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site is under construction.
Search by property
This page provides a simple browsing interface for finding entities described by a property and a named value. Other available search interfaces include the page property search, and the ask query builder.
List of results
- E481 + (이순인의 '송인' 시는 다음과 같다. "" 하응림의 시는 다음과 같다. "" 이 두 시가 모두 아름답지만, 이순인의 시가 당시에 더 가깝다.)
- M081 + (이야기 무르녹을 때 이지러진 달이 깊은 사립문에 들어오고, 늦도록 앉았노라니 산들바람이 높은 잣나무에서 읊조린다.)
- E210 + (이용재(李容齋)가 주운(朱雲)을 읊은 시(詩)에, 허리 사이에 칼이 있으니 … 이용재(李容齋)가 주운(朱雲)을 읊은 시(詩)에,</br>허리 사이에 칼이 있으니 어찌 청할 필요가 있으랴 / 腰間有釰何須請</br>지하에 사람이 없더라도 또한 족히 놀 만하리라 / 地下無人亦足遊</br>애석하다. 한 나라 조정의 괴리령은 / 可惜漢庭槐里令</br>평생에 오직 아첨하는 신하의 머리만 알았도다 / 一生唯識佞臣頭</br>하였는데, 고금(古今)에 주운을 읊은 자가 이런 생각이 없었으니, 비록 당(唐)ㆍ송(宋)의 문집 속에 넣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정덕 신사년에 용재(容齋)가 멀리 당태사(唐太史) 고(皐)를 의주(義州)에서 영접하는데, 태사가 법도가 있어서 말도 경솔히 하지 않았다. 정주(定州)에 이르러 용재가 같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속필(速筆)로, 태사가 지은 음락(飮酪)에 대한 절구(絶句) 네 수(首)에 차운(次韻)하니, 태사가 이를 보고 “참으로 노련한 솜씨다.”라 하였다.에 차운(次韻)하니, 태사가 이를 보고 “참으로 노련한 솜씨다.”라 하였다.)
- E629 + (이익지(李益之)는 어릴 적에 두시(杜詩)를 호음(湖陰)에게 배웠는데 하루는 … 이익지(李益之)는 어릴 적에 두시(杜詩)를 호음(湖陰)에게 배웠는데 하루는 익지더러 서가 위의 여러 책을 가져오도록 명했다. 그리하여 호음이 그것을 보다가 《춘정집(春亭集)》이 나오니 땅에 던져버렸고, 《매계집(梅溪集)》은 펴보고 웃으며 덮었는데 대개 가볍게 여긴 것이었다. 오직 《점필재집(佔畢齋集)》만은 집어들고 익히 보기를 마지않았다. 익지가 엿보니 모두 뽑아서 줄을 그으니 대개 그들을 좋아하여 소재로 취해 시의 자료로 하려는 것이었다. 언젠가 평생에 가장 마음에 만족하게 여기는 시구를 물었더니</br>산 나무 함께 우니 바람 언뜻 일어나고 / 山木俱鳴風乍起</br>강물 소리 문득 높자 달이 홀로 걸렸네 / 江聲忽厲月孤懸</br>라는 구절을 사람들이 깎은 듯 아름답다고들 하고,</br>산꼭대기에 깜빡이는 별은 조각달과 빛 다투고 / 峯頂星搖爭缺月</br>나무 위에 움직이는 새는 깊은 떨기 숨는고야 / 樹顚禽動竄深蕞</br>라는 시구 역시 시상(詩想)은 교묘하지만 마침내</br>빗기운 노을 눌러 산은 문득 어두워지고 / 雨氣壓霞山忽暝</br>냇빛은 달을 받아 밤에도 밝구나 / 川華受月夜猶明</br>라 한 구절보다는 못하니, 이는 마치 신이 도운 것 같다고 말했다 한다.明 라 한 구절보다는 못하니, 이는 마치 신이 도운 것 같다고 말했다 한다.)
- E618 + (이전 사람들은 점필재가 여강(驪江)에서 읊은, 십년간의 세상사는 홀로 읊는 … 이전 사람들은 점필재가 여강(驪江)에서 읊은,</br>십년간의 세상사는 홀로 읊는 시 속에 / 十年世事孤吟裏</br>팔월의 가을빛은 어지러운 숲 사이에 / 八月秋容亂樹間</br>라는 구절을 칭송해 왔다. 그러나 신륵사(神勒寺)에서 지은,</br>상방에서 종 울리니 여룡은 춤을 추고 / 上方鍾動驪龍舞</br>만 구멍에 바람 우니 철봉이 나래 치네 / 萬竅風生鐵鳳翔</br>라 한 구절의 홍량(洪亮)ㆍ엄중(嚴重)함만 같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우주를 버팀직한 시구이다. 그 보천탄즉사(寶泉灘卽事)에서는</br>복사꽃 띄운 물결이 몇 자나 높았는고 / 桃花浪高幾尺許</br>은석은 목까지 잠겨서 어딘지 모르겠네 / 銀石沒頂不知處</br>쌍쌍의 가마우지 여울돌을 잃고 / 兩兩鸕鶿失舊磯</br>물고기 물면 갈대숲으로 들어가네 / 銜魚却入菰蒲去</br>라 했는데 이는 가장 항고(伉高)하며, 《동경악부(東京樂府)》는 편편마다 모두 예스럽다.는 가장 항고(伉高)하며, 《동경악부(東京樂府)》는 편편마다 모두 예스럽다.)
- E440 + (이존오가 십여 세 때에 '강물이 불어남'시에서, ""라 하였다. 그의 지절을 상상할 만하다. 만약 공이 혁명의 때에 당하였다면, 그 절개를 세움이 어찌 포은 정몽주의 아래였겠는가. 상고하건대 고산은 여주에 있으니 이존오가 살았던 곳이다.)
- E550 + (이주는 문인이다. 서장관으로 중원에 가서 통주 문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 … 이주는 문인이다. 서장관으로 중원에 가서 통주 문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 중국 사람들이 현판에 걸어놓고 칭송하여 말하기를 "獨鳥膜歸遼" 선생이라 했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을 낮게 보아서, 비록 최치원이 중국에서 벼슬했지만 그 시문으로는 일찍이 여러 문사들의 반열에서 개략적으로 보이지 못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당음 중에 무명씨가 고운 최치원이라 하는데, 진위를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예문지에만 조금 기록되어 보일 뿐이다. 동방 사람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긴다."라 하였다. 근자에 학관 어숙권이 일찍이 패관잡기를 저술했는데, 천중기에 초록되었으니 또한 미증유의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치원의 황소격을 자주 칭송하지만 사륙문의 책에 선택되지 못하여 중국 역시 편협함을 면하지 못한다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황소격은 비록 놀라게 하는 구절이 있지만, 언어를 세우고 뜻을 명령함에 있어 많이 전도되는 잘못이 있으니 동국 사람들은 참으로 문을 알지 못한다 하겠다. 다만 산승과 규수의 글이 역시 중국과 같이 하여 선록된 것이 보이는데 우리나라 사람의 문집에 어찌 한두 개 채택할 만한 것이 없겠는가.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이주의 시가 통주에 현판으로 걸린 것은 또한 다행이라 할 만하다. 나의 시 또한 만류장에서 현판에 걸렸으니 이에 느낀 바가 있었다. 만하다. 나의 시 또한 만류장에서 현판에 걸렸으니 이에 느낀 바가 있었다.)
- E278 + (이증영(李增榮)이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있으면서 가장 잘 다스렸다. 합천사람 사문 주이(周怡)가 그에게 송별시를 지어주기를, 만 사람의 입이 바로 비니 하필이면 돌을 쓸까 / 萬口是碑安用石 한 마디 말로 노자 쌈지 돈을 줄 것 무어랴 / 一言爲贐不須金 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소인은 사람에게 돈을 준다.” 하였으니, 이 글과 뜻이 아울러 묘한 것이다.)
- E556 + (이홍남과 나세찬이 서로 화답하며 시를 지으며 소(簫) 자를 운으로 삼고 매 … 이홍남과 나세찬이 서로 화답하며 시를 지으며 소(簫) 자를 운으로 삼고 매 편마다 아래에 이(李)와 나(羅)를 번갈아 썼다. 마지막에 이홍남이 소 자 운에 차운하여 ""라 하니 나세찬이 마침내 붓을 놓았다. 나는 늘 그 구절을 기이하게 여겼는데, 후에 중원에서 태평광기를 구해 보니 나리로 퉁소 소리를 삼은 말이 당나라 사람에게서 출처한 것이었다. 이홍남은 어렸을 때부터 재명이 있었다. 어른이 반달을 가리키며 어(魚) 자로 운을 감으니 극히 어려웠다. 이홍남이 곧바로 입으로 응답하여 외쳤다. "" 저(蛆)자로 운을 삼자 곧바로 대답하였다. "" 그 재주를 일찍 이룬 것이 이와 같았다.운을 삼자 곧바로 대답하였다. "" 그 재주를 일찍 이룬 것이 이와 같았다.)
- E269 + (이회재(李晦齋) 선생의 경산현(慶山縣) 동헌(東軒) 시에, 우는 뻐꾹새는 가지 위에 일곱이요 / 鳴鳩枝上七 나는 제비 비 속에 쌍쌍이라 / 飛燕雨中雙 하였는데, 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볼 만한 것이 매우 많다. 공은 시학(詩學)을 오로지 하지 않았으나 성정(性情)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이 이러하였으니, 품성(稟性)이 고명하면 애쓰지 않아도 이런 시구를 얻을 수 있음을 알겠다.)
- E389 + (이후백(李後白) 공이 영북(嶺北 함경도)의 안절사로 가서 그 전부터 내려오던 … 이후백(李後白) 공이 영북(嶺北 함경도)의 안절사로 가서 그 전부터 내려오던 폐단을 모두 없애버렸다. 따라서, 군현의 부세 수입을 거의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 웅부(雄富)한 고을이 드디어 쇠해지고 말았다. 그 뒤 수령들이 혹 허위로 조작하여 다른 세를 징수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이것을 괴롭게 여겼다. 임제(林悌)가 시로써 이것을 풍자하고 슬피 여겨 말하기를,</br>혜초는 서릿바람에 지고 옥은 티끌에 버려졌는데 / 蕙折霜風玉委塵</br>한때 맑은 덕이 벼슬아치들을 고무시켰네 / 一時淸德動簪紳</br>가련하도다 맥도는 결국 이어가기가 어려워 / 可矜貊道終難繼</br>상국이 백성의 병을 고쳐 준 것이 바로 백성의 병이 되었도다 / 相國醫民是病民</br>하였다.의 병을 고쳐 준 것이 바로 백성의 병이 되었도다 / 相國醫民是病民 하였다.)
- E479 + (이후백의 '규방의 정'시에, ""라 하였다. 김극검의 시에, ""라 하였다. 두 시가 비슷하게 아름답다.)
- E562 + (이후백이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을 때, 관찰사의 행차 도중 잘못하여 영문 … 이후백이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을 때, 관찰사의 행차 도중 잘못하여 영문으로 끌려갔다. 스스로 유생이라고 말하니, 관찰사가 운을 부르며 시를 짓게 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았다. "" 관찰사가 크게 가상히 여기고 이로부터 서로 친하게 지냈다. 후에 이후백이 과거에 급제하여 호남어사가 되어 남원부에 이르니, 부에서 기녀 말진을 잠자리에 추천하였다. 자못 인연을 맺어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떠났다. 곡성에 이르러 비를 만나 사흘을 머물게 되었는데, 시를 지어 말했다. "" 욕천이란 곡성의 다른 이름이다. 머물게 되었는데, 시를 지어 말했다. "" 욕천이란 곡성의 다른 이름이다.)
- E551 + (이희보는 만 권의 책을 읽었으며 어려서부터 나이들어서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 이희보는 만 권의 책을 읽었으며 어려서부터 나이들어서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젊었을 때 어른들이 친구들을 모아 산 위에 장막을 치고 잔치를 베풀면서 기마병을 보내 이희보를 불렀다. 이희보는 마침 책을 읽고 있어서 초청에 응할 뜻이 없었다. 억지로 오게 하자 소매에서 좀먹은 책을 꺼내 자리 가운데에서 읽었다. 때마침 자리 옆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게 하였는데 이희보는 한 번도 곁눈질하지 않았다. 그가 책에 빠져 있는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후에 원접사 이행의 종사관이 되어 중국 사신을 벽제에서 전송했다. 사신이 한 구절을 말했다. "" 정사룡과 소세양 등이 모두 깨닫지 못했다. 이희보가 한 번 보고 냉소하며 말했다. "여러 공들이 독서를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모르는 것이다. 시경에 '나가서 간 땅에서 묵으면서 술을 마시며 언 땅에서 전별한다'라고 했으니, 이는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송별연을 베푼 것을 뜻한다." 두 사람이 부끄러운 빛을 보였다. 연산군이 사랑하는 기녀가 죽자 조정의 문사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했다. 이희보가 시를 지었다."" 연산군이 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당시의 논의가 그를 박하게 대하고 벼슬길이 많이 막혔다. 늙어서 술에 취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자제들이 놀라며 그 연유를 물었다. 이희보가 말했다. "나는 일찍이 만 권의 책을 읽었고, 무릇 내가 지은 것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독서를 널리 하지 않아서 내 문장을 소홀히 여기며 온 세상이 어리석게 구니, 내 시가 진짜로 간재 진여의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죽어도 후세에 전해지지 않겠구나." 안분당집 12책이 간행되지 않고 외손에게 전하여졌는데, 지금 난리를 겪어서 잃지 않고 보전되었는지 모르겠다.외손에게 전하여졌는데, 지금 난리를 겪어서 잃지 않고 보전되었는지 모르겠다.)
- E436 + (익재 이제현의 '범려를 읊다' 시에, ""라 하였다. 그 뜻이 매우 새롭다.)
- E164 + (익재 이제현의 '사호가 한나라로 돌아가다' 시에, ""라 하였으니, 논의가 적당하다. '벌' 시에, ""라 하였으니, 형용이 훌륭하다. 가정 이곡의 '소나무를 심고' 시에, ""이라 한 연은 전실하다. 또, ""라 하였으니 대가 매우 공교하다. 다만 '長柄笠'이라 한 것은 아마 우산을 가리킨 듯한데 그 출처를 알지 못하겠다.)
- E602 + (익재의 장인은 곧 국재공(菊齋公 국재는 권보(權溥)의 호)인데 부부가 함께 … 익재의 장인은 곧 국재공(菊齋公 국재는 권보(權溥)의 호)인데 부부가 함께 94세까지 살았으나 부인이 공보다 먼저 죽었다. 익재공이 장인을 애도한 만시(挽詩) 한 연(聯)에</br>항아는 광한전에 님 오시길 기다리나 / 姮娥相待廣寒殿</br>거사는 다만 홀로 도솔천에 돌아가네 / 居士獨歸兜率天</br>라고 했다. 권공(權公)이 부처를 좋아했기에 낙천도솔(樂天兜率)에 비유한 것은 무방하겠으나, 항아가 약을 훔친 것은 자고로 시인들이 속세로부터 선계(仙界)로 올라간 것을 비유함이 상례였는데, 이를 장모에게 쓴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라간 것을 비유함이 상례였는데, 이를 장모에게 쓴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
- M048 + (인간의 일들은 고르지 못하여 / 人間細事亦參差 걸핏하면 마음과 틀린다 / 動 … 인간의 일들은 고르지 못하여 / 人間細事亦參差</br>걸핏하면 마음과 틀린다 / 動輒違心莫適宜</br>젊을 땐 집이 가난하여 아내도 업신여기더니 / 盛歲家貧妻尙侮</br>늘그막엔 녹봉이 두둑하니 기생이 항시 따른다 / 殘年祿厚妓常隨</br>비 올 때 나가 노는 날이 많고 / 雨霪多是出遊日</br>갠 날은 모두 내가 한가히 앉아 있을 때라 / 天霽皆吾閑坐時</br>배 불러 숟가락 놓으니 아름다운 고기를 만나고 / 腹飽輟飡逢美肉</br>목구멍 아파 술 금하니 좋은 술을 만난다 / 喉瘡忌飮遇深巵</br>저장된 보배를 헐하게 팔고 나니 값이 오르고 / 儲珍賤售市高價</br>묵은 병이 막 낫고 나니 이웃에 의원이 있네 / 宿疾方痊隣有醫</br>세쇄한 일이 잘 아니됨도 이와 같은데 / 碎山不諧猶類此</br>양주에서 학 타는 일은 더구나 기대하겠나 / 揚州駕鶴況堪期/ 碎山不諧猶類此 양주에서 학 타는 일은 더구나 기대하겠나 / 揚州駕鶴況堪期)
- E098 +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이 젊어서 재예(才藝)가 있었다. 만년에 양주(楊 …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이 젊어서 재예(才藝)가 있었다. 만년에 양주(楊州)의 누원(樓院)에 올라 짧은 시 3편을 남겼다. 그 첫 편에,</br>산이 있으면 어디나 여산이 아닐까 / 有山何處不爲廬</br>앉아 청산을 대하고 한번 탄식하노라 / 坐對靑山試一噓</br>벼슬살이 십 년에 늙은이 되었으니 / 簪笏十年成老大</br>노경에 〈귀거래사〉를 읊게 하지 말라 / 莫敎霜鬢賦歸歟</br>하였다. 영천군(永川君) 이정(李定)은 자가 안지(安之)인데, 이 시를 보고 절하고, 또 비평하기를 “이 시는 매우 핍진하니, 서(徐)의 시가 아니면 이(李)의 시일 것이다.” 하였다. 그 당시 서거정(徐居正)과 이승소(李承召)가 시명을 독차지하여 이정이 감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이정이 다시 누각 아래를 지나가다가 전날 썼던 비평을 다시 읽어 보니, 그 아래에 글이 쓰여 있기를 “이 시에는 강산의 아취(雅趣)가 있어 한 점의 티끌도 없으니, 이는 반드시 번뇌에 얽매인 세속의 선비가 지은 것이 아니다. 또 천지가 크고 강산이 깊은데 어찌 인재가 없어서 반드시 서(徐)와 이(李)라고 추측하는가. 인재를 저버리고 사람을 멸시함이 어찌 이리도 심하단 말인가.” 하였다. 이정이 이 글을 보고 크게 뉘우쳐서 전날 비평했던 글을 지워 버렸다. 지금의 《진산세고》에는 3편이 모두 실려 있지 않으니, 경순(景醇)의 편집이 넓지 못함이 이와 같다.편이 모두 실려 있지 않으니, 경순(景醇)의 편집이 넓지 못함이 이와 같다.)
- E461 + (일두 정여창 선생이 '악양루'로 시를 지었다. "" 그의 기상을 볼 수 있다. 악양과 화계는 모두 진주의 지명이다.)
- E191 + (일본 사신 붕중(弸中)이 우리 나라에 올 때 모재(暮齋) 김안국(金安國)이 선위사로 있었는데, 때마침 여름이라 붕중이 식탁에 얼음이 있는 것을 보고 문득 읊기를, 얼음이 한 점 녹아 도로 물이 되네 / 氷消一點還成水 하고, 모재에게 다음 구절을 청하니, 모재는 반나절을 끙끙거렸으나 결국 짓지 못하였다. 나무가 두 그루 짝지어 서니 곧 수풀이 되네 / 木立雙株便作林 라고 한 대구가 있는데, 누가 지은 것인지는 모른다.)
- E229 + (일본의 중 천우가 도은에게 적성의 자석연을 보냈다. 도은이 감사의 뜻에서 시를 두 편 지었다. 첫 수는 ""라 하였고, 둘째 수는 ""라 하였다.)
- E508 + (일찍이 궁궐의 주춧돌에 제시한 것을 보았다. "" 이를 물어보니 군사의 시라 하는데,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 M091 + (일찍이 봄바람과 같이 춤자리를 휩쓸면서<br>개인 정원에서 즐겨 놀며 애를 태울 때<br>어찌 즐겨하랴! 가을이 되어<br>사양이 되었는데 매미까지 우는 것은.<br>)
- E509 + (일찍이 역정에서 시를 본 적이 있다. "" 누가 지었는지는 모른다.)
- E302 + (임 사문(林斯文 임형수(林亨秀)를 말함)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천하에 … 임 사문(林斯文 임형수(林亨秀)를 말함)이 말하기를,</br>“내가 일찍이,</br>천하에 어찌 천리마가 없으리오 / 天下豈無千里馬</br>인간에 구방 고를 얻기 어렵도다 / 人間難得九方皐</br>하는 한 연구(聯句)를 얻었는데, 그뒤에 황산곡(黃山谷)의 시집을 보니 거기에,</br>세상에 어찌 천리마가 없겠는가 / 世上豈無千里馬</br>사람 가운데 구방 고를 얻기 어렵도다 / 人中難得九方皐</br>라는 글귀가 있었다. ‘세상’이라 한 것은 나의 ‘천하’보다 못하고, 그의 ‘사람 가운데[人中]’라 한 것은 나의 ‘인간(人間)’보다 낫다.”</br>하였다. 생각으로는 황산곡의 이 말은 고금에 뛰어났으며, 그후로 어찌 여기에 겨룰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고 우연히 합치되었다면 그는 천 년 뒤에 황산곡과 겨룬다 할 수 있다.지 않고 우연히 합치되었다면 그는 천 년 뒤에 황산곡과 겨룬다 할 수 있다.)
- M011 + (임궁(琳宮)에서 범어를 파하니 / 琳宮梵語罷 하늘 빛이 유리처럼 깨끗하이 / 天色凈琉璃)
- M058 + (임금의 수레 아래서 풍운이 일어나, 사람 죽인 것이 흩어져 있는 삼 베듯했네. 그러나 좋은 때를 저버릴 수 없어, 흰 술에 국화를 띄우네.)
- E219 + (임서하(林西河)가 도망간 기생을 읊은 시에, 붉게 단장하고 새벽을 기다려서 … 임서하(林西河)가 도망간 기생을 읊은 시에,</br>붉게 단장하고 새벽을 기다려서 금비녀를 꽂으니 / 紅粧待曉帖金鈿</br>재촉하는 부름을 받아 비단 자리에 오르기 위함이다 / 爲被催呼上綺筳</br>장관의 엄한 호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 不怕長官嚴號令</br>공연히 행객이 인연이 나쁘다고 꾸짖는다 / 漫嗔行客惡因緣</br>다락에 올라가서 퉁소 부는 짝이 되지 못하고 / 乘樓未作吹簫伴</br>달로 달아나서 도리어 약을 훔치는 신선이 되었도다 / 奔月還爲竊藥仙</br>벼슬길에 있는 어진 학사들에게 말을 부치노니 / 寄語靑雲賢學士</br>어진 마음으로 부들 채찍을 보일 필요가 없다 / 仁心不用示蒲鞭</br>하였는데, 시는 참으로 아름다우나, 부들 채찍이라는 한 마디가 크게 규방의 풍미(風味)와 운치(韻致)가 없다. 만일 북[梭]을 던지는 여자를 만난다면 아마도 유여(幼輿)처럼 이가 부러져도 마음 달갑게 여기지는 못할 것이다.면 아마도 유여(幼輿)처럼 이가 부러져도 마음 달갑게 여기지는 못할 것이다.)
- E637 + (임석천(林石川 석천은 임억령(林億齡)의 호)은 사람됨이 고매하고 시 역시 사람됨과 같았다. 낙산사영(洛山寺詠)은 마치 용이 오르고 비가 내리는 형세로 문세(文勢)가 날아 꿈틀거려 그 기이한 경치와 자못 장려함을 다툴 만하였다. 그 시에 마음은 유수와 함께 세상으로 나오고 / 心同流水世間出 꿈에는 백구 되어 강 위를 나네 / 夢作白鷗江上飛 라 한 구절은 기상이 높아 신룡이 바다를 희롱하는 뜻이 있다.)
- E139 + (임인 년간(1482)에, 개녕현 송방리의 한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옛날 돌부처 … 임인 년간(1482)에, 개녕현 송방리의 한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옛날 돌부처를 얻었다. 돌부처는 귀·눈·입·코가 모두 마멸되어 사라져 있었고 밭둑에 놓아두었다. 천식 병이 있는 사람이 돌부처에 절하자 병이 가벼워진 듯했다. 이에 영험하다고 여겨 남녀가 뒤섞여 쌀·베·지전·향초·화과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한 승려가 와서 향불를 주관하고, 시주가 기와집을 짓고는 장차 큰 절을 지으려 하였다. 이때 금산 군수 이인형이 이를 듣고 유생과 나졸을 보내어 그 승려와 시주를 잡아 쫓아냈다. 문간공 김종직이 응교로 부르는 것을 사양하고 마침 금산에 거주하고 있다가, 시로써 이 군수를 치하하며 말했다. ""하고 마침 금산에 거주하고 있다가, 시로써 이 군수를 치하하며 말했다. "")
- E665 +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은 시명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은 시명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추켜 받들고 인정해 주면서, 그의 삭설은 변방 길에 휘몰아치네[朔雪龍荒道]라는 시 한 편은 성당(盛唐)의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했다. 일찍이 그의 말을 들으면 어느 절에 가니 승축(僧軸)에</br>동화에서 밥을 빌던 옛날의 학관이라 / 竊食東華舊學官</br>분산이 좋아 노닐 만하다지만 / 盆山雖好可盤桓</br>십 년이나 그리던 꿈 비로봉(飛盧峯)을 감도니 / 十年夢繞毗盧頂</br>베갯머리 솔바람 밤마다 서늘하네 / 一枕松風夜夜寒</br>라 했는데, 어사(語詞)가 심히 탈쇄(脫洒)하나 그 이름이 빠져서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세상에 참으로 버려진 인재가 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br>중형(仲兄)이 사명을 받들고 북방에 나가 압호정(壓胡亭)에 올라서</br>백옥에는 해 지난 병든 백성들 / 白屋經年病</br>푸른 벼를 망쳐 버린 하루 밤 서리 / 靑苗一夜霜</br>라 읊었는데, 임자순은 이를 극찬하고,</br>백옥 청묘는 열 글자의 시사(詩史)로다 / 白屋靑苗十字史</br>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중형도 임자순의</br>오랑캐 일찍이 이십 주를 엿볼 적엔 / 胡虜曾窺二十州</br>장군은 말 솟구쳐 봉후를 취했는데 / 將軍躍馬取封侯</br>지금은 절새에 정벌 싸움 없으니 / 如今絶塞無征戰</br>장사는 옛 역루에 한가로이 잠을 자네 / 壯士閑眠古驛樓</br>라는 시를 칭찬하여 협기(俠氣)가 펄펄 뛴다고 하였다.네 / 壯士閑眠古驛樓 라는 시를 칭찬하여 협기(俠氣)가 펄펄 뛴다고 하였다.)
- E537 + (임제가 속리산에 들어가 중용을 팔백 번 읽고 한 구를 얻었다. "" 중용의 말을 용사한 것이다. 소재 노수신은 평생 논어를 읽어 그의 시에는 논어의 모든 구절을 심히 많이 용사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시문은 논어에서 가장 큰 힘을 얻었다."라 하였다.)
- E667 + (임진년(1592, 선조25) 6월 28일은 명종(明宗)의 기일(忌日)이라 신제이(申濟而 제이는 신노(申櫓)의 자) 가 곡구역(谷口驛)에서 시를 쓰기를 선왕께서 이 날에 군신을 버리실 적 / 先王此日棄群臣 유언은 은근히 성인에게 부탁했네 / 末命慇懃托聖人 스물이라 여섯 해에 향불이 끊어지니 / 二十六年香火絶 소리쳐 우는 사람 늙은 유민(遺民)뿐이로세 / 白頭號哭只民遺 라 하니, 보는 자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E159 + (임희재의 자는 경여로 나와 함께 시와 술을 즐겼다. 급제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요절하였으니 슬프다. 병진년(1496) 여름에 동강에 살면서 '해민시 열두 절구'를 지어 나에게 주었다. 지금 두 수를 여기에 기록한다. """")
- E492 + (자순 임제의 '친구를 방문하다' 시는 ""라 하였고, '향렴'시는 ""라 하였고, '산사'시는 ""라 하였다. 또 경구 한 구절은 ""라 하였다.)
- E410 + (자순(子順) 임제(林悌)는 성격이 호방하고 시도 잘했는데 일찍이 지은 패강곡 … 자순(子順) 임제(林悌)는 성격이 호방하고 시도 잘했는데 일찍이 지은 패강곡(浿江曲) 10 수 가운데 하나를 보면,</br></br>대동강 가 소녀들 봄볕 밟고 거니는데 / 浿江兒女踏春陽</br>어느 곳 봄볕인들 애간장이 안 끊기랴 / 何處春陽不斷腸</br>끝없이 내리는 저 햇살로 베를 짤 수만 있다면 / 無限煙絲若可織</br>님을 위해 재단해서 춤옷을 만들어 주련마는 / 爲君裁作舞衣裳</br></br>이라 하였다. 시어가 매우 염려(艶麗)한데 이는 대체로 번천(樊川 두목(杜牧))을 본받아 지은 작품이라 하겠다.)한데 이는 대체로 번천(樊川 두목(杜牧))을 본받아 지은 작품이라 하겠다.)
- E149 + (자정 안응세가 죽은 지 삼 년 뒤인 임인년(1482)에, 희지 고순이 꿈에서 … 자정 안응세가 죽은 지 삼 년 뒤인 임인년(1482)에, 희지 고순이 꿈에서 안응세를 광막한 들판에서 보았다. 서로 시를 수창하기를 생전과 똑같이 하다가 안응세가 백공 남효온, 종지 허종이 잘 있는지 물었다. 고순이 "이미 절에 올라가 공부 중이다."라 하였다. 안응세가 기뻐하지 않으면서 시 한 수를 지어 고순에게 부탁하여 두 사람에게 남겼다. ""고순이 깨어나서 이를 기억하였다가 나에게 남겼다. 내가 이 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십 년이 지나 복명한 연후에야 이를 깨달았다.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십 년이 지나 복명한 연후에야 이를 깨달았다.)
- C054 + (작가의 표현 수단은 본래 각자 같지 않은 것이다.)
- E038 + (장간공 장일의 승평연자루시는 이렇다. <div class="poetry … 장간공 장일의 승평연자루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바람과 달 처량한 영자루,</br>낭관이 한번 간 뒤 꿈조차 아득하다.</br>당시 좌중의 손들 늙음을 어찌 싫어하는가,</br>누대 위의 미인도 또한 흰 머리가 되었는데.</div> </br>밀직 곽예의 수강궁일요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여름엔 서늘하게 겨울엔 따듯하게 깨끗하고 살찌게 길렀는데,</br>무슨 일로 구름을 뚫고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가.</br>바다제비는 일찍이 낟알 한톨 주지 않았는데,</br>해마다 곁에 돌아와서 대들보 위를 날아다닌다.</div> </br>이승휴의 영운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한조각 홀연히 바다 속에서 생겨,</br>동서남북 가로세로 멋대로 다니네.</br>장마되어 마른 곡식 살린다 하면서,</br>공연히 중천의 햇빛과 달빛만 가리네.</div> </br>밀직 정윤의의 증렴사라는 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이른 새벽 말을 달려 외로운 성에 들어가니,</br>울타리가엔 사람 없고 살구만 익었구나.</br>뻐꾸기는 나라일 급한 줄도 모르고서,</br>수풀가에서 밭 갈라고 하루 종일 권하고 있네.</div> </br><div class="critique-text">이 시들은 사람들이 즐겨 일컫는 것이다.</div></br><div class="critique-text">그러나 장일의 시는 옛일이 느꺼워 지은 것이니 다른 뜻이 없다.</div></br><div class="critique-text">그 나머지 세 편은 모두 풍유를 간직하고 있는데</div></br><div class="critique-text">정윤의, 곽예의 시는 풍유가 드러나지 않고 완곡하다.</div>class="critique-text">그 나머지 세 편은 모두 풍유를 간직하고 있는데</div> <div class="critique-text">정윤의, 곽예의 시는 풍유가 드러나지 않고 완곡하다.</div>)
- M037 + (장안의 서신이 성기다 마소 / 莫道長安鯉信疏 세속의 소리가 어떻게 그윽한 수 … 장안의 서신이 성기다 마소 / 莫道長安鯉信疏</br>세속의 소리가 어떻게 그윽한 수운에 이르겠소 / 俗音那到水雲幽</br>그대는 암당의 연월에서 편안히 은거하시는데 / 巖堂煙月棲身穩</br>나는 경연의 풍진에서 녹봉 그리워 머문다오 / 京輦風塵戀祿留</br>생각건대 그대는 도의 풍치가 골수에 스몄을 터인데 / 道韻想君風入骨</br>가련하도다 나는 벼슬길에서 머리가 희었다오 / 宦遊憐我雪蒙頭</br>어느날에나 벼슬 버리고 고상한 그대를 따라 / 掛冠何日攀高躅</br>육척의 쇠잔한 몸 고이 늙을꼬 / 六尺殘骸老可收대를 따라 / 掛冠何日攀高躅 육척의 쇠잔한 몸 고이 늙을꼬 / 六尺殘骸老可收)
- E634 + (장음정(長吟亭) 나식(羅湜)의 시는 시취(詩趣)가 있어 이따금 성당시(盛唐詩 … 장음정(長吟亭) 나식(羅湜)의 시는 시취(詩趣)가 있어 이따금 성당시(盛唐詩)에 접근하고 있다. 신광한과 정사룡 등 노대가들이 어느 집에 모여 바야흐로 포도(蒲桃) 그림 족자를 놓고 시를 읊으려 하는데 생각에 잠겨 미처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장음이 술에 취해 와서는 붓을 빼앗아 들고 족자 위에 쓰려 했다. 주인이 말리려 하자 호음이 그냥 두라고 하니, 장음은 절구 두 수를 지었는데 그 하나에</br>늙은 원숭이 무리를 잃고 / 老猿失其群</br>지는 해는 마른 등걸 위에 비치네 / 落日枯楂上</br>우뚝 앉아 고개도 아니 돌리니 / 兀坐首不回</br>아마도 천산의 메아리 듣는 거지 / 想聽千峯響</br>라 하였다. 호음이 크게 칭찬하고는 붓을 놓아버리고 짓지 않았다.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호)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br>“이는 성당 이주가(伊州歌)의 법이니 이른바 한 구절이라도 끊어 놓으면 시편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법이니 이른바 한 구절이라도 끊어 놓으면 시편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 E433 + (장일의 '승평 연자루에 제하다' 시에, ""라 하였다. 승평은 지금의 순천부이다. 자일이 일찍이 이 군의 판관일 적에 태수 손억이라는 사람이 관기 호호를 아꼈다. 장일이 부사가 되어 다시 오니 호호가 이미 늙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낭관은 손억을 지칭한 것이다. 신광한의 시에 ""라 하였으니 역시 같은 뜻이다.)
- E301 + (재상 최연(崔演)의 문장은 호건(豪健)하여 필한(筆翰)이 물 흐르는 것같다. … 재상 최연(崔演)의 문장은 호건(豪健)하여 필한(筆翰)이 물 흐르는 것같다. 인종(仁宗)의 만시(挽詩)는 이러하다.</br>삼년상을 짧게 한 한 나라를 마음으로 낮추보고 / 三年短制心嫌漢</br>오월을 여막에 거처함은 예법이 등 나라보다 낫네 / 五月居廬禮過滕</br>전고(典故)를 쓴 것이 매우 적당하다. 임 사문 형수(林斯文亨秀)가 인종의 만장을 짓기를,</br>오늘의 눈물을 차마 가지고서 / 忍將今日淚</br>작년 옷을 거듭 적시랴 / 重濕去年衣</br>하였다. 중종(中宗)이 승하하고 1년이 되지 않아 인종(仁宗)이 승하하였으니, 말은 간략하나 뜻은 극진하였다.년이 되지 않아 인종(仁宗)이 승하하였으니, 말은 간략하나 뜻은 극진하였다.)
- E212 + (적암(適庵) 조신(曹伸)이 젊어서 재주 있기로 이름났는데, 성화(成化) 기해 … 적암(適庵) 조신(曹伸)이 젊어서 재주 있기로 이름났는데, 성화(成化) 기해년에 통신사(通信使)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일본(日本)에 갔으니, 이는 함허(㴠虛) 홍귀달(洪貴達)과 나재(懶齋) 채수(蔡壽)가 번갈아 천거한 때문이었다. 성종이 어필(御筆)로 다섯 개의 제목을 내어 지어 바치게 하고, 또 여섯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어려운 운(韻)을 내어 시험하게 하였다. 떠나려 할 때에 함허가 적암부(適庵賦)를 지어 주었다. 뒤에 물러와 영남(嶺南) 금산(金山)에 살았는데, 시고(詩稿) 다섯 권과 《소문쇄록(謏聞瑣錄)》 한 권이 있다. 그 우음(偶吟)이라는 시에 말하기를,</br>아침 술 석 잔을 마시고 나이 70이 된 것을 자랑삼아 / 三杯卯酒詫年稀</br>손으로 남쪽 창문을 열어젖히고 한 번 시를 읊는다 / 手拓南窓一詠詩</br>샘 구멍에서 솟는 물이 못에 넘치매 고기가 뛰놀고 / 泉眼溢池魚潑剌</br>나무 숲이 집을 둘렀으니 새가 모여든다 / 樹林遶屋鳥來歸</br>꽃은 비갠 뒤에 안색이 나고 / 花生顔色雨晴後</br>바람이 불 때 버들은 허리를 흔드는구나 / 柳弄腰肢風過時</br>누가 적암이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던가 / 誰道適庵無箇事</br>매양 절물(節物)로 인하여 기심을 잊지 못한다 / 每因節物未忘機</br>하였는데, 스스로 주(註)를 내기를, “진퇴격(進退格)을 써서 시주(詩酒)ㆍ임천(林泉)ㆍ어조(魚鳥)ㆍ화류(花柳) 등 열 글자에 들였다.” 하였다.酒)ㆍ임천(林泉)ㆍ어조(魚鳥)ㆍ화류(花柳) 등 열 글자에 들였다.” 하였다.)
- E253 + (적암(適菴) 조신(曺伸)이 황폐한 절에 들어가 율시 한 수를 지었다. 그 경련(頸聯)에, 길에는 올 가을 낙엽 덮였고 / 逕覆今秋葉 부엌에는 전일 불 때던 나무 남았네 / 厨餘去日樵 하였는데, 구법(句法)이 기기 절묘하여 사람들이 서로 전하며 읊었다. 그러나 적암이 스스로 자기 작품을 뽑은 것에는 이 시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젊어서 지어 만족스럽지 않아서 버린 것이나 아니겠는가?)
- E069 + (전목(全穆)이 충주 기생 금란(金蘭)을 사랑하였는데, 그가 서울로 떠나려 할 … 전목(全穆)이 충주 기생 금란(金蘭)을 사랑하였는데, 그가 서울로 떠나려 할 때 금란을 불러 타이르기를, “경솔히 남에게 몸을 허락하지 말라.” 하니, 금란의 말이, “월악산(月嶽山)은 무너질지라도 내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 하였으나, 뒤에 단월역(斷月驛)의 승(丞)을 사랑하게 되었다. 전목이 이 소문을 듣고 시를 지어 보내기를,</br>듣자니 네가 문득 단월역 승을 사랑하여 / 聞汝便憐斷月丞</br>깊은 밤 항상 역을 향해 달려간다 하니 / 夜深常向驛奔騰</br>언제나 삼릉장(세모진 형장)을 잡고 / 何時手執三稜杖</br>돌아가 월악산 무너져도 마음은 변치 않는다던 맹세를 물어볼고 / 歸問心期月嶽崩</br>하니, 금란이 대답하여 말하기를,</br>북쪽에 전군이 있고 남쪽에는 승이 있으니 / 北有全君南有丞</br>첩의 마음 정할 수 없어 뜬구름 같도다 / 妾心無定似雲騰</br>만약 맹세한 바와 같이 산이 변할진대 / 若將盟誓山如變</br>월악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무너졌는고 / 月嶽于今幾度崩</br>하였다. 이것은 모두 사문(斯文) 양여공(梁汝恭)이 지은 것이었다.今幾度崩 하였다. 이것은 모두 사문(斯文) 양여공(梁汝恭)이 지은 것이었다.)
- E454 + (전우치의 시에, ""라 하였다. '남씨 재상'이라 함은 남곤을 말한 것이니 시어가 매우 기묘하다.)
- E105 + (전한 기준이 어느 날 당직을 서다가 꿈을 꾸었다. 교외를 떠돌며 객지에서 험 … 전한 기준이 어느 날 당직을 서다가 꿈을 꾸었다. 교외를 떠돌며 객지에서 험한 길을 걷다가 근체시 한 수를 읊어내었다. ""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 시를 관아의 벽에 써두었다. 오래지 않아, 을묘년에 당쟁에 연루되어 호서로 귀양을 가고 다시 북도의 온성으로 이배되었는데 길에 보이는 것이 모두 그 시의 풍광이라, 말을 멈추고 시를 읊으면서 애통해하며 흐느꼈고 따르는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온성에 도착하고 곧 사사되니, 인사에 모두 정해진 것이 있음을 알겠다. 사림에 이야기가 전하자, 찬탄하고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을 알겠다. 사림에 이야기가 전하자, 찬탄하고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E681 + (전한(典翰) 하곡(荷谷) 허봉(許篈)은 시를 잘 지어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 전한(典翰) 하곡(荷谷) 허봉(許篈)은 시를 잘 지어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불행히도 요절하여 그의 시가 사람의 입에 전파되어 있는 것은 매우 적다. 나도 그의 시를 여러 편은 보지 못하였는데, 근래에 학사 기와(畸窩) 정홍명(鄭弘溟)이 나에게 말하기를,</br>“일찍이 들으니 내한(內翰) 장유(張維)가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논하기를 ‘근래의 문인재자 중에 하곡의 시가 으뜸이다’ 하였습니다.”</br>하였다. 나는 장 내한(張內翰)이야말로 틀림없이 본 것이 있었으리라 여기고, 《하곡유고(荷谷遺稿)》 한 권을 구하여 얻고서 늘 손에 들고 탐독하였는데 진실로 절세의 시재(詩才)였다. 격조가 높기는 경번당(景樊堂)과 같았지만 허탄한 병통은 없었다. 그 아우 허균은 재주가 넉넉하여 다함이 없지만 격률(格律)은 몹시 비루하니 같이 말할 수 없다.가 넉넉하여 다함이 없지만 격률(格律)은 몹시 비루하니 같이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