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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st of all pages that have property "TextKor" with value "후세에 그에 대한 의신(疑信)이 결정되지 못하는데 혹자는, 동정에 달이 떨어지니 고운이 돌아간다 라는 글귀로 최치원의 저작이라는 증거를 댄다. 그러나 또한 그것으로는 단안을 내릴 수가 없다.". Since there have been only a few results, also nearby values are displa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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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108  + (점쟁이 김륜이 젊었을 때 평안도의 향산(香山) 등지를 두루 유람하다가 한 방점쟁이 김륜이 젊었을 때 평안도의 향산(香山) 등지를 두루 유람하다가 한 방외인을 만났는데 이름이 이천년(李千年)이라 하였다. 그를 따라 여러 산을 함께 거의 6~7년을 유람하고 그에게서 술수를 배웠다. 헤어질 무렵에 이천년이 시 한 수를 주었다. ""그를 모시던 하인의 나이가 겨우 열서너 살이었는데 또한 손수 시를 지어 주었다. "" 또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시의 품격이 높고 옛스러우며, 필적은 기이하고도 굳세었다. 심지어 그 어린 하인조차 시재와 필법이 보통이 아니었으니 평범한 도사가 아니었음이 분명한데, 혹자는 이천년이 즉 정희량(鄭希良)이라 하였다.도사가 아니었음이 분명한데, 혹자는 이천년이 즉 정희량(鄭希良)이라 하였다.)
  • E201  + (정덕 기사년(1509, 중종 4) 무렵에 삼가 현령(三嘉縣令)이 있었는데, 정덕 기사년(1509, 중종 4) 무렵에 삼가 현령(三嘉縣令)이 있었는데, 그 성명을 잊어버렸으나 정사(政事)가 자못 탐혹(貪酷)하였다. 마침 병으로 죽어 관(棺)을 내어 발인하려고 하는데, 고을 사람이 관머리에 시를 써 붙이기를,</br>저승의 다섯 귀신이 뭇 백성을 학대하니 / 冥間五鬼虐烝民</br>염라대왕이 천라를 시켜 악독한 몸을 죽였구나 / 帝使天羅殺毒身</br>이제부터는 백성들의 시름과 원한이 끊겼으니 / 從此閭閻愁怨絶</br>요순시대의 태평한 봄 이로다 / 堯天舜日太平春</br>하였다. 관찰사가 그 말을 듣고, “현령이 참으로 나쁘다. 그러나 읍인(邑人)도 잘못하였다.” 하고, 그 시를 지은 자를 찾아서 잡으라고 하였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이 시를 살펴보건대, 비록 잘 짓지는 못했으나 재물을 탐하고 독직(瀆職)하는 자의 경계가 될 만하다. 잘 짓지는 못했으나 재물을 탐하고 독직(瀆職)하는 자의 경계가 될 만하다.)
  • E560  + (정현이 해주 목사가 되어 부용당에 걸린 여러 시들을 보고는 모두 가져다가 객정현이 해주 목사가 되어 부용당에 걸린 여러 시들을 보고는 모두 가져다가 객사 하인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들을 장작으로 써서 뒷간의 물을 데우는 데 써라" 스스로 절구 한 수를 지어 들보 위에 전하기로, ""라 하였다. 그 시가 당시에 널리 회자되었는데 혹자는 그 교만함을 매우 미워하였다. 이후에 임진란이 일어나 왜구가 해주에 들어와 부용당 현판에 걸린 시들을 모두 부수었는데 유독 정현과 김성일 두 사람의 시만 남겼다. 김성일은 비록 시를 잘하지 못했지만 일본 통신사로 다닐 때에 그 강직함을 일본에서 중시하였으므로 그 시를 남겼다. 정현의 시는 왜구도 그것이 절창임을 알았기 때문에 남긴 것이다. 또 강릉에 이르러 관부 현판에 걸린 시들을 보고는 여러 시들은 모두 그대로 두고 오직 임억령의 장편고시만을 취하여 배에 싣고 돌아갔다. 왜구도 또한 시를 알았던 것이다. 장편고시만을 취하여 배에 싣고 돌아갔다. 왜구도 또한 시를 알았던 것이다.)
  • E648  + (조지세(趙持世 지세는 조위한(趙緯韓)의 자)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명(地名)조지세(趙持世 지세는 조위한(趙緯韓)의 자)는 일찍이</br>“우리나라 지명(地名)은 시(詩) 속에 들여와도 우아한 맛이 없다. 그러나 중국의,</br>대기는 운몽택을 쪄서 올리고 / 氣蒸雲夢澤</br>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네 / 波撼岳陽城</br>와 같은 시구를 보면 무릇 열 글자 중에서 여섯 글자가 지명이고, 그 위에 네 글자를 보탠 것이요, 그 힘쓴 곳은 다만 증(蒸)자와 감(撼)자, 이 두 글자뿐이니 시를 짓기가 어찌 수월하지 않은가.”</br>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또한 일리는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노 정승의 시인</br>길은 평구역에서 다해 버리고 / 路盡平丘驛</br>강물은 판사정에서 깊어진다네 / 江深判事亭</br></br>청파의 저녁에 버들빛 짙고 / 柳暗靑坡晩</br>백악의 봄날에 하늘은 맑네 / 天晴白嶽春</br>같은 구절은 또한 대단히 훌륭하다. 이것은 글귀 만드는 묘법에 있을 뿐이나 쇠로서 금을 만들기에 무엇이 해로우랴?것은 글귀 만드는 묘법에 있을 뿐이나 쇠로서 금을 만들기에 무엇이 해로우랴?)
  • E203  + (지사(知事) 안침(安琛)의 영암군(靈岩郡)의 배회루(徘徊樓)에, 배회루 위에지사(知事) 안침(安琛)의 영암군(靈岩郡)의 배회루(徘徊樓)에,</br>배회루 위에 달이 배회하니 / 徘徊樓上月徘徊</br>나그네 배회함 또한 유쾌하도다 / 客子徘徊亦快哉</br>옥토끼는 몇 해나 선약을 찧고 / 玉兎幾年仙藥搗</br>소아(달의 딴 이름)는 어디에서 거울갑을 여는고 / 素娥何處鏡奩開</br>흔들리는 물결이 백 갈래로 흩어지는 동파수에 / 搖波散百東坡水</br>비친 그림자 셋이 되어 이태백의 잔이로다 / 對影成三太白杯</br>바로 밤중이 되니 하늘이 씻은 듯하고 / 直到夜深天似洗</br>바람이 불어 보내니 계향이 오도다 / 好風吹送桂香來</br>하였는데, 그 당시 가작(佳作)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파백태백삼(東坡百太白三)의 문구는 본래 이 문순공(李文順公)의 말이고, 또 안침의 창녕(昌寧)의 〈추월헌시(秋月軒詩)〉가 있는데, 그 한 연에,</br>흔들리는 물결은 흩어져 동파의 백 갈래가 되고 / 搖波散作東坡百</br>비친 그림자는 참으로 태백의 삼을 이루도다 / 對影眞成太白三</br>하였다. 무슨 새로운 말이라고 여러 번이나 썼는가.루도다 / 對影眞成太白三 하였다. 무슨 새로운 말이라고 여러 번이나 썼는가.)
  • E546  + (참판 박민헌이 '촉석루 시에 차운하여'에서, ""라 하였다. 다른 차운한 사람들이 모두 이에 미치지 못했다. 공은 당세에 시명이 있었으며 시학은 두보를 온전히 배웠다. 그러나 그의 사고 가운데 여러 작품들을 보면 모름지기 사람들의 뜻에 만족스럽지 못하다. 믿을 만하구나, 보는 것이 듣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 E216  + (충재(盅齋) 최숙생(崔淑生)의 의주 취승정시(聚勝亭詩)에, 말굽 같은 서해가충재(盅齋) 최숙생(崔淑生)의 의주 취승정시(聚勝亭詩)에,</br>말굽 같은 서해가 막다른 모퉁이에 이르렀는데 / 馬蹄西海到窮陲</br>백척 높은 정자 자미(북두의 북쪽 별)에 닿을 듯 / 百尺危亭近紫微</br>난간에 기대어 좋은 경치 바라보며 / 且倚雕欄看勝景</br>구슬발이 밝은 햇빛을 가리지 말라 하네 / 不敎珠箔障晴暉</br>가로지른 압록강이 하늘에 닿아 있고 / 江橫鴨綠兼天暉</br>버들개지 노랗게 비 맞아 살쪘구나 / 柳暗鵝黃着雨肥</br>문득 옥당을 생각하니 이 몸 만리 밖에 있는데 / 忽憶玉堂身萬里</br>봉래산 어느 곳에 오색 구름 나는고 / 蓬萊何處五雲飛</br>하였는데, 퇴휴당 소정승이 나에게 현판의 시를 읽게 하고 이 한 편에 이르러 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 늙은이의 시는 시다운 시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그러나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시에,</br>웅번 예부터 변방에 건장한데 / 雄藩自古壯邊陲</br>새로 지은 정자 산허리에 마주 섰네 / 新搆華亭對翠微</br>절역(멀리 떨어져 있는 땅)의 구름 안개 취한 눈에 들어오고 / 絶域雲煙來醉眼</br>성 마루에 핀 꽃버들은 봄빛을 자랑하네 / 層城花柳媚春凈</br>산을 두른 넓은 들 그림같이 푸르고 / 山圍廣野靑如畫</br>비 지난 긴 강은 푸르기가 더하네 / 雨過長江綠漸肥</br>참지 못하여 정자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 叵耐登臨還望遠</br>고향 생각 밤낮 없이 남쪽으로 날아가네 / 歸心日夜正南飛</br>하였는데, 나의 좁은 소견으로 본다면 조위의 시가 어찌 충재만 못하겠는가. 하였는데, 나의 좁은 소견으로 본다면 조위의 시가 어찌 충재만 못하겠는가.)
  • E564  + (퇴계 이황이 일찍이 남명 조식과 함께 연회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황이 말했퇴계 이황이 일찍이 남명 조식과 함께 연회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황이 말했다. "주색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술은 오히려 참기 쉽지만 색욕은 참기 어렵다. 소강절의 시에 '색은 능히 사람을 탐닉하게 한다(色能使人嗜)'라 하였으니, 역시 그 참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자네는 색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식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색욕에 있어서는 패전한 장군이니, 묻지 말아주시오." 이황이 말했다. "나는 젊었을 때에는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었지만, 중년 이후로는 자못 참고 있으니, 자제력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송익필도 자리에 있었는데, 지위는 낮지만 글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송익필이 말했다. "소생이 일찍이 읊은 것이 있사온데, 대인의 한 번 들어주심을 바랍니다." 이에 외워서 들려주었다. 시는 이러하였다."" 용사한 뜻이 깊고 절실하였다. 이황이 읊으며 칭찬하였고 조식은 웃으며 말했다. "이 시는 패군장의 경계로 삼기에 적합하다."하였고 조식은 웃으며 말했다. "이 시는 패군장의 경계로 삼기에 적합하다.")
  • E687  + (학사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평사(評事 북평사(北評事))로 함경도(咸학사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평사(評事 북평사(北評事))로 함경도(咸鏡道)에 부임하자 손곡이 〈새하곡(塞下曲)〉 3수로 송별하였다. 그 첫 수에 이르기를,</br></br>도위가 군사를 나눠 밤에 적진 습격하니 / 都尉分軍夜斫營</br>한나라의 쇠북소리 변성을 진동하네 / 漢家金鼓動邊城</br>아침에 항복한 오랑캐 얘기 들으니 / 朝來更聽降胡說</br>서쪽 아래 음산에는 복병이 있다네 / 西下陰山有伏兵</br></br>하였는데, 한 때에 전하여 읊어졌다.</br>내가 일찍이 당나라 우곡(于鵠)의 시를 보니,</br></br>물 건너 오랑캐 말을 들으니 / 度水逢胡說</br>사막 북쪽에 복병이 있다네 / 沙陰有伏兵</br></br>라는 구절이 있었고, 권송계(權松溪 권응인(權應仁))의 시〈유해상인가(遊海上人家)〉에는,</br></br>갈매기가 잘못 난간에 날아드네 / 鷗飛誤入闌</br></br>라는 구절이 있었다. 또 나는〈하월호환취각(何月湖環翠閣)〉시에 나오는,</br></br>사금이 물을 차지하여 한가히 서로 따르다 / 沙禽占水閑相趁</br>성긴 발에 잘못 들어갔다 돌아나오네 / 誤入疏簾靜却廻</br></br>라는 구절도 보았다. 옛날에 유원보(劉原父)가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을 희롱하며 말하기를,</br>“영숙(永叔 구양수의 자(字))이 한유(韓愈)의 문장에서 공취(公取 공공연히 취함)한 것이 있고 절취(竊取 몰래 취함)한 것이 있는데, 공취한 것은 대강 셀 수 있지만 절취한 것은 셀 수가 없습니다.”</br>하였는데, 송계는 칠언 두 구절을 요약하여 오언 일구를 이루어 다만 그 뜻만을 취했을 뿐이니 절취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손곡은 고구(古句)를 완전히 베껴 거기에 몇 글자만 더해 한때에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자 했으니, 공취와 절취가 아니고 발총수(發塚手 무덤을 파헤친 솜씨)이다.고자 했으니, 공취와 절취가 아니고 발총수(發塚手 무덤을 파헤친 솜씨)이다.)
  • E628  + (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br>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 때 / 昔年窮寇此殲亡</br>혈전 벌인 신검(神劍)에는 붉은 빛깔 둘렸다네 / 鏖戰神鋒繞紫芒</br>한의 깃대 꽂힌 흔적 돌 틈에 남아 있고 / 漢幟豎痕餘石縫</br>얼룩진 옷 적신 피는 노을 빛을 물들이네 / 斑衣漬血染霞光</br>소슬바람 살기 띠어 수풀 뫼는 엄숙하고 / 商聲帶殺林巒肅</br>도깨비불 음기 타니 성루는 묵어졌네 / 鬼燐憑陰堞壘荒</br>동방 사람 어육(魚肉) 면킨 우 임금의 덕일진댄 / 東土免魚由禹力</br>소신이 해를 그려 어찌 감히 칭찬하리 / 小臣摸日敢揄揚</br>기걸(奇杰)하고 혼중(渾重)하니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절강(浙江)의 오명제(吳明濟)가 이 시를 보고 비평하기를,</br>“그대의 재주는 용을 잡을 만한데 도리어 개를 잡고 있으니 애석하다.”</br>고 했는데 대개 당시(唐詩)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
  • E725  + (호주 채유후가 일찍이 동호 독음에 갈 때에 승지 이원진과 같이 배를 타고 놀았다. 채유후가 크게 취하여 실수로 강물에 빠졌는데 이원진이 급하게 그를 구조하였다. 채유후가 곧 절구 한 수를 읊었다. "" 자리의 사람들이 모두 좋게 여겼다. 혹자는 전하기를, 채유후가 이미 이 구를 얻고서 일부러 물에 빠진 척하였다 하니, 시인의 웃음거리로 보탤 만하다.)
  • M026  + (황혼의 풍우에 원림이 어두운데 / 黃昏風雨暝園林 쇠잔한 국화 떨어지니 땅에 황금이 가득하이 / 殘菊飄零滿地金)
  • E587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사신의 작품들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감히 가리지 못하고 받아서 간행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 사신 중에 글을 잘한다 일컫는 자는 필경 공용경인데 주지번에게 그를 물으니 일찍이 성명을 듣지 못했다 한다. 기순과 당고는 시어가 아름답고 굳세지만 또한 시가에 대하여 능한 사람은 아니다. 장녕은 다소 청려한 듯하나 또한 취약하여 골격이 없어서 끝내 소가에 귀결된다. 주지번의 시는 조잡하여 형태가 없으니 오히려 사신 웅화의 위약함만도 못하다. 그 밖의 사람들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 문인들이 매번 수창할 적에 대부분 미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대소정편의 다름이 있다. 원접사 서거정이 기순에 대해 감히 선창하기를 마치 도전하는 듯하게 하였지만 결국 ""구에 곤란을 겪었다. 율곡 이이가 조롱하여 말하기를 "사가 서거정은 씨름하는 사람과 같으니 먼저 다리를 걸고 후에 땅에 넘어뜨린다." 아랫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는 마땅히 받들어 접대하고 수창하여야 할 따름인데 어찌 감히 선창하겠는가? 이는 참으로 식자의 말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 그 시절 문인들 중 다소 시에 능한 자들을 모아서 수답하게 하였는데 그 택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사신의 웃음을 산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정사룡은 비록 시짓는 장수라 칭하지만 그 시가 이루어진 시에 견강부회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 오직 이행만이 혼연히 글을 완성하였으나 격조가 매우 비루하여 과체시의 류에 불과하였다. 지을 때마다 잠시 집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응수하였는데 그 대구가 잘 어울려 흠이 없었으니 평소에 익숙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소세양과 이희보는 비록 당시의 종사에게는 굴복하였으나 지금 세상에 동문을 읽고 사운시를 익히는 유근과 같은 자와는 함께 논할 수 없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 C006  +
  • E004  +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었고, 또《계원필경(桂苑筆耕)》10권을 간행하였다. 나는 일찍이 중국 사람은 포용력이 넓어서 외국 사람의 글이라고 경홀하게 여기지 않고, 이미 사책에 실었을 뿐더러, 또 그 문집이 세상에 행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 갸륵하게 여겼다. 그러나 문예열전(文藝列傳)에 최치원을 위하여 특별히 그 전(傳)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 뜻을 모르겠다. 혹 그의 사적이 전을 설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겨서일까? 최치원은 12세에 바다를 건너 당 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여 한 번 과거를 보아 갑과로 급제하였고, 드디어 고변(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서는 황소에게 격문을 보내니 황소의 기가 꺾였으며, 뒤에 벼슬이 도통순관 시어사(都統巡官侍御史)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려 할 때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이 유선가(儒仙歌)를 주었는데, 그 한 구에, </br></br><div class="poetry-text">[[M004|<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br></br>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네</div></br></br>하였고, 그의 자서(自敍)에도, “무협 중봉(巫峽重峯)의 해에 보잘것없는 몸으로 중국에 들어 왔고, 은하 열수(銀河列宿)의 해에 비단옷 입고 고국에 돌아왔다.” 하였으니, 대개 열두 살에 당 나라로 들어갔다가 스물여덟 살에 고국으로 돌아왔음을 말한 것이다. 그 행적이 이처럼 뚜렷하니, 이것으로 전을 설치한다면 예문지에 실린 심전기(沈佺期)ㆍ유병(柳幷)ㆍ최원한(崔元翰)ㆍ이빈(李頻) 등의 반장 정도되는 열전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만약 외국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지(志)에는 써야 할 것이다. 번진호용열전(藩鎭虎勇列傳)에서는 이정기(李正己)ㆍ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다 고려 사람인데도 각각 그 전을 만들어 그 사실을 소상하게 기록했는데, 어째서 문예열전에서만 최치원을 위하여 그 전을 설치하지 않았는가? 내가 사의(私意)로 헤아리건대, 옛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시기함이 없지 않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의 외로운 몸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사들을 압도했음에랴. 만일 전을 설치하여 바른 대로 그 사적을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을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
  • E003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이 있다. 그러므로 동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이 있다. 그러므로 동방학자들은 모두 그를 유종(儒宗)으로 여긴다.<br />그가 지은 비파행(琵琶行) 한 수가 《당음(唐音)》유향(遺響)에 실려 있는데 작자는 무명씨로 적혀 있다. 후세에 그에 대한 의신(疑信)이 결정되지 못하는데 혹자는,<br /><div class="poem font-weight-light"><br /> 동정에 달이 떨어지니 고운이 돌아간다<br /></div><br />라는 글귀로 최치원의 저작이라는 증거를 댄다. 그러나 또한 그것으로는 단안을 내릴 수가 없다.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檄文) 한 편과 같은 것은 비록 사적(史籍)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죽이기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벌써 죽이기를 의논했다.’라는 대문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와서 무릎을 꿇었다 하니,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
  • E358  + (교관 정군경(鄭君敬 정작(鄭碏))이 나에게 윤창주(尹滄洲 윤춘년(尹春年))가교관 정군경(鄭君敬 정작(鄭碏))이 나에게 윤창주(尹滄洲 윤춘년(尹春年))가 임자년(1552, 명종7) 가을에 지은 증별시(贈別詩)를 보여 주었다. 시는 다음과 같다.</br>문장에는 정맥이 있어 / 文章有正脈</br>뜻과 음이 위주이거늘 / 意音爲之主</br>이 도가 오래 전하지 않아 / 此道久不傳</br>소경과 귀머거리 되고 말았네 / 已矣爲聾瞽</br>성(性)과 정(情)은 본디 맑으니 / 性情本湛然</br>뜻만이 고무시킬 수 있다네 / 惟意能鼓舞</br>슬픔과 기쁨은 각기 상응하고 / 哀樂各相應</br>안팎은 원래 하나의 법칙이네 / 表裏元一矩</br>원기는 참으로 호연하니 / 元氣信浩然</br>큰 음악에 어찌 악보 있으랴 / 大樂安有譜</br>음조와 반절은 문자에 담겨 있고 / 調切寄文字</br>가락은 종소리 북소리에 응하네 / 節奏應鐘鼓</br>슬프다, 나는 옛글을 읽으며 / 嗟余讀古書</br>십 년 동안 고생하며 노력했네 / 十年勤自苦</br>다행히 하루아침에 터득하여 / 一朝幸有得</br>눈으로 보듯 훤하게 되었네 / 敢謂如目覩</br>정군은 비록 나이 적으나 / 鄭子雖年少</br>마음은 고인을 간절히 사모하네 / 其心甚慕古</br>나를 따르며 이미 누차 물었지만 / 相從已屢問</br>도움된 바가 없어 부끄럽구나 / 自愧無所補</br>기운을 길러 근본으로 삼고 / 養氣以爲本</br>책을 읽어 보탬으로 삼았네 / 讀書以爲輔</br>혈기가 왕성하지 않다면 / 血氣苟不盛</br>만 권 읽어도 끝내 헛일이라네 / 萬卷終鹵莽</br>그대가 귀 기울여 듣기 바라니 / 願君聽殷勤</br>내 말은 진심에서 나왔다네 / 我言出肺腑</br>어찌 문장 짓는 법에 불과하랴 / 豈徒作文法</br>도를 배우는 것도 여기서 얻으리 / 學道從此取</br>이제 그대 멀리 떠나서 / 今君有遠行</br>적막한 남쪽으로 돌아가네 / 寂寞歸南土</br>오랫동안 만날 일도 없으리니 / 追隨應久廢</br>헤어져 있는 기간 헤아릴 수 있으랴 / 別離那可數</br>옛사람 흉내내어 증별시 주고 싶지만 / 贈言欲效古</br>내 재주는 이백이나 두보가 아니라네 / 我才非李杜</br>서성거리며 차마 작별 못하는데 / 徘徊不忍別</br>가을 바람이 강가에 불어오네 / 秋風動江浦</br>이때 정군의 나이는 겨우 스물이었는데 창주가 이미 이렇게까지 인정하였다. 이 시는 상당히 법도가 있어 볼만하다. 창주가 이미 이렇게까지 인정하였다. 이 시는 상당히 법도가 있어 볼만하다.)
  • E034  + (대축 오세재가 의종이 미행한 것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 <div cla대축 오세재가 의종이 미행한 것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M059|<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어찌하여 날이 청명한데도,<br>검은 구름 낮게 땅에 깔리었는가,<br>도성 사람들 가까이 마오.<br>용이 이 속으로 다닌다오.</div></br>그는 또 남의 운을 써서 극암에 대해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M060|<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성의 북쪽 높고 험한 바위,<br>나라 사람들은 극암이라고 부르지.<br>멀리 학을 탄 왕자 진을 찧을 듯하고,<br>높이 하늘에 오른 무함을 찌를 것 같다.<br>자루를 휘는 데 번개로 불을 삼고,<br>칼날을 담금질하는 데 서리로 소금을 삼는다.<br>어떻게 변기로 만들어,<br>초를 없애고 범을 살릴까.</div></br>눈병을 앓으면서 지은 시는 이렇ᄃᆞ.</br><div class="poetry-text">[[M061|<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늙음과 병은 기약이나 한 듯 찾아오지만,<br>죽을 때가 다된 한 포의의 신세.<br>눈동자 몹시 희미하여,<br>자수정 안경도 소용이 없네.<br>등잔불 앞에서 글자 보기가 겁나고,<br>눈 내린 뒤 빛을 부끄럽게 바라본다.<br>금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br>눈을 감고 기심을 잊는 것을 배우리라.</div></br>문순공 이규보가 말하기를, “<div class="critique-text">[[C037|<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선생이 시를 짓는 것은 한유와 두보를 배웠다. 그러나 그의 시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div></br>”고 하였다. </br>그런데 김거사집 가운데 그의 시가 한 편 실려 있다.</br><div class="poetry-text">[[M062|<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크기는 백 아름이나 되는 재목이지만 쓸 데가 없고,<br>길이는 석 자나 되는 입이지만 말을 못한다.</div></br><div class="critique-text">[[C038|<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역시 노건하여 칭찬할 만하다.</div>)
  • E401  + (박 상국 순(朴相國淳)은 자(字)가 화숙(和叔)으로서 박우(朴祐)의 아들이요박 상국 순(朴相國淳)은 자(字)가 화숙(和叔)으로서 박우(朴祐)의 아들이요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그의 맑은 덕과 꿋꿋한 절개는 남이 따라갈 수 없었으며 정승으로 10년 동안 있으면서 아무 잘못도 없었다. 그런데 계미년(1583, 선조16)에 정인(正人)을 헐뜯는 자가 그를 모함에 빠뜨리면서 그의 죄 열 가지를 들어 배척할 것을 청하였는데, 선조대왕이 그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통촉해 준 덕분으로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병을 핑계로 물러나와 영평(永平) 땅에서 살았는데, 경치 좋은 그곳에서 유유자적하다가 아무 병 없이 생을 마쳤다. 그가 배척을 받고 서호(西湖)에 있을 때 시를 짓기를,</br></br>거문고 책 끼고 낭패당해 용산으로 물러나와 / 琴書顚倒下龍山</br>목란선(木蘭船)에 의지하고 바람 따라 흘러가네 / 一棹飄然倚木蘭</br>석양 노을 조각조각 붉기만 하고 / 霞帶夕暉紅片片</br>비온 뒤의 가을 물결 넘실넘실 푸르구나 / 雨增秋浪碧漫漫</br>꼬시래기 잎새 다 시들어 소객(騷客)의 마음 슬퍼지고 / 江蘺葉悴騷人怨</br>물여뀌 꽃 다 졌으니 백로도 밤에 추워하리 / 水蓼花殘宿鷺寒</br>백발 머리에 강 떠도는 나그네 신세 되어 / 頭白又爲江漢客</br>서리 이슬 잔뜩 맞고 여울을 거슬러 올라가네 / 滿衣霜露泝危灘</br></br>이라 하였는데 한때 널리 읊어졌다. 또 그의 ‘승려의 시축에 제함[題僧軸]’이라는 시에,</br></br>아침에 암자 물러나와 한가한 틈을 타서 / 小齋朝退偶乘閑</br>궤안에 기대고는 쓸쓸히 먼 산 바라보네 / 隱几蕭然看遠山</br>예로부터 세상 분규 그칠 날이 없었지만 / 終古世紛無盡了</br>오늘날 처신하기 더욱 더 어렵구나 / 秪今人事轉多艱</br>하늘 질러 지나간 새 까마득히 안 보이고 / 長空過鳥元超忽</br>석양녘 외로운 구름 갔다가는 돌아오네 / 落日孤雲自往還</br>생각나네 그 언젠가 먼 절에서 노닐던 일 / 遙想舊遊天外寺</br>목련꽃 활짝 피고 물은 졸졸 흘렀었지 / 木蓮花發水潺潺</br></br>이라 하였는데, 이것 역시 경절(警絶)하다고 칭해졌다. 그는 호를 사암(思庵)이라 하였다. 사암이 영평에 있을 때 소절(小絶) 한 수를 짓기를,</br></br>이따금 들려오는 외마디 산새 소리 / 谷鳥時時聞一箇</br>책상 머리 적요한데 서책들만 널려 있네 / 匡床寂寂散群書</br>어떡하나 백학대 앞 흐르는 저 시냇물 / 每憐白鶴臺前水</br>산문만 나가면은 이내 흙탕물 될 것이니 / 纔出山門便帶淤</br></br>라 하였는데, 한가하게 노닐며 자재(自在)하는 뜻과 홀로 높이 속세를 초월한 기상 모두가 이 시에 갖춰져 있다고 할 만하다.과 홀로 높이 속세를 초월한 기상 모두가 이 시에 갖춰져 있다고 할 만하다.)
  • E033  + (상서 김신윤이 의종 경인년 9월 9일에 이런 시를 지었다.<div cl상서 김신윤이 의종 경인년 9월 9일에 이런 시를 지었다.<div class="poetry-text">[[M058|<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임금의 수레 아래서 풍운이 일어나,</br></br>사람 죽인 것이 흩어져 있는 삼 베듯했네.</br></br>그러나 좋은 때를 저버릴 수 없어,</br></br>흰 술에 국화를 띄우네.</div><div class="critique-text">[[C036|<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이 시를 통해 당시의 일이 어찌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늙은이의 마음은 크고 구애됨이 없어 범상하지 않다.</div>;/div>)
  • E044  + (서하 임춘의 문앵시는 이렇다. <div class="poetry-tex서하 임춘의 문앵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88|<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농가에 오디 익고 보리가 자랐는데,</br>푸른 나무 사이에서 꾀꼬리 소리 처음으로 듣는다.</br>낙양 꽃 아래 손을 아는 듯,</br>은근히 울어대며 그치지 않네.</div></br>문청공 최자의 야직문채진봉학려라는 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89|<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구름 걷힌 장공에 달 정히 밝은데,</br>소나무에 깃들어 자는 학은 맑음을 이기지 못하네.</br>산에 잔나비와 새 가득해도 알아주는 이 없어,</br>홀로 성긴 날개를 퍼덕이며 밤중에 우노라.</div></br><div class="critique-text">[[C055|<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두 편의 시가 모두 불우한 처지를 슬퍼하며 지은 작품이다. 그러나 최자의 시는 기개와 절개가 강개하여 임춘의 시에 비길 것이 아니다.</div>)
  • E677  + (수호(垂胡) 임기(林芑)는 많은 서적을 읽었고 겸하여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을수호(垂胡) 임기(林芑)는 많은 서적을 읽었고 겸하여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을 지녔다. 그래서 무릇 구류백가(九流百家) 및 기서고문(奇書古文)을 눈으로 섭렵하고 입으로 외우지 않는 것이 없었다.</br>일찍이 서울에서 문인재자(文人才子)들이 모두 그의 집에 모여 각자의 견문(見聞)을 수호에게 문난(問難 질문)하였다. 수호가 좌우를 보면서 묻는 대로 즉답하는데 의혹스러운 곳이 없어서, 마치 쏟아지는 강물이나 흐르는 수은 같아 그침이 없었다. 호음(湖陰)은 늘 그를 가리키며 ‘걸어 다니는 비서〔行秘書〕’라고 말하였다.</br>호음은 술자리에서 많은 시를 지었는데 때때로 그 용사(用事)가 이해할 수 없는 곳이 있었으니, 대개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수호가 일찍이 사적인 자리에서 호음을 모시고 있다가 물어 보기를,</br>“상공(相公)의 시는 자주 위어(僞語)로 사람을 속이는데 후세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십니까?”</br>하였다. 호음이 대답하기를,</br>“세간에 당신같이 안목을 기른 자가 몇이겠는가. 희작(戱作)은 사고(私稿)에는 등재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후인의 눈에 띄겠는가.”</br>하였다. 마침내 서로 한바탕 웃었다.</br>호음은 병이 위독하자 수호에게 부탁하기를,</br>“그대가 꼭 내 시에 주를 달아 주게.”</br>하였다. 수호는 이를 허락하였다. 십여 년 후에 호음의 시고가 세상에 간행되었는데 주가 없었다. 가군(家君 아버님)이 수호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br>“제가 일찍이 그의 시를 수습하여 이미 한 권에 주를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에 용사와 문자가 대체로 거듭나오는지라 취하여 두루 열람해 본 즉 거듭나오는 곳이 갈수록 더욱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만두게 되었습니다…….”</br>하였다. 수호는 비록 이같이 박학했지만, 다만 시를 익히지도 않았고, 또한 즐겨 짓지도 않았다.</br>임신년(1572, 선조5)에 조사(詔使 중국 사신)를 맞이할 때 임기는 일기관(日記官)으로 임당(林塘)을 따라 용만(龍灣)에 갔다. 학사 습재(習齋) 권벽(權擘)이 조사의 시를 차운하여</br></br>중선루 위에서 북쪽으로 옷깃을 열고 / 仲宣樓上開襟北</br>자미 시 가운데 서쪽으로 길머리 했네 / 子美詩中首路西</br></br>라는 구절을 지었다. 수호가 말하기를,</br>“‘누상(樓上)’을 고쳐 ‘부리(賦裏)’로 하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br>하였다. 임당이 가군을 보며 말하기를,</br>“저 부리를 치는 것이 좋겠소.”</br>하기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포복절도하였다. 우리 동방의 말에 부리〔喙〕와 ‘부리(賦裏)’의 음이 같은 까닭이었다.</br>그러나 증다산(曾茶山)의 시 〈송증굉수천태(茶山送曾宏守天台)〉의 함련(頷聯)에서,</br></br>흥공의 부 가운데 운하가 붉고 / 興公賦裏雲霞赤</br>자미의 시 중에 도서가 푸르네 / 子美詩中島嶼靑</br></br>하였으니, 수호가 어찌 근거 없이 이 말을 하였겠는가. / 子美詩中島嶼靑 하였으니, 수호가 어찌 근거 없이 이 말을 하였겠는가.)
  • E397  + (우리 나라에 대단한 문장가들이 많이 배출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식대로우리 나라에 대단한 문장가들이 많이 배출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식대로 하려고만 힘썼을 뿐 당(唐) 나라 때의 작품에서 모범을 취해보려고 노력한 작품조차 극히 드문 실정이다. 그런데 충암(沖菴 김정(金淨))과 망헌(忘軒 이주(李冑)) 이후로는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 등 몇 사람이 가장 저명하다. 충암의 시 가운데 사람들의 입으로 전송(傳誦)되어 오는 것이 원래 많은데, 가령</br></br>강남 땅 못다 꾼 꿈 고요한 대낮인데 / 江南殘夢晝厭厭</br>꽃다운 해 날마다 시름만 더해가네 / 愁逐年芳日日添</br>꾀꼬리 제비 오지 않고 봄날 또 저무는데 / 鶯燕不來春又暮</br>살구꽃에 이슬비 발을 도로 내려놓네 / 杏花微雨下重簾</br></br>이라고 한 것이나, 또</br></br>가을 바람 낙엽지는 금강의 가을인데 / 西風木落錦江秋</br>연무 덮인 모래섬 바라보면 시름겨워 / 煙霧蘋洲一望愁</br>해 저물녘 술은 깨고 사람은 멀리 떠나는데 / 日暮酒醒人去遠</br>감당 못할 이별 생각 강 누각에 가득하네 / 不堪離思滿江樓</br></br>라고 한 시 등은 당 나라 사람들의 시집 속에 놔두어도 쉽게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망헌의 시 가운데</br></br>통주는 천하의 절경이라 / 通州天下勝</br>누각들 하늘에 솟았구나 / 樓觀出雲霄</br>저자엔 금릉의 물화(物貨) 가득하고 / 市積金陵貨</br>물줄기 양자강에 합류하네 / 江通楊子潮</br>가을이라 까마귀떼 물가에 내려 앉고 / 飢鴉秋落渚</br>저녁이라 외로운 새 요동으로 돌아간다 / 獨鳥暮歸遼</br>말 탄 이 내 몸 천리 길 나그네라 / 鞍馬身千里</br>정자 올라 바라보는 멀고 먼 고국땅 / 登臨故國遙</br></br>라고 한 것 역시 충암에 버금가는 시라고 하겠다. 최(崔)의 시에,</br></br>지난 해 절 언덕에 배를 갖다 대놓고는 / 去歲維舟蕭寺岸</br>꽃 꺾어 물가에서 전송을 하였었지 / 折花臨水送行人</br>이별 슬픔 저 산승은 아는지 모르는지 / 山僧不管傷離別</br>문을 닫고 무단히 또 봄 한 철을 보내누나 / 閉戶無端又一春</br></br>이라고 한 것이나, 백(白)의 시에,</br></br>못 속엔 붉은 연꽃 바람이 집에 가득터니 / 紅藕一池風滿院</br>나무마다 매미 소리 비가 마을로 몰려가네 / 亂蟬千樹雨歸村</br></br>이라고 한 것이나, 이(李)의 시에,</br></br>병객의 외로운 배 달빛만 밝게 비춰주고 / 病客孤舟明月在</br>노승의 적막한 절 꽃잎만 많이 져 있구나 / 老僧深院落花多</br></br>라고 한 표현들은 한 번 음미하면 그 맛을 알 수가 있다. 老僧深院落花多 라고 한 표현들은 한 번 음미하면 그 맛을 알 수가 있다.)
  • E038  + (장간공 장일의 승평연자루시는 이렇다. <div class="poetry장간공 장일의 승평연자루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71|<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바람과 달 처량한 영자루,</br>낭관이 한번 간 뒤 꿈조차 아득하다.</br>당시 좌중의 손들 늙음을 어찌 싫어하는가,</br>누대 위의 미인도 또한 흰 머리가 되었는데.</div> </br>밀직 곽예의 수강궁일요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72|<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여름엔 서늘하게 겨울엔 따듯하게 깨끗하고 살찌게 길렀는데,</br>무슨 일로 구름을 뚫고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가.</br>바다제비는 일찍이 낟알 한톨 주지 않았는데,</br>해마다 곁에 돌아와서 대들보 위를 날아다닌다.</div> </br>이승휴의 영운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73|<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한조각 홀연히 바다 속에서 생겨,</br>동서남북 가로세로 멋대로 다니네.</br>장마되어 마른 곡식 살린다 하면서,</br>공연히 중천의 햇빛과 달빛만 가리네.</div> </br>밀직 정윤의의 증렴사라는 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74|<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이른 새벽 말을 달려 외로운 성에 들어가니,</br>울타리가엔 사람 없고 살구만 익었구나.</br>뻐꾸기는 나라일 급한 줄도 모르고서,</br>수풀가에서 밭 갈라고 하루 종일 권하고 있네.</div> </br><div class="critique-text">[[C045|<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이 시들은 사람들이 즐겨 일컫는 것이다.</div></br><div class="critique-text">[[C046|<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그러나 장일의 시는 옛일이 느꺼워 지은 것이니 다른 뜻이 없다.</div></br><div class="critique-text">[[C1743|<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그 나머지 세 편은 모두 풍유를 간직하고 있는데</div></br><div class="critique-text">[[C047|<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정윤의, 곽예의 시는 풍유가 드러나지 않고 완곡하다.</div>)
  • E045  + (정언 진화의 영류시는 이렇다. <div class="poetry-tex정언 진화의 영류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90|<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봉성 서쪽 가에 일만 가지 노란 버들,<br>봄 근심 묶어서 어두운 그늘을 만들었네.<br>끝없이 바람이 불고 또 불어,<br>연기와 비를 섞어 깊은 가을에 이르겠네.<br></div></br><div class="critique-text">[[C056|<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이 시는 정치가 유렿다.</div></br>그런데 당나라 이상은의 유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M091|<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일찍이 봄바람과 같이 춤자리를 휩쓸면서<br>개인 정원에서 즐겨 놀며 애를 태울 때<br>어찌 즐겨하랴! 가을이 되어<br>사양이 되었는데 매미까지 우는 것은.<br></div></br><div class="critique-text">[[C057|<span class="fa fa-plus-circle critique-link-btn"></span>]]진화의 시는 이 시를 본받아 지은 것이다.</div></br>그러나 황산곡이 말하기를, “<div class="poetry-text">[[M092|<span class="fa fa-plus-circle poetry-link-btn"></span>]]남을 따라 계책을 세우면 끝내 남에게 뒤질 것이고, <br>스스로 일가를 이루어야 비로소 핍진할 것이다.</div>”고 하였는데 정말 그렇다.)
  • C006  + (후세에 그에 대한 의신(疑信)이 결정되지 못하는데 혹자는, 동정에 달이 떨어지니 고운이 돌아간다 라는 글귀로 최치원의 저작이라는 증거를 댄다. 그러나 또한 그것으로는 단안을 내릴 수가 없다.)
  • E295  + (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예부(禮部)를 관광(觀光)하는데, 절강(浙江)의 서생(書生) 5~6인이 먼저 와 있었다. 땅에 글을 적어 서로 문답하고, 한 절구를 지어보였다.</br>중국 조정 예부에 부평같이 모였으니 / 天朝禮部風萍集</br>천리의 관광객은 각각이 다른 고향 / 千里觀光各異鄕</br>가장 괴로운 건 내일 아침 이별하면 / 最苦明朝又分手</br>푸른 하늘 가을 숲이 정히 푸르리 / 碧天秋樹正蒼蒼</br>내가 곧 그 시의 운에 따라 지었다.</br>서리 바람 나무에 불어 성겨 누른 잎 떨어지니 / 霜風吹樹隕疏黃</br>소슬한 찬 소리에 고향 생각 괴롭도다 / 蕭瑟聲寒苦憶鄕</br>같은 나그네로 내가 가장 먼 곳이니 / 同作旅遊吾最遠</br>바다 하늘 나직한데 흩어진 산 푸르구나 / 海天低襯亂山蒼</br>서로 끌며 몰려와 보고는 선생이라 불렀다. 내가 사양하여 말하기를,</br>“중국 선비들의 과분한 칭찬이 이미 감사한데, 또 선생은 무슨 말입니까?”</br>하니, 답하기를,</br>“재주를 보는 것이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br>하였다. 이번 걸음에 무령현(撫寧縣) 벽에 한 율시를 지어 붙였다. 그 1 연(聯)에,</br>말 통하려고 땅에 글 쓰기 번거롭고 / 通言煩畫地</br>악을 보러 중국을 방문한 것 기쁘다 / 觀樂喜朝天</br>하였다. 그후 임술년간에 한 압마관(押馬官)이 와서 말하기를,</br>“어떤 현의 관사가 다 낡아 다시 지었는데, 그 시를 쓴 구벽(舊壁)은 완연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br>하였다. 케케묵고 누추한 시에서 뭐 취할 것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
  • C005  +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
  • C046  + (그러나 장일의 시는 옛일이 느꺼워 지은 것이니 다른 뜻이 없다.)
  • E736  + (근래의 젊은이 중에서 사백 김석주가 일찍부터 문명을 얻었으나 문장이 난삽한 근래의 젊은이 중에서 사백 김석주가 일찍부터 문명을 얻었으나 문장이 난삽한 병통이 있었다. 비록 몇 구의 말을 지어도 반드시 마음을 써서 깊이 생각하며, 초고를 여러 번 고치지 않으면 내놓지 않았다. 그의 시는 대개 조각하고 꾸민 것이 많은데, 우해 홍만종에게 차운한 시 여덟 편은 모두 좋다. 그 중 한 편은 이러하다. "" 극히 평담하고 고풍에 가깝다. 내가 일찍이 김석주를 만나 문학을 논할 때 김석주가 말했다. "내가 젊어서 많이 읽지 못하여 글쓰는 힘에 박차를 가할 수 없다. 비록 힘써 읽어서 그 병통을 고치려 하나 많은 업무로 겨를이 없으니 한스러울 뿐이다." 대개 김석주가 무릇 제술할 때에는 옛 저작을 모방하는 데이만 능할 뿐으로 큰 근원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므로 그가 이처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작법을 묘하게 이해하고 각 체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참으로 얻기 쉽지 않다. 작법을 묘하게 이해하고 각 체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참으로 얻기 쉽지 않다.)
  • E659  + (근일에는 이실지(李實之 실지는 이춘영(李春英)의 자)가 시문에 능하다. 그 근일에는 이실지(李實之 실지는 이춘영(李春英)의 자)가 시문에 능하다. 그 시가 비록 번잡한 것 같으나 기(氣)는 나름대로 창대(昌大)하여 작가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권여장(權汝章 여장은 권필(權韠)의 호)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다. 실지의 안목은 높아서 일세의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나와 여장ㆍ자민(子敏 이안눌(李安訥)의 자)만을 괜찮다고 여겼다. 그는, ‘허는 허세가 있고 권은 말랐으며 이는 융통성이 없다.’ 고 하였는데 역시 지당한 평론이다.고 권은 말랐으며 이는 융통성이 없다.’ 고 하였는데 역시 지당한 평론이다.)
  • E154  + (김시습의 자는 열경으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을 우습게 보면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였다. 그의 호는 동봉, 췌세옹, 매월당, 청한거사, 청은 등이며 만년에 환속하였다가 죽었다. 그의 '공암의 사준사에게 율시 이십사수를 주다' 시에, ""라 하였고, 또 "", 또 "", 또 "", 또 "", 또 "", 또 "", 또 "", 또 "", 또 "" 등등의 시가 있다.)
  • E224  + (남추강이 한훤선생의 일을 씀에 말하길, 대유(大猷)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남추강이 한훤선생의 일을 씀에 말하길, 대유(大猷)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에게 수업하였고, 고상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었고,인정(人定)이 된 뒤라야 잠자리에 들고 닭이 울면 일어났으며, 손에서 《소학》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이 국가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소학》을 읽는 아이가 어찌 큰 의리를 알겠는가.” 하였다. 나이 30이 된 뒤에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고, 나이가 들수록 도가 더욱 높아졌기에 세상이 만회될 수 없고 도가 행해질 수 없음을 익히 알아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다. 그러나 사람들이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br>점필재 선생이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또한 국사를 건의하는 일이 없자, 대유가 시를 지어 올리기를, </br>도란 겨울에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 마심에 있거늘 / 道在冬裘夏飮氷</br>비 개면 가고 비 오면 멈춤이 어찌 전능한 일일까 / 霽行潦止豈全能</br>난초도 만약 세속을 따른다면 마침내 변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br>소는 밭 갈고 말은 탄다는 이치를 누가 믿으리까 / 誰信牛耕馬可乘</br>하였다. 선생이 화답하기를,</br>분에 넘치게 관직이 경대부에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伐氷</br>임금 바로잡고 세속 구제함을 내 어찌 능히 하랴 / 匡君救俗我何能</br>이로써 후배로 하여금 오졸함을 비웃게 했으니 / 從敎後輩嘲迂拙</br>구구한 권세의 벼슬길에는 나설 것이 못 되누나 / 勢利區區不足乘</br>하였으니, 대개 이를 싫어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나빠졌다.乘 하였으니, 대개 이를 싫어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나빠졌다.)
  • E012  + (내가 본래 시를 즐기는 것은 비록 포부(抱負)이기는 하나 병중에는 평일보다 내가 본래 시를 즐기는 것은 비록 포부(抱負)이기는 하나 병중에는 평일보다 배나 더 좋아하게 되니, 또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매양 흥이 날 때나 물(物)을 접촉했을 때에는 시를 읊지 않는 날이 없다. 그렇지 않으려 하여도 되지 않으니, 이것 또한 병이라고 말할 만하다. 일찍이 시벽편(詩癖篇)을 지어 뜻을 나타냈으니, 대개 스스로 상심한 것이다. 또 매일 한 끼니 식사는 두어 숟갈을 뜨는 데 불과하고 오직 술만 마실 뿐이라 항상 이것으로 걱정하였는데, 백낙천(白樂天)의《후집(後集)》에 실린 노경(老境)에 지은 것을 보았더니 병중에 지은 것이 많고, 술 마시는 것 또한 그러하였다. 그 한 시는 대략 이러하다. 내 또한 조용히 운명을 관찰하니 / 我亦定中觀宿命 평생의 부채는 바로 시가일러라 / 多生債負是歌詩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읊는 일에 미친 것이 / 不然何故狂吟詠 병난 뒤엔 병나기 전보다 더하겠는가 / 病後多於未病時 꿈에 얻은 시를 수작한 시는 이러하다. 어둡고 어두운 베이불 밑에 / 昏昏布衾底 병과 취함과 졸음이 서로 어울렸다 / 病醉睡相和 운모산(雲母散)을 먹는 데 대해 지은 시는 이러하다. 늦게 먹은 세 숟갈의 밥을 약이 녹이는구나 / 藥消日晏三匙食 그 나머지의 시도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이런 시를 보고난 다음에 너그럽게 생각하기를, “나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옛사람도 그랬다. 이것은 모두 숙부(宿負) 때문이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백공(白公)은 재직 중 병가를 내기를 1백 일이나 하였다. 나는 모일(某日)에 장차 퇴임을 청원할 터인데, 병가를 계산하면 1백 10일이니, 그것이 우연히 이처럼 서로 같다. 다만 부족한 것은 번소(樊素)와 소만(少蠻)일 뿐이다. 그러나 두 첩(妾)은 또한 공의 나이 68세 때 모두 내침을 당했으니 어찌 이때에 있었겠는가. 아, 재명(才名)과 덕망(德望)은 비록 백공에게 미치지 못한 그 거리가 매우 머나, 노경의 병중에 겪은 일들은 이따금 서로 같은 것이 많았다.” 하고, 따라서 그가 병중에 지은 시 열 다섯 수를 화답하여 다음과 같이 정을 서술한다. 노경에 세사를 잊고 평탄한 땅 밟았으니 / 老境忘懷履垣夷 낙천은 나의 스승이 될 만하이 / 樂天可作我之師 세상에 뛰어난 낙천의 재주에는 미치지 못하나 / 雖然與及才超世 병중에 시를 즐기는 것은 우연히 서로 같구나 / 偶爾相侔病嗜詩 그의 당년 퇴임하던 날짜를 비교해보면 / 較得當年身退日 나의 금년 퇴임하는 때와 같다 / 類余今歲乞骸時 낙구(落句)는 빠졌다.退日 나의 금년 퇴임하는 때와 같다 / 類余今歲乞骸時 낙구(落句)는 빠졌다.)
  • E678  + (내가 일찍이 결성현(結城縣 충남 홍성군 일대의 옛지명)을 맡았을 때 동상헌(내가 일찍이 결성현(結城縣 충남 홍성군 일대의 옛지명)을 맡았을 때 동상헌(東上軒) 벽상(壁上)에서 먼지에 묻혀 있는 시판을 보았는데 그것은 정호음의 장률이었다. 함련(頷聯)에 이르기를,</br></br>파도치는 추석에 굴이 껍질 붙였고 / 波舂醜石蠔黏甲</br>햇볕 어량에는 백로가 날개 말리네 / 日照高梁鷺晒翎</br></br>하였으니, 해변의 광경〔景象〕을 모사한 것이다.</br>죽음(竹陰) 조희일(趙希逸)이 매번 호음이 지은</br></br>산마루 별빛은 이지러진 달과 다투고 / 峯頂星搖爭缺月</br>나무 꼭대기 새는 깊은 숲으로 숨네 / 樹顚禽動竄深叢</br></br>라는 구절을 음송하며 자주 탄미하였으니, 대개 새벽에 일어나면 바로 펼쳐졌던 경치이다. 또한,</br></br>잠깐 이는 바람에 산 나무 일제히 울고 / 山木俱鳴風乍起</br>외로이 걸린 달에 강물소리 문득 사납네 / 江聲忽厲月孤懸</br></br>라는 시구는 온 세상이 다 칭찬한다.</br>‘나뭇잎 일제히 우짖자 밤비 내리고〔木葉俱鳴夜雨來〕’는 간재(簡齋)의 시구이고, ‘여울 소리 문득 높으니 어디에서 비 내리는가〔灘響忽高何處雨〕’는 오융(吳融)의 시구이니, 호음의 상하 구는 이 두 시의 말을 취하여 원만하게 잘 빚어내서 흠이 없게 한 것이다.</br>혹자는 ‘월고현(月孤懸)’ 세 글자가 위의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고 하는데, 치인(癡人) 앞에서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이를 만하다. 호음의 경구(警句)는 한정이 없는데 우연히 이 두세 구절을 기록했을 뿐이다.호음의 경구(警句)는 한정이 없는데 우연히 이 두세 구절을 기록했을 뿐이다.)
  • E014  + (내가《서청시화(西淸詩話)》를 상고하니,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왕 내가《서청시화(西淸詩話)》를 상고하니,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왕 문공(王文公 왕안석(王安石))의 시에, 황혼의 풍우에 원림이 어두운데 / 黃昏風雨暝園林 쇠잔한 국화 떨어지니 땅에 황금이 가득하이 / 殘菊飄零滿地金 구양수(歐陽脩)가 이 시를 보고 말하기를 ‘모든 꽃은 다 떨어지나 국화만은 가지 위에 말라붙어 있을 뿐인데, 어찌 「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문공(文公)은 크게 성내어 말하기를 ‘이는 초사(楚辭)의「저녁에는 떨어진 가을의 국화 꽃을 먹는다[夕餐秋菊之落英]」라는 말을 알지 못함이니, 구양수의 배우지 못한 과실이다.’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시란 보는 일을 읊는 것이다. 내가 옛날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노란 국화를 보았더니, 역시 떨어진 것이 있었다. 문공이 시에서 이미 ‘황혼의 풍우에 원림이 어둡다.’ 하였으니 ‘보는 일을 읊은 것이다.’고 하여 구양수의 말을 일축했어야 옳았을 것이고, 굳이 초사를 이끌었으면 ‘구공(歐公)은 어찌 이것을 보지 못했는가?’라고만 했어도 또한 족했을 것인데, 도리어 ‘배우지 못했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편협하였을까? 구양수가 설사 박학 다문한 지경에 이르지 못한 자라 하더라도 초사가 어찌 유경벽설(幽經僻說)이기에 구양수가 보지 못했겠는가? 나는 개보(介甫 왕안석의 자)를 장자(長者)로 기대할 수 없다.못했겠는가? 나는 개보(介甫 왕안석의 자)를 장자(長者)로 기대할 수 없다.)
  • E650  + (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ㆍ황지천(黃芝川 지천은 황정욱(黃廷彧)의 호)은 근대의 대가로서 둘 다 근체시(近體詩)에 솜씨가 뛰어나다. 노의 오언율시(五言律詩)와 황의 칠언율시(七言律詩)는 모두 1천년 이래의 절조이다. 그러나 장편시는 이만 못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 E749  + (당나라의 여러 시인들은 시를 지을 때에 일생의 심력을 기울였으므로 능히 세상당나라의 여러 시인들은 시를 지을 때에 일생의 심력을 기울였으므로 능히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후세에 전할 수 있었다. 예로 "", "", "", "", "", ""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나 또한 이러한 버릇이 있어서 버리고 싶어도 능히 하지 못한다. 희롱삼아 읊은 한 절구에, ""라 하였다. 아, 오직 아는 사람만이 더불어 이 경지를 말할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얕은 학문으로 경솔하게 글을 이루어 곧바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을 지으려 하니 또한 엉성하지 않겠는가.이루어 곧바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을 지으려 하니 또한 엉성하지 않겠는가.)
  • E026  + (대저 시란 뜻으로 주를 삼는 것이니 뜻을 베푸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대저 시란 뜻으로 주를 삼는 것이니 뜻을 베푸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미는 것이 그 다음 어렵다. 뜻은 기운으로 주를 삼는 것이니, 기운의 우열로 말미암아 곧 천심(淺深)이 있게 된다. 그러나 기운은 하늘에 근본한 것이니, 배워서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운이 약한 자는 문장을 수식하는 데 공을 들이고 뜻으로 우선을 삼지 않는다. 대개 문장을 다듬고 문구를 수식하면 그 글은 참으로 화려할 것이나, 속에 함축된 심후한 뜻이 없으면 처음에는 꽤 볼 만하지만, 재차 음미할 때에는 맛이 벌써 다한다. 시를 지을 때에는 먼저 낸 운자가 뜻을 해칠 것 같으면 운자를 고쳐 내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의 시를 화답할 경우에 만일 험한 운자가 있거든, 먼저 운자의 안치할 바를 생각한 다음에 뜻을 안배해야 한다.</br>시구 중에 대(對)를 맞추기가 어려운 것이 있으면, 한참 동안 침음(沈吟)해 보아서 능히 쉽게 얻을 수 없거든 곧 그 시구는 아낌없이 버리는 것이 좋다. 시를 구상할 때에 깊이 생각해 들어가서 헤어나지 못하면 거기에 빠지고, 빠지면 고착되고, 고착하면 미혹되고, 미혹하면 집착되어 통하지 못하게 되니, 오직 이리저리 생각하여 변화 자재하게 해야 원만하게 된다.</br>혹은 뒷글귀로 앞글귀의 폐단을 구제하기도 하고, 한 글자로 한 글귀의 안전함을 돕기도 하니, 이것은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글자로 한 글귀의 안전함을 돕기도 하니, 이것은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 M003  + (동정에 달이 떨어지니 고운이 돌아간다)
  • C055  + (두 편의 시가 모두 불우한 처지를 슬퍼하며 지은 작품이다. 그러나 최자의 시는 기개와 절개가 강개하여 임춘의 시에 비길 것이 아니다.)
  • E700  + (만력(萬曆) 경신년(1620, 광해 12)에, 내가 바야흐로 폐고(廢錮 종신만력(萬曆) 경신년(1620, 광해 12)에, 내가 바야흐로 폐고(廢錮 종신토록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는 것)된 상태에서 정처없이 영서(嶺西) 지방을 떠돌 적에, 나그네의 심경을 절구(絶句) 한 수로 읊기를,</br></br>땅에 가득 떨어진 꽃 반쯤은 벌써 진흙 / 滿地殘花半作泥</br>간 밤의 비바람 앞 시내에 요란했네 / 夜來風雨暗前溪</br>망향대 올라 서니 하염없이 슬픈 마음 / 望鄕臺上空惆悵</br>운수는 천 겹이라 꿈속에서 헤매누나 / 雲樹千重夢也迷</br></br>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시를 본 이가 말하기를, “결구(結句)에 내포하고 있는 뜻이 처연(悽然)하고 암울하니, 상서롭지 못하게 될 분위기가 배어 있는 듯하다.”고 하면서 나를 위해 상당히 걱정해 주었다. 그러나 또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운수 천중(雲樹千重)이라는 말이야말로 앞길이 창창(蒼蒼)하게 멀어 끝이 없다는 뜻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으니, 상서롭지 못한 말이 아니다.”고 하였다.</br>그런데 그 뒤 몇 년이 지나 내가 요행히 좋은 시대를 만난 덕분에 벼슬 길에 올라 현달(顯達)하게 되었는데, 그 시를 지은 것이 지금으로부터 벌써 17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혹자(或者)의 말이 자못 들어맞았다고도 하겠다. 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혹자(或者)의 말이 자못 들어맞았다고도 하겠다.)
  • E029  + (무릇 옛사람의 시체를 본받으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시를 습독(習讀)한 뒤무릇 옛사람의 시체를 본받으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시를 습독(習讀)한 뒤에 본받아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표절도 오히려 어렵다. 도둑에게 비하면, 먼저 부잣집을 엿보아 그 집 문과 담의 위치를 눈익혀 둔 뒤에야 그 집을 잘 들어가 남의 것을 탈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되 남이 모르게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의 낭탁(囊橐)을 더듬고 협상(篋箱)을 열 때에 반드시 잡힐 것이다.</br>나는 젊을 때부터 방랑하여 몸을 단속하지 않고 글 읽는 것이 매우 정하지 못하여, 비록 육경(六經)이나 자사(子史)의 글도 섭렵했을 뿐, 원리를 궁구하는 지경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제가(諸家)ㆍ장구(章句)의 글임에랴. 이미 그 글을 익숙히 알지 못하는데 그 체를 본받고 그 말을 도둑질하겠는가. 그래서 부득불 새말로 짓게 되는 것이다.를 본받고 그 말을 도둑질하겠는가. 그래서 부득불 새말로 짓게 되는 것이다.)
  • E294  +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는 강산 풍물(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는 강산 풍물(江山風物)이 서로 으뜸을 겨루는데, 영남루는,</br>가을 깊어 큰길엔 붉은 단풍 비쳐 있고 / 秋深官道映紅樹</br>날 저문 어촌에는 흰 연기 난다 / 日暮漁村生白煙</br>한 낚시 어부는 빗소리 밖이요 / 一竿漁父雨聲外</br>십리길 나그네는 산 그림자 가이로세 / 十里行人山影邊</br>라고 한 등의 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촉석루는 전할 만한 가작이란 하나도 없다. 한 사람의 시작으로 영남에는 뛰어난 시가 있고, 촉석루에는 옹졸한 것은 촉석루의 기승(奇勝)이 영남루보다 나아서 잘 형용을 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아서 잘 형용을 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 E215  + (병신년에 내가 의주(義州)에 있을 때, 퇴휴당 소(蘇) 정승을 모시고 밤에 병신년에 내가 의주(義州)에 있을 때, 퇴휴당 소(蘇) 정승을 모시고 밤에 앉아서 《당고황화집(唐皐皇華集)》을 보다가, 내가 말하기를,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한강시(漢江詩)〉에</br>아득한 세 산은 엎은 솥인 듯 / 査紗三山看覆鼎</br>굽이굽이 한 때는 투금에 닿았도다 / 逶迤一帶接投金</br>라는 연(聯)이 매우 좋습니다.” 하였더니, 공이 웃으면서, “너는 참으로 시를 보는 안식(眼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내가 지은 것으로, 용재가 때마침 분주하여 나에게 대신 짓게 한 것이다.” 하였다. 엎은 솥과 투금(投金)의 대(對)가 과연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비록 형공(荊公)이 다시 살아나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사실 용재가 지은 것인데, 소세양은 자기가 지은 것이라 하니 부끄러움을 모르기가 심하도다.” 하였다. 소세양은 자기가 지은 것이라 하니 부끄러움을 모르기가 심하도다.” 하였다.)
  • E646  + (봉래가 강릉 군수로 있을 적에 익지(益之 이달(李達)의 자)를 손님으로 대우봉래가 강릉 군수로 있을 적에 익지(益之 이달(李達)의 자)를 손님으로 대우했는데 사람됨이 행실이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다. 선친이 편지를 보내 그를 변호하니 공이 답장하기를</br>밤 연기에 오동 꽃 떨어지고 / 桐花夜煙落</br>바다 숲에 봄 구름 사라지도다 / 海樹春雲空</br>고 읊었던 이달(李達)을 만약 소홀히 대한다면 곧 진왕(陳王 위(魏) 조식(曺植)의 봉호)이 응양(應瑒)ㆍ유정(劉楨)을 처음 잃던 날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대접이 조금 허술해지자 익지는 시를 남기고 작별하는데</br>나그네 가고 머물 사이란 것은 / 行子去留際</br>주인이 눈썹 까딱하는 사이라 / 主人眉睫間</br>오늘 아침 기쁜 빛을 잃게 됐으니 / 今朝失黃氣</br>오래잖아 청산을 생각하리 / 未久憶靑山</br>노국에선 원거에게 제사를 했고 / 魯國鶢鶋饗</br>남방에 출정가서 율무 갖고 돌아왔네 / 南征薏苡還</br>소 계자는 가을 바람 만나자마자 / 秋風蘇季子</br>또 다시 목릉관을 나가는구나 / 又出穆陵關</br>라 읊으니, 공이 크게 칭찬과 사랑을 더하며 그를 처음처럼 대접했다. 선배들이 붕우간에 서로 바로잡아 주는 의가 어떠했던가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풍류 있는 훌륭한 재사를 또 어찌 쉬이 얻을 수 있겠는가?있다. 그리고 그 풍류 있는 훌륭한 재사를 또 어찌 쉬이 얻을 수 있겠는가?)
  • E536  + (사문 양사준은 봉래 양사언의 아우이다. 문사에 진력하여 정사룡이 허여한 바 있었으나, 양사언은 매번 그 간고함을 흠잡았다. 일찍이 시짓기를, ""라 하였다. 그러나 듣기로 그가 평소 한유의 문장을 사천 번 읽었다 하니, 문명을 일대에 날리지 못하였으니 그 재주를 알 만하다.)
  • E691  + (사문 홍천경(洪千璟)의 호는 반환(盤桓)이다. 어릴 적부터 문장을 업(業)으사문 홍천경(洪千璟)의 호는 반환(盤桓)이다. 어릴 적부터 문장을 업(業)으로 삼아 남쪽 지방에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운수가 기이하여 뜻이 어긋나 나이 오십이 지난 후에야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오래지 않아 또 장원으로 급제하여 폐조(廢朝) 때에 전라도 벽사 찰방(碧沙察訪)이 되었다. 그때 참의(參議) 이광정(李光庭)이 분사 지조(分司地曹)로서, 홍공(洪公)에게 곡식 모으는 임무를 맡겼는데, 다른 관원보다 훨씬 우수하게 곡식을 모은지라,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인조반정 후에는 시대의 버림을 받아 한 관직도 지내지 못하고 죽었으니, 슬프다.</br>그는 평생 시 짓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가끔 기특하고 힘이 있었다. 과장(科場)에서 지은 작품 같은 것은 붓을 휘두름에 바람이 이는 듯하였고, 시어는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니 또한 한 시대의 호방한 재주였다. 이석루(李石樓) 어른이 호남을 체찰(體察)할 때에 마관(馬官)으로 수행하며 시 한 편을 그에게 올렸는데, 경련에 이르기를,</br></br>누각에 다시 오니 지은 시 두루 있고 / 重來樓閣題詩遍</br>산천 바라보니 일찍이 알던 모습일세 / 過眼山川識面曾</br></br>하였다. 이공(李公)이 시를 좋게 여기고 예로써 대우하였다.過眼山川識面曾 하였다. 이공(李公)이 시를 좋게 여기고 예로써 대우하였다.)
  • E694  + (상사(上舍 진사) 정언눌(鄭彥訥)은 호가 일치(一蚩)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상사(上舍 진사) 정언눌(鄭彥訥)은 호가 일치(一蚩)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학문이 깊었으나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과장(科場)에 갔을 때마다 부(賦)로써 사람들을 굴복시키니, 세상에서는 부에 능한 것은 알았지만 그가 지은 시를 볼 수는 없었다. 그가 소년 시절에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에서 노닐다가 임백호 시의 일련을 차운한</br></br>괴석은 밤이면 호랑이가 되고 / 怪石夜能虎</br>왜송은 가을이면 거문고가 되려 하네 / 矮松秋欲絃</br></br>에서 그의 뛰어남을 충분히 볼 수 있다.</br>임진년 이후 난을 만나 떠돌아다닐 때,</br></br>취할 적엔 천일도 적더니 / 醉來千日少</br>난리에는 일신도 많도다 / 亂後一身多</br></br>라는 시 구절을 지었는데, 듣는 사람들은 모두 옛사람들도 말하지 못했던 말을 잘 지어냈다고 칭찬하였다.</br>요합(姚合)의 〈증유차(贈劉叉)〉 시 일련,</br></br>때를 피해 성을 바꿨고 / 避時曾變姓</br>난을 구함에 몸을 꺼렸네 / 救難似嫌身</br></br>도 정언눌의 시의(詩意)와 대략 같다. 그러나 일치는 기묘한 시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필시 요합의 구절을 답습한 것은 아닐 것이다.《금강경(金剛經)》 송(頌)에 이르기를,</br></br>부자는 천 명 먹을 재산도 적다고 투덜대고 / 富嫌千口少</br>가난한 사람은 한 몸도 많다고 한탄하네 / 貧恨一身多</br></br>하였는데, 아마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다.도 많다고 한탄하네 / 貧恨一身多 하였는데, 아마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 E183  +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이르기를, “전조(前朝 고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이르기를, “전조(前朝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 사암(思菴) 유숙(柳淑)이 벼슬을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벗을 전송하는 시를 지었는데,</br>인간들이 기름을 짜듯이 서로들 괴롭히는데 / 人間膏火自相煎</br>명철한 공은 길이 역사에 전하리 / 明哲如公史可傳</br>이미 위급한 때에 사직을 편안히 하고 / 已向危時安社稷</br>다시 시골로 가니 신선이 되겠구려 / 更從平地作神仙</br>오호에 놀던 꿈은 끊어지고 연파(자연풍경을 말함)만 푸르고 / 五湖夢斷煙波綠</br>삼경에 가을이 깊으니 들국화 곱구나 / 三逕秋深野菊鮮</br>그러나 나는 벼슬을 버리고 가지를 못하니 / 顧我未能投紱去</br>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br>하였다. 신돈(辛旽)이 이 시를 보고 명철(明哲)이나 오호(五湖) 등의 말을 들어 왕에게 참소하여 죽였다.”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에도 이 시가 쓰여져 있는데, 여기에는 이인복(李仁復)이 유숙(柳淑)을 전송하며 지은 시라 하고, 그 시 끝에 주(註)를 내기를, “끝 구절을</br>서풍(여기에서는 불교를 지칭한 것으로, 곧 신돈을 말함.)이 부는 속세에 대한 뜻은 막연하네 / 西風塵土意茫然</br>라고 하였다가, 신돈이 볼까 염려하여</br>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br>라고 고쳤다.” 하였다. 서거정과 김종직은 모두 문장을 박람(博覽)한 사람이며 또 시대의 선후도 서로 멀지 않는데, 기록된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괴이하다. 신돈이 이 시를 가지고 왕에게 참소하였다면 유숙이 지은 것이 명백하다.다. 신돈이 이 시를 가지고 왕에게 참소하였다면 유숙이 지은 것이 명백하다.)
  • E261  + (서사가(徐四佳)가 조사(詔使) 기순(祈順)의 시에 차운하여, 금암은 날이 따서사가(徐四佳)가 조사(詔使) 기순(祈順)의 시에 차운하여,</br>금암은 날이 따스하여 버드나무 새로 피고 / 金巖日暖初楊柳</br>검수는 봄이 차서 두견 아직 멀었네 / 劍水春寒未杜鵑</br>하였는데,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 공이 감탄해 마지않았다.</br>내가 호음에게 물으니, 곧 말하기를,</br>“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줄 모르겠다. 말에 병폐가 있다.”</br>하였다. 한 사람은 칭찬하고 한 사람은 낮게 평가하니, 두 사람의 뜻이 같지 않다. 물러나 생각하니, 이 한 연구는 오로지 원(元) 나라 사람의 시어(詩語)를 쓴 것인데, 저것은 두 땅이 서로 떨어져 있어서 초(初)ㆍ미(未) 두 자가 합당하다. 그러나 금암과 검수 사이는 아침에 떠나 저녁에 닿을 수 있는 곳이니, 어찌 날이 따스하다느니 봄이 차다느니 하는 그런 차이가 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말에 병폐가 있는 것이니, 마땅히 호음의 말을 옳다 해야 할 것이다.이른바 말에 병폐가 있는 것이니, 마땅히 호음의 말을 옳다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