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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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Info
TypeSPA
ContainsC007, M004
Mentions PersonCh’oe Ch’iwŏn, 황소, 고운, 심전기, 유병, 최붕, 이빈, 이정기, 흑치상지, 이단
Mentions Place고려, 동국
Is Part OfJottings by Paegun, Spring


Original Text
按唐書藝文志載崔致遠四六一卷。又刊桂苑筆耕十卷。余未嘗不嘉其中國之廣蕩無外。不以外國人爲之輕重。而旣載於史。又令文集行于世。然於文藝列傳不爲致遠特立其傳。余未知其意也。若以爲其事績不足以立傳。則致遠十二渡海入唐遊學。一擧中甲科及第。遂爲高騈從事。檄黃巢。黃巢氣沮。後官至道統巡官侍御史。及將還本國也。同年顧雲贈儒仙歌。其一句曰。十二乘船渡海來。文章感動中華國。其自敘亦云。巫峽重峯之歲。絲入中華。銀河列宿之年。錦還東國。蓋言十二而入唐。二十八而東還也。其跡章章如此。以之立傳。則固與藝文所在沈佺期。柳幷。崔元翰。李頻輩之半紙列傳有間矣。若以外國人。則已見于志矣。又於藩鎭虎勇。則李正己。黑齒常之等皆高麗人也。各列其傳。書其事備矣。奈何於文藝。獨不爲致遠立其傳也。余以私意揣之。古之人於文章不得不嫌忌。況致遠以外國孤蹤入中朝。躪踏當時名輩。若立傳。直其筆。恐涉其嫌。故畧之歟。是余所未知者也。
Korean Translation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었고, 또《계원필경(桂苑筆耕)》10권을 간행하였다. 나는 일찍이 중국 사람은 포용력이 넓어서 외국 사람의 글이라고 경홀하게 여기지 않고, 이미 사책에 실었을 뿐더러, 또 그 문집이 세상에 행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 갸륵하게 여겼다. 그러나 문예열전(文藝列傳)에 최치원을 위하여 특별히 그 전(傳)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 뜻을 모르겠다. 혹 그의 사적이 전을 설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겨서일까? 최치원은 12세에 바다를 건너 당 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여 한 번 과거를 보아 갑과로 급제하였고, 드디어 고변(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서는 황소에게 격문을 보내니 황소의 기가 꺾였으며, 뒤에 벼슬이 도통순관 시어사(都統巡官侍御史)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려 할 때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이 유선가(儒仙歌)를 주었는데, 그 한 구에,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船渡海來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네 / 文章感動中華國 하였고, 그의 자서(自敍)에도, “무협 중봉(巫峽重峯)의 해에 보잘것없는 몸으로 중국에 들어 왔고, 은하 열수(銀河列宿)의 해에 비단옷 입고 고국에 돌아왔다.” 하였으니, 대개 열두 살에 당 나라로 들어갔다가 스물여덟 살에 고국으로 돌아왔음을 말한 것이다. 그 행적이 이처럼 뚜렷하니, 이것으로 전을 설치한다면 예문지에 실린 심전기(沈佺期)ㆍ유병(柳幷)ㆍ최원한(崔元翰)ㆍ이빈(李頻) 등의 반장 정도되는 열전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만약 외국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지(志)에는 써야 할 것이다. 번진호용열전(藩鎭虎勇列傳)에서는 이정기(李正己)ㆍ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다 고려 사람인데도 각각 그 전을 만들어 그 사실을 소상하게 기록했는데, 어째서 문예열전에서만 최치원을 위하여 그 전을 설치하지 않았는가? 내가 사의(私意)로 헤아리건대, 옛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시기함이 없지 않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의 외로운 몸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사들을 압도했음에랴. 만일 전을 설치하여 바른 대로 그 사적을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
English Translation
The “Treatise on Literature” (Yiwenzhi藝文志) in the Xin Tang shu 新唐書 (New Book of Tang) contains Ch’oe Ch’iwŏn’s single-volume Saryuk chip 四六集 (Collection of Four-Six Poetic Exposition). Additionally, his ten-volume literary collection, the Kyewŏn p’ilgyŏng 桂苑筆耕 (Ploughing the Cassia Grove with a Writing Brush), has been published. I have always admired the great open-mindedness of the Chinese for not looking down upon foreigners and including them in their official histories, and even making their writings circulate throughout the world. Nevertheless, I cannot figure out why there is no separate biography of Ch’oe Ch’iwŏn in the “Biographies of Writers” (Wenyi liezhuan 文藝列傳) [in the Xin Tang shu]. Was it because there was a paucity of information about him to write a separate biography? At age twelve, Ch’oe crossed the sea to study in Tang and passed the highest civil service examination on his first attempt. He went on to serve Gao Pian 高駢 (821?–887) and wrote “A Letter to Condemn Huang Chao,” which disconcerted the rebel. Subsequently, he was appointed Campaign Commander (dutong xunguan) and Attendant Censor (shiyushi). When it was time for him to return to his native land, Gu Yun 顧雲 (d. 894), a fellow graduate of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gave him a poem, “Song of a Confucian Immortal” 儒仙歌. One of its stanzas reads, At twelve you boarded a ship, crossing the sea to arrive here.Your writings inspired the kingdom of Central Efflores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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