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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381 + (손순효가 찬성(贊成)가이되었는데, 성종이 그 재주를 아껴 매우 중히 여겼다. … 손순효가 찬성(贊成)가이되었는데, 성종이 그 재주를 아껴 매우 중히 여겼다. 일찍이 인접하여 술을 내리니, 마침내 대취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경은 시를 지을 줄 아오.” 하자, “명하기만 하십시오.” 하였다. 임금이 장량(張良)으로써 글제를 삼고 마침내 가운데 중(中) 자로 첫 운자를 불러 지으라고 명했다. 대답하기를,</br>기모를 수랑사 가운데서 팔지 못하고 / 奇謀不售浪沙中</br>하니, 또 공(公) 자로 불렀다.</br>검을 짚고 돌아와 패공을 도왔네 / 杖劒歸來相沛公</br>하자, 그 대(對)를 봉(封) 자로 하니</br>계획은 이미 한 나라 왕업을 이루고 / 借箸已能成漢業</br>분모(모토를 분봉함 또는 제후로 봉하는 것)는 도리어 스스로 제 나라 봉해 줌을 사양했네 / 分茅却自讓齊封</br>했다. 그 다음 대(對)는 송(松) 자로 하니,</br>평생의 지략은 황석에게 전해 얻고, / 平生智略傳黃石</br>늘그막의 공명은 적송에게 붙였네 / 末路功名付赤松</br>하였고, 다음 대는 웅(雄) 자로 하니,</br>한신과 팽월이 끝내 젓갈 담겨진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노니 / 堪恨韓彭竟葅醞</br>공을 이루고 몸은 물러가는 것이 바로 영웅이라네 / 功成身退是英雄</br>하여, 응하기를 메아리치듯 하였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경은 늙을수록 더욱 장성해지는 자라고 할 만하오.” 하고, 술이 취하자 임금이 늙은 궁인 하나를 나오라 하여, 비파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고, 또 순효에게 일어나 춤을 추라 하니, 순효는 취했기 때문에 거꾸러져 일어나지 못하므로 임금이 남금단첩리(藍錦段貼裡 임금이 걸치듯 입는 옷 이름)를 벗어 덮어 주고 들어갔다. 임금과 신하 사이가 이와 같았으므로 지금까지도 듣는 사람이 감격하여 눈물짓는다.과 신하 사이가 이와 같았으므로 지금까지도 듣는 사람이 감격하여 눈물짓는다.)
- E016 + (송(宋) 나라 선자(禪子) 조파(祖播)가, 우리나라에 오는 구양백호(歐陽伯虎 … 송(宋) 나라 선자(禪子) 조파(祖播)가, 우리나라에 오는 구양백호(歐陽伯虎)의 편을 이용하여 시 한 수를 우리나라 공공상인(空空上人)에게 부치고, 겸하여 까맣게 옻칠한 바리때 다섯 개와 반죽장(斑竹杖) 한 개를 주었으며, 또 암자의 이름을 토각(兎角)이라 지어 손수 그 액자를 써서 부쳤다. 나는 두 조사(祖師)가 천 리 밖에서 서로 뜻이 합한 것을 가상히 여기고 또 구양(歐陽) 군의 시명(詩名)을 듣고 무척 사모하였다. 그래서 두 수의 시로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이곳과 중화 사이 큰 바다 막혔는데 / 此去中華隔大瀛 두 공은 거울처럼 맑은 마음 통했네 / 兩公相照鏡心淸 공공상인이 벌집만한 집을 막 지으니 / 空師方結蜂窠室 조파 선로(禪老)가 토각이란 이름 멀리서 전했네 / 播老遙傳兎角名 지팡이는 예스러워 반죽의 흔적 남았고 / 杖古尙餘斑竹暈 바리때는 신령스러워 벽련의 줄기가 빼어났네 / 鉢靈應秀碧蓮莖 하루에 이처럼 친절하게 사귀어서 / 誰敎一日親交錫 금모(金毛)가 땅을 진동하는 소리를 함께 짓게 하였는가 / 共作金毛震地聲 멀리 천릿길 바다를 건너 왔는데 / 邈從千里渡滄瀛 시운은 오히려 산수의 맑은 기운 머금었네 / 詩韻猶含山水淸 기쁘다 취옹(醉翁)의 원손이 스스로 구양영숙의 11세 손이라 하였다 / 可喜醉翁流遠派 우리들로 하여금 꽃다운 이름을 실컷 듣게 하는 것 / 尙敎吾輩飽香名 하늘에 닿을 듯 옥수는 천 길이나 높고 / 凌霄玉樹高千丈 세상에 상서로운 금지는 아홉 줄기 빼어났네 / 端世金芝擢九莖 일찍이 훌륭한 명성은 들었으나 상면하기 어려우니 / 早挹英風難覿面 어느 때나 친히 음성을 들을 건가 / 何時親聽咳餘聲려우니 / 早挹英風難覿面 어느 때나 친히 음성을 들을 건가 / 何時親聽咳餘聲)
- E344 + (수찬 안수(安璲)는 시로 이름이 났는데 일찍이, 지하에는 단연코 한을 녹일 술이 없고 / 地下定無消恨酒 인간에는 반혼할 향을 얻기 어렵다 / 人間難得返魂香 라는 시 한 구를 지었는데, 그 해에 병이 나 죽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시가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다.)
- E677 + (수호(垂胡) 임기(林芑)는 많은 서적을 읽었고 겸하여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을 … 수호(垂胡) 임기(林芑)는 많은 서적을 읽었고 겸하여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을 지녔다. 그래서 무릇 구류백가(九流百家) 및 기서고문(奇書古文)을 눈으로 섭렵하고 입으로 외우지 않는 것이 없었다.</br>일찍이 서울에서 문인재자(文人才子)들이 모두 그의 집에 모여 각자의 견문(見聞)을 수호에게 문난(問難 질문)하였다. 수호가 좌우를 보면서 묻는 대로 즉답하는데 의혹스러운 곳이 없어서, 마치 쏟아지는 강물이나 흐르는 수은 같아 그침이 없었다. 호음(湖陰)은 늘 그를 가리키며 ‘걸어 다니는 비서〔行秘書〕’라고 말하였다.</br>호음은 술자리에서 많은 시를 지었는데 때때로 그 용사(用事)가 이해할 수 없는 곳이 있었으니, 대개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수호가 일찍이 사적인 자리에서 호음을 모시고 있다가 물어 보기를,</br>“상공(相公)의 시는 자주 위어(僞語)로 사람을 속이는데 후세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십니까?”</br>하였다. 호음이 대답하기를,</br>“세간에 당신같이 안목을 기른 자가 몇이겠는가. 희작(戱作)은 사고(私稿)에는 등재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후인의 눈에 띄겠는가.”</br>하였다. 마침내 서로 한바탕 웃었다.</br>호음은 병이 위독하자 수호에게 부탁하기를,</br>“그대가 꼭 내 시에 주를 달아 주게.”</br>하였다. 수호는 이를 허락하였다. 십여 년 후에 호음의 시고가 세상에 간행되었는데 주가 없었다. 가군(家君 아버님)이 수호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br>“제가 일찍이 그의 시를 수습하여 이미 한 권에 주를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에 용사와 문자가 대체로 거듭나오는지라 취하여 두루 열람해 본 즉 거듭나오는 곳이 갈수록 더욱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만두게 되었습니다…….”</br>하였다. 수호는 비록 이같이 박학했지만, 다만 시를 익히지도 않았고, 또한 즐겨 짓지도 않았다.</br>임신년(1572, 선조5)에 조사(詔使 중국 사신)를 맞이할 때 임기는 일기관(日記官)으로 임당(林塘)을 따라 용만(龍灣)에 갔다. 학사 습재(習齋) 권벽(權擘)이 조사의 시를 차운하여</br></br>중선루 위에서 북쪽으로 옷깃을 열고 / 仲宣樓上開襟北</br>자미 시 가운데 서쪽으로 길머리 했네 / 子美詩中首路西</br></br>라는 구절을 지었다. 수호가 말하기를,</br>“‘누상(樓上)’을 고쳐 ‘부리(賦裏)’로 하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br>하였다. 임당이 가군을 보며 말하기를,</br>“저 부리를 치는 것이 좋겠소.”</br>하기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포복절도하였다. 우리 동방의 말에 부리〔喙〕와 ‘부리(賦裏)’의 음이 같은 까닭이었다.</br>그러나 증다산(曾茶山)의 시 〈송증굉수천태(茶山送曾宏守天台)〉의 함련(頷聯)에서,</br></br>흥공의 부 가운데 운하가 붉고 / 興公賦裏雲霞赤</br>자미의 시 중에 도서가 푸르네 / 子美詩中島嶼靑</br></br>하였으니, 수호가 어찌 근거 없이 이 말을 하였겠는가. / 子美詩中島嶼靑 하였으니, 수호가 어찌 근거 없이 이 말을 하였겠는가.)
- E702 + (왕년에 내가 곤궁한 처지에서 근신하고 있을 때, 경신일(庚申日) 밤을 지새우 … 왕년에 내가 곤궁한 처지에서 근신하고 있을 때, 경신일(庚申日) 밤을 지새우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결구(結句)에,</br></br>삼팽 이 놈 붉은 혓바닥 마음대로 놀려 봐라 / 任爾三彭饒赤舌</br>이 마음 하느님이 원래 알고 계시니라 / 此心元自有天知</br></br>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당(唐) 나라의 《만수절구(萬首絶句)》를 보니, 정자소(程紫霄)의 시에,</br></br>옥황께서 나의 품행 이미 알고 계시느니 / 玉皇已自知行知</br>삼팽 이 놈 네 멋대로 고자질 해 보아라 / 任汝三彭說是非</br></br>라고 하였다.</br>시인의 뜻이 이처럼 우연히 계합(契合)되는 경우가 이따금씩 나오는데, 혹시라도 나의 시를 보고서 그의 표현을 빌려 썼다고 할지도 모르겠기에 부질없이 기록해 둔다.를 보고서 그의 표현을 빌려 썼다고 할지도 모르겠기에 부질없이 기록해 둔다.)
- E584 + (우홍적은 일찍이 재능으로 이름이 있었다. 일곱살 때에 어른들이 老 자와 春 자로 연구를 지어 보라 하자 우홍적이 ""라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으나 식견 있는 사람은 그의 요절을 미리 알았다. 벗 정상의가 영숭전 참봉이 되어 평양에 부임하게 되자 우홍적이 시를 지어 주었다. ""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평양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상을 당한 것을 들었으니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시참(詩讖)으로 여겼다.)
- E708 + (유생 우탁은 시에 능했다. 소재 노수신이 일찍이 강가의 정자에서 우탁과 함께 … 유생 우탁은 시에 능했다. 소재 노수신이 일찍이 강가의 정자에서 우탁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때 어촌에 석양이 지는데,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노수신이 시를 지으려 하여 한창 음미하고 있을 때 우탁이 붓을 잡고 먼저 절구 한 수를 썼다. "" 노수신이 극찬하며 말했다. "비록 사가 서거정처럼 시어가 넉넉한 사람이라도 이러한 경어는 없을 것이다." 동원 김귀영이 마침 자리에 있다가 말했다. "저 학생은 시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데 어찌 그리 지나치게 칭찬하십니까?" 노수신이 말했다. "그대는 명성과 지위로 시를 논하는가? 맹호연의 ""는 시가의 상승인데, 그 맹호연 또한 학생이 아니었던가?" 김귀영이 무안해하며 부끄러운 빛을 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속세의 사람들은 보는 눈도 없고 듣는 귀도 없어서 시대의 선후와 사람의 귀천으로 경중을 말한다. 비록 이백과 두보가 다시 태어난다 하여도 만약 미천한 지위에 있다면 또한 반드시 업신여기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풍조가 개탄스럽다.다면 또한 반드시 업신여기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풍조가 개탄스럽다.)
- E543 + (율곡 이이가 대사간으로 있다가 시골로 물러났다. 시에, ""라 하였다. 말의 어조에 화평한 뜻이 있다. 송강 정철이 직제학으로 있다가 남쪽으로 돌아갈 때 이이에게 시를 주었다. "" 대개 그 당시에 이이와 논의하는 바가 같지 않았으나 이처럼 말하였으니 바로 이것으로써 두 사람의 기상을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았다.)
- E675 + (을미년(1595, 선조28)과 병신년(1596, 선조29) 사이에 명나라의 … 을미년(1595, 선조28)과 병신년(1596, 선조29) 사이에 명나라의 장군 제독(提督) 유정(劉綎)이 병사를 이끌고 호남과 영남 사이를 왕래하였는데, 막하에 한 서생을 데리고 다녔다. 가끔씩 시를 지었고, 사람들은 간혹 그의 가구(佳句)를 전하여 읊었으나, 그 얼굴은 본적도 없고 이름도 알지 못하였다. 그때 우리나라와 왜적은 서로 대치하여 승패를 결정하지 못했는데, 그 서생이 방휼(蚌鷸)의 비유를 써서 장률을 지어 이르기를,</br></br>늙은 조개 추위 피해 햇볕을 쬐는데 / 老蚌當陽爲怕寒</br>들새는 무슨 일로 애써 구하였는가 / 野禽何事苦相干</br>몸은 굴혈 떠나 진주 태는 손상되고 / 身離窟穴珠胎損</br>여울에서 힘 다해 푸른 깃은 쇠잔타 / 力盡沙灘翠羽殘</br>입 닫을 때에 열 때의 화를 어찌 알며 / 閉口豈知開口禍</br>머리 넣을 때에 빼기 어려움 누가 알았으랴 / 入頭誰料出頭難</br>어부 손에 함께 떨어질 줄 일찍 알았던들 / 早知俱落漁人手</br>구름과 물속 맘껏 날고 잠겨있을 텐데 / 雲水飛潛各自安</br></br>하였다. 서생은 대개 당시의 어지러운 사세(事勢)를 보고 어부지리(漁父之利)의 설을 그릇되게 거론한 것이다. 마침내 국가가 다시 회복되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상국(上國 명나라)이 한결같이 우리나라를 구휼하고 선조(宣祖)께서 발리(跋履 여러 곳을 다니며 애씀)하시며 난을 극복한 노력이 아님이 없으니, 서생이 어찌 말을 할 줄 아는 자이겠는가.을 극복한 노력이 아님이 없으니, 서생이 어찌 말을 할 줄 아는 자이겠는가.)
- M029 + (이곳과 중화 사이 큰 바다 막혔는데 / 此去中華隔大瀛 두 공은 거울처럼 맑은 … 이곳과 중화 사이 큰 바다 막혔는데 / 此去中華隔大瀛</br>두 공은 거울처럼 맑은 마음 통했네 / 兩公相照鏡心淸</br>공공상인이 벌집만한 집을 막 지으니 / 空師方結蜂窠室</br>조파 선로(禪老)가 토각이란 이름 멀리서 전했네 / 播老遙傳兎角名</br>지팡이는 예스러워 반죽의 흔적 남았고 / 杖古尙餘斑竹暈</br>바리때는 신령스러워 벽련의 줄기가 빼어났네 / 鉢靈應秀碧蓮莖</br>하루에 이처럼 친절하게 사귀어서 / 誰敎一日親交錫</br>금모(金毛)가 땅을 진동하는 소리를 함께 짓게 하였는가 / 共作金毛震地聲錫 금모(金毛)가 땅을 진동하는 소리를 함께 짓게 하였는가 / 共作金毛震地聲)
- E618 + (이전 사람들은 점필재가 여강(驪江)에서 읊은, 십년간의 세상사는 홀로 읊는 … 이전 사람들은 점필재가 여강(驪江)에서 읊은,</br>십년간의 세상사는 홀로 읊는 시 속에 / 十年世事孤吟裏</br>팔월의 가을빛은 어지러운 숲 사이에 / 八月秋容亂樹間</br>라는 구절을 칭송해 왔다. 그러나 신륵사(神勒寺)에서 지은,</br>상방에서 종 울리니 여룡은 춤을 추고 / 上方鍾動驪龍舞</br>만 구멍에 바람 우니 철봉이 나래 치네 / 萬竅風生鐵鳳翔</br>라 한 구절의 홍량(洪亮)ㆍ엄중(嚴重)함만 같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우주를 버팀직한 시구이다. 그 보천탄즉사(寶泉灘卽事)에서는</br>복사꽃 띄운 물결이 몇 자나 높았는고 / 桃花浪高幾尺許</br>은석은 목까지 잠겨서 어딘지 모르겠네 / 銀石沒頂不知處</br>쌍쌍의 가마우지 여울돌을 잃고 / 兩兩鸕鶿失舊磯</br>물고기 물면 갈대숲으로 들어가네 / 銜魚却入菰蒲去</br>라 했는데 이는 가장 항고(伉高)하며, 《동경악부(東京樂府)》는 편편마다 모두 예스럽다.는 가장 항고(伉高)하며, 《동경악부(東京樂府)》는 편편마다 모두 예스럽다.)
- E550 + (이주는 문인이다. 서장관으로 중원에 가서 통주 문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 … 이주는 문인이다. 서장관으로 중원에 가서 통주 문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 중국 사람들이 현판에 걸어놓고 칭송하여 말하기를 "獨鳥膜歸遼" 선생이라 했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을 낮게 보아서, 비록 최치원이 중국에서 벼슬했지만 그 시문으로는 일찍이 여러 문사들의 반열에서 개략적으로 보이지 못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당음 중에 무명씨가 고운 최치원이라 하는데, 진위를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예문지에만 조금 기록되어 보일 뿐이다. 동방 사람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긴다."라 하였다. 근자에 학관 어숙권이 일찍이 패관잡기를 저술했는데, 천중기에 초록되었으니 또한 미증유의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치원의 황소격을 자주 칭송하지만 사륙문의 책에 선택되지 못하여 중국 역시 편협함을 면하지 못한다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황소격은 비록 놀라게 하는 구절이 있지만, 언어를 세우고 뜻을 명령함에 있어 많이 전도되는 잘못이 있으니 동국 사람들은 참으로 문을 알지 못한다 하겠다. 다만 산승과 규수의 글이 역시 중국과 같이 하여 선록된 것이 보이는데 우리나라 사람의 문집에 어찌 한두 개 채택할 만한 것이 없겠는가.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이주의 시가 통주에 현판으로 걸린 것은 또한 다행이라 할 만하다. 나의 시 또한 만류장에서 현판에 걸렸으니 이에 느낀 바가 있었다. 만하다. 나의 시 또한 만류장에서 현판에 걸렸으니 이에 느낀 바가 있었다.)
- E551 + (이희보는 만 권의 책을 읽었으며 어려서부터 나이들어서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 이희보는 만 권의 책을 읽었으며 어려서부터 나이들어서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젊었을 때 어른들이 친구들을 모아 산 위에 장막을 치고 잔치를 베풀면서 기마병을 보내 이희보를 불렀다. 이희보는 마침 책을 읽고 있어서 초청에 응할 뜻이 없었다. 억지로 오게 하자 소매에서 좀먹은 책을 꺼내 자리 가운데에서 읽었다. 때마침 자리 옆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게 하였는데 이희보는 한 번도 곁눈질하지 않았다. 그가 책에 빠져 있는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후에 원접사 이행의 종사관이 되어 중국 사신을 벽제에서 전송했다. 사신이 한 구절을 말했다. "" 정사룡과 소세양 등이 모두 깨닫지 못했다. 이희보가 한 번 보고 냉소하며 말했다. "여러 공들이 독서를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모르는 것이다. 시경에 '나가서 간 땅에서 묵으면서 술을 마시며 언 땅에서 전별한다'라고 했으니, 이는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송별연을 베푼 것을 뜻한다." 두 사람이 부끄러운 빛을 보였다. 연산군이 사랑하는 기녀가 죽자 조정의 문사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했다. 이희보가 시를 지었다."" 연산군이 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당시의 논의가 그를 박하게 대하고 벼슬길이 많이 막혔다. 늙어서 술에 취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자제들이 놀라며 그 연유를 물었다. 이희보가 말했다. "나는 일찍이 만 권의 책을 읽었고, 무릇 내가 지은 것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독서를 널리 하지 않아서 내 문장을 소홀히 여기며 온 세상이 어리석게 구니, 내 시가 진짜로 간재 진여의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죽어도 후세에 전해지지 않겠구나." 안분당집 12책이 간행되지 않고 외손에게 전하여졌는데, 지금 난리를 겪어서 잃지 않고 보전되었는지 모르겠다.외손에게 전하여졌는데, 지금 난리를 겪어서 잃지 않고 보전되었는지 모르겠다.)
- E098 +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이 젊어서 재예(才藝)가 있었다. 만년에 양주(楊 …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이 젊어서 재예(才藝)가 있었다. 만년에 양주(楊州)의 누원(樓院)에 올라 짧은 시 3편을 남겼다. 그 첫 편에,</br>산이 있으면 어디나 여산이 아닐까 / 有山何處不爲廬</br>앉아 청산을 대하고 한번 탄식하노라 / 坐對靑山試一噓</br>벼슬살이 십 년에 늙은이 되었으니 / 簪笏十年成老大</br>노경에 〈귀거래사〉를 읊게 하지 말라 / 莫敎霜鬢賦歸歟</br>하였다. 영천군(永川君) 이정(李定)은 자가 안지(安之)인데, 이 시를 보고 절하고, 또 비평하기를 “이 시는 매우 핍진하니, 서(徐)의 시가 아니면 이(李)의 시일 것이다.” 하였다. 그 당시 서거정(徐居正)과 이승소(李承召)가 시명을 독차지하여 이정이 감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이정이 다시 누각 아래를 지나가다가 전날 썼던 비평을 다시 읽어 보니, 그 아래에 글이 쓰여 있기를 “이 시에는 강산의 아취(雅趣)가 있어 한 점의 티끌도 없으니, 이는 반드시 번뇌에 얽매인 세속의 선비가 지은 것이 아니다. 또 천지가 크고 강산이 깊은데 어찌 인재가 없어서 반드시 서(徐)와 이(李)라고 추측하는가. 인재를 저버리고 사람을 멸시함이 어찌 이리도 심하단 말인가.” 하였다. 이정이 이 글을 보고 크게 뉘우쳐서 전날 비평했던 글을 지워 버렸다. 지금의 《진산세고》에는 3편이 모두 실려 있지 않으니, 경순(景醇)의 편집이 넓지 못함이 이와 같다.편이 모두 실려 있지 않으니, 경순(景醇)의 편집이 넓지 못함이 이와 같다.)
- E665 +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은 시명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은 시명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추켜 받들고 인정해 주면서, 그의 삭설은 변방 길에 휘몰아치네[朔雪龍荒道]라는 시 한 편은 성당(盛唐)의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했다. 일찍이 그의 말을 들으면 어느 절에 가니 승축(僧軸)에</br>동화에서 밥을 빌던 옛날의 학관이라 / 竊食東華舊學官</br>분산이 좋아 노닐 만하다지만 / 盆山雖好可盤桓</br>십 년이나 그리던 꿈 비로봉(飛盧峯)을 감도니 / 十年夢繞毗盧頂</br>베갯머리 솔바람 밤마다 서늘하네 / 一枕松風夜夜寒</br>라 했는데, 어사(語詞)가 심히 탈쇄(脫洒)하나 그 이름이 빠져서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세상에 참으로 버려진 인재가 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br>중형(仲兄)이 사명을 받들고 북방에 나가 압호정(壓胡亭)에 올라서</br>백옥에는 해 지난 병든 백성들 / 白屋經年病</br>푸른 벼를 망쳐 버린 하루 밤 서리 / 靑苗一夜霜</br>라 읊었는데, 임자순은 이를 극찬하고,</br>백옥 청묘는 열 글자의 시사(詩史)로다 / 白屋靑苗十字史</br>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중형도 임자순의</br>오랑캐 일찍이 이십 주를 엿볼 적엔 / 胡虜曾窺二十州</br>장군은 말 솟구쳐 봉후를 취했는데 / 將軍躍馬取封侯</br>지금은 절새에 정벌 싸움 없으니 / 如今絶塞無征戰</br>장사는 옛 역루에 한가로이 잠을 자네 / 壯士閑眠古驛樓</br>라는 시를 칭찬하여 협기(俠氣)가 펄펄 뛴다고 하였다.네 / 壯士閑眠古驛樓 라는 시를 칭찬하여 협기(俠氣)가 펄펄 뛴다고 하였다.)
- E212 + (적암(適庵) 조신(曹伸)이 젊어서 재주 있기로 이름났는데, 성화(成化) 기해 … 적암(適庵) 조신(曹伸)이 젊어서 재주 있기로 이름났는데, 성화(成化) 기해년에 통신사(通信使)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일본(日本)에 갔으니, 이는 함허(㴠虛) 홍귀달(洪貴達)과 나재(懶齋) 채수(蔡壽)가 번갈아 천거한 때문이었다. 성종이 어필(御筆)로 다섯 개의 제목을 내어 지어 바치게 하고, 또 여섯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어려운 운(韻)을 내어 시험하게 하였다. 떠나려 할 때에 함허가 적암부(適庵賦)를 지어 주었다. 뒤에 물러와 영남(嶺南) 금산(金山)에 살았는데, 시고(詩稿) 다섯 권과 《소문쇄록(謏聞瑣錄)》 한 권이 있다. 그 우음(偶吟)이라는 시에 말하기를,</br>아침 술 석 잔을 마시고 나이 70이 된 것을 자랑삼아 / 三杯卯酒詫年稀</br>손으로 남쪽 창문을 열어젖히고 한 번 시를 읊는다 / 手拓南窓一詠詩</br>샘 구멍에서 솟는 물이 못에 넘치매 고기가 뛰놀고 / 泉眼溢池魚潑剌</br>나무 숲이 집을 둘렀으니 새가 모여든다 / 樹林遶屋鳥來歸</br>꽃은 비갠 뒤에 안색이 나고 / 花生顔色雨晴後</br>바람이 불 때 버들은 허리를 흔드는구나 / 柳弄腰肢風過時</br>누가 적암이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던가 / 誰道適庵無箇事</br>매양 절물(節物)로 인하여 기심을 잊지 못한다 / 每因節物未忘機</br>하였는데, 스스로 주(註)를 내기를, “진퇴격(進退格)을 써서 시주(詩酒)ㆍ임천(林泉)ㆍ어조(魚鳥)ㆍ화류(花柳) 등 열 글자에 들였다.” 하였다.酒)ㆍ임천(林泉)ㆍ어조(魚鳥)ㆍ화류(花柳) 등 열 글자에 들였다.” 하였다.)
- E253 + (적암(適菴) 조신(曺伸)이 황폐한 절에 들어가 율시 한 수를 지었다. 그 경련(頸聯)에, 길에는 올 가을 낙엽 덮였고 / 逕覆今秋葉 부엌에는 전일 불 때던 나무 남았네 / 厨餘去日樵 하였는데, 구법(句法)이 기기 절묘하여 사람들이 서로 전하며 읊었다. 그러나 적암이 스스로 자기 작품을 뽑은 것에는 이 시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젊어서 지어 만족스럽지 않아서 버린 것이나 아니겠는가?)
- E190 + (정덕(正德) 임신년(1512, 중종 7)에 일본 사신이 서울에 와서 병이 들 … 정덕(正德) 임신년(1512, 중종 7)에 일본 사신이 서울에 와서 병이 들어 시를 짓기를,</br>조선 사관의 문 밖 / 東國館門外</br>사면에 둘러 있는 산은 늦은 봄인데 / 四屛山暮春</br>침상 밑의 신발은 먼지가 쌓이고 / 塵埋床下屨</br>걸려 있는 두건에는 거미줄이 쳐졌도다 / 蛛網架頭巾</br>베갯머리에 고향 그리워 눈물이 글썽이는데 / 枕有思鄕淚</br>문에는 문병 오는 사람 없으니 / 門無問疾人</br>바다 건너 만 리 나그네 / 滄波萬里客</br>돌아가지 못하는 신세를 슬퍼하노라 / 惆帳未歸身</br>하였다. 그때에 선위관(宣慰官)이 그 시를 탄복해 마지않았고, 온 장안이 모두 전하며 그 시를 외웠다. 지금 보건대 당 나라 말년에 병든 중이 그의 집에서 지은 시에,</br>베갯머리에는 고향 그리워 눈물이 글썽이는데 / 枕有思鄕淚</br>문에는 문병 오는 사람 없도다 / 門無問疾人</br>침상 밑의 신발은 먼지가 쌓이고 / 塵埋床下履</br>걸려 있는 두건에는 바람이 부네 / 風動架頭巾</br>한 것이 있다. 마침 부사(部使)가 그것을 보고 조정에 말하여 온 나라 안 절에 연수료(延壽寮)를 설치하고 병든 중들을 요양하게 하였다. 일본 사신의 시는 병든 중이 지은 시의 두 연(聯)을 그대로 인용하고 다만 그 구절을 위아래로 바꾸어 놓고, 또 이(履) 자를 구(屨) 자로 고치고, 바람이 부네[風動]를 거미줄[蛛網]로 바꾸었을 뿐이니, 온 장안에 전하며 암송한 사람들은 참으로 그 식견이 좁고 선위관도 식견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매우 우스운 일이다.으로 그 식견이 좁고 선위관도 식견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매우 우스운 일이다.)
- E686 + (정랑(正郞) 백호 임제는 시를 지음에 번천(樊川)을 배웠는데, 명성이 세상에 … 정랑(正郞) 백호 임제는 시를 지음에 번천(樊川)을 배웠는데, 명성이 세상에 높았다. 손곡(蓀谷)이 일찍이 사람들의 시품(詩品)을 논하다 백호에 이르자 그를 ‘능수(能手)’라고 지목했고 듣는 사람들은 모두 잘된 비유라고 하였다.</br>백호가 젊었을 적 호서(湖西)에서 서울로 향할 때, 바로 한겨울〔窮冬〕을 당해 눈보라가 몰아쳤다. 길에서 한편의 율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고당으로 가는 길 눈보라 세찬데 / 大風大雪高唐路</br>검과 거문고 하나로 천릿길 가네 / 一劍一琴千里人</br>새 우는 교목에 저녁연기 차갑고 / 鳥啼喬木暮煙冷</br>개 짖는 쓸쓸한 마을 민가는 가난하네 / 犬吠孤村民戶貧</br>동자 춥고 말 병들어 의뢰할 길 없지만 / 僮寒馬病若無賴</br>휘파람 불고 노래하니 신들린 듯하네 / 嘯志歌懷如有神</br>문득 아득한 고향 생각 일어나는데 / 悠悠忽起故園思</br>금수에 매화 피니 남국은 봄이겠지 / 錦水梅花南國春</br></br>하였다. 고당(高唐)은 지난 곳의 지명이다. 대곡(大谷) 성운(成運) 선생이 이 시를 보고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 백호가 드디어 가서 인사드리니 매우 기뻐하였다.</br>계미년(1583, 선조16)과 갑신년(1584, 선조17) 사이에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이 전조(銓曹 이조)의 아판(亞判 참판)이었는데, 백호가 재주를 갖고도 침체되어 있는 것을 가련히 여겼다. 추천〔吹噓〕을 하고자 하여 그를 맞아들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씨(姓氏)의 유래를 물으며, “필시 여러 대에 혁혁(奕奕)했던 문벌이었을 것이오.” 라고 말하였다. 백호가 대답하기를, “몇 대 동안 외람되이 과명(科名)을 얻어 사람들이 귀성(貴姓)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한미(寒微)한 데서 일어나 세대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br>우계는 크게 찬탄하며, 그에게 세속을 초월한 기상이 있다고 여기고는, 장차 청반(淸班)에 두고자 하여 《홍문록(弘文錄)》에 이름을 끼워 넣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그가 지은 시에서는 전혀 곤궁한 모습이 없는데 끝내 떨치지 못했으니 무슨 까닭인가.은 시에서는 전혀 곤궁한 모습이 없는데 끝내 떨치지 못했으니 무슨 까닭인가.)
- E719 + (지봉 이수광과 동주 이민구 부자는 모두 시문으로 명가라 일컬어졌다. 이수광은 … 지봉 이수광과 동주 이민구 부자는 모두 시문으로 명가라 일컬어졌다. 이수광은 시에 뛰어났고 이민구는 부에 뛰어났다. 이민구가 말했다. "선친의 시는 마힐 왕유를 숭상하고 나의 시는 소릉 두보를 숭상한다." 그 뜻은 대개 자부하는 뜻이 많았던 듯한데, 평가하는 사람들은 조예에 있어서 아들이 반드시 아버지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이민구의 "" 구는 비록 사람들이 전하여 읊었으나 구 가운데에서 '조수'와 '물', '생겨남'과 '사라짐'을 대로 삼았으니 병통을 피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이수광의 "" 구는 편안하고 느긋하여 빈틈이 없다.피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이수광의 "" 구는 편안하고 느긋하여 빈틈이 없다.)
- E116 + (참판 홍일동이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놀러 나갔다가 바야흐로 배를 타고 … 참판 홍일동이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놀러 나갔다가 바야흐로 배를 타고 건너게 되었다. 어떤 호걸이 노복 십여 명을 거느리고 나타났는데 혹 활을 끼거나 사냥한 족제비를 들고 있었으며 안장과 말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소리치며 다가왔다. 홍일동의 말과 노복을 보고는 모두 배 아래로 내쫒자 홍일동이 홀로 간청하며 말했다. "저 또한 양가의 사람이니 청컨대 모퉁이에 남도록 해 주십시오." 모퉁이에 엎드려 기다렸다. 그 사람이 배에 오르자 노복들이 각기 물품을 받들어 올렸다. 그 사람은 음식을 먹으면서 뱃전을 두드리며 시를 짓기를, ""라 하였는데, 그 대구를 오래 기억하지 못했다. 홍일동이 나와서 ""라 하자 그 사람이 놀라서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라 하였다. 대답하기를 "생원 홍일동입니다."라 하자 그 사람이 곧 손을 잡고 함께 앉아 시를 읊으며 매우 즐거워하였다. 이 때문에 교분이 두터워졌으니, 그 사람은 심선이었다. 매우 즐거워하였다. 이 때문에 교분이 두터워졌으니, 그 사람은 심선이었다.)
- E074 + (태종께서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더니 신우(辛禑) 임술년에 진사 제2등에 뽑혔 … 태종께서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더니 신우(辛禑) 임술년에 진사 제2등에 뽑혔고, 또 이듬해 계해년에는 문과에 뽑혔는데, 김한로(金漢老)가 장원을 하고 심효생(沈孝生)은 2등이 되고 태종은 10등이었는데, 이내(李來)ㆍ성부(成傅)ㆍ윤규(尹珪)ㆍ윤사수(尹思修)ㆍ박습(朴習)ㆍ현맹인(玄孟仁) 등은 모두 동방(同榜)이었다. 보위(寶位)에 오르자 김한로의 딸이 세자 이지(李禔)의 부인이 되었는데, 진퇴할 때 마다 항상 장원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br>태종이 일찍이 선시(扇詩)를 지어 이르기를,</br>풍탑에 의지했을 때는 밝은 달을 생각하고 / 風榻依時思朗月</br>월헌에서 읆조리면서는 맑은 바람을 생각하도다 / 月軒吟處想淸風</br>대를 깎아 단선을 이루고 보니 / 自從削竹成團扇</br>명월 청풍이 손바닥 안에 있도다 / 朗月淸風在掌中</br>하였다. 옛날부터 일찍이 문사(文士)로써 대업을 이룬 자는 있지 아니하였고, 문장이 또한 이와 같이 기교(奇巧)한 제왕도 있지 아니하였다. 그 사물을 인용하여 비유한 것과 함축된 의취(意趣)는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다.용하여 비유한 것과 함축된 의취(意趣)는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다.)
- E400 + (홍 상국 섬(洪相國暹)의 자(字)는 퇴지(退之)요 호는 인재(忍齋)로서 의정 … 홍 상국 섬(洪相國暹)의 자(字)는 퇴지(退之)요 호는 인재(忍齋)로서 의정(議政) 언필(彦弼)의 아들이다. 젊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모함에 떨어져 정형(庭刑)을 받고 흥양(興陽)으로 유배되었는데, 안로가 망하자 마침내 크게 현달(顯達)하였다. 그가 형을 받을 때 어떤 사람이 소 찬성 세양(蘇贊成世讓)에게 말하기를 “퇴지가 여기에서 끝나게 되다니 애석하다.”고 하였는데, 찬성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필시 앞길이 유망하게 될 것인데 어찌 갑자기 죽겠는가.” 하자, 그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물으니, 찬성이 말하기를 “전일 염여퇴(灔澦堆 중국 양자강 구당협(瞿唐峽) 상류의 큰 암석이 있는 곳)라는 제목의 과제시(課製詩) 결구(結句)에서 그가 ‘원숭이 끊임없이 울어대면서 급한 여울 올라가는 나를 전송하누나[淸猿啼不盡送我上危灘].’라고 하였는데, 이런 시구를 지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홍섬이 마침내 의정부에 정승으로 들어가 20년 동안이나 지내다가 나이 82세에 죽었으니, 시를 통해서도 이처럼 사람의 궁달(窮達)을 점칠 수 있는 것인가.죽었으니, 시를 통해서도 이처럼 사람의 궁달(窮達)을 점칠 수 있는 것인가.)
- M031 + (화롯불 연기 속에 범어를 익히니 / 爐火煙中演梵音 고요한 속에 일광은 비치는데 집은 침침하네 / 寂寥生白室沈沈 길 문 밖에 나 있으매 사람들은 남북으로 오가고 / 路長門外人南北 소나무 바위 가에 늙었는데 달은 고금에 밝구나 / 松老巖邊月古今 빈 절 새벽 바람 목탁소리 요란하고 / 空院曉風饒鐸舌 작은 뜰 가을 이슬 파초 상하누나 / 小庭秋露敗蕉心 내가 와서 고승의 자리에 앉으니 / 我來寄傲高僧榻 하룻밤 청담은 그 값어치 만금이어라 / 一夜淸談直萬金)
- E587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사신의 작품들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감히 가리지 못하고 받아서 간행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 사신 중에 글을 잘한다 일컫는 자는 필경 공용경인데 주지번에게 그를 물으니 일찍이 성명을 듣지 못했다 한다. 기순과 당고는 시어가 아름답고 굳세지만 또한 시가에 대하여 능한 사람은 아니다. 장녕은 다소 청려한 듯하나 또한 취약하여 골격이 없어서 끝내 소가에 귀결된다. 주지번의 시는 조잡하여 형태가 없으니 오히려 사신 웅화의 위약함만도 못하다. 그 밖의 사람들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 문인들이 매번 수창할 적에 대부분 미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대소정편의 다름이 있다. 원접사 서거정이 기순에 대해 감히 선창하기를 마치 도전하는 듯하게 하였지만 결국 ""구에 곤란을 겪었다. 율곡 이이가 조롱하여 말하기를 "사가 서거정은 씨름하는 사람과 같으니 먼저 다리를 걸고 후에 땅에 넘어뜨린다." 아랫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는 마땅히 받들어 접대하고 수창하여야 할 따름인데 어찌 감히 선창하겠는가? 이는 참으로 식자의 말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 그 시절 문인들 중 다소 시에 능한 자들을 모아서 수답하게 하였는데 그 택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사신의 웃음을 산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정사룡은 비록 시짓는 장수라 칭하지만 그 시가 이루어진 시에 견강부회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 오직 이행만이 혼연히 글을 완성하였으나 격조가 매우 비루하여 과체시의 류에 불과하였다. 지을 때마다 잠시 집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응수하였는데 그 대구가 잘 어울려 흠이 없었으니 평소에 익숙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소세양과 이희보는 비록 당시의 종사에게는 굴복하였으나 지금 세상에 동문을 읽고 사운시를 익히는 유근과 같은 자와는 함께 논할 수 없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 E004 +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 …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었고, 또《계원필경(桂苑筆耕)》10권을 간행하였다. 나는 일찍이 중국 사람은 포용력이 넓어서 외국 사람의 글이라고 경홀하게 여기지 않고, 이미 사책에 실었을 뿐더러, 또 그 문집이 세상에 행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 갸륵하게 여겼다. 그러나 문예열전(文藝列傳)에 최치원을 위하여 특별히 그 전(傳)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 뜻을 모르겠다. 혹 그의 사적이 전을 설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겨서일까? 최치원은 12세에 바다를 건너 당 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여 한 번 과거를 보아 갑과로 급제하였고, 드디어 고변(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서는 황소에게 격문을 보내니 황소의 기가 꺾였으며, 뒤에 벼슬이 도통순관 시어사(都統巡官侍御史)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려 할 때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이 유선가(儒仙歌)를 주었는데, 그 한 구에, </br></br><div class="poetry-text">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br></br>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네</div></br></br>하였고, 그의 자서(自敍)에도, “무협 중봉(巫峽重峯)의 해에 보잘것없는 몸으로 중국에 들어 왔고, 은하 열수(銀河列宿)의 해에 비단옷 입고 고국에 돌아왔다.” 하였으니, 대개 열두 살에 당 나라로 들어갔다가 스물여덟 살에 고국으로 돌아왔음을 말한 것이다. 그 행적이 이처럼 뚜렷하니, 이것으로 전을 설치한다면 예문지에 실린 심전기(沈佺期)ㆍ유병(柳幷)ㆍ최원한(崔元翰)ㆍ이빈(李頻) 등의 반장 정도되는 열전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만약 외국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지(志)에는 써야 할 것이다. 번진호용열전(藩鎭虎勇列傳)에서는 이정기(李正己)ㆍ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다 고려 사람인데도 각각 그 전을 만들어 그 사실을 소상하게 기록했는데, 어째서 문예열전에서만 최치원을 위하여 그 전을 설치하지 않았는가? 내가 사의(私意)로 헤아리건대, 옛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시기함이 없지 않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의 외로운 몸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사들을 압도했음에랴. 만일 전을 설치하여 바른 대로 그 사적을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
- E366 + (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의 누제(樓題)는 모두 쌍(雙)과 창(窓) 두 자 … 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의 누제(樓題)는 모두 쌍(雙)과 창(窓) 두 자를 써서 지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양창해 선생 것이 더욱 좋다.</br>푸른 바다 붉은 무리 둥근 해의 반을 줄그었는데 / 碧海暈紅規日半</br>이끼 푸르고 바위 흰데 연기와 갈매기 짝지어 가네 / 蒼苔巖白煙鷗雙</br>금과 은으로 꾸민 대 위에 외로이 휘파람 부니 / 金銀臺上發孤嘯</br>넓고 넓은 천지 창으로 들어오네 / 天地浩然開入窓</br>이 시를 어떤 사람이 전하다가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공에게 보이니 말하기를, “혹 득의하여 이처럼 지을 만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반드시 이 시보다 나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우리 아버지께서도 이 운을 사용하여 지으시기를,</br>가랑비에 흰 갈매기 쌍쌍이 날고 / 疎雨白鷗飛兩兩</br>해질 녘 고깃배는 쌍쌍이 떴네 / 夕照漁艇泛雙雙</br>바다에서 돋는 해를 맞고자 / 擬看暘谷金烏出</br>정각의 동쪽 문을 두지 않았네 / 畵閣東頭不設窓</br>하였는데,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였다. 김첨경(金添慶)공이 관찰사였을 때에 지은 시 두 수가 있다. 그 하나는</br>아깝다 홍문(鴻門)에서 구슬 한말[玉斗] 깨뜨린 것이 / 可惜鴻門玉斗撞</br>조각조각 흩어져서 한 쌍 두 쌍 못 맞추네 / 紛紛片片不論雙</br>변해 흰 새가 되어 천백 떼를 이루어 / 化成白鳥群千百</br>해돋이 객 창가에 시끄럽게 울어대네 / 日出呶呶鬧客窓</br>이며, 또 하나는,</br>좋은 경치 하도 많아 좌우 부딪치는데 / 好景紛紛左右撞</br>말 머리엔 미인들도 쌍쌍이 보이는구나 / 馬頭紅粉亦雙雙</br>다음 구절은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그 뒤에 글을 쓰기를,</br>가소롭다 김문길이 / 可笑金文吉</br>정신 없이 좌우에 부딪치네 / 紛紛左右撞</br>하니, 듣는 사람이 조소하였다.吉 정신 없이 좌우에 부딪치네 / 紛紛左右撞 하니, 듣는 사람이 조소하였다.)
- E372 + (고성(高城)에는 옛날부터 가볼 만한 명승지가 없었다. 병인년 겨울에 아버지께 … 고성(高城)에는 옛날부터 가볼 만한 명승지가 없었다. 병인년 겨울에 아버지께서 고성에 부임하시자, 다음 해 봄에 바로 관아 뒤 가시밭 가운데서 한군데 절승지(絶勝地)를 얻게 되어, 높은 곳을 평평하게 고르고 정자를 지었다. 서쪽은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이 쳐다보이는데, 천봉(千峯)이 한눈에 들어오며, 열흘 안 걸려 닿을 수 있고, 동쪽은 바다에 임하였는데, 거리가 10리도 못 되고, 남쪽은 남강을 수백 보 앞에다 굽어보며, 북쪽은 36봉이 바라보인다. 아래 제일 기승(奇勝)은 선군(先君)께서 기문을 짓고, 또 십영(十詠)을 지었으며, 양창해도 십영을 짓고 또 여기에 발문(跋文)을 지었는데, 문인들로 화답하는 분들이 많았다. 석봉(石峯) 한호(韓濩)는 거기에 액자를 크게 썼는데, 바로 해산정(海山亭)이다.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시를 보냈는데,</br>새로이 제일가는 강산을 열어 / 聞說新開第一區</br>바다와 산을 영동 한쪽 높이달았다는 말을 들었네 / 海山高揭嶺東陬</br>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두었던 모든 것이 눈앞에 나타나니 / 天慳地秘森呈露</br>시흥(詩興)이 나면 그 누가 넓다 하여 이 경치를 거두지 못하랴 / 詩興何人浩莫收</br>하였고, 감사(監司) 김여경(金餘慶)이 시를 짓기를,</br>이제 와서야 비로소 물 되기가 어려움을 믿겠네 / 今來始信難爲水</br>이 산 밖에 다시 좋은 산이 있다고 누가 말하리 / 此外誰言更有山</br>조그만 마음이 저같이 큰 것을 용납하니 / 方寸容他如許大</br>이번 행차가 말발굽 사이에 있음이 아니라네 / 玆行不在馬蹄間</br>하였다. 국상(國相) 윤두수(尹斗壽)의 시에,</br>삼일포(三日浦)에 조각배 띄우니 / 三日湖中泛小舟</br>한 갈피 좋은 곳 이루어 물과 구름이 한가롭네 / 一區形勝水雲悠</br>일찍이 자주 놀던 곳 기억을 더듬어 써오니 / 書來曾憶重遊處</br>서른여섯 봉우리마다 가을 다함 없네 / 三十六峯無盡秋</br>하였고, 남언경(南彦經) 공의 시에,</br>가을 달에 남강이 넓고 / 秋月南江闊</br>서리 단풍은 북령에 높았더라 / 霜楓北嶺高</br>꿈속에 늘 그리는 그곳 / 夢魂長繞處</br>갈대밭에 바람도 우수수하겠지 / 蘆荻吹蕭蕭</br>하였다. 황윤길(黃允吉)공의 시에</br>희한한 서른 봉우리 아흔 호수는 / 三十奇峯九十湖</br>네 신선 거닐던 날 몰래 놀던 곳 / 四仙當日秘名區</br>티끌 낀 소매 깨끗해짐을 문득 깨닫겠구려 / 尋眞斗覺塵襟淨</br>이 몸이 도리어 그림 가운데 있지 않나 의심이 나네 / 身世還疑入畵圖</br>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이 나네 / 身世還疑入畵圖 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
- E698 + (교관(敎官) 권필(權韠)의 호는 석주(石洲)이다. 시벽(詩癖)이 있어 과업( … 교관(敎官) 권필(權韠)의 호는 석주(石洲)이다. 시벽(詩癖)이 있어 과업(科業)을 일삼지 않았다. 그의 시는 노두(老杜)를 조종(祖宗)으로 삼고 간재(簡齋)를 답습하여 어의(語意)가 지극하고 구법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당시 시에 능한 사람들이 모두 추숭하여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근세에 성명(盛名)을 얻은 시인들 중 석주가 으뜸이 되었다. 들으니, 중국인이 동국(東國)의 시를 간행할 때 석주의 장률 몇 수가 들어갔다고 한다. 그중 한 수에 이르기를,</br></br>강가에 뚜우- 호각 소리 들리는데 / 江上嗚嗚聞角聲</br>북두성 자루는 강에 꽂혀 강물이 맑네 / 斗柄揷江江水明</br>아침조수 언덕을 침노하니 오리들 요란하고 / 早潮侵岸鴨鵝亂</br>먼 집엔 등불 켜져 다듬이 소리 울리네 / 遙舍點燈砧杵鳴</br>나그네 문을 나서니 달 지려 하고 / 客子出門月初落</br>뱃사람 돛을 거니 바람 일려 하네 / 舟人挂席風欲生</br>서주의 천리 길 여기서부터 가노니 / 西州千里自此往</br>긴 여정 험난한 길 어느 때나 평탄해질까 / 長路險艱何日平</br></br>하였는데, 파산(坡山 파주)에서 강도(江都 강화도)로 가려고 할 때 지은 것이다. 이 한 편만을 보아도 그의 재능이 뛰어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폐조(廢朝 광해군)때에 유씨(柳氏)의 여러 사람이 내세(內勢 광해비 유씨)를 빙자하여 멋대로 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니, 당시의 조정 신하들이 모두 아첨하고 애걸하였다. 지평(持平) 임숙영(任叔英)이 그때 거자(擧子 과거 보는 선비)로 대책문(對策文)을 지었는데, 촉휘(觸諱 꺼리는 것을 범함)하는 말이 많아 삭과(削科)를 당하려다가 다행히 중지하였다. 이에 석주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청청한 궁류에 꾀꼬리 어지러이 나는데 / 宮柳靑靑鶯亂飛</br>성 가득 벼슬아치 봄빛에 아첨하네 / 滿城冠蓋媚春輝</br>조정에선 모두 태평성대 축하하지만 / 朝家共賀昇平樂</br>누가 직언을 포의에서 나오게 했는고 / 誰遣危言出布衣</br></br>하였다. 그 후에 별시(別試)가 있어 박자흥(朴自興)이 등제(登第)하였는데, 박자흥의 부친 박승종(朴承宗)과 박자흥의 장인 이이첨(李爾瞻)이 고관(考官)을 했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순사(循私 사사로움에 따름)를 감히 거론하지 못하였다. 그때에 허균(許筠) 또한 시관(試官)으로서 자신의 조카 허아무개(허요(許窑))가 지은 글을 취하여 방(榜) 안에 넣었다가 죄를 입어 멀리 귀양을 갔다. 석주가 또 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과거급제 사사로운 정 있었다 한들 / 設令科第有私情</br>아들 사위 동생 중 조카가 제일 가벼운데 / 子壻弟中姪最輕</br>허균에게만 이 죄를 감당케 하니 / 獨使許筠當此罪</br>세간에 공도 행하긴 과연 어렵구나 / 世間公道果難行</br></br>하였다. 폐조에 이르러 역옥(逆獄 역적에 관련된 옥사)을 친국(親鞠)할 때 이 두 편의 시가 죄인의 서찰 가운데서 나오니, 석주는 시안(詩案) 때문에 형벌을 받고, 끝내는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석주를 들쳐 메고 동성(東城) 밖의 인가로 나왔는데, 나와 조현부(趙玄夫)가 함께 따라가 행구(行具)를 꾸려 주었다. 주인집 판영(板櫺) 위에 초서(屮書)로 이장길(李長吉 이하(李賀, 790~816))의 시〈장진주(將進酒)〉끝 4구를 보았는데 ‘권(勸)’ 자가 ‘권(權)’ 자로 되어 있었으니, 사실 잘못 쓴 데서 나온 것이었다.</br>때는 정히 늦봄이라, 도화(桃花)가 뜰에 가득하였다. 석주는 죽음에 임하여 석잔 술을 연거푸 마시더니 해가 질 무렵에 눈을 감았다. 한 글자 잘못 쓰인 것이 우연히 참언(讖言)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지 아니한가. 잘못 쓰인 것이 우연히 참언(讖言)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하지 아니한가.)
- E155 + (궁녀로 지내다가 밖으로 나온 사람이 상자에 보통이 아닌 편지를 가지고 있었는 … 궁녀로 지내다가 밖으로 나온 사람이 상자에 보통이 아닌 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로 "", 또 "", 또 "", 또 "", 또 "" 등등이 있었다. 이를 본 사람은 성종이 평소에 희롱삼아 붓을 들었다가 버린 것들임을 알았다. 절구 두 수는 틀림없이 그림에 제한 시일 것인데 누구의 것인지는 모른다. 나머지는 모두 월산대군에게 준 편지의 초고이다. 성종이 늘 원산대군을 안으로 불러들여 만나고 나갈 적에 편지를 주어 시를 주고받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대개 형제의 우애가 이처럼 돈독하였다.어 시를 주고받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대개 형제의 우애가 이처럼 돈독하였다.)
- E205 + (근대(近代) 무신(武臣) 중에 시에 능한 사람이 몇 사람에 지나지 않고 또 … 근대(近代) 무신(武臣) 중에 시에 능한 사람이 몇 사람에 지나지 않고 또 볼만한 것도 못 된다. 오직 박위겸(朴撝謙)이 젊어서 신 문충공(申文忠公 신숙주)의 막하에 있을 때에 시를 지었는데,</br>10만 정병이 수루를 호위하고 / 十萬貔貅擁戍樓</br>변방의 깊은 달밤에 여우 갖옷 싸늘한데 / 夜深邊月冷狐裘</br>한 가닥 긴 피리 소리 어디메서 들려오는고 / 一聲長笛來何處</br>정부의 만리의 시름을 불어서 다하는구나 / 吹盡征夫萬里愁</br>하였다. 뒤에 흥덕현(興德縣) 배풍헌(培風軒)에서 시를 지었는데,</br>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 정정한데 / 屹立亭亭萬仞峯</br>봉우리에 선 높은 누각 멀리 바람 속에 있도다 / 峯頭高閣逈臨風</br>땅은 봉래섬과 삼청의 경계에 이어 있고 / 地連蓬島三淸界</br>사람은 소상팔경 중에 있도다 / 人在瀟湘八景中</br>구름은 산허리에 아득하고 / 雲帶山腰橫縹緲</br>물은 하늘가에 닿아 뿌옇도다 / 水㴠天影接空濛</br>문득 먼 포구에 돌아오는 배를 보니 / 忽看遠浦歸帆疾</br>물길이 멀리 한수(한강)와 통하는구나 / 水道遙連漢水通</br>하였으니, 무인(武人)의 시 가운데 이런 작품은 쉽사리 얻지 못할 일이다. 하였으니, 무인(武人)의 시 가운데 이런 작품은 쉽사리 얻지 못할 일이다.)
- E575 + (근래에 당시를 배운다는 사람들이 모두 최경창과 이달을 칭송한다. 잠시 그 시 … 근래에 당시를 배운다는 사람들이 모두 최경창과 이달을 칭송한다. 잠시 그 시 중 좋은 것들을 취하여 기록한다. 최경창이 이장곤 옛 재상의 집을 지나며 지은 시는 이러하였다. "" 중국의 어느 장군이 전사했을 때 지은 만사는 이러하였다. "" 이달이 영광에서 최경창을 만났을 때에 눈여겨본 기생이 있었는데, 마침 상인이 보랏빛 비단을 파는 것을 보고 즉시 붓을 달려 최경창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 "" 최경창이 즉시 답하기를, "만약 이 시의 값을 논한다면 어찌 천금에 그치겠는가. 고을이 작아 재물이 마음에 차지 않을 것이다."라 하고 마침내 한 구에 백미 십 석을 쳐서 사십 석을 주었다. 그 밖에 바다에 머물며 지은 시는 이러하였다. "" 또다른 시는 이러하였다. "" 또 최경창의 시에 ""라 하였다. 모두 청담하며 가상히 여길 만하다. 다만 이런 사람들은 다만 작은 시만을 일삼고 본래 학문이 넉넉하지 못하였으므로 종래 옛사람들처럼 크게 울리지는 못하였으니 아쉬울 뿐이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종래 옛사람들처럼 크게 울리지는 못하였으니 아쉬울 뿐이다.)
- E736 + (근래의 젊은이 중에서 사백 김석주가 일찍부터 문명을 얻었으나 문장이 난삽한 … 근래의 젊은이 중에서 사백 김석주가 일찍부터 문명을 얻었으나 문장이 난삽한 병통이 있었다. 비록 몇 구의 말을 지어도 반드시 마음을 써서 깊이 생각하며, 초고를 여러 번 고치지 않으면 내놓지 않았다. 그의 시는 대개 조각하고 꾸민 것이 많은데, 우해 홍만종에게 차운한 시 여덟 편은 모두 좋다. 그 중 한 편은 이러하다. "" 극히 평담하고 고풍에 가깝다. 내가 일찍이 김석주를 만나 문학을 논할 때 김석주가 말했다. "내가 젊어서 많이 읽지 못하여 글쓰는 힘에 박차를 가할 수 없다. 비록 힘써 읽어서 그 병통을 고치려 하나 많은 업무로 겨를이 없으니 한스러울 뿐이다." 대개 김석주가 무릇 제술할 때에는 옛 저작을 모방하는 데이만 능할 뿐으로 큰 근원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므로 그가 이처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작법을 묘하게 이해하고 각 체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참으로 얻기 쉽지 않다. 작법을 묘하게 이해하고 각 체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참으로 얻기 쉽지 않다.)
- E632 + (김이숙(金頤叔 이숙은 김안로(金安老)의 자)이 젊어서 관동에 놀러갔을 때 꿈 … 김이숙(金頤叔 이숙은 김안로(金安老)의 자)이 젊어서 관동에 놀러갔을 때 꿈에 귀신이 나타나 읊조리기를</br>봄은 우전의 산천 밖에 무르익고 / 春融禹甸山川外</br>풍악은 우정의 조수 사이 아뢰누나 / 樂奏虞庭鳥獸間</br>라 하고는 이어서 말하기를,</br>“이것이 바로 네가 벼슬길을 얻을 시어(詩語)이다.”</br>고 하므로 꿈을 깨고 나서 이를 기억해 두었다. 다음해 정시(庭試)에 들어가니 연산(燕山)이 율시 여섯 편을 내어 시험을 치렀는데 그 가운데 ‘봄날 이원 제자들이 침향정 가에서 한가로이 악보를 들춰보다.[春日梨園弟子沈香亭畔閑閱樂譜]’라는 시제(詩題)를 가지고 한(閑) 자를 압운(押韻)으로 해서 시를 지으라는 문제가 있었다. 김이 생각하니 그 글귀가 꼭 들어 맞는지라 이내 그걸 가지고 써 냈다. 강목계(姜木溪 목계은 강혼(姜渾)의 호)가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크게 칭찬하고 장원(壯元)을 시켰다. 김모재(金慕齋 모재는 김안국(金安國)의 호)가 본디 글을 잘 안다고 이름이 난지라 참시관(參試官)을 하면서,</br>“이 구절은 귀신의 소리지 사람의 시가 아니다.”</br>하고 즉시 그 출처를 묻자 김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감식안에 탄복하였다. 출처를 묻자 김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감식안에 탄복하였다.)
- E011 + (나는 아홉 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지금까지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시서 … 나는 아홉 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지금까지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시서육경(詩書六經)ㆍ제자백가(諸子百家)ㆍ사필(史筆)의 글로부터 유경벽전(幽經僻典)ㆍ범서(梵書)ㆍ도가(道家)의 설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 깊은 뜻은 궁구하지 못했지만, 그를 섭렵하여 좋은 글귀를 따서 글 짓는 자료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또 복희(伏羲) 이후 삼대(三代)ㆍ양한(兩漢)ㆍ진(秦)ㆍ진(晉)ㆍ수(隋)ㆍ당(唐)ㆍ오대(五代) 사이의, 군신의 득실이며 방국의 치란이며 그리고 충신의사(忠臣義士)ㆍ간웅 대도(奸雄大盜)의 성패ㆍ선악의 자취를 비록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기억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들을 간추려 기송(記誦)하여 적시에 응용할 준비를 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혹시 지필을 가지고 풍월을 읊게 되면, 아무리 백운(百韻)에 이르는 장편(長篇)ㆍ거제(巨題)라 할지라도 마구 내려 써서 붓이 멈추지 않는다. 비록 금수(錦繡)와 주옥(珠玉) 같은 시편은 이루지 못하나 시인의 체재는 잃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건대, 자부함이 이와 같은데 결국 초목과 함께 썩게 되는 것이 애석하다. 한 번 붓을 들고 금문(金門)ㆍ옥당(玉堂)에 앉아서 왕언(王言)을 대신하고 고초(稿草)를 검토하며 비칙(批勅)ㆍ훈령(訓令)ㆍ황모(皇謨)ㆍ제고(帝誥)의 글을 지어 사방에 선포하여 평생의 뜻을 푼 뒤에야 말 것이니, 어찌 구구하게 대수롭지 않은 녹을 구하여 처자를 살릴 꾀를 하는 자의 유이기를 바랐겠는가. 아, 뜻은 크고 재주는 높건만, 부명(賦命)이 궁박(窮薄)하여 나이 30이 되도록 오히려 한 군현(郡縣)의 직임도 얻지 못하였으니, 외롭고 괴로운 온갖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내 두뇌를 알 만하다. 이때부터 경치를 만나면 부질없이 시를 읊고 술을 만나면 통쾌하게 마시며 현실을 떠나서 방랑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라, 바람은 화창하고 날씨는 따스하여 온갖 꽃이 다투어 피니, 이처럼 좋은 때를 그저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윤학록(尹學錄)과 함께 술을 가지고 구경하면서 수십 편의 시를 지었다. 흥이 무르익었을 때 취기로 인해 졸았는데, 윤학록이 운자를 부르며 나더러 시를 지으라고 권하기에 나는 곧 보운(步韻)으로 다음과 같이 지었다. 귀는 귀머거리되려 하고 입은 벙어리되려 하니 / 耳欲爲聾口欲瘖 곤궁한 처지에 더욱 세정을 안다 / 窮途益復世情諳 뜻과 같지 않은 일은 십에 팔구나 되고 / 不如意事有八九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열에 한둘도 없다 / 可與語人無二三 사업은 고기처럼 하기를 기약하고 / 事業皐夔期自比 문장은 반마처럼 하려 하였는데 / 文章班馬擬同參 연래에 신명을 점검하니 / 年來點檢身名上 전현에 미치지 못한 게 바로 나의 부끄러움이네 / 不及前賢是我慙 윤학록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팔구(八九)로 이삼(二三)을 대하니 평측(平仄)이 고르지 못하오. 공(公)은 평일에 있어서는 문장이 훌륭하여 비록 수백 운(韻)의 율시(律詩)라도 한 번 내려 쓰기를 마치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스쳐가듯 빨리 하나 한 글자도 하자가 없었는데, 지금은 한 작은 율시를 짓되 도리어 염(廉)을 어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지금은 꿈속에서 지은 것이므로 가리지 않고 내놓은 때문이오. 팔구는 천만(千萬)으로 고치는 것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소. 대갱(大羹)과 현주(玄酒)가 초장만 못하지 않은 법이라. 대가의 솜씨는 원래 이러한 것인데 공이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하품하고 기지개하면서 깨니 바로 한 꿈이었다. 그래서 꿈속에 있었던 일을 윤학록에게 갖추 말하기를, “꿈속에서 꿈에 지은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이른바 꿈속의 꿈이구려.” 하고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따라서 희롱으로 다음과 같이 한 절구를 지었다. 수향이 문득 취향과 이웃하였으니 / 睡鄕便與醉鄕隣 두 곳에서 돌아오니 다만 한 몸일러라 / 兩地歸來只一身 구십 일 온 봄이 모두 꿈이라 / 九十一春都是夢 꿈속에 도리어 꿈속 사람이 되었네 / 夢中還作夢中人꿈이라 / 九十一春都是夢 꿈속에 도리어 꿈속 사람이 되었네 / 夢中還作夢中人)
- E684 +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은 서예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스스로 자앙(子 …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은 서예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스스로 자앙(子昂)을 배웠다고 말하였으나 조맹부(趙孟頫) 서체와는 달랐다. 해서(楷書) 글씨가 매우 아름다웠으며 그의 시는 낭연(琅然)하여 애송할 만하였다. 〈영신월(詠新月)〉 시의 일련에서 이르기를,</br></br>달빛이 비껴 흡사 명협 세 잎을 비추는 듯하고 / 光斜恰照蓂三葉</br>바퀴 이지러져 겨우 계수 한 가지만 용납하네 / 輪缺纔容桂一枝</br></br>하였는데, 사람들은 뛰어나다고 칭찬하였다. 동악(東岳 이안눌의 호)이 차운하여 이르기를,</br></br>낚시 드리워 굴혈에 잠긴 교룡 겁주고 / 鉤沈剩劫潛蛟窟</br>활 걸어 가지에 조는 학을 놀라게 하네 / 弓掛偏驚睡鶴枝</br></br>하였는데, 비록 원운에는 미치지 못하나 압운에는 선후의 난이(難易)가 있는 법이니, 동악의 높은 재주를 알 수 있다.</br>두보의 시 〈대월(對月)〉에 이르기를,</br></br>달빛이 잠긴 규룡을 쏘니 꿈틀거리고 / 光射潛虯動</br>밝음이 잠든 새에 어른거리니 찡그리네 / 明翻宿鳥頻</br></br>하였고, 또 왕원지(王元之)의 시〈중추월(中秋月)〉에 이르기를,</br></br>차가움은 반딧불 나는 풀 적시고 / 冷濕流螢草</br>달빛은 학이 조는 가지에 엉겼네 / 光凝睡鶴枝</br></br>하였으니, 대개 동악은 두 시의 말을 사용한 것이다.엉겼네 / 光凝睡鶴枝 하였으니, 대개 동악은 두 시의 말을 사용한 것이다.)
- E177 +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 …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80세에 자식을 낳은 것은 근세에 드문 일로 사람들은 경사라 하나, 나는 재변이라고 여긴다. 장난삼아 두 절구를 지어서 서교(西郊 송찬)와 죽계(竹溪 한안) 두 늙은 친구에게 보냈더니, 두 노인이 모두 화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 전파되었으니, 더욱 우습다. 나의 시에,</br>75세 생남도 세상에 드문 일인데 / 七五生男世古稀</br>어이하여 80에 또 생남했나 / 如何八十又生兒</br>알겠구나. 조물주가 참으로 하는 일이 많아 / 從知造物眞多事</br>이 늙은이를 후대하여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을 / 饒此衰翁任所爲</br>80 생남은 재앙인가 두려우니 / 八十生兒恐是災</br>축하는 당치 않소 웃기나 하소 / 不堪爲賀只堪咍</br>괴이한 일이라고 다투어 말하게나 / 從敎怪事人爭說</br>어쩌리 세상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 其奈風情尙未灰</br>하였다.爭說 어쩌리 세상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 其奈風情尙未灰 하였다.)
- E012 + (내가 본래 시를 즐기는 것은 비록 포부(抱負)이기는 하나 병중에는 평일보다 … 내가 본래 시를 즐기는 것은 비록 포부(抱負)이기는 하나 병중에는 평일보다 배나 더 좋아하게 되니, 또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매양 흥이 날 때나 물(物)을 접촉했을 때에는 시를 읊지 않는 날이 없다. 그렇지 않으려 하여도 되지 않으니, 이것 또한 병이라고 말할 만하다. 일찍이 시벽편(詩癖篇)을 지어 뜻을 나타냈으니, 대개 스스로 상심한 것이다. 또 매일 한 끼니 식사는 두어 숟갈을 뜨는 데 불과하고 오직 술만 마실 뿐이라 항상 이것으로 걱정하였는데, 백낙천(白樂天)의《후집(後集)》에 실린 노경(老境)에 지은 것을 보았더니 병중에 지은 것이 많고, 술 마시는 것 또한 그러하였다. 그 한 시는 대략 이러하다. 내 또한 조용히 운명을 관찰하니 / 我亦定中觀宿命 평생의 부채는 바로 시가일러라 / 多生債負是歌詩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읊는 일에 미친 것이 / 不然何故狂吟詠 병난 뒤엔 병나기 전보다 더하겠는가 / 病後多於未病時 꿈에 얻은 시를 수작한 시는 이러하다. 어둡고 어두운 베이불 밑에 / 昏昏布衾底 병과 취함과 졸음이 서로 어울렸다 / 病醉睡相和 운모산(雲母散)을 먹는 데 대해 지은 시는 이러하다. 늦게 먹은 세 숟갈의 밥을 약이 녹이는구나 / 藥消日晏三匙食 그 나머지의 시도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이런 시를 보고난 다음에 너그럽게 생각하기를, “나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옛사람도 그랬다. 이것은 모두 숙부(宿負) 때문이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백공(白公)은 재직 중 병가를 내기를 1백 일이나 하였다. 나는 모일(某日)에 장차 퇴임을 청원할 터인데, 병가를 계산하면 1백 10일이니, 그것이 우연히 이처럼 서로 같다. 다만 부족한 것은 번소(樊素)와 소만(少蠻)일 뿐이다. 그러나 두 첩(妾)은 또한 공의 나이 68세 때 모두 내침을 당했으니 어찌 이때에 있었겠는가. 아, 재명(才名)과 덕망(德望)은 비록 백공에게 미치지 못한 그 거리가 매우 머나, 노경의 병중에 겪은 일들은 이따금 서로 같은 것이 많았다.” 하고, 따라서 그가 병중에 지은 시 열 다섯 수를 화답하여 다음과 같이 정을 서술한다. 노경에 세사를 잊고 평탄한 땅 밟았으니 / 老境忘懷履垣夷 낙천은 나의 스승이 될 만하이 / 樂天可作我之師 세상에 뛰어난 낙천의 재주에는 미치지 못하나 / 雖然與及才超世 병중에 시를 즐기는 것은 우연히 서로 같구나 / 偶爾相侔病嗜詩 그의 당년 퇴임하던 날짜를 비교해보면 / 較得當年身退日 나의 금년 퇴임하는 때와 같다 / 類余今歲乞骸時 낙구(落句)는 빠졌다.退日 나의 금년 퇴임하는 때와 같다 / 類余今歲乞骸時 낙구(落句)는 빠졌다.)
- E653 + (내가 수안(遂安)에 부임하는 날 황지천이 시로 전송하여 시재(詩才)는 우뚝하 … 내가 수안(遂安)에 부임하는 날 황지천이 시로 전송하여</br>시재(詩才)는 우뚝하니 동료들 가운데 뛰어나나 / 詩才突兀行間出</br>벼슬 복은 어그러져 분수 밖에 기구하네 / 官況蹉跎分外奇</br>이 모두 인생에는 각기 명이 있으니 / 摠是人生各有命</br>유유한 남은 일은 미뤄두고 지날밖에 / 悠悠餘外且安之</br>라 하였으니, 자못 감개가 깊다. 공이 젊어서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 이백생(李伯生 백생은 이순인(李純仁)의 자)ㆍ최가운(崔嘉運 가운은 최경창(崔慶昌)의 자)ㆍ하대이(河大而 대이는 하응림(河應臨)의 자) 의 무리들이 함께 당운(唐韻)을 숭상하여 대궐안의 소도(小桃)를 두고 읊어 작품이 꽤 많았는데 공이 이에 화운하기를</br>무수한 궁중 꽃은 흰 담장에 기댔는데 / 無數宮花倚粉牆</br>벌 나비는 노닐며 남은 향을 좇아가네 / 游蜂戲蝶趁餘香</br>늙은이는 봄바람을 채 보지 못하고 / 老翁不及春風看</br>속절없이 태양을 향하는 해바라기 마음이로세 / 空有葵心向太陽</br>라 하였다. 이처럼 함축된 뜻이 심원하고 조사(措辭)가 기한(奇悍)하니 시를 하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되지 않겠는가? 부드러운 것 고운 것 바람 꽃 따위를 읊은 시는 오히려 그 중후한 맛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것 바람 꽃 따위를 읊은 시는 오히려 그 중후한 맛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 E010 + (내가 옛날 과거에 급제하던 해에 동년(同年)들과 통제사(通濟寺)에 놀러 갔었 … 내가 옛날 과거에 급제하던 해에 동년(同年)들과 통제사(通濟寺)에 놀러 갔었다. 그때 나와 4~5인은 일부러 뒤떨어져서 말 안장을 나란히하고 천천히 가면서 시를 창화(唱和)하였다. 맨 먼저 지은 사람의 시운(詩韻)을 가지고 각기 사운시(四韻詩)를 지었다. 이 시는 이미 노상에서 입으로 부른 것이라 붓으로 쓸 만한 것이 있지도 않거니와, 또한 시인의 상어(常語)로 생각하여 아예 기억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두 번이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이 시가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사대부들에게 크게 칭송받는 바가 되었다.” 하고, 그 사람은, 나귀 그림자 속에 푸른 산이 저물고 / 蹇驢影裡碧山暮 외기러기 울음 속에 단풍지는 가을일러라 / 斷雁聲中紅樹秋 는 한 시구만을 외면서, “이 시구가 더욱 사랑을 받는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또한 믿지 않았다.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외로운 학은 어디 가고 하늘은 아득한고 / 獨鶴何歸天杳杳 다니는 사람 끊이지 않는데 길은 길구나 / 行人不盡路悠悠 라는 한 시구 만을 기억하고, “첫구와 끝구는 다 알지 못한다.” 하였다. 내가 비록 총명하지는 못하나 또한 매우 노둔한 사람은 아닌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 그때 갑작스레 짓고 조금도 유의하지 않아 우연히 잊어서일까. 전번 구양백호(歐陽伯虎)가 나를 찾아왔을 때 좌석에 있던 어떤 손이 이 시에 언급하고 이내 묻기를, “상국(相國)의 이 시가 대국에 전파되었다 하는데 진실입니까?” 하니, 구양백호는 선뜻 대답하기를,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두 화족(畫簇)을 만들어서 봅니다.” 하자, 그 손은 약간 의심하였다. 그러자 구양백호는, “그렇게 의심하신다면, 내가 명년에 환국하여 그림과 시의 전본(全本)을 싸가지고 와서 보여주겠습니다.” 하였다. 아, 과연 이 말과 같다면, 이는 실로 분에 넘치는 말이니 감당할 바 아니로다. 전에 부친 절구를 차운하여 구양백호에게 주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부끄럽도다! 구구한 이 한 수의 시는 / 慚愧區區一首詩 한 번 보아줌도 족한데 또 그림까지 그렸나 / 一觀猶足又圖爲 중국이 이처럼 외국을 차별하지 않음을 누가 알았으랴 / 誰知中國曾无外 명공께서 혹 속이는 것은 아닌지 / 無乃明公或有欺알았으랴 / 誰知中國曾无外 명공께서 혹 속이는 것은 아닌지 / 無乃明公或有欺)
- C014 +
- E689 + (내가 차오산과 있을 때, 행차가 용만(龍灣)에 이르니 그때는 4월 초순이었다 … 내가 차오산과 있을 때, 행차가 용만(龍灣)에 이르니 그때는 4월 초순이었다. 하루는 오산이 숙소에 있으면서 나에게 요구하여 말하기를,</br>“오늘 구룡대(九龍臺)에 가서 놀고자 하는데 그대도 뒤따라오시오.”</br>하였다. 나는 말을 재촉하여 그를 따라갔다. 드디어 성의 북쪽으로 몇 리쯤 이르자, 층층 벼랑이 만장이나 우뚝 솟았는데, 그곳에 오르니 중국의 산천과 말갈(靺鞨) 지방이 바라보였다. 그 아래에 깊은 물은 검은 빛이 나고 성난 파도가 거칠게 일어났다. 바로 구룡연(九龍淵)이다. 이 때문에 구룡대라는 이름을 얻은 것일까.</br>오산이 자리를 깔게 하고 그 위에 앉더니, 시자(侍者)를 시켜 종이 5, 6폭을 이어 붙이게 하고 붓과 벼루를 들여 나를 궁지에 빠뜨리고자 하였다. 나는 이 노인과 함께 다작(多作)으로 경쟁할 수가 없으므로 속히 시 한편을 짓고 나서 그 필봉(筆鋒)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단율(短律) 한 수를 써서 그에게 보여주었는데, 그때 오산은 이미 20여 운을 지어놓고 있었다. 왼손으로 종이를 말아서 시를 감춘 채, 측면으로 내 시를 본 다음에 몇 소리 신음하더니, 종들에게 수레를 갖추라 재촉하고 말을 달려 그의 숙소로 돌아갔다. 내가 뒤따라 와 그 까닭을 물으니 오산이 웃음을 터뜨리며 사실을 토로하기를,</br>“내가 평소 즐겨 쓰던 문자는 ‘육오(六鼇)’ 두 글자라네. 내 시 가운데 이미 ‘육오’로 ‘구룡(九龍)’의 대우(對偶)를 삼았는데, 그대가 먼저 그것을 써버린지라, 신기(神氣)가 갑자기 막혀서 그만두고 돌아왔을 뿐이네.”</br>하기에, 서로 마주보고 한바탕 웃었다. 대개 나의 시 가운데,</br></br>산은 육오가 이고 있는 듯하고 / 山疑六鼇戴</br>강은 구룡 깊은 곳에 이르렀네 / 江到九龍深</br></br>라는 구절이 있어서 오산이 이처럼 말하였던 것이다. 빈상(유근)이 이 말을 듣고는 배를 움켜쥐고 한바탕 웃었다.하였던 것이다. 빈상(유근)이 이 말을 듣고는 배를 움켜쥐고 한바탕 웃었다.)
- E745 + (당나라 잠삼은 늘 한 편의 시를 지으면 사람들이 전하여 베꼈고 비록 이민족의 … 당나라 잠삼은 늘 한 편의 시를 지으면 사람들이 전하여 베꼈고 비록 이민족의 무리들이라도 음송하지 않는 적이 없었다. 이익이 매번 한 편의 시를 지으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음악에 맞추고 그림에 그려넣었으니 두 사람의 시가 어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경모하게 하는가. 지금 세상에는 비록 뛰어난 작품이 있어도 독실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지금과 옛날이 다르기 때문인가?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인가? 내가 일찍이 용호정사에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사람들이 모두 전하여 읊었다. 내가 평소 지은 시 중에 이보다 나은 것이 많은데 이 시가 가장 회자되니, 시에도 또한 만나고 만나지 못함이 있는가? 효종께서 일찍이 화공으로 하여금 금병에 그리게 할 적에 이 시를 써내리고 명하여 이 시의 경치를 모사하여 올리게 하셨다. 아, 나의 보잘것없는 시구가 그림까지 명할 것이 아닌데도 외람되게 눈에 들어 그림으로 그려지게 되었으니 실로 세상에 보기 드문 좋은 일이다. 눈에 들어 그림으로 그려지게 되었으니 실로 세상에 보기 드문 좋은 일이다.)
- E749 + (당나라의 여러 시인들은 시를 지을 때에 일생의 심력을 기울였으므로 능히 세상 … 당나라의 여러 시인들은 시를 지을 때에 일생의 심력을 기울였으므로 능히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후세에 전할 수 있었다. 예로 "", "", "", "", "", ""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나 또한 이러한 버릇이 있어서 버리고 싶어도 능히 하지 못한다. 희롱삼아 읊은 한 절구에, ""라 하였다. 아, 오직 아는 사람만이 더불어 이 경지를 말할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얕은 학문으로 경솔하게 글을 이루어 곧바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을 지으려 하니 또한 엉성하지 않겠는가.이루어 곧바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을 지으려 하니 또한 엉성하지 않겠는가.)
- E034 + (대축 오세재가 의종이 미행한 것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 <div cla … 대축 오세재가 의종이 미행한 것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어찌하여 날이 청명한데도,<br>검은 구름 낮게 땅에 깔리었는가,<br>도성 사람들 가까이 마오.<br>용이 이 속으로 다닌다오.</div></br>그는 또 남의 운을 써서 극암에 대해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성의 북쪽 높고 험한 바위,<br>나라 사람들은 극암이라고 부르지.<br>멀리 학을 탄 왕자 진을 찧을 듯하고,<br>높이 하늘에 오른 무함을 찌를 것 같다.<br>자루를 휘는 데 번개로 불을 삼고,<br>칼날을 담금질하는 데 서리로 소금을 삼는다.<br>어떻게 변기로 만들어,<br>초를 없애고 범을 살릴까.</div></br>눈병을 앓으면서 지은 시는 이렇ᄃᆞ.</br><div class="poetry-text">늙음과 병은 기약이나 한 듯 찾아오지만,<br>죽을 때가 다된 한 포의의 신세.<br>눈동자 몹시 희미하여,<br>자수정 안경도 소용이 없네.<br>등잔불 앞에서 글자 보기가 겁나고,<br>눈 내린 뒤 빛을 부끄럽게 바라본다.<br>금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br>눈을 감고 기심을 잊는 것을 배우리라.</div></br>문순공 이규보가 말하기를, “<div class="critique-text">선생이 시를 짓는 것은 한유와 두보를 배웠다. 그러나 그의 시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div></br>”고 하였다. </br>그런데 김거사집 가운데 그의 시가 한 편 실려 있다.</br><div class="poetry-text">크기는 백 아름이나 되는 재목이지만 쓸 데가 없고,<br>길이는 석 자나 되는 입이지만 말을 못한다.</div></br><div class="critique-text">역시 노건하여 칭찬할 만하다.</div>는다.</div> ”고 하였다. 그런데 김거사집 가운데 그의 시가 한 편 실려 있다. <div class="poetry-text">크기는 백 아름이나 되는 재목이지만 쓸 데가 없고,<br>길이는 석 자나 되는 입이지만 말을 못한다.</div> <div class="critique-text">역시 노건하여 칭찬할 만하다.</div>)
- E111 + (목은(牧隱, 이색)은 스스로 재주와 기개가 넘친다고 자부했지만, 시를 지을 … 목은(牧隱, 이색)은 스스로 재주와 기개가 넘친다고 자부했지만, 시를 지을 때 속된 말을 많이 썼다. 예를 들면, "", "","", "", ""등이다. '동해'는 세상에서 동으로 만든 세숫대야를 말하는 것으로, 그러하여 이렇게 읊은 것이다. ""라 하였는데 여기서 평계는 꿀떡이다. 쌀가루에 꿀을 섞고 얇게 빚어 지름이 반 치 정도, 길이가 두세 치 정도 되게 만든 후 향기로운 기름에 지져낸 것을 평계라고 부른다. 또는 과자라고도 하는데, 지금 사람들은 상례·제사·혼인·잔치 때 모두 이것을 사용하며, 그릇에 담아 높이가 한 자에 이른다. 이러한 음식을 마련하지 않으면 반드시 소홀하다 여겼는데, 이는 고려 시대의 풍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라 하였는데 이는 면채 구이를 가리킨다. 세속에서 말하는 동지에는 숭늉죽을 서로 나누어 먹었는데, 목은의 시에 ""라 하였다. 정월 대보름에는 찹쌀밥을 지어 과실과 꿀을 섞어 서로 나누어 먹었는데, 시에 이르기를, ""라 하였다.어 과실과 꿀을 섞어 서로 나누어 먹었는데, 시에 이르기를, ""라 하였다.)
- M018 + (부끄럽도다! 구구한 이 한 수의 시는 / 慚愧區區一首詩 한 번 보아줌도 족한데 또 그림까지 그렸나 / 一觀猶足又圖爲 중국이 이처럼 외국을 차별하지 않음을 누가 알았으랴 / 誰知中國曾无外 명공께서 혹 속이는 것은 아닌지 / 無乃明公或有欺)
- E692 + (사문(斯文) 이춘영(李春英)의 호는 체소(體素)이며, 문한(文翰 문장)으로 … 사문(斯文) 이춘영(李春英)의 호는 체소(體素)이며, 문한(文翰 문장)으로 자부하였다. 그의 문장과 시는 오로지 부려(富麗 풍부하고 미려함)함을 숭상하여 도도(滔滔)히 그침이 없었다. 매번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인재의 장단(長短)을 논할 때면 팔뚝을 걷고 수염을 매만지며 큰 소리로 크게 꾸짖으니, 비록 문인재자(文人才子)가 그 옆에 있어도 모두 감히 그와 맞서지 못하였다.</br>처사 임전(任錪)의 호는 명고(鳴皐)이다. 일생을 시에 힘썼는데, 읽은 것은 이백의 시와 《당음(唐音)》 뿐이었다. 또한 시를 이야기하고 구절을 평하는 것을 잘하여 듣는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다. 그가 평생 취하지 않은 것은 체소의 시였다.</br>두 사람의 평론은 호각(互角)을 이루어 죽을 때까지 서로 굽히지 않았다. 체소의 시 〈등영보정(登永保亭)〉에 이르기를,</br></br>달은 오늘밤에 가득 채워지고 / 月從今夜十分滿</br>호수는 만조에 천경이나 넓네 / 湖納晩潮千頃寬</br></br>하였는데, 구가 원만하고 뜻이 넉넉하다. 명고가 일찍이 길에서 지은</br></br>외로운 성에 노을 지는 저녁이요 / 斷靄孤城夕</br>늙은 나무에 매미 우는 가을이네 / 寒蟬老樹秋</br></br>라는 구절은 담아(淡雅)하여 읊을 만하다. 이 두 연을 보면 과연 서로 합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시를 아는 자들이 두 사람 시를 논하면, 체소는 추호(麤豪)하고 명고는 한검(寒儉)하다고 말하는데, 이런 논평이 어떠한지 모르겠다.豪)하고 명고는 한검(寒儉)하다고 말하는데, 이런 논평이 어떠한지 모르겠다.)
- E694 + (상사(上舍 진사) 정언눌(鄭彥訥)은 호가 일치(一蚩)이며 본관은 나주(羅州) … 상사(上舍 진사) 정언눌(鄭彥訥)은 호가 일치(一蚩)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학문이 깊었으나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과장(科場)에 갔을 때마다 부(賦)로써 사람들을 굴복시키니, 세상에서는 부에 능한 것은 알았지만 그가 지은 시를 볼 수는 없었다. 그가 소년 시절에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에서 노닐다가 임백호 시의 일련을 차운한</br></br>괴석은 밤이면 호랑이가 되고 / 怪石夜能虎</br>왜송은 가을이면 거문고가 되려 하네 / 矮松秋欲絃</br></br>에서 그의 뛰어남을 충분히 볼 수 있다.</br>임진년 이후 난을 만나 떠돌아다닐 때,</br></br>취할 적엔 천일도 적더니 / 醉來千日少</br>난리에는 일신도 많도다 / 亂後一身多</br></br>라는 시 구절을 지었는데, 듣는 사람들은 모두 옛사람들도 말하지 못했던 말을 잘 지어냈다고 칭찬하였다.</br>요합(姚合)의 〈증유차(贈劉叉)〉 시 일련,</br></br>때를 피해 성을 바꿨고 / 避時曾變姓</br>난을 구함에 몸을 꺼렸네 / 救難似嫌身</br></br>도 정언눌의 시의(詩意)와 대략 같다. 그러나 일치는 기묘한 시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필시 요합의 구절을 답습한 것은 아닐 것이다.《금강경(金剛經)》 송(頌)에 이르기를,</br></br>부자는 천 명 먹을 재산도 적다고 투덜대고 / 富嫌千口少</br>가난한 사람은 한 몸도 많다고 한탄하네 / 貧恨一身多</br></br>하였는데, 아마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다.도 많다고 한탄하네 / 貧恨一身多 하였는데, 아마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 E315 + (상사(上舍) 홍유손(洪裕孫)은 남양(南陽)의 향리였다. 본읍에서 침해하여 역 … 상사(上舍) 홍유손(洪裕孫)은 남양(南陽)의 향리였다. 본읍에서 침해하여 역사시키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겨 생원에 합격한 뒤에 과거보려 하지 아니하고, 방외의 선비가 되어 방랑하면서 스스로를 높게 여겼다. 금강산 석벽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br>몸이 단군 무진년보다 앞에 생기고 / 身先檀帝戊辰歲</br>눈으로 기왕이 마한이라 이름함을 보았다 /眼及箕王號馬韓</br>영랑과 수부에서 놀려고 하다가 / 要與永郞遊水府</br>우연히 술에 이끌려 인간에 머물렀네 / 偶牽春酒滯人間</br>당시 사람들은 신선이 지은 시라고 하다가, 뒤에 홍유손이 왕래하였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홍유손의 지은 시임을 알았다. 뒤에 홍유손이 왕래하였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홍유손의 지은 시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