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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056 + (위로 북두에 닿을 듯 삼각형 지붕, 허공에 높이 솟은 한 칸의 누대.)
- E579 + (유근이 호서에서 안찰사로 있을 때 여러 수령들과 함께 공북루에서 큰 잔치를 … 유근이 호서에서 안찰사로 있을 때 여러 수령들과 함께 공북루에서 큰 잔치를 벌였다. 밤새도록 흠뻑 즐기면서 취흥이 한창 짙어질 때 갑자기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묻기를, "이게 무슨 소리인가?"하였으니 대개 밤이 이미 새벽으로 향해감을 싫어해서이다. 기생 중에 양대운이 있어 짐짓 대답했다. "이것은 바로 강가의 백로 소리입니다." 유근이 그 대답이 자신의 뜻에 들어맞음을 기뻐하여 그 민첩하고 지혜로움을 칭찬하였다. 이어서 좌중에 시를 짓게 하였다. 홍난상은 문인으로 그 때에 문의 현감으로 있었는데 역시 여기에 참석하였다. 먼저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방백이 보고 칭찬하였으며 한때에 회자되었다. 호서의 선비들이 마지막 구를 제목으로 삼아서 읊은 자들이 많았다 한다.다. 호서의 선비들이 마지막 구를 제목으로 삼아서 읊은 자들이 많았다 한다.)
- E728 + (유도삼의 호는 자하옹이다. 일찍이 함경도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주색이 있는 곳을 두루 유람하고는 돌아와 안변의 석왕사에 이르러 율시 한 수를 지었다. "" 번화한 경계를 완연히 벗어나 맑고 한가로운 의취만을 남겼다. 시와 정신이 만나서 시어로 발한 것이 맑고 시원하니 재주와 격조가 범상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 E217 + (유몽와(柳夢窩)의 《대동시림》에 있는 그의 선친 수재의 〈숙낙생역(宿樂生驛) … 유몽와(柳夢窩)의 《대동시림》에 있는 그의 선친 수재의 〈숙낙생역(宿樂生驛)〉 시에,</br>날이 저물어 온 산이 어두운데 / 日夕衆山暗</br>멀리 낙생에 와 머물도다 / 遠來投樂生</br>나귀는 남은 풀을 씹고 / 征驢吃殘草</br>늙은 종은 좋은 밥을 먹네 / 老僕飯香粳</br>베개를 찾아 등잔을 등지고 자며 / 索枕背燈睡</br>잔을 잡고 술을 따라 마시네 / 把杯斟酒傾</br>때때로 장로를 불러 / 時時呼長老</br>손꼽아 앞길을 묻노라 / 屈指問前程</br>하였는데, 나귀가 남은 풀을 씹는다는 것은 이미 여행길이 고달픈데, 어찌 늙은 종이 좋은 밥을 먹겠으며, 이미 등잔을 등지고 자는데, 또 무슨 잔을 잡는 일이 있겠는가. 그리고 파(把)ㆍ짐(斟)ㆍ경(傾) 자는 모두 비슷한 뜻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낙생역에서 단 하루만 묵었는데, ‘때때로 장로를 부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驛)의 하인들이 불도를 닦는 중과 비길 바가 아닌데, 그들을 가리켜 장로라 함은 또한 무슨 뜻인가. 굴지(屈指)라는 말은 본래 《한서(漢書)》 진탕전(陳湯傳)에, “손꼽아 그날을 세면서 말하기를, 며칠 가지 않아서 응당 길한 말이 들릴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앞길을 물으면서 굴지라는 글자를 쓴 것은 역시 그것이 온당한 말인가 모르겠다.길을 물으면서 굴지라는 글자를 쓴 것은 역시 그것이 온당한 말인가 모르겠다.)
- E708 + (유생 우탁은 시에 능했다. 소재 노수신이 일찍이 강가의 정자에서 우탁과 함께 … 유생 우탁은 시에 능했다. 소재 노수신이 일찍이 강가의 정자에서 우탁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때 어촌에 석양이 지는데,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노수신이 시를 지으려 하여 한창 음미하고 있을 때 우탁이 붓을 잡고 먼저 절구 한 수를 썼다. "" 노수신이 극찬하며 말했다. "비록 사가 서거정처럼 시어가 넉넉한 사람이라도 이러한 경어는 없을 것이다." 동원 김귀영이 마침 자리에 있다가 말했다. "저 학생은 시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데 어찌 그리 지나치게 칭찬하십니까?" 노수신이 말했다. "그대는 명성과 지위로 시를 논하는가? 맹호연의 ""는 시가의 상승인데, 그 맹호연 또한 학생이 아니었던가?" 김귀영이 무안해하며 부끄러운 빛을 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속세의 사람들은 보는 눈도 없고 듣는 귀도 없어서 시대의 선후와 사람의 귀천으로 경중을 말한다. 비록 이백과 두보가 다시 태어난다 하여도 만약 미천한 지위에 있다면 또한 반드시 업신여기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풍조가 개탄스럽다.다면 또한 반드시 업신여기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풍조가 개탄스럽다.)
- E346 + (유생에 홍한인(洪漢仁)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는 시재가 있고 산수에 놀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천마산(天磨山)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아침엔 백운봉 정상에 올라 놀다가 / 朝上白雲峯頂觀 석양엔 봉우리 아래 외딴 암자에 투숙하네 / 暮投峯下孤菴宿 밤 깊어 중은 말없고 손은 잠 못이루는데 / 夜深僧定客無眠 두견새 소리 속에 산달이 지네 / 杜宇一聲山月落 그는 뒤에 강산에 유람하러 가서 깊은 못을 탐내 구경하다가 실족하여 빠져 죽었다고 한다.)
- E309 + (유응부(兪應孚)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장군의 인의가 오랑캐를 진압하니 / 將軍仁義鎭夷蠻 국경 밖에 전생 사라져 사졸이 조네 / 塞外塵淸士卒眠 긴 낮 빈 뜰에 볼 것이 무엇인고 / 晝永空庭何所玩 날랜 매 삼백 마리 다락 앞에 앉았네 / 良鷹三百坐樓前 남추강(南秋江 효온(孝溫))은 그 말구를 들어, 족히 그 기상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전편이 세상에 많이 나타나서 않았기 때문에 기록한다.)
- E270 + (유촌(柳村)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에 서울에 들어와 신기재(申企齋)에게, ‘근래에 누구의 가작(佳作)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임공 형수(林公亨秀)가 탐라(耽羅)에 목사로 나가, 산은 왕자국에 서려 있고 / 山蟠王子國 물결은 노인성을 차도다 / 波蹴老人星 라는 글귀를 얻었는데, 이것이 가장 아름답다.’ 하였소.” 하였다. 내가 호음에게 질문하였더니, 곧 말하기를, “나는 그것이 좋은 줄 모르겠다.” 하였다.)
- E672 + (유희경(劉希慶)이란 자는 천례(賤隷)이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 … 유희경(劉希慶)이란 자는 천례(賤隷)이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젊었을 때 갈천(葛川) 임훈(林薰)을 따라 광주(光州)에 있으면서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호)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전인(前人)이 써 놓은 성(星)자 운에 차하여</br>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 / 竹葉朝傾露</br>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 松梢曉掛星</br>라 하니 양송천(梁松川 송천은 양응정(梁應鼎)의 호)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하니 양송천(梁松川 송천은 양응정(梁應鼎)의 호)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 E585 + (유희경은 본래 천한 신분이었으나 본성이 담아하여 어려서부터 시와 예절을 배웠 … 유희경은 본래 천한 신분이었으나 본성이 담아하여 어려서부터 시와 예절을 배웠다. 임진왜란 이후에 스스로 의탁할 곳이 없어서 위장의 서원이 되었다. 중전을 호위하여 수안에 머물렀는데 때마침 눈이 개어서 계곡과 산의 아름다움이 배가되었다. 호위하는 여러 신하들이 유희경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 그 시에, "" 또 일찍이 용문산에서 놀았는데 같이 놀던 유사가 말 위에서 희경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 그 시에, "" 유희경은 상복을 잘 지었으므로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상사가 있으면 그에게 옷을 짓게 하였다. 유희경은 천한 처지라 사양할 수 없었고, 나이 칠십에 상가의 일꾼이 되어 굶주린 채로 곡하는 곳에서 뛰어다녔다. 식자들이 이를 슬퍼하였다.꾼이 되어 굶주린 채로 곡하는 곳에서 뛰어다녔다. 식자들이 이를 슬퍼하였다.)
- E664 + (윤 사문 면(尹斯文勉)이 사명을 받들고 호남으로 떠나 어느 산을 지나가는데 … 윤 사문 면(尹斯文勉)이 사명을 받들고 호남으로 떠나 어느 산을 지나가는데 산 속에 초가집이 있었다. 거기서 한 늙은이가 나무 아래에서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고 책상 위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펴 보니 늙은이가 다가와서 빼앗으며,</br>“되지 않은 작품이라 남의 눈에 보여 줄 수가 없소.”</br>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겨우 첫머리에 쓴 빗을 읊은 시만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았다.</br>얼레빗 빗질하고 참빗으로 빗질하니 / 木梳梳了竹梳梳</br>빗질 천 번 쓸어 내려 이는 벌써 없어졌네 / 梳却千回蝨已除</br>어찌하면 만장 길이 큰 빗을 얻어다가 / 安得大梳長萬丈</br>백성들의 물것을 남기잖고 쓸어낼꼬 / 盡梳黔首蝨無餘</br>그 이름을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盡梳黔首蝨無餘 그 이름을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 E377 + (윤결 선생이 선군의 처소로 오셔서 종일 말씀하셨는데, 윤공이 오언절구 한 구 … 윤결 선생이 선군의 처소로 오셔서 종일 말씀하셨는데, 윤공이 오언절구 한 구절을 부르시고, “이 시가 어떻습니까?” 하자, 선군이 말하기를, “이것은 귀신의 시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윤공이 대단히 놀라면서, “그대는 어떻게 귀신의 시인줄 아시오. 내가 어젯밤 꿈에 어떤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놀았는데, 흰 모래가 십여 리나 깔렸고, 달빛은 낮과 같았습니다. 어디서 꾀꼬리 소리가 들려 왔는데, 이 골짜기를 물어보니, 바로 ‘석문동(石門洞)’이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흥이 나서 오언시 한 수를 지었는데,</br>우연히 석문동(石門洞)에 들어와 / 偶入石門洞</br>시를 읊조리면서 홀로 밤길을 걷고 있구나 / 吟詩孤夜行</br>달은 대낮같이 밝고 시냇가 모래는 희기도 한데 / 月午澗沙白</br>텅빈 산골짜기 어디에선가 꾀꼬리 울음소리 한 차례 들리어 온다 / 空山啼一鶯</br>라고 지었습니다.” 하였다.리 울음소리 한 차례 들리어 온다 / 空山啼一鶯 라고 지었습니다.” 하였다.)
- E380 + (윤결(尹結) 공이 젊었을 때 어느날 작은 마루에 나와 앉아 있는데 문이 열리 … 윤결(尹結) 공이 젊었을 때 어느날 작은 마루에 나와 앉아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고운 옷을 입은 종 하나가 나타나, 명함을 내어 놓기에 문으로 가서 맞이하니, 한 관인(官人)이 따라 들어오는데, 의관과 용모가 매우 바르고 깨끗하였다. 장원이 말하기를, “ 반드시 잘못 찾아오신 겁니다. 어찌 우리 집에 올 관인이 있겠습니까. 그만두시고 다른 데 가서 찾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자, 그 관인은 말하기를, “꼭 윤 진사님을 뵙고자 합니다.” 하였다. 장원은 바로 갓과 옷을 가져오라 명하고 손님을 들어오시도록 하니, 그 관인은 자리를 옮겨 꿇어 앉아 말하기를, “제가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 어른을 번거롭게 하니, 말이 나오지 아니하여 감히 여쭙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명하신 어른께서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장원이 말하기를, “공의 모습을 뵈옵건대 현달한 관원 같으신데, 무슨 일이 있으시기에 이렇게 오시어 이름도 없는 저를 찾으셨습니까.” 하였다. 그 관인은 용모를 단정히 하고 말하기를, “장옥견(張玉見) 선생이 남양부백(南陽府伯)이 되었는데, 거문고 잘 타는 사람이 차례가 되어 서울에 왔었는데, 제가 우연히 그와 만나는 기회를 얻게 되어 그것을 계기로 정이 함빡 들어 떨어지려 하여도 차마 떨어질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장공에게 관대하게 용납하기를 청해 보았지만 허락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이름난 어른들의 글을 가져다가 청을 넣어 보았지만 그래도 허락하지 못하겠다 하시더니, 말씀하시기를, ‘만일 윤 진사의 시를 얻게 된다면, 내가 1년 동안 빌려 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감히 두려움을 무릅쓰고 와서 청하는게 올시다.” 하고, 이어서 술과 돈과 홍화전(紅花牋 글 쓰는 종이)한 폭을 꺼내서 무릎을 꺼내서 무릎을 꿇고 바치면서, “원하옵건대 명공(明公)께서 한 번 글 지으시는 노고를 아끼지 마시고 베푸시어 이 목마르고 주린 사람의 소망을 풀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장원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왜 다른 시를 구해다가 내가 지은 양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합니까.” 하니, 그는 또 말하기를, “고명한 선생의 시명(詩名)이 당대에 제일인 까닭으로 장공께서 꼭 얻고자 하옵니다. 다른 분의 시야 어디 이를 나위가 있습니까.” 하였다. 장원이 마침내 율시(律詩) 한 수를 내리쓰니,</br>보압좋은 향로(옛날의 향로는 오리 모양이었다)에 향불 잦아지고 / 寶鴨香銷罷</br>난당(아름다운 방 또는 여자가 쓰는 그윽한 방)에는 연기 흩어지네 / 蘭堂烟散初</br>등잔불 식어가니 작은 병풍은 어슴푸레하고 / 燈寒小屛暗</br>달 떠오르니 반쯤 드린 발에 빛 새어 들어 오누나 / 月上半簾疎</br>혀를 내밀면 모두 시샘을 이루고 / 吐舌皆成妬</br>맹약을 삼으면 또 헛될까 두렵구나 / 申盟更怕虛</br>낭군(郞君)의 정이 나와 같을 양이면 / 郞君情似妾</br>어찌 백년 된 옥이라도 아낄 것인가 / 何惜百年磲</br>하였다. 다 써서 주니, 그 관인이 고맙다 인사하고 돌아갔다. 얼마 후에 그 관인이 와서 사례하여 말하기를, “장 사또께서 선생의 시를 얻고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거문고 타는 아가씨를 돌려보내라고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관인은 옥천군수(沃川郡守) 왕손명(王孫名)이었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관인은 옥천군수(沃川郡守) 왕손명(王孫名)이었다.)
- E378 + (윤결(尹結) 공이 젊었을 때 지은 명구 하나가 있다. 벼슬아치 백년에 좋은 솜씨가 없고 / 簪笏百年無好手 강호 천리에 기재(奇才)가 있구나 / 江湖千里有奇才 라고 했다. 내 선군(先君)께서 서화담(徐花潭) 선생에게 이 시를 읊어 주시자, 선생께서 말하기를, “이 시는 재주가 있는 듯하지만, 뜻이 원대하지 못하다.” 하였다.)
- E557 + (윤결이 오언절구 한 수를 얻었다. "" 차식에게 말했다. "이 시가 어떠한가?" 차식이 낭랑하게 재삼 읊조리고 말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필경 귀신의 시이다." 윤결이 말했다. "내가 과연 어젯밤 꿈속에서 얻었으니, 필시 신의 도움이 있었다.")
- E079 + (윤무송(尹茂松)은 곧 신고령(申高靈)의 처형이니 한때 재상을 제수받은 일이 있다. 동년(同年) 모임에서 신고령이 한 구를 지었는데, 청안의 옛 친구들이 모두 백발이로다 / 靑眼故人俱白髮 하니, 윤무송이 급히 대구하기를, 검은 머리의 현상이 다만 단심이로다 / 黑頭賢相只丹心 하였다. 신고령이 탄복하여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나는 형만큼 정밀하지 못하다.” 하였다. 신고령이 고부(古阜) 기생 지단심(只丹心)을 사랑한 까닭에 이렇에 말한 것이다.)
- E738 + (윤보 이서우와 문약 이옥은 모두 문사에 공교하여 각각의 장점이 있었다. 이옥 … 윤보 이서우와 문약 이옥은 모두 문사에 공교하여 각각의 장점이 있었다. 이옥이 젊었을 적에 동주 이민구의 문하에서 배웠다. 이민구가 일찍이 칭찬하였다. "이 사람은 재주가 범상치 않지만 너무 젊을 적에 등과하여 문장에 힘을 다할 수 없으니 애석하다." 만년에 시를 좋아하였으나 왕왕 고어를 쓰지 않아 교룡과 지렁이 같은 것들이 섞여 있어서 시가 문만 못하였다. 박사 홍도 역시 이민구의 문인이었다. 총명함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서 한 번 보면 곧 기억하고 자의와 음운에 밝게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문장을 지을 때에는 즉시 붓을 잡고 곧 완성하여 조금도 막히는 바가 없었으나 시에 있어서는 한 구도 제대로 짓지 못했다. 이민구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문에 장점이 있으나 시에 단점이 있는 것을 보니, 옛사람이 말한 바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다는 말이 믿을 만하다." 보니, 옛사람이 말한 바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다는 말이 믿을 만하다.")
- E337 + (윤장원(尹長源)은 아이 때에 그 아버지가 관등(觀燈)하는 날 저녁에 관장하다가 인하여 연구(聯句)를 지어보라고 하였더니, 장성과 화성이 번쩍번쩍이고 / 長星火星爛爛然 한 층 두 층 서네 층이러라 / 一層二層三四層 하므로, 그가 시재가 있는 것을 알고 학업을 독려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였었다.)
- E543 + (율곡 이이가 대사간으로 있다가 시골로 물러났다. 시에, ""라 하였다. 말의 어조에 화평한 뜻이 있다. 송강 정철이 직제학으로 있다가 남쪽으로 돌아갈 때 이이에게 시를 주었다. "" 대개 그 당시에 이이와 논의하는 바가 같지 않았으나 이처럼 말하였으니 바로 이것으로써 두 사람의 기상을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았다.)
- E242 + (융경 무진년(1568)에 행인 구희직이 사제시래사으로 와서 오조천에 이르러 '회란석'시를 지었다. 원접사 판서 박순이 차운하여 말했다."" 대개 구희직이 초나라 사람이므로 '瀨'자와 '潭' 자를 사용한 것이다. 반산 왕안석의 시에 ""라고 하였으니, 박순의 시도 이에 근본한 것이다. 구희직이 보고 말했다. "시가 극히 맑고 절묘하다. '湘潭水已生' 구절이 실로 내 마음을 감동시킨다")
- E483 + (융경 연간(1568-1572)에, 어떤 사람이 제천정에 시를 썼다. "" 호사가들이 실로 신선의 시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후에 임진년(1592)에 왜적이 선릉과 정릉 두 왕릉을 파헤쳤는데, 사람들이 "청산의 한 줌 흙"이라는 말이 징험하였다고 여겼다.)
- E675 + (을미년(1595, 선조28)과 병신년(1596, 선조29) 사이에 명나라의 … 을미년(1595, 선조28)과 병신년(1596, 선조29) 사이에 명나라의 장군 제독(提督) 유정(劉綎)이 병사를 이끌고 호남과 영남 사이를 왕래하였는데, 막하에 한 서생을 데리고 다녔다. 가끔씩 시를 지었고, 사람들은 간혹 그의 가구(佳句)를 전하여 읊었으나, 그 얼굴은 본적도 없고 이름도 알지 못하였다. 그때 우리나라와 왜적은 서로 대치하여 승패를 결정하지 못했는데, 그 서생이 방휼(蚌鷸)의 비유를 써서 장률을 지어 이르기를,</br></br>늙은 조개 추위 피해 햇볕을 쬐는데 / 老蚌當陽爲怕寒</br>들새는 무슨 일로 애써 구하였는가 / 野禽何事苦相干</br>몸은 굴혈 떠나 진주 태는 손상되고 / 身離窟穴珠胎損</br>여울에서 힘 다해 푸른 깃은 쇠잔타 / 力盡沙灘翠羽殘</br>입 닫을 때에 열 때의 화를 어찌 알며 / 閉口豈知開口禍</br>머리 넣을 때에 빼기 어려움 누가 알았으랴 / 入頭誰料出頭難</br>어부 손에 함께 떨어질 줄 일찍 알았던들 / 早知俱落漁人手</br>구름과 물속 맘껏 날고 잠겨있을 텐데 / 雲水飛潛各自安</br></br>하였다. 서생은 대개 당시의 어지러운 사세(事勢)를 보고 어부지리(漁父之利)의 설을 그릇되게 거론한 것이다. 마침내 국가가 다시 회복되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상국(上國 명나라)이 한결같이 우리나라를 구휼하고 선조(宣祖)께서 발리(跋履 여러 곳을 다니며 애씀)하시며 난을 극복한 노력이 아님이 없으니, 서생이 어찌 말을 할 줄 아는 자이겠는가.을 극복한 노력이 아님이 없으니, 서생이 어찌 말을 할 줄 아는 자이겠는가.)
- E388 + (을유년에 사암(思菴) 박순(朴淳)은 영의정이 되고, 소재(蘇齋) 노수신(盧守 … 을유년에 사암(思菴) 박순(朴淳)은 영의정이 되고,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은 좌의정과 우의정이 되고,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은 좌찬성과 좌참찬이 되었는데, 다섯 공은 모두 장원 급제를 한 분들이었다. 그때에 다섯 분이 장원 계(契) 축(軸)을 만들었는데, 이름을 ‘정부용두회축(政府龍頭會軸)’이라 했다. 심 상국(沈上國)이 시 짓기를,</br>깊고 넓은 상부(相府)의 용두회는 / 潭潭相府會龍頭</br>성하여 오늘날 비할 만한 짝이 없구나 / 盛事如今罕比侔</br>-제 3구는 기억하지 못한다. -</br>도리어 보통 물건이 명류에 섞인 것을 부끄러워하노라 / 却慙庸品厠名流</br>하였다. 정송강은 이에 화답하여,</br>다섯 학사가 다섯 장원이 되고 보니 / 五學士爲五狀頭</br>성명(聲名)이 내게 이르러 서로 짝이 못 되노라 / 聲名到我不相侔</br>다만 좋은 일에 분별이 없어서 / 祗應好事無分別</br>모두 당시에 제일류라 하는구나 / 等謂當時第一流</br>하였다. / 祗應好事無分別 모두 당시에 제일류라 하는구나 / 等謂當時第一流 하였다.)
- E396 + (의주(義州) 통군정(統軍亭)은 세 나라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경치가 장관이니 … 의주(義州) 통군정(統軍亭)은 세 나라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경치가 장관이니 온 세상에서 다 찾아보아도 그 짝을 구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시인들이 이곳을 주제로 읊은 시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형세와 기상을 제대로 표현한 경우는 있지 않았다. 그런데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연소한 나이에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절구 한 수를 짓기를,</br>내가 강을 건너가서는 / 我欲過江去</br>곧바로 송골산에 오르고 싶네 / 直登松鶻山</br>서쪽에서 화표주(華表柱)의 학 불러 내다가 / 西招華表鶴</br>구름 속에서 서로 한 번 놀아보려네 / 相與戲雲間</br>이라 하였는데, 이 시가 대작(大作)은 아니라 하더라도 스스로 기발하여 뒤에 전할 만하다 하겠다. 그 뒤에 시인 묵객들이 와서 읊은 것 가운데 이런 정도의 수준을 보여주는 시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와서 읊은 것 가운데 이런 정도의 수준을 보여주는 시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 C052 + (이 구절들은 모두 좋은 것이다. 다만 전편을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 E595 + (이 대간이 승정원(承政院)에서 숙직하며 지은 시에 공작 병풍 깊은 곳에 촛불 … 이 대간이 승정원(承政院)에서 숙직하며 지은 시에</br>공작 병풍 깊은 곳에 촛불 그림자 희미한데 / 孔雀屛深燭影微</br>원앙새는 쌍쌍 자니 어찌 각각 날아가리 / 鴛鴦雙宿豈分飛</br>애닯구나 초췌한 청루 속의 여인이여 / 自憐憔悴靑樓女</br>길이 남을 위하여 시집갈 옷 짓다니 / 長爲他人作嫁衣</br>라 했으니, 대개 대간이 오래도록 하관(下官)으로 있어 상기 등용되지 못했는데 동료들은 모두 재상 길에 올랐으므로 재상의 사령장(辭令狀)을 초(草) 하면서 느낀 바가 있어 이 시를 지은 것이었다. 사령장(辭令狀)을 초(草) 하면서 느낀 바가 있어 이 시를 지은 것이었다.)
- E596 + (이 문순(李文順 이규보(李奎報)의 시호)의 시는 부려하고 방일하다. 그 칠석 … 이 문순(李文順 이규보(李奎報)의 시호)의 시는 부려하고 방일하다. 그 칠석우(七夕雨)란 시는 참으로 절창이다. 그 시에</br>얇은 적삼 삽자리로 바람 난간에 누웠다가 / 輕衫小簞臥風欞</br>꾀꼬리 울음 소리 두세 번에 꿈을 깼네 / 夢覺啼鸎三兩聲</br>짙은 잎에 가린 꽃은 봄 뒤까지 남아 있고 / 密葉翳花春後在</br>엷은 구름 헤친 햇살 빗속에 밝도다 / 薄雲漏日雨中明</br>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읽기만 해도 시원해진다. 또,</br>관인이 한가로이 젓대를 골라 부니 / 官人閑捻笛橫吹</br>부들자리 바람 타고 날아갈 듯하구나 / 蒲席凌風去似飛</br>천상에 걸린 달은 천하가 함께 누릴 텐데 / 天上月輪天下共</br>내 배에 혼자 싣고 돌아오나 여기네 / 自疑私載一船歸</br>라고 한 시 또한 지극히 고일(高逸)하다.돌아오나 여기네 / 自疑私載一船歸 라고 한 시 또한 지극히 고일(高逸)하다.)
- E603 + (이 문정(李文靖 문정은 이색(李穡)의 시호)의 ‘어제 영명사에 들르다[昨過永 … 이 문정(李文靖 문정은 이색(李穡)의 시호)의 ‘어제 영명사에 들르다[昨過永明寺]’라는 작품은 별로 수식하거나 탐색한 흔적 없이 저절로 음률에 맞아서 읊으면 신일(神逸)하다. 허영양(許穎陽)은 이를 보고 ‘당신네 나라에도 이와 같은 작품이 있소.’라고 했다. 그의 부벽루(浮碧樓) 시는 대편(大篇)인데 거기에</br>문 머리엔 고려 시가 상기도 걸렸으니 / 門端尙懸高麗詩</br>당시에도 하마 중화 문자 깨쳤다네 / 當時已解中華字</br>라고 했으니, 비록 우리나라 사람을 깔보기는 했으나 또한 문정공의 시에는 감복하고 있었던 것이다.리나라 사람을 깔보기는 했으나 또한 문정공의 시에는 감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 C039 + (이 시가 가장 전려한 것으로 뽑혔다.)
- C043 + (이 시가 오래도록 읊어졌다고 해서 어찌 더 남은 맛이 없겠는가.)
- C040 + (이 시는 왕기공의 시와 나란히 앞을 다툴 만하다.)
- C044 + (이 시는 정습명의 시에 비해 그다지 못할 것이 없다.)
- C056 + (이 시는 정치가 유렿다.)
- C042 + (이 시들은 말은 같지 않으나, 거기에 쓰인 뜻은 서로 같다.)
- C045 + (이 시들은 사람들이 즐겨 일컫는 것이다.)
- C049 + (이 시를 보면 양비경이 늙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C036 + (이 시를 통해 당시의 일이 어찌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늙은이의 마음은 크고 구애됨이 없어 범상하지 않다.)
- C035 + (이 시인은 이 같은 시를 즐겨 썼다.)
- E254 + (이 정승(李政丞) 용재(容齋 행(荇)의 호) 선생의 ‘제갈 무후를 읊다[詠諸 … 이 정승(李政丞) 용재(容齋 행(荇)의 호) 선생의 ‘제갈 무후를 읊다[詠諸葛武侯]’라는 시에,</br>사생을 나라에 허하여 힘을 다했는데 / 死生許國無遺力</br>성패로 사람을 논하는 것은 어린애지 / 成敗論人是小兒</br>하였다. 의논이 공정하고 글도 또한 새롭다. 중국 사신[天使] 당고(唐皐)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br>아득한 삼산은 솥을 엎은 것으로 보이고 / 縹緲三山看覆鼎</br>굽이친 한 띠의 물은 투금강에 닿았어라 / 逶迤一帶接投金</br>하였다. 복정은 삼각산(三角山)의 별명이요, 양화(楊花) 나루를 투금강이라 하기도 한다. 대구가 아주 잘 들어맞는다. 이 일련(一聯)은 소퇴휴(蘇退休) 상공(相公)이 지은 것이다. 소퇴휴가 말하였다. 《황화집(皇華集)》을 얻어 본 것이 기억나는데, 대(帶) 자는 수(水) 자였다. 대(帶) 자는 아마 전하는 사람들이 잘못 전한 것일 게다. 용재(容齋)의 이름은 이행(李荇)이요, 퇴휴의 이름은 소세양(蘇世讓)이다. 용재(容齋)의 이름은 이행(李荇)이요, 퇴휴의 이름은 소세양(蘇世讓)이다.)
- E599 + (이견간(李堅幹)의 시에 여관에는 호롱불 하나 남은 심지 돋우노니 / 旅館挑殘 … 이견간(李堅幹)의 시에</br>여관에는 호롱불 하나 남은 심지 돋우노니 / 旅館挑殘一盞燈</br>사신(使臣)의 풍미가 중보다 담박하네 / 使華風味淡於僧</br>창 너머 두견 소리 밤새도록 듣노니 / 隔窓杜宇終宵聽</br>산꽃의 몇째 층에 울음소리 나는고 / 啼在山花第幾層</br>라 했는데, 이 시를 두고 당시에는 절창이라고 일렀다. 나는 관동(關東) 지방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그 이른바 두견이란 곧 소쩍새의 무리였다. 절강(浙江) 사람 왕자작(王子爵), 사천(泗川) 사람 상방기(商邦奇)가 함께 강릉(江陵)에 왔으므로 그들에게 내가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이는 두견이 아니라고 하였다. 대개 시인들은 흥을 붙여 말하는지라, 비록 그 물건이 아니더라도 시 가운데 그 말을 쓴 것이다. 이를테면</br>수풀 너머 흰 잔나비 울음 부질없이 듣노라 / 隔林空聽白猿啼</br>와 같은 경우, 우리나라에는 본시 잔나비가 없고,</br>집집마다 긴 대 숲에 비취새 울음 우네 / 脩竹家家翡翠啼</br>와 같은 경우는, 파랑새를 보고 염주취(炎洲翠)라 한 것이고,</br>자고새는 놀라서 해당화를 흔드네 / 鷓鴣驚簸海棠花</br>와 같은 경우는, 때까치가 깍깍 우는 것을 보고 행부득(行不得)이라 한 것이니, 모두 이와 같은 유이다.깍 우는 것을 보고 행부득(行不得)이라 한 것이니, 모두 이와 같은 유이다.)
- E571 + (이곡이 서장관으로 중국에 사신갈 때에 길가 청루 위에 네 명의 미인이 주렴 … 이곡이 서장관으로 중국에 사신갈 때에 길가 청루 위에 네 명의 미인이 주렴 안에서 은근하게 비쳐 보였다. 이곡을 향해 물을 뿌리자, 이곡이 즉시 주머니에서 흰 부채를 꺼내어 절구 하나를 써서 주었다. "" 이곡이 돌아올 때에 미인들이 향기로운 술과 좋은 안주를 준비하여 길에서 맞이하며 사례하였다. 근년에 서장관 조곡이 연경에 갈 때에 도중에 미인을 만났는데 얇은 비단으로 얼굴을 가리고 갔다. 조곡이 흰 부채에 절구 하나를 써서 주었다. "" 조곡은 탕아로, 그 집에 쫓아갔다. 그 미색은 절대적이고, 붉은 비단으로 바지를 만들어 입고는 조곡을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또 우리나라의 한 문사가 중원에 갈 때에 길에서 미인이 나귀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 선비가 문에 기대어 바라보며 두 구의 시를 붙여 미인에게 연구를 청했다. "" 미인이 나귀를 멈추고 이를 이어 주고는 떠났다. 그 두 구는 이러하였다. ""인이 나귀를 멈추고 이를 이어 주고는 떠났다. 그 두 구는 이러하였다. "")
- M029 + (이곳과 중화 사이 큰 바다 막혔는데 / 此去中華隔大瀛 두 공은 거울처럼 맑은 … 이곳과 중화 사이 큰 바다 막혔는데 / 此去中華隔大瀛</br>두 공은 거울처럼 맑은 마음 통했네 / 兩公相照鏡心淸</br>공공상인이 벌집만한 집을 막 지으니 / 空師方結蜂窠室</br>조파 선로(禪老)가 토각이란 이름 멀리서 전했네 / 播老遙傳兎角名</br>지팡이는 예스러워 반죽의 흔적 남았고 / 杖古尙餘斑竹暈</br>바리때는 신령스러워 벽련의 줄기가 빼어났네 / 鉢靈應秀碧蓮莖</br>하루에 이처럼 친절하게 사귀어서 / 誰敎一日親交錫</br>금모(金毛)가 땅을 진동하는 소리를 함께 짓게 하였는가 / 共作金毛震地聲錫 금모(金毛)가 땅을 진동하는 소리를 함께 짓게 하였는가 / 共作金毛震地聲)
- E425 + (이공 수광(李公睟光)의 자는 윤경(潤卿)이요 호는 지봉(芝峯)인데 단아한 풍 … 이공 수광(李公睟光)의 자는 윤경(潤卿)이요 호는 지봉(芝峯)인데 단아한 풍도가 진세(塵世)를 벗어나 세상의 변고를 차례로 다 맛보았으면서도 조금이라도 좌절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와 함께 기미를 보고 일어나 함정에 떨어지는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금옥군자(金玉君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밖으로 나가 순천부(順川府)를 맡고 있을 때 시권(詩卷)을 부쳐 보냈는데 그 가운데 칠언 근체시 2수가 들어 있었다. 그 시를 보건대,</br></br>늘그막에 남쪽 시골 수령으로 내려와서 / 暮年身世宰炎鄕</br>다스릴 능력 없어 탄식만 하고 앉아 있네 / 治郡無能坐嘯長</br>한가한 집 뜨락엔 봄 제비도 오지 않고 / 春燕不來閑院落</br>조그마한 연못가엔 맑은 물결 찰랑이네 / 晴波欲滿小池塘</br>붉은 매화 그림자 아래 문서 처리할 일도 없고 / 紅梅影下文書靜</br>귤나무 그늘 가에 자리가 향기롭네 / 綠橘陰邊几席香</br>퇴근하고 문 닫히자 인적도 끊어지고 / 衙罷閉門人跡少</br>창 너머 새 소리에 또 기우는 저녁 햇살 / 隔窓啼鳥又斜陽</br></br>이라 하였고, 또</br></br>난간 밖 연못의 빛 푸른 이끼 물들이고 / 檻外池光梁綠苔</br>주렴(珠簾)에 비낀 가랑비 노란 매실 익히누나 / 一簾微雨欲黃梅</br>출근해도 문 닫힌 채 적막하기 그지없고 / 衙居寂寞門長掩</br>퇴근해도 어제처럼 인 꺼낼 일 하나 없네 / 公退尋常印不開</br>밀감 향내 맡으면서 산 사슴 잠이 들고 / 盧橘香邊山鹿睡</br>석류 꽃 그늘 아래 새들 모여 앉아 있네 / 石榴花下怪禽來</br>창문 밖엔 하루 종일 찾아오는 인적 없어 / 軒窓盡日淸如水</br>오늘도 시상(詩想)에 젖다 낮잠에 빠져드네 / 輸與騷翁晝夢回</br></br>라고 하였는데, 격운(格韻)이 청려(淸麗)하여 스스로 미칠 수가 없다.回 라고 하였는데, 격운(格韻)이 청려(淸麗)하여 스스로 미칠 수가 없다.)
- E084 + (이광성(李廣城)은 문장(文章)과 다스림의 재주가 모두 넉넉해서 항상 스스로 … 이광성(李廣城)은 문장(文章)과 다스림의 재주가 모두 넉넉해서 항상 스스로 국사(國士)라 하고, 인물을 평할 때는 좋게 말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특별히 백씨(伯氏)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이광성이 도승지이고 백씨가 우승지였는데, 이광성이 어느 기생을 사랑하여 자취를 감추자 백씨가 간 곳을 알아내고 시를 지어 말하기를,</br>관아가 파하여 돌아옴에 날이 저물려 하는데 / 衙罷歸來日欲低</br>명화와 국사가 둘이 서로 만났구나 / 名花國士兩相擕</br>뉘 집 골목 속에 수레를 숨겼는가 / 誰家巷裏藏車駕</br>사온서의 동쪽이요, 예부의 서쪽일세 / 司醞東邊禮部西</br>하고는, 몰래 시를 그 벽에 붙여두었는데, 이광성이 보고 찢어서 소매 속에 넣어버렸다. 이로부터 더욱 뜻이 서로 맞았다. 이광성이 체질될 적에 세조(世祖)가, “군(君)에 대신할 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이광성이 아뢰기를, “성(成) 아무개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여, 백씨가 도승지에 등급을 뛰어넘어 제배(除拜)되었다.람이 없습니다.” 하여, 백씨가 도승지에 등급을 뛰어넘어 제배(除拜)되었다.)
- E431 + (이규보의 '정자 안의 달을 읊다' 시는 아래와 같다. "" 간이 최립이 이 시에 차운하였다. "" 두 시에 하늘과 땅보다 더한 차이가 있다.)
- C018 + (이는 초사(楚辭)의「저녁에는 떨어진 가을의 국화 꽃을 먹는다[夕餐秋菊之落英]」라는 말을 알지 못함이니, 구양수의 배우지 못한 과실이다.)
- E547 + (이달은 홍주 사람으로, 부정 이수함이 데리고 살던 고을 기생의 소생이다. 그 시가 회자되는데, '전가'시에, ""라 하였고, '한식'시에 ""라 하였으니 당에 가까워 즐길 만하다.)
- E529 + (이달의 격암 남사고에 대한 만시에 ""라 하였다. 격암은 남사고의 호이다. 남사고는 일찍이 이인을 따라 진결을 받아서 마침내 비술에 통달하였다 한다. "약목진"이라 한 것은 아마 "절목진(折木津)"을 잘못 쓴 말로 보인다.)
- E493 + (이달의 시에, ""라 하였고, 최경창의 시에, ""라 하였다. 이 두 시는 모두 아름다우나, 최경창의 시 말구는 방운(旁韻)을 사용하였으니 운자를 쓴 것이 아쉽다.)
- E609 + (이도은(李陶隱 도은은 이숭인(李崇仁)의 호)의 오호도시(嗚呼島詩)를 목은(牧 … 이도은(李陶隱 도은은 이숭인(李崇仁)의 호)의 오호도시(嗚呼島詩)를 목은(牧隱)은 추장하여 성당(盛唐)에 비길 만하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삼봉(三峯)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되고 기구한 화마저 당하게 되었다. 지난날 주 태사(朱太史)가 이 작품을 보고 또한 매우 감탄하였다. 그</br>산북과 산남으로 세로는 갈라지고 / 山北山南細路分</br>송화는 비 머금어 어지러이 떨어지네 / 松花含雨落紛紛</br>도인이 물을 길어 초가로 돌아오니 / 道人汲井歸茅舍</br>한 가닥 푸른 연기 흰 구름을 물들이네 / 一帶靑煙染白雲</br>라고 한 시는 유수주(劉隨州 당 나라 유장경(劉長卿))에게 무엇이 모자란다 하겠는가?시는 유수주(劉隨州 당 나라 유장경(劉長卿))에게 무엇이 모자란다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