의 운을 써서 극암에 대해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성의 북쪽 높고 험한 바위,<br>나라 사람들은 극암이라고 부르지.<br>멀리 학을 탄 왕자 진을 찧을 듯하고,<br>높이 하늘에 오른 무함을 찌를 것 같다.<br>자루를 휘는 데 번개로 불을 삼고,<br>칼날을 담금질하는 데 서리로 소금을 삼는다.<br>어떻게 변기로 만들어,<br>초를 없애고 범을 살릴까.</div></br>눈병을 앓으면서 지은 시는 이렇ᄃᆞ.</br><div class="poetry-text">늙음과 병은 기약이나 한 듯 찾아오지만,<br>죽을 때가 다된 한 포의의 신세.<br>눈동자 몹시 희미하여,<br>자수정 안경도 소용이 없네.<br>등잔불 앞에서 글자 보기가 겁나고,<br>눈 내린 뒤 빛을 부끄럽게 바라본다.<br>금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br>눈을 감고 기심을 잊는 것을 배우리라.</div></br>문순공 이규보가 말하기를, “<div class="critique-text">선생이 시를 짓는 것은 한유와 두보를 배웠다. 그러나 그의 시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div></br>”고 하였다. </br>그런데 김거사집 가운데 그의 시가 한 편 실려 있다.</br><div class="poetry-text">크기는 백 아름이나 되는 재목이지만 쓸 데가 없고,<br>길이는 석 자나 되는 입이지만 말을 못한다.</div></br><div class="critique-text">역시 노건하여 칭찬할 만하다.</div>는다.</div> ”고 하였다. 그런데 김거사집 가운데 그의 시가 한 편 실려 있다. <div class="poetry-text">크기는 백 아름이나 되는 재목이지만 쓸 데가 없고,<br>길이는 석 자나 되는 입이지만 말을 못한다.</div> <div class="critique-text">역시 노건하여 칭찬할 만하다.</div>)
  • E186  + (동호(東湖)의 저자도(楮子島)는 절승(絶勝)이다. 전조(前朝 고려) 때 정승동호(東湖)의 저자도(楮子島)는 절승(絶勝)이다. 전조(前朝 고려) 때 정승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며 시를 읊기를,</br>10리나 되는 판판한 호수에 가랑비 지날 제 / 十里平湖細雨過</br>긴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서 들리네 / 一聲長篴隔蘆花</br>금정(나라)에서 국(정치)을 조리하던 손을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br>다시 낚싯대 잡고 늦게 모랫가로 내려가네 / 還把漁竿下晩沙</br>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을 돌아드니 / 單衫短帽繞池塘</br>건너편 언덕 늘어진 버들 서늘한 바람 보내는구나 / 隔岸垂楊送晩涼</br>산보하다 돌아오니 달은 산 위에 떠올랐고 / 散步歸來山月上</br>지팡이 끝에 연꽃 향기 어려 있네 / 杖頭猶襲露荷香</br>하였으니, 시 또한 흥취가 좋다. 봉은사(奉恩寺)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 몇 해 전에 내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할 때에 타고 간 배를 저자도 머리에 정박하고 봉은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강가 어촌에 살구꽃이 만발하여 봄 경치가 더욱 아름답기에, 배 안에서 시를 짓기를,</br>동호의 빼어난 경치는 모두들 알고 있지만 / 東湖勝槪衆人知</br>자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네 / 楮島前頭更絶奇</br>절에 가는 길 솔잎 우거진 길이요 / 蕭寺踏穿松葉徑</br>어촌을 두루 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울타리로세 / 漁村看盡杏花籬</br>따스한 모래밭 연한 풀에 원앙 한쌍 잠들었고 / 沙暄草軟雙鳶睡</br>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돛대 한척 흘러가네 / 浪細風微一棹移</br>봄 흥취와 봄 수심을 채 읊기도 전에 / 春興春愁吟未了</br>압구정 언덕엔 벌써 석양이로세 / 狎鷗亭畔夕陽時</br>하였다. 지금 40여 년이 지났는데 다시 가서 구경을 못하니, 가물거리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겠도다. 압구정은 저자도의 서쪽 수리(數里)에 있는데, 재상 한명회(韓明澮)가 별장을 지어 또한 이로써 유명하다.數里)에 있는데, 재상 한명회(韓明澮)가 별장을 지어 또한 이로써 유명하다.)
  • C055  + (두 편의 시가 모두 불우한 처지를 슬퍼하며 지은 작품이다. 그러나 최자의 시는 기개와 절개가 강개하여 임춘의 시에 비길 것이 아니다.)
  • E700  + (만력(萬曆) 경신년(1620, 광해 12)에, 내가 바야흐로 폐고(廢錮 종신만력(萬曆) 경신년(1620, 광해 12)에, 내가 바야흐로 폐고(廢錮 종신토록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는 것)된 상태에서 정처없이 영서(嶺西) 지방을 떠돌 적에, 나그네의 심경을 절구(絶句) 한 수로 읊기를,</br></br>땅에 가득 떨어진 꽃 반쯤은 벌써 진흙 / 滿地殘花半作泥</br>간 밤의 비바람 앞 시내에 요란했네 / 夜來風雨暗前溪</br>망향대 올라 서니 하염없이 슬픈 마음 / 望鄕臺上空惆悵</br>운수는 천 겹이라 꿈속에서 헤매누나 / 雲樹千重夢也迷</br></br>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시를 본 이가 말하기를, “결구(結句)에 내포하고 있는 뜻이 처연(悽然)하고 암울하니, 상서롭지 못하게 될 분위기가 배어 있는 듯하다.”고 하면서 나를 위해 상당히 걱정해 주었다. 그러나 또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운수 천중(雲樹千重)이라는 말이야말로 앞길이 창창(蒼蒼)하게 멀어 끝이 없다는 뜻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으니, 상서롭지 못한 말이 아니다.”고 하였다.</br>그런데 그 뒤 몇 년이 지나 내가 요행히 좋은 시대를 만난 덕분에 벼슬 길에 올라 현달(顯達)하게 되었는데, 그 시를 지은 것이 지금으로부터 벌써 17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혹자(或者)의 말이 자못 들어맞았다고도 하겠다. 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혹자(或者)의 말이 자못 들어맞았다고도 하겠다.)
  • E294  +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는 강산 풍물(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는 강산 풍물(江山風物)이 서로 으뜸을 겨루는데, 영남루는,</br>가을 깊어 큰길엔 붉은 단풍 비쳐 있고 / 秋深官道映紅樹</br>날 저문 어촌에는 흰 연기 난다 / 日暮漁村生白煙</br>한 낚시 어부는 빗소리 밖이요 / 一竿漁父雨聲外</br>십리길 나그네는 산 그림자 가이로세 / 十里行人山影邊</br>라고 한 등의 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촉석루는 전할 만한 가작이란 하나도 없다. 한 사람의 시작으로 영남에는 뛰어난 시가 있고, 촉석루에는 옹졸한 것은 촉석루의 기승(奇勝)이 영남루보다 나아서 잘 형용을 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아서 잘 형용을 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 E401  + (박 상국 순(朴相國淳)은 자(字)가 화숙(和叔)으로서 박우(朴祐)의 아들이요박 상국 순(朴相國淳)은 자(字)가 화숙(和叔)으로서 박우(朴祐)의 아들이요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그의 맑은 덕과 꿋꿋한 절개는 남이 따라갈 수 없었으며 정승으로 10년 동안 있으면서 아무 잘못도 없었다. 그런데 계미년(1583, 선조16)에 정인(正人)을 헐뜯는 자가 그를 모함에 빠뜨리면서 그의 죄 열 가지를 들어 배척할 것을 청하였는데, 선조대왕이 그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통촉해 준 덕분으로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병을 핑계로 물러나와 영평(永平) 땅에서 살았는데, 경치 좋은 그곳에서 유유자적하다가 아무 병 없이 생을 마쳤다. 그가 배척을 받고 서호(西湖)에 있을 때 시를 짓기를,</br></br>거문고 책 끼고 낭패당해 용산으로 물러나와 / 琴書顚倒下龍山</br>목란선(木蘭船)에 의지하고 바람 따라 흘러가네 / 一棹飄然倚木蘭</br>석양 노을 조각조각 붉기만 하고 / 霞帶夕暉紅片片</br>비온 뒤의 가을 물결 넘실넘실 푸르구나 / 雨增秋浪碧漫漫</br>꼬시래기 잎새 다 시들어 소객(騷客)의 마음 슬퍼지고 / 江蘺葉悴騷人怨</br>물여뀌 꽃 다 졌으니 백로도 밤에 추워하리 / 水蓼花殘宿鷺寒</br>백발 머리에 강 떠도는 나그네 신세 되어 / 頭白又爲江漢客</br>서리 이슬 잔뜩 맞고 여울을 거슬러 올라가네 / 滿衣霜露泝危灘</br></br>이라 하였는데 한때 널리 읊어졌다. 또 그의 ‘승려의 시축에 제함[題僧軸]’이라는 시에,</br></br>아침에 암자 물러나와 한가한 틈을 타서 / 小齋朝退偶乘閑</br>궤안에 기대고는 쓸쓸히 먼 산 바라보네 / 隱几蕭然看遠山</br>예로부터 세상 분규 그칠 날이 없었지만 / 終古世紛無盡了</br>오늘날 처신하기 더욱 더 어렵구나 / 秪今人事轉多艱</br>하늘 질러 지나간 새 까마득히 안 보이고 / 長空過鳥元超忽</br>석양녘 외로운 구름 갔다가는 돌아오네 / 落日孤雲自往還</br>생각나네 그 언젠가 먼 절에서 노닐던 일 / 遙想舊遊天外寺</br>목련꽃 활짝 피고 물은 졸졸 흘렀었지 / 木蓮花發水潺潺</br></br>이라 하였는데, 이것 역시 경절(警絶)하다고 칭해졌다. 그는 호를 사암(思庵)이라 하였다. 사암이 영평에 있을 때 소절(小絶) 한 수를 짓기를,</br></br>이따금 들려오는 외마디 산새 소리 / 谷鳥時時聞一箇</br>책상 머리 적요한데 서책들만 널려 있네 / 匡床寂寂散群書</br>어떡하나 백학대 앞 흐르는 저 시냇물 / 每憐白鶴臺前水</br>산문만 나가면은 이내 흙탕물 될 것이니 / 纔出山門便帶淤</br></br>라 하였는데, 한가하게 노닐며 자재(自在)하는 뜻과 홀로 높이 속세를 초월한 기상 모두가 이 시에 갖춰져 있다고 할 만하다.과 홀로 높이 속세를 초월한 기상 모두가 이 시에 갖춰져 있다고 할 만하다.)
  • E646  + (봉래가 강릉 군수로 있을 적에 익지(益之 이달(李達)의 자)를 손님으로 대우봉래가 강릉 군수로 있을 적에 익지(益之 이달(李達)의 자)를 손님으로 대우했는데 사람됨이 행실이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다. 선친이 편지를 보내 그를 변호하니 공이 답장하기를</br>밤 연기에 오동 꽃 떨어지고 / 桐花夜煙落</br>바다 숲에 봄 구름 사라지도다 / 海樹春雲空</br>고 읊었던 이달(李達)을 만약 소홀히 대한다면 곧 진왕(陳王 위(魏) 조식(曺植)의 봉호)이 응양(應瑒)ㆍ유정(劉楨)을 처음 잃던 날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대접이 조금 허술해지자 익지는 시를 남기고 작별하는데</br>나그네 가고 머물 사이란 것은 / 行子去留際</br>주인이 눈썹 까딱하는 사이라 / 主人眉睫間</br>오늘 아침 기쁜 빛을 잃게 됐으니 / 今朝失黃氣</br>오래잖아 청산을 생각하리 / 未久憶靑山</br>노국에선 원거에게 제사를 했고 / 魯國鶢鶋饗</br>남방에 출정가서 율무 갖고 돌아왔네 / 南征薏苡還</br>소 계자는 가을 바람 만나자마자 / 秋風蘇季子</br>또 다시 목릉관을 나가는구나 / 又出穆陵關</br>라 읊으니, 공이 크게 칭찬과 사랑을 더하며 그를 처음처럼 대접했다. 선배들이 붕우간에 서로 바로잡아 주는 의가 어떠했던가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풍류 있는 훌륭한 재사를 또 어찌 쉬이 얻을 수 있겠는가?있다. 그리고 그 풍류 있는 훌륭한 재사를 또 어찌 쉬이 얻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