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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st of all pages that have property "TextKor" with value "뜻이 본래 천지 밖에 있으니, 천지도 포용하지 못하리로다. 장차 원기(元氣)의 모체(母體)와 함께 무한한 공터의 세계에 노니리로다.". Since there have been only a few results, also nearby values are displa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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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427  + (아조(我朝)에 들어오면서 시인들이 각 시대마다 나와 그 숫자가 수백 명이 될아조(我朝)에 들어오면서 시인들이 각 시대마다 나와 그 숫자가 수백 명이 될 뿐만이 아닌데 근대(近代)의 시인들을 말한다면 세 가지 부류로 나뉘어진다. 화평(和平)하고 담아(淡雅)하여 일가(一家)를 이룬 자로는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낙봉(駱峯) 신광한(申光漢)이 있는데 신은 비교적 맑고 이는 비교적 원만한 편이다. 대가(大家)를 든다면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응당 으뜸을 차지하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이 그 뒤를 따른다. 그리고 눌재(訥齋) 박상(朴祥),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간이(簡易) 최립(崔岦) 같은 이들은 험괴(險瓌)하고 기건(奇健)함을 장기(長技)로 삼는다. 시 세계에 대해 바른 깨달음을 얻은 자는 여전히 많지 않은데, 사암(思庵) 박공순(朴公淳)이 근래 조금 당대(唐代)의 시파(詩派)를 섭렵하여 매우 청소(淸邵)한 시를 지었다 조금 당대(唐代)의 시파(詩派)를 섭렵하여 매우 청소(淸邵)한 시를 지었다)
  • E357  + (옛적 내가 경차관의 명을 받들고 영남에 사신으로 갔을 때 승려의 시축에 쓰기옛적 내가 경차관의 명을 받들고 영남에 사신으로 갔을 때 승려의 시축에 쓰기를,</br>고향 생각은 흰구름 끝에 아득한데 / 鄕心迢遞白雲端</br>남쪽 지방 가을 바람 불고 길은 험하구나 / 南國秋風道路難</br>말 위에서 승려 만나 한바탕 웃고는 / 馬上逢僧還一笑</br>산에 가득한 푸른 빛을 보라고 하네 / 滿山蒼翠要人看</br>하였는데,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몹시 칭찬하였다. 또 산인(山人)에게 주는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br>삼각산 못 본 지 이미 삼년이 되었는데 / 三峰不見已三年</br>산승을 만나니 그저 서글프기만 하네 / 逢着山僧一悵然</br>외로운 학 홀로 가는 구름에 무한한 마음 / 獨鶴孤雲無限意</br>언제쯤 연지(硯池)에서 물결을 희롱할까 / 硯池何日弄潺湲</br>하였다.孤雲無限意 언제쯤 연지(硯池)에서 물결을 희롱할까 / 硯池何日弄潺湲 하였다.)
  • E153  + (우리 고장의 태보 최천순 선생이 기묘년(1459) 봄에 진사 이숙황, 허순,우리 고장의 태보 최천순 선생이 기묘년(1459) 봄에 진사 이숙황, 허순, 이종주 등과 함께 향시를 보러 갔다. 말 위에서 갑자기 꿈을 꾸었는데, 수양버들가지가 늘어져 말머리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깨고서 기이하게 여겨 동행에게 말했는데 허순이 말했다. "버들가지의 모양이 바로 푸른 일산과 같으니 그대의 꿈은 매우 기이하다. 내가 그 꿈을 사겠다." 선생이 말했다. "길조는 이미 정해졌으니 어찌 살 수 있겠는가." 과연 향시에 합격하였다. 이어서 점필재 계온 김종직과 함께 서울로 회시를 보러 가게 되었는데, 선생이 말했다. "자네는 재주가 좋으니 반드시 장원을 하겠지만 나는 준마를 따라갈 희망이 없다." 김종직이 말했다. "옛날에 손근과 그의 아우 손하가 함께 시험을 보러 갔는데 형이 일등을 하고 아우가 이등을 한 적이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어찌 손근과 손하처럼 되지 않으리라 보장하겠습니까?" 하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길에 걸어가던 중이 있었는데 지팡이로 둥근 삿갓을 받치고서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다. 그 모양이 마치 일산과 같아서 김종직이 "이 또한 좋은 징조이다."라 하였다. 서로 담소하며 길을 갔는데, 이해에 마침내 두 사람 모두 합격하였다.였다. 서로 담소하며 길을 갔는데, 이해에 마침내 두 사람 모두 합격하였다.)
  • E726  + (우리 동방의 문인들은 매번 중국 사신들과 창화할 때에 모두 율시를 사용하였다우리 동방의 문인들은 매번 중국 사신들과 창화할 때에 모두 율시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호음 정사룡과 같은 대가도 고시 장편에 있어서는 능하지 못하였다. 오직 석주 권필만이 고시체를 깊이 알았다. 그의 충주석, 호수재를 보내며와 같은 시편들이 절묘하게 좋아서 동방의 사람들 중 단지 배비(排比)만을 일삼는 자들과는 매우 다르다. 근세에 동명 군평 정두경이 한 시대에 걸출하여 부미한 습속을 모두 쓸어버렸다. 그가 지은 가행은 웅건하고 준일하여 가히 성당의 여러 시인들과 견줄 만하다. 그 협객편에, ""라 하였으니, 이와 같은 작품은 당시 가운데서 구하여도 또한 드물 것이다. 평하는 사람들이 말한다. "우리 나라의 문장에 전대를 초월하여 중국 사람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소암 임숙영의 변려문과 정두경의 가행이다."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소암 임숙영의 변려문과 정두경의 가행이다.")
  • E210  + (이용재(李容齋)가 주운(朱雲)을 읊은 시(詩)에, 허리 사이에 칼이 있으니 이용재(李容齋)가 주운(朱雲)을 읊은 시(詩)에,</br>허리 사이에 칼이 있으니 어찌 청할 필요가 있으랴 / 腰間有釰何須請</br>지하에 사람이 없더라도 또한 족히 놀 만하리라 / 地下無人亦足遊</br>애석하다. 한 나라 조정의 괴리령은 / 可惜漢庭槐里令</br>평생에 오직 아첨하는 신하의 머리만 알았도다 / 一生唯識佞臣頭</br>하였는데, 고금(古今)에 주운을 읊은 자가 이런 생각이 없었으니, 비록 당(唐)ㆍ송(宋)의 문집 속에 넣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정덕 신사년에 용재(容齋)가 멀리 당태사(唐太史) 고(皐)를 의주(義州)에서 영접하는데, 태사가 법도가 있어서 말도 경솔히 하지 않았다. 정주(定州)에 이르러 용재가 같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속필(速筆)로, 태사가 지은 음락(飮酪)에 대한 절구(絶句) 네 수(首)에 차운(次韻)하니, 태사가 이를 보고 “참으로 노련한 솜씨다.”라 하였다.에 차운(次韻)하니, 태사가 이를 보고 “참으로 노련한 솜씨다.”라 하였다.)
  • E440  + (이존오가 십여 세 때에 '강물이 불어남'시에서, ""라 하였다. 그의 지절을 상상할 만하다. 만약 공이 혁명의 때에 당하였다면, 그 절개를 세움이 어찌 포은 정몽주의 아래였겠는가. 상고하건대 고산은 여주에 있으니 이존오가 살았던 곳이다.)
  • E550  + (이주는 문인이다. 서장관으로 중원에 가서 통주 문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이주는 문인이다. 서장관으로 중원에 가서 통주 문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 중국 사람들이 현판에 걸어놓고 칭송하여 말하기를 "獨鳥膜歸遼" 선생이라 했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을 낮게 보아서, 비록 최치원이 중국에서 벼슬했지만 그 시문으로는 일찍이 여러 문사들의 반열에서 개략적으로 보이지 못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당음 중에 무명씨가 고운 최치원이라 하는데, 진위를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예문지에만 조금 기록되어 보일 뿐이다. 동방 사람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긴다."라 하였다. 근자에 학관 어숙권이 일찍이 패관잡기를 저술했는데, 천중기에 초록되었으니 또한 미증유의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치원의 황소격을 자주 칭송하지만 사륙문의 책에 선택되지 못하여 중국 역시 편협함을 면하지 못한다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황소격은 비록 놀라게 하는 구절이 있지만, 언어를 세우고 뜻을 명령함에 있어 많이 전도되는 잘못이 있으니 동국 사람들은 참으로 문을 알지 못한다 하겠다. 다만 산승과 규수의 글이 역시 중국과 같이 하여 선록된 것이 보이는데 우리나라 사람의 문집에 어찌 한두 개 채택할 만한 것이 없겠는가.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이주의 시가 통주에 현판으로 걸린 것은 또한 다행이라 할 만하다. 나의 시 또한 만류장에서 현판에 걸렸으니 이에 느낀 바가 있었다. 만하다. 나의 시 또한 만류장에서 현판에 걸렸으니 이에 느낀 바가 있었다.)
  • E069  + (전목(全穆)이 충주 기생 금란(金蘭)을 사랑하였는데, 그가 서울로 떠나려 할전목(全穆)이 충주 기생 금란(金蘭)을 사랑하였는데, 그가 서울로 떠나려 할 때 금란을 불러 타이르기를, “경솔히 남에게 몸을 허락하지 말라.” 하니, 금란의 말이, “월악산(月嶽山)은 무너질지라도 내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 하였으나, 뒤에 단월역(斷月驛)의 승(丞)을 사랑하게 되었다. 전목이 이 소문을 듣고 시를 지어 보내기를,</br>듣자니 네가 문득 단월역 승을 사랑하여 / 聞汝便憐斷月丞</br>깊은 밤 항상 역을 향해 달려간다 하니 / 夜深常向驛奔騰</br>언제나 삼릉장(세모진 형장)을 잡고 / 何時手執三稜杖</br>돌아가 월악산 무너져도 마음은 변치 않는다던 맹세를 물어볼고 / 歸問心期月嶽崩</br>하니, 금란이 대답하여 말하기를,</br>북쪽에 전군이 있고 남쪽에는 승이 있으니 / 北有全君南有丞</br>첩의 마음 정할 수 없어 뜬구름 같도다 / 妾心無定似雲騰</br>만약 맹세한 바와 같이 산이 변할진대 / 若將盟誓山如變</br>월악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무너졌는고 / 月嶽于今幾度崩</br>하였다. 이것은 모두 사문(斯文) 양여공(梁汝恭)이 지은 것이었다.今幾度崩 하였다. 이것은 모두 사문(斯文) 양여공(梁汝恭)이 지은 것이었다.)
  • E661  + (정송강(鄭松江 송강은 정철(鄭澈)의 호)은 우리말 노래를 잘 지었으니, 사미정송강(鄭松江 송강은 정철(鄭澈)의 호)은 우리말 노래를 잘 지었으니, 사미인곡(思美人曲) 및 권주사(勸酒辭)는 모두 그 곡조가 맑고 씩씩하여 들을 만하다. 비록 이론(異論)하는 자들은 이를 배척하여 음사(陰邪)하다고는 하지만 문채와 풍류는 또한 엄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연달아 있어 왔다. 여장이 그의 묘를 지나며 시를 지었는데</br>빈산에 나뭇잎 우수수 지니 / 空山木落雨蕭蕭</br>상국의 풍류는 이곳에 묻혀 있네 / 相國風流此寂寥</br>서글퍼라 한 잔 술 다시 권하기 어려우니 / 惆悵一杯難更進</br>지난날 가곡은 오늘 두고 지은 걸세 / 昔年歌曲卽今朝</br>라 했다. 자민이 강 가에서 노래를 듣는다[江上聞歌]의 시에</br>강 어귀에 그 뉘라서 미인사(美人辭)를 부르니 / 江頭誰唱美人辭</br>때마침 강 어귀에 달이 지는 시각이라 / 正是江頭月落時</br>서글퍼라 님 그리는 무한한 마음을 / 惆悵戀君無恨意</br>세상에선 오로지 여랑만이 알고 있네 / 世間唯有女郞知</br>라 했는데, 두 시가 모두 송강의 가사(歌辭)로 인해 나온 것이다.有女郞知 라 했는데, 두 시가 모두 송강의 가사(歌辭)로 인해 나온 것이다.)
  • E590  + (중국의 문사들은 문장을 감별하는 안목이 매우 밝다. 천사 주지번이 조선에 와중국의 문사들은 문장을 감별하는 안목이 매우 밝다. 천사 주지번이 조선에 와서 말했다. "조선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각로를 쓸 때에는 반드시 문장이 극히 뛰어난 자를 선택한다. 수석 각로인 유영경은 문장이 가장 뛰어나다. 그의 시를 볼 때마다 책상을 치며 칭찬하며 말하기를, '동방 제일의 문장이다.'라 했다." 그 당시 영의정 유영경이 매번 동지 최립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여서, 황화집에 유영경의 이름으로 된 것은 모두 최립의 시이다. 최립이 일찍이 두 재상과 이름을 나란히 하여 요동에 문서를 올렸는데 그때 도어사 고양겸이 가마 위에서 첩을 펼쳐보고 세 재상을 앞으로 불러 말하기를, "훌륭하다. 이것이 누구의 문장인가." 말했다. "둘째 재상의 것입니다." 양겸이 자세히 살펴보고 손가락으로 첩 위에 비점을 찍으며 말했다. "시문이 중국에서도 견줄 이가 드물다." 내가 일찍이 명나라에 갔을 때 우리나라에 상이 있으니 연회를 면제하여 달라고 예부에 올렸는데 예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일곱 낭관이 그 글을 전해 보고 서로 안색이 변했다. 역관이 뜰에 서서 아침부터 해가 기울 때까지 답을 듣지 못하고, 다만 순찰하며 보는 이들이 서너 번 왔다. 역관이 그 첩을 돌려달라고 청하니 낭관이 말했다. "부중에 보관하겠다." 그해 정경세가 예부에 문서를 올리니 낭관들이 칭찬하면서 그 청을 허락하며 말했다. "이 글이 비록 좋지만 앞서 온 사신 유아무개만 못하다. 그 글은 고아함이 이것의 배나 되었는데 사체가 맞지 않아서 그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동방에는 참으로 문장가가 많구나."라 하였다. 그해 내가 영평부 만류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만류장은 홍려승 이완의 별장이었다. 내가 칠언율 16운을 벽에 써놓았는데 그 때에 날이 어두워서 촛불을 켜고 썼다. 한 노인 수재가 와서 보며 말했다. "아, 좋은 작품이구나. 좋은 작품이구나." 어사 한응경은 이완의 처남으로 이웃에 사는 문사 한림 백유와 함께 와서 칭찬하며 판에 새겨 벽에 걸었다. 예로부터 중국 문사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얕보아서, 수백 년 동안 길가 수천 리에 우리나라 시 한 편도 판에 새겨 걸린 것이 없었는데, 판에 거는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 또한 영광이다. 내가 만류장에 제시한 것들을 보니 앞뒤로 몇백 편이 되는데, 내가 지은 것도 크게 다른 것이 아닌데도 중국 문인들이 유독 이것만 벽에 게시했으니, 그들의 문장을 감별하는 안목이 우리나라 문사들과는 다른 것이다. 시는 아래와 같다. "" 감별하는 안목이 우리나라 문사들과는 다른 것이다. 시는 아래와 같다. "")
  • E663  + (중형은 고제봉(高霽峰)에게 깊이 심복하여 늘 말하기를, “평양에 함께 있을 중형은 고제봉(高霽峰)에게 깊이 심복하여 늘 말하기를,</br>“평양에 함께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교(交) 자로 운을 내니 고공(高公)이 이에 화답하기를,</br>마을 연댄 벼 기장은 삼추 지나 무르익고 / 連村稌黍三秋後</br>한 고을의 서리 바람은 시월이라 초승일세 / 一路風霜十月交</br>라 하므로 나도 모르게 굴복하게 되었다.”</br>하고 또 말하기를,</br>“참판(參判) 유영길(柳永吉)의 시는 비록 시경(詩境)은 협소하나 좋은 곳이 있으니,</br>이를테면</br>금슬은 성급히 해를 녹이고 / 瑟錦消年急</br>금 병풍은 웃음 사기 더디구려 / 金屛買笑遲</br>발에 비친 석류는 곱기도 하고 / 映箔山榴艶</br>연못으로 통하는 들물은 맑기도 하네 / 通池野水淸</br>등의 시구는 밝고 굳세어 즐길 만하다.”</br>고 하였다.도 하네 / 通池野水淸 등의 시구는 밝고 굳세어 즐길 만하다.” 고 하였다.)
  • E680  + (지난 기유년(1609, 광해군1) 조사(詔使)가 한강에서 유람할 때, 당시 지난 기유년(1609, 광해군1) 조사(詔使)가 한강에서 유람할 때, 당시 시로 유명한 이들이 모두 제술관으로 따라갔다. 배를 타고 뒤에 있으면서 서로 고금의 시를 평론하는데 온 배안이 시끌벅적하였다. 논의가 소재에 이르자 한결같이 말하기를,</br>“대가의 솜씨이니 어찌 감히 가볍게 의론할 수 있겠느냐.”</br>하였는데, 자리에 있던 두세 사람만은 유독 말하기를,</br>“단율은 비록 아름다우나 장률은 거칠어서 취할 만하지 못합니다.”</br>하였다. 전적 차운로(車雲輅)가 팔뚝을 걷으며 크게 외치기를,</br>“소가(小家)의 작품이 비록 일편 한 구절은 읊조릴 만해도 자잘한 것들을 주워 모았기 때문에 전혀 기력이 없소. 소재의 작품 같은 것은 만균(萬鈞)의 기세가 있으니 어찌 감히 그와 더불어 우열을 다투겠소. 풀밭의 귀뚜라미가 큰 종소리를 만나면 울음이 그치는 것과 다를 바 없소.”</br>하였다. 인하여〈유금강산(遊金剛山)〉장률 한 수를 들어 읊었는데, 그중,</br></br>어두운 골짝 늙은 느티나무에 구름이 머물고 / 屯雲古檜陰陰洞</br>얕은 물굽이 높다란 다리에 해가 기우네 / 落日危橋淺淺灣</br></br>라는 구절에서는 거듭 영탄(詠嘆)하였다. 내가 보기에 윗구는 혼후(渾厚)하고, 아랫구는 아량(雅亮)하여 경중이 고르게 맞지 않는 듯하다.혼후(渾厚)하고, 아랫구는 아량(雅亮)하여 경중이 고르게 맞지 않는 듯하다.)
  • E631  + (최원정(崔猿亭 원정은 최수성(崔壽峸)의 호)은 세상을 내리보고서 벼슬하지 아최원정(崔猿亭 원정은 최수성(崔壽峸)의 호)은 세상을 내리보고서 벼슬하지 아니하고 화나 면하기를 바랐다. 하루는 제현(諸賢)이 정암(靜庵 조광조의 호)의 집에 모였는데 원정이 밖에서 들어오며 숨이 가빠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황급히 물을 달라고 해 마시고는,</br>“내가 한강을 건너올 제 물결이 솟구치고 배가 부서져 거의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났다.”</br>고 하니, 주인이 웃으면서,</br>“이는 우리들을 풍자하는 말이다.”</br>고 했다. 원정이 붓을 잡아 벽에다 산수를 그리자 원충(元冲 김정(金淨)의 자)이 시를 지었는데</br>맑은 새벽 바위 산 봉우리 우뚝한데 / 淸曉巖峯立</br>흰 구름은 산 기슭에 비꼈네 / 白雲橫翠微</br>강촌에는 사람 모습 보이지 않고 / 江村人不見</br>강변 나무 저 멀리 아득하누나 / 江樹遠依依</br>라 했다. 원정이 만의사(萬義寺)에 올라 지은 시에,</br>옛 불전엔 몇 안 되는 중이 지키고 있고 / 古殿殘僧在</br>수풀 끝엔 저녁 종 맑게 울리네 / 林梢暮磬淸</br>창문은 트이어 천리 끝 닿고 / 窓通千里盡</br>담장이 눌러 서니 뭇산은 평평 / 牆壓衆山平</br>나무는 몇 해나 늙어 왔는지 / 木老知何歲</br>새는 별난 목청 우짖고 있네 / 禽呼自別聲</br>험난한 세망에 걸릴까 근심하려니 / 艱難憂世網</br>오늘에 내 인생을 한탄하노라 / 今日恨吾生</br>라고 했다. 결구(結句)에 뜻이 담겨 있으니 아마도 스스로 화를 입을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애석하구나.담겨 있으니 아마도 스스로 화를 입을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애석하구나.)
  • E059  +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양촌(陽村)에 이어 문형(文衡)을 맡았으나 문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양촌(陽村)에 이어 문형(文衡)을 맡았으나 문장은 나약하였다. 문사 김구경(金久冏)은 시를 잘 짓기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항상 춘정이 지은 시를 보고 입을 막고 크게 웃었다. 하루는 춘정이 휴가를 얻어 시골에 있는 별장에서 놀면서 우연히 시 한 구절을 지었는데,</br>허백한 것이 하늘을 이으니 강가엔 새벽이 되었고 / 虛白連天江渚曉</br>암황한 것이 이 땅에 서리니 들에는 버들가지 늘어진 봄이 왔구나 / 暗黃浮地柳郊春</br>하고, 아름다운 연구(聯句)를 얻었다고 자부하며 장차 상경하여 임금께 상주(上奏)하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구경에게 말했더니, 구경은 말하기를, “기가 아주 졸렬한데 만약 이 시를 상주한다면 이는 임금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옛날에 지은 시에,</br>역정에서 술잔을 잡으니 산이 문 앞에 당(當)해 있고 / 驛亭把酒山當戶</br>강군에서 시를 읊조리니 비는 배에 가득 차는도다 / 江郡哦詩雨滿船</br>라고 한 것이 있으니, 이런 것이 상주함직한 시이다.”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춘정에게 알리니, 춘정은 말하기를, “당(當) 자가 온당치 못하니 임(臨) 자로 고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그 사람이 또 이를 구경에게 얘기하니, 구경은, “사람들이 춘정은 시를 알지 못한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고시(古詩)에,</br>남산이 문에 당하니 더욱 분명하도다 / 南山當戶轉分明</br>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그 사람이 또 춘정에게 말하니, 춘정은, “고시에,</br>청산이 황하에 임(臨)하였도다 / 靑山臨黃河</br>하지 않았는가. 구경 그 자신이 시를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내가 지은 것을 비웃는다.” 하였다. 그 자신이 시를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내가 지은 것을 비웃는다.” 하였다.)
  • E564  + (퇴계 이황이 일찍이 남명 조식과 함께 연회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황이 말했퇴계 이황이 일찍이 남명 조식과 함께 연회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황이 말했다. "주색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술은 오히려 참기 쉽지만 색욕은 참기 어렵다. 소강절의 시에 '색은 능히 사람을 탐닉하게 한다(色能使人嗜)'라 하였으니, 역시 그 참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자네는 색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식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색욕에 있어서는 패전한 장군이니, 묻지 말아주시오." 이황이 말했다. "나는 젊었을 때에는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었지만, 중년 이후로는 자못 참고 있으니, 자제력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송익필도 자리에 있었는데, 지위는 낮지만 글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송익필이 말했다. "소생이 일찍이 읊은 것이 있사온데, 대인의 한 번 들어주심을 바랍니다." 이에 외워서 들려주었다. 시는 이러하였다."" 용사한 뜻이 깊고 절실하였다. 이황이 읊으며 칭찬하였고 조식은 웃으며 말했다. "이 시는 패군장의 경계로 삼기에 적합하다."하였고 조식은 웃으며 말했다. "이 시는 패군장의 경계로 삼기에 적합하다.")
  • E494  + (한음 이덕형이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접반사가 되었다. 이 때 이여송이 왜적의 거짓 화의를 들어서 망설임을 면치 못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였다. 하루는 이여송이 적벽도를 내보이자 이덕형이 시를 지었다. "" 말에 법도와 풍자가 있으니, 이여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 E628  + (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br>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 때 / 昔年窮寇此殲亡</br>혈전 벌인 신검(神劍)에는 붉은 빛깔 둘렸다네 / 鏖戰神鋒繞紫芒</br>한의 깃대 꽂힌 흔적 돌 틈에 남아 있고 / 漢幟豎痕餘石縫</br>얼룩진 옷 적신 피는 노을 빛을 물들이네 / 斑衣漬血染霞光</br>소슬바람 살기 띠어 수풀 뫼는 엄숙하고 / 商聲帶殺林巒肅</br>도깨비불 음기 타니 성루는 묵어졌네 / 鬼燐憑陰堞壘荒</br>동방 사람 어육(魚肉) 면킨 우 임금의 덕일진댄 / 東土免魚由禹力</br>소신이 해를 그려 어찌 감히 칭찬하리 / 小臣摸日敢揄揚</br>기걸(奇杰)하고 혼중(渾重)하니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절강(浙江)의 오명제(吳明濟)가 이 시를 보고 비평하기를,</br>“그대의 재주는 용을 잡을 만한데 도리어 개를 잡고 있으니 애석하다.”</br>고 했는데 대개 당시(唐詩)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
  • C016  + (뜻이 본래 천지 밖에 있으니, 천지도 포용하지 못하리로다. 장차 원기(元氣)의 모체(母體)와 함께 무한한 공터의 세계에 노니리로다.)
  • E218  + (가정 신축년에 내가 하절사(賀節使)를 따라 연경에 갔을 때, 때마침 무종(武가정 신축년에 내가 하절사(賀節使)를 따라 연경에 갔을 때, 때마침 무종(武宗)의 황후가 돌아갔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도 반열(班列)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나아가 곡(哭)하였다. 어느 날 일찍 사문(社門) 밖에 임시로 앉아 있는데, 중국 관원들이 많이 와서 극우(隟宇)에 앉아 있었다. 한 벼슬아치가 역사(譯士) 홍겸(洪謙)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시를 지을 수 있는가.” 하니 홍겸이, “어젯밤에 비가 조금 내려 나그네의 회포가 쓸쓸하여 우연히 절구 한 수를 지었다.”고 하였더니, 그 벼슬아치가 매우 간곡히 보여 달라고 하였다. 홍겸이 최고운(崔孤雲)의 시를 써서 보여 주었는데,</br>가을 바람에 비록 애써 읊었으나 / 秋風雖苦吟</br>세상에 알아 주는 사람이 적구나 / 世俗少知音</br>창밖은 비내리는 한밤중인데 / 窓外三更雨</br>등잔 앞에서 먼 고향 생각에 잠겨 있네 / 燈前萬里心</br>하였다. 벼슬아치가 가지고 가서 그 상관에게 보였더니, 다투어 벼슬아치를 보내 적어 갔다. 한참 손님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심지어 과일과 차를 가지고 와서 위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붓을 들어 홍겸에게 주면서, “그대, 다시 한 수 지어 달라.” 하니, 홍겸이 나를 가리키며, “저 분도 시를 잘 지으니 가서 청하여 보라.” 하니, 드디어 나에게 구하였다. 내가 종이에 쓰기를, “조충전각(雕虫篆刻 자질구레하게 문장의 문구를 수식함)은 본래 장부의 할 일이 아니다. 하물며 국상(國喪)을 당하였는데, 어찌 풍월을 읊을 때냐. 그래도 원한다면 길에서 지은 것이 있으니, 그 중의 절구 하나를 보여 주리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이에, “탕참(湯站)에 이르러 사람을 동쪽으로 돌려보내다.”라는 시를 썼는데, 그 시는,</br>송골산 앞 길에서 / 松鶻山前路</br>그대는 동으로 나는 서쪽으로 헤어지네 / 君東我馬西</br>집에 편지 써 보내려고 / 欲題家信去</br>종이를 대하니 생각이 도리어 아득하구나 / 臨紙意還迷</br>하였다. 서로 돌아보며 베껴 쓰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어찌 풍월을 읊을 때이냐.”의 말을 가리켜 탄복하기를, “참으로 예의를 아는 나라로다.” 하였다.냐.”의 말을 가리켜 탄복하기를, “참으로 예의를 아는 나라로다.” 하였다.)
  • E132  + (고려 문성공 안향이 일찍이 시를 지어 학궁에 쓰기를, ""라 하였다. 개연히고려 문성공 안향이 일찍이 시를 지어 학궁에 쓰기를, ""라 하였다. 개연히 유교를 흥기하는 것을 그의 사명으로 여겨 개연히 사문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성균관에 노비 백 명을 바쳤다. 죽은 후 문묘에 배향되었고, 곳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지금까지도 공의 자손이 연이어 십 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고 있으니, 그 보답을 받은 셈이다. 공이 합포의 진무사로 있은 지 몇 개월 만에 조정에서 인재를 뽑게 되어 급히 불러들여 시험관을 맡게 되었다. 그 때 장마로 물이 불어나서, 공이 간신히 성주에 도착하여 동암 이진에게 증별하는 시를 지었다. ""공의 부자가 연이어 합포의 도절제사가 되었고, 구대손 안침 또한 절도사가 되었다. 공의 시를 차운하여 썼다."" 되었고, 구대손 안침 또한 절도사가 되었다. 공의 시를 차운하여 썼다."")
  • E576  + (고죽 최경창이 절을 찾아 산골짜기에 들어갔다가 홀연 길을 잃고는 입으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그 길을 잃고 헤매는 괴로움과 서러운 한이 말의 바깥에 있으니 읊으면 서러워진다.)
  • E049  + (그 뒤에 우리나라에서 야인(野人)을 함부로 죽인 일로 급사중 장녕(張寧)이 그 뒤에 우리나라에서 야인(野人)을 함부로 죽인 일로 급사중 장녕(張寧)이 와서 문책할 때 홍제원(弘濟院)에 이르러 멈추어 선 채, “왕세자는 무슨 일로 마중 나오지 않느냐.” 하였다. 좌승지 이승감(李承堪)에게 대답하도록 명하니 승지가, “세자는 나이 어리고 병이 있어 오지 못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급사가, “옛날에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을 업고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는데, 비록 세자의 나이가 어리다 할지라도 업고 오지야 못하겠느냐.” 하니, 승지가 대답하기를, “주공이 성왕을 업은 것은 무왕(武王)이 죽은 뒤에 성왕이 어리고 약하여 조회에 임하지 못하겠으므로 그런 것이요, 만약 무왕이 살아서 왕 위에 있다면 어찌 성왕을 업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장차 천자의 명을 초야에다 버린 채 포고하지 않으시렵니까.” 하니, 크게 웃고 일어났다. 그의 사람됨은 풍채가 준일(俊逸)하며 의기가 호방하고 굳세었다. 부사(副使) 무충(武忠)이 관(館)에서 연회하는 날 기생 자동선(紫洞仙)을 보고 눈짓하니, 급사가 관반(館伴)에게, “무대인(武大人)은 연(燕) 나라와 조(趙) 나라 사이에서 났고, 노래 부르는 고장에서 자랐는데, 만리나 되는 먼 길을 애써 와서 회포를 풀지 못하고 있으니 위안해 줌이 어떠한가.” 하고, 마침내 아름다운 기생 수명을 불러서 방에 들여 술상을 베풀고 담소하며 즐겼다. 무충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였는데 밤이 깊자 급사가 중문(中門)으로 나와 호상에 걸터앉아 일일이 기생의 이름을 점고(點考)하여 보내고 문 빗장을 걸고 돌아오니, 무충은 괴롭고 원망스러워 견디지 못하였다. 무충은 금대(金帶)로 직이 높고, 급사는 각대(角帶)로 직이 낮았으나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다루는 것이 이와 같았다. 〈평양주중시(平壤舟中詩)〉에,</br>평양 고성(孤城)을 새벽에 떠나가니 / 平壤孤城發曉裝</br>풍악이 울리는 화려한 뱃전에 봄볕이 아름답다 / 畫舡簫鼓麗春陽</br>까마귀 날아가고 구름이 다하는 곳에 푸른 산이 솟고 / 烏邊雲盡靑山出</br>나루터에 조수(潮水)가 드니 푸른 바다가 아득하구나 / 渡口潮通碧海長</br>황은(皇恩)을 함께 즐기는 같은 땅에 있으니 / 共喜皇恩同大地</br>내 몸이 타향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겠구나 / 不知身世是他鄕</br>푸른 술통은 자주 권하지 말라 / 靑尊且莫頻相勸</br>사신의 행렬은 동풍(東風)에 갈 길 아득하다 / 四牡東風路渺茫</br>하였다. 한강에서 놀 적에 시 10수를 지었는데, 그 중 한 수에,</br>동국에 높은 누가 있으니 / 東國有高樓</br>누 앞에 한수가 흐른다 / 樓前漢水流</br>빛은 청작방에 흔들리고 / 光搖靑雀舫</br>그림자는 백구 있는 물가에 떨어지누나 / 影落白鷗洲</br>멀리 바라보면 하늘이 다했는가 싶고 / 望遠天疑盡</br>허공으로 솟아 땅이 또 있는 것만 같다 / 凌虛地欲浮</br>창문으로 몰려드는 바람과 햇볕이 좋으니 / 入窓風日好</br>탑(榻)을 내려 거듭 머뭇거리네 / 下榻重淹留</br>하였는데, 나머지 아홉 수도 모두 절묘하였으며, 또 〈예양론(豫讓論)〉을 지어 옛사람이 말하지 않았던 일을 논하였다. 대개 시와 글이 모두 표표(飄飄)하여 속진을 벗어난 느낌이 있어 다른 속된 무리들은 모방할 수 없었다.飄飄)하여 속진을 벗어난 느낌이 있어 다른 속된 무리들은 모방할 수 없었다.)
  • E352  +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는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빠르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는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빠르게 올랐다. 성품이 호탕하고 얽매이지 않아 기세가 왕성하여 선배나 연장자라도 거만한 말로 업신여겼다. 다만 퇴계에 대해서는 존경할 줄 알고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한번은 영천(靈川) 신잠(申潛)이 그린 묵죽을 읊기를,</br>영천이 그려낸 푸른 대나무는 / 靈川筆下碧琅玕</br>소상강 어귀의 고아한 모습 눈과 달빛에 차갑네 / 湘口高標雪月寒</br>시인을 뽑아 보면 어느 누가 비슷할까 / 揀得詩人誰得似</br>맑고 여윈 모습 퇴계와 나란히 보리라 / 淸癯宜竝退溪看</br>하였으니, 지극히 존경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어 퇴계에게 화답하여 보낸 시에,</br>그대의 높은 의리 나는 그만 못한데 / 高義吾君我不如</br>편지를 보내 주니 인정이 말 밖에 넘치네 / 書來情款溢言餘</br>변씨의 옥은 월형을 초래함을 알고 있으니 / 本知卞玉能成刖</br>반드시 양장이라야 수레 넘어지는 것 아니네 / 未必羊腸可覆車</br>떠돌며 벼슬하는 마음 이제 고달프니 / 浮海宦情今已苦</br>산 사서 돌아갈 계획 소홀히 하지 않으리 / 買山歸計未應踈</br>강가 매화 다 졌는지 누구에게 물어볼까 / 江梅落盡誰相問</br>만 리 밖에서 부질없이 편지만 전하네 / 萬里空傳尺素書</br>하였다.梅落盡誰相問 만 리 밖에서 부질없이 편지만 전하네 / 萬里空傳尺素書 하였다.)
  • E653  + (내가 수안(遂安)에 부임하는 날 황지천이 시로 전송하여 시재(詩才)는 우뚝하내가 수안(遂安)에 부임하는 날 황지천이 시로 전송하여</br>시재(詩才)는 우뚝하니 동료들 가운데 뛰어나나 / 詩才突兀行間出</br>벼슬 복은 어그러져 분수 밖에 기구하네 / 官況蹉跎分外奇</br>이 모두 인생에는 각기 명이 있으니 / 摠是人生各有命</br>유유한 남은 일은 미뤄두고 지날밖에 / 悠悠餘外且安之</br>라 하였으니, 자못 감개가 깊다. 공이 젊어서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 이백생(李伯生 백생은 이순인(李純仁)의 자)ㆍ최가운(崔嘉運 가운은 최경창(崔慶昌)의 자)ㆍ하대이(河大而 대이는 하응림(河應臨)의 자) 의 무리들이 함께 당운(唐韻)을 숭상하여 대궐안의 소도(小桃)를 두고 읊어 작품이 꽤 많았는데 공이 이에 화운하기를</br>무수한 궁중 꽃은 흰 담장에 기댔는데 / 無數宮花倚粉牆</br>벌 나비는 노닐며 남은 향을 좇아가네 / 游蜂戲蝶趁餘香</br>늙은이는 봄바람을 채 보지 못하고 / 老翁不及春風看</br>속절없이 태양을 향하는 해바라기 마음이로세 / 空有葵心向太陽</br>라 하였다. 이처럼 함축된 뜻이 심원하고 조사(措辭)가 기한(奇悍)하니 시를 하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되지 않겠는가? 부드러운 것 고운 것 바람 꽃 따위를 읊은 시는 오히려 그 중후한 맛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것 바람 꽃 따위를 읊은 시는 오히려 그 중후한 맛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 E534  + (내가 연경에 갔을 때 안남국의 사신 풍극관을 만났다. 그와의 창화시집이 있었내가 연경에 갔을 때 안남국의 사신 풍극관을 만났다. 그와의 창화시집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연에 ""라 하였다. 다만 교지에서 상아와 용연 등의 향이 나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후에 포로가 되었던 학자 조완벽이 왜에서 돌아와 말했다. 상인을 따라 왜에서 안남으로 갔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시를 좋아하면서 보여 주며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 상아가 나는 산이 있으니 이 때문에 이 시가 좋다.' 운운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이를 듣고 이상하게 여겼는데, 뒤에 강목의 주를 찾아보니 안남에서 코끼리가 나는 곳을 상산이라 한다 하였다. 또 양비외전에 교지에서 용뇌향을 바쳤다 하였으니, 이는 실로 우연히 들어맞은 것이다.전에 교지에서 용뇌향을 바쳤다 하였으니, 이는 실로 우연히 들어맞은 것이다.)
  • E336  + (노공 수신(盧公守愼)이 진도에 귀양살이 하면서 지은 시는 이러하다. 천하의 노공 수신(盧公守愼)이 진도에 귀양살이 하면서 지은 시는 이러하다.</br>천하의 동쪽나라의 남쪽에 / 天下之東國以南</br>옥주산 밑에 두어 칸 암자여라 / 沃州山下數間庵</br>용서하기 어려운 죄 고치기 어려운 병이 있으니 / 有難赦罪難醫病</br>불충한 신하 불효한 자식이 되었다 / 爲不忠臣不孝男</br>귀양살이 삼천 오백 일만 된 것 다행이오 / 客日三千五百幸</br>나이는 올해에서 병진까지 산 것 부끄럽네 / 行年乙亥丙辰慚</br>너 노수신아 만일 죽지 않는다면 / 汝盧守愼如無死</br>공사간에 보답하는 일이 되게 하여라 / 報得公私底事堪</br>노수신의 나이 을해생이라고 하였으니, 이 시는 대개 병진년에 지은 것이요, 그의 귀양살이는 필시 3천 5백 일이었던 것이다.</br>또 아우를 전송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br>아! 우리 형제 이 지경이 되어 / 嗟吾兄弟至於斯</br>십 년 동안 다섯 번 만났네 / 一十年來五見之</br>만일 정위가 바다를 메운다면 / 若使精衛能塡海</br>천리길 탐라를 걸어라도 가겠네 / 千里耽羅可步追 메운다면 / 若使精衛能塡海 천리길 탐라를 걸어라도 가겠네 / 千里耽羅可步追)
  • E566  + (동고 최립은 문장에 대해 쉽게 허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질정관으로 동고 최립은 문장에 대해 쉽게 허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질정관으로 서울에 올라갔을 때, 율곡 이이가 정철과 함께 말을 나란히 하고 찾아왔다. 시인 이달도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삼각으로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이달이 이이를 보며 말했다. "공께서 이별시를 지으셨습니까?" 이이가 소매에서 꺼내어 보여주었다. 시는 다음과 같았다. "" 최립이 잠깐 보고는 지나쳐 버리며 오른쪽에 놓아두었다. 정철이 말했다. "숙헌 이이의 시가 어떻습니까?" 최립이 말했다. "요즈음 재상 노수신(盧相)이 책문을 잘한다고 하여 성상의 물음에 우러러 답한 것은 대개 그가 책문에 장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철이 말했다. "이 분의 글은 성리에 근본을 두고 있으니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최립이 웃으며 말했다. "학력은 내가 알지 못하지만, 글쓰기에 있어서는 어찌 내 집터조차 바라볼 수 있겠는가?" 그 자부하고 교만한 태도가 이와 같았다. 숙헌은 이이의 자이다.있겠는가?" 그 자부하고 교만한 태도가 이와 같았다. 숙헌은 이이의 자이다.)
  • C016  +
  • E700  + (만력(萬曆) 경신년(1620, 광해 12)에, 내가 바야흐로 폐고(廢錮 종신만력(萬曆) 경신년(1620, 광해 12)에, 내가 바야흐로 폐고(廢錮 종신토록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는 것)된 상태에서 정처없이 영서(嶺西) 지방을 떠돌 적에, 나그네의 심경을 절구(絶句) 한 수로 읊기를,</br></br>땅에 가득 떨어진 꽃 반쯤은 벌써 진흙 / 滿地殘花半作泥</br>간 밤의 비바람 앞 시내에 요란했네 / 夜來風雨暗前溪</br>망향대 올라 서니 하염없이 슬픈 마음 / 望鄕臺上空惆悵</br>운수는 천 겹이라 꿈속에서 헤매누나 / 雲樹千重夢也迷</br></br>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시를 본 이가 말하기를, “결구(結句)에 내포하고 있는 뜻이 처연(悽然)하고 암울하니, 상서롭지 못하게 될 분위기가 배어 있는 듯하다.”고 하면서 나를 위해 상당히 걱정해 주었다. 그러나 또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운수 천중(雲樹千重)이라는 말이야말로 앞길이 창창(蒼蒼)하게 멀어 끝이 없다는 뜻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으니, 상서롭지 못한 말이 아니다.”고 하였다.</br>그런데 그 뒤 몇 년이 지나 내가 요행히 좋은 시대를 만난 덕분에 벼슬 길에 올라 현달(顯達)하게 되었는데, 그 시를 지은 것이 지금으로부터 벌써 17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혹자(或者)의 말이 자못 들어맞았다고도 하겠다. 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혹자(或者)의 말이 자못 들어맞았다고도 하겠다.)
  • E196  + (명 나라의 소복(蘇福)이 8세 때에 초하룻날 밤 달을 보고 지은 시에, 기운이 초하루에 차고 비어 다시 시작하니 / 氣朔盈虛又一初 달의 밑쪽이 절반이나 없구나 / 嫦娥底事半分無 없는 곳에 분명 있으니 / 却於無處分明有 하늘이 생기기 이전의 태극도와 같구나 / 恰似先天太極圖 하였는데, 그는 14세에 죽었다.)
  • E118  + (목은 이색의 시는 한적하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다 시는 다음과 같다. "" 봄날의 그늘 시는 다음과 같다. "" 즉사 시는 다음과 같다. "" '절구' 시는 다음과 같다. '매미 소리' 시는 다음과 같다. "" 사물을 묘사하는 솜씨가 정교하면서도 무한한 뜻을 담고 있다. '밤을 줍다' 시는 다음과 같다. "" 그의 귀향하고자 하는 뜻을 엿볼 수 있다.)
  • E586  + (무릇 만물을 조각하여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형태를 갖추도록 만드는 것은 하무릇 만물을 조각하여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형태를 갖추도록 만드는 것은 하늘의 재능이다. 조화를 주무르며 능히 만물의 모습을 본떠낼 수 있는 것은 시인의 재능이다. 오직 하늘만큼 솜씨 좋은 것이 없거늘, 시인이 무엇이기에 하늘의 솜씨를 빼앗는다는 말인가. 이로써 알 수 있으니, 재주 있는 자에게는 수명이 없다는 것은 하늘이 시키는 일이다. 하늘 또한 시기가 많은 것인가? 이미 재주를 주었거늘 어찌 궁하게 만드는 것인가? 나의 벗 성여학은 시재가 높아 한 세상에 견줄 자가 드문데 지금 육십 세가 되도록 한 자리 벼슬도 얻지 못하여 나는 늘 괴이하게 여겼다. 그 시에, "", "", ""라 하였따. 그 말이 비록 지극히 공교하나 그 한담소색함이 영달하고 귀히 된 사람의 기상과는 매우 다르다. 어찌 시만이 그를 궁하게 만들었겠는가? 시 또한 그 궁함을 울었던 것이다. 또 이정면은 이홍남의 손자이다. 키가 작고 얼굴에 사마귀가 있어서 스스로 단사라 호하였다. 일찍이 비온 뒤에 시를 지었다. "" 그 벗 이춘영은 문인인데 늘 그 묘함을 칭찬하면서도 그 궁함을 질책하였다. 후에 과연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 대개 뜰의 진흙과 끊어진 지렁이(庭泥斷蚓)는 천함의 징조요, 벽의 햇살에 겨울 파리(壁日寒蠅)는 요절의 징조라 한다. 내가 수찬 윤계선과 함께 시인 윤효원의 집에서 작은 술자리를 가졌는데 윤계선이 즉석에서 시를 지었다. 그 한 연에, ""라 하였다. 좌중이 모두 아름답다고 칭찬하였으나 내가 "젊은 사람이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라 하였다. 과연 얼마 되지 않아 요절하였다. 아, 시라는 것은 정성의 허령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니, 요절과 천함을 미리 알고서 유연하게 발하여 기다리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곤 한다.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궁하기 때문에 시라는 것 또한 이렇게 되고 만다. 다만 재주 있는 자를 하늘도 또한 시기하니,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또 무엇을 탓하겠는가? 애석하구나.도 또한 시기하니,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또 무엇을 탓하겠는가? 애석하구나.)
  • E732  + (무릇 시는 천기에서 얻어서 스스로 조화의 공을 움직이는 것이 상품이나, 이러무릇 시는 천기에서 얻어서 스스로 조화의 공을 움직이는 것이 상품이나, 이러한 것은 세상에 많지 않다. 그 다음으로는 당을 배우고 송을 배워서 각각 그 체를 얻으면 모두 취할 만한 바가 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시로써 일컬어지는 자가 수 명 없지 않으나 체격의 높고 낮음은 물론이거니와 능히 시가의 의취를 얻은 자도 매우 적으니 어찌 겨를이 있어서 다시 당송에 가깝고 가깝지 않음을 논하겠는가. 세상에 전하는 어떤 시에, ""라 하니, 이것이 누구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의 이치가 모두 이르러서 무한한 의취가 있다. 비록 당송의 사이에 놓더라도 만약 스스로 조화의 공을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더라도 만약 스스로 조화의 공을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 E707  + (문장에서 뜻을 쓴 바의 곳은 절로 기묘한 조화가 있어서 참으로 쉽게 논할 수문장에서 뜻을 쓴 바의 곳은 절로 기묘한 조화가 있어서 참으로 쉽게 논할 수 없다. 사물을 묘사하고 경치를 그리는 언어에 이르러서는 마치 바람과 구름이 변화하는 모양과 같아서 아침저녁으로 일정하지 않다. 만약 스스로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명확히 깨달을 수 없으니, 이는 성인만이 성인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지봉 이수광의 지봉유설 중 호음 정사룡의 후대에 밤에 앉아서 시의 한 연인 "" 를 평하며 달이 외로이 걸렸네(月孤懸) 세 글자가 강소리 홀연히 사나우니(江聲忽厲)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였다. 허균이 지은 국조시산에서 이 시를 뽑아 넣으면서 평하였다. "이 노인의 이 연은 마땅히 이 권을 압도한다." 허균은 감식안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으니 마땅히 깊은 이해가 있는 바일 텐데 이수광이 이러한 폄하하는 논평을 한 것은 아마도 세밀하게 연구하지 않아서가 아니겠는가. 내가 일찍이 청풍을 지나 황강역에 이르러 머물렀는데 한밤중에 여울 소리가 매우 빠른 것을 들었고 문을 열어 바라보니 지는 달이 외롭게 걸려 있었다. 이에 정사룡의 "" 구를 떠올리며 한번 읊조리고 세 번 탄식하면서 비로소 옛사람이 경치를 묘사함이 핍진함을 깨달았다. 그 시의 가치가 실경을 대하니 더욱 높아진 듯하였다.이 핍진함을 깨달았다. 그 시의 가치가 실경을 대하니 더욱 높아진 듯하였다.)
  • E265  + (미전(薇田) 왕학(王鶴)이 기자묘(箕子廟)를 참배하고 시를 지었다. 호음(湖陰)이 사(師) 자 운을 짓기에 군색하여 며칠을 두고 다듬었는데, 지을수록 난삽하여 종사관(從事官)에게 부탁하자, 정랑(正郞) 이홍남(李洪男)이 즉석에서 써내려갔다. 삼인이 비록 행적은 다르지만 / 三仁雖異迹 백세에 오히려 같이 스승으로 삼는다 / 百世尙同師 하였다. 호음의 재주로도 때로는 간혹 막히는 수가 있으니,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이랴?)
  • E644  + (박수암이 청학동(靑鶴洞)에서 놀며 지은 시에, 고운은 당 나라 진사였으니 /박수암이 청학동(靑鶴洞)에서 놀며 지은 시에,</br>고운은 당 나라 진사였으니 / 孤雲唐進士</br>당초에 신선을 아니 배웠네 / 初不學神仙</br>만촉같은 삼한의 날이라면 / 蠻觸三韓日</br>풍진은 온 누리에 가득찼구려 / 風塵四海天</br>영웅을 어이 가늠할 수 있으리 / 英雄那可測</br>진결은 본디 아니 전하는 것을 / 眞訣本無傳</br>봉래산(蓬萊山)에 한번 들어가 버린 후에 / 一入蓬山去</br>청향(淸香)만 팔백 년을 남아 전하네 / 淸芬八百年</br>는 연한(淵悍 깊고 굳셈), 간질(簡質 조촐하고 질박함)하며 사려 깊은 맛이 있으니 두보와 진자앙의 진수를 깊이 얻은 것이다.박함)하며 사려 깊은 맛이 있으니 두보와 진자앙의 진수를 깊이 얻은 것이다.)
  • E013  + (백운거사(白雲居士)는 선생의 자호이니, 그 이름을 숨기고 그 호를 드러낸 것백운거사(白雲居士)는 선생의 자호이니, 그 이름을 숨기고 그 호를 드러낸 것이다. 그가 이렇게 자호하게 된 취지는 선생의 백운어록(白雲語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집에는 자주 식량이 떨어져서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나 선생은 스스로 유쾌히 지냈다. 성격이 소탈하여 단속할 줄을 모르고 우주를 좁게 여겼으며, 항상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다. 초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갑게 곧 가서 잔뜩 취해 가지고 돌아왔으니, 아마도 옛적 도연명(陶淵明)의 무리이리라.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며 이렇게 세월을 보냈다. 이것이 그의 실록(實錄)이다. 거사(居士)는 취중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천지로 금침을 하고 / 天地爲衾枕 강하로 주지를 삼아 / 江河作酒池 천일 동안 계속 마시어 / 願成千日飮 취해서 태평 시대를 보내리 / 醉過太平時 또 다음과 같이 스스로 찬(贊)을 지었다. “뜻이 본래 천지 밖에 있으니, 천지도 포용하지 못하리로다. 장차 원기(元氣)의 모체(母體)와 함께 무한한 공터의 세계에 노니리로다.” 장차 원기(元氣)의 모체(母體)와 함께 무한한 공터의 세계에 노니리로다.”)
  • E690  + (사문(斯文) 유도(柳塗)는 시재가 있었다. 젊었을 적 청루(靑樓)에서 놀다가사문(斯文) 유도(柳塗)는 시재가 있었다. 젊었을 적 청루(靑樓)에서 놀다가 절구 한 수를 기생집 벽에 써 이르기를,</br></br>반평생을 청루에서 먹었더니 / 半世靑樓食</br>사람들 비방이 하늘을 달구네 / 熏天衆謗喧</br>그래도 미친 마음 뉘우침 없어 / 狂心猶未悔</br>백마를 타니 또 황혼이네 / 白馬又黃昏</br></br>하였다. 하루는 상공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호)가 연회장에서 물러나 돌아오다가 형편상 집에 이르지 못하고 길가의 다른 사람 집을 빌려 쉬었는데 곧 그 기생집이었다. 술이 깨고 나서 벽에 쓰인 시를 보고 크게 놀랐다. 만나는 사람마다 언급하니 도성 전체에 일시에 전해져 읊어졌는데, 그 회자(膾炙)된 것은 낙구(落句)였다. 아계가 말하기를,</br>“청루식(靑樓食)의 ‘식(食)’ 자가 가장 쓰기 어려운 것이다…….”</br>하였다. 내가 일찍이 생각을 해보니, 소장공(蘇長公 소식(蘇軾))의〈적벽부(赤壁賦)〉의 주(註)에《주자어록(朱子語錄)》을 인용하여 이르기를,</br>“‘오여자지소공식(吾與子之所共食)’의 ‘식(食)’ 자를 잘못 ‘낙(樂)’ 자로 써놓은 것이다. 동파(東坡)의 수본(手本)을 보면 모두 ‘식(食)’ 자로 쓰여 있으니, 이는 ‘식색(食色 식욕과 색욕)’의 ‘식(食)’ 자일 것이다.”</br>하였다. 대개 아계 상공이 ‘청루식(靑樓食)’의 ‘식(食)’ 자를 인정한 것은 ‘여소공식(與所共食)’의 ‘식(食)’과 같은 뜻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용의(用意)가 이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니, 실로 아계의 고견(高見)에서 나온 것이다.</br>유도는 술을 좋아하고 독서를 폐하여 마침내 그 재주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술을 좋아하고 독서를 폐하여 마침내 그 재주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E654  + (사암(思庵 박순(朴淳)의 호) 정승이 돌아가자 만가(輓歌)가 거의 수백 편이사암(思庵 박순(朴淳)의 호) 정승이 돌아가자 만가(輓歌)가 거의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오직 성우계(成牛溪 우계는 성혼(成渾)의 호)의 한 절구(絶句)가 절창이었다. 그 시에</br>세상 밖에 운산이 깊고 또 깊으니 / 世外雲山深復深</br>시냇가에 초가집은 이미 찾기 어려워라 / 溪邊草屋已難尋</br>배견와(拜鵑窩)위에 뜬 삼경의 달빛은 / 拜鵑窩上三更月</br>아마도 선생의 일편단심 비추리라 / 應照先生一片心</br>고 하였는데, 무한한 감상(感傷)이 말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으니 서로 간에 깊이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작품이 있겠는가?지 않으니 서로 간에 깊이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작품이 있겠는가?)
  • E086  + (성화(成化)ㆍ홍치(弘治) 연간에 한씨(韓氏) 성을 가진 한 서생이 영안(永安성화(成化)ㆍ홍치(弘治) 연간에 한씨(韓氏) 성을 가진 한 서생이 영안(永安)의 도산사(道山寺)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남빛 옷을 입은 한 늙은이가 마을로 쌀을 구걸하러 다니다가 서생을 만나 말하기를, “선비는 무슨 책을 애써 읽고 있소. 나는 평생을 걸식으로 만족하는 사람이오.” 하고는 절구 한 수를 썼는데,</br>하염없이 사창에 기대 있으니 봄날이 더디고 / 懶倚紗窓春日遲</br>홍안은 속절없이 늙어 꽃 지는 시절이로다 / 紅顔空老落花時</br>세상 만사가 모두 이와 같은데 / 世間萬事皆如此</br>피리 불며 노래 부른들 그 누가 알리 / 叩角謳歌誰得知</br>하였다. 동국 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좁아서 재주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영달할 수 있는데, 어찌 버려지는 인재가 있다는 탄식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지금 내가 들은 것이 이와 같으니, 내가 아직 듣지 못한 이 늙은이와 같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전야에 묻혀 있으며, 몇 사람이나 시장에서 썩고 있을까. 한씨 서생은 학문이 있고 논의가 독실한 군자로 망령된 말을 하지 않을 자이다. 나를 위하여 이를 말한다.가 독실한 군자로 망령된 말을 하지 않을 자이다. 나를 위하여 이를 말한다.)
  • E677  + (수호(垂胡) 임기(林芑)는 많은 서적을 읽었고 겸하여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을수호(垂胡) 임기(林芑)는 많은 서적을 읽었고 겸하여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을 지녔다. 그래서 무릇 구류백가(九流百家) 및 기서고문(奇書古文)을 눈으로 섭렵하고 입으로 외우지 않는 것이 없었다.</br>일찍이 서울에서 문인재자(文人才子)들이 모두 그의 집에 모여 각자의 견문(見聞)을 수호에게 문난(問難 질문)하였다. 수호가 좌우를 보면서 묻는 대로 즉답하는데 의혹스러운 곳이 없어서, 마치 쏟아지는 강물이나 흐르는 수은 같아 그침이 없었다. 호음(湖陰)은 늘 그를 가리키며 ‘걸어 다니는 비서〔行秘書〕’라고 말하였다.</br>호음은 술자리에서 많은 시를 지었는데 때때로 그 용사(用事)가 이해할 수 없는 곳이 있었으니, 대개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수호가 일찍이 사적인 자리에서 호음을 모시고 있다가 물어 보기를,</br>“상공(相公)의 시는 자주 위어(僞語)로 사람을 속이는데 후세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십니까?”</br>하였다. 호음이 대답하기를,</br>“세간에 당신같이 안목을 기른 자가 몇이겠는가. 희작(戱作)은 사고(私稿)에는 등재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후인의 눈에 띄겠는가.”</br>하였다. 마침내 서로 한바탕 웃었다.</br>호음은 병이 위독하자 수호에게 부탁하기를,</br>“그대가 꼭 내 시에 주를 달아 주게.”</br>하였다. 수호는 이를 허락하였다. 십여 년 후에 호음의 시고가 세상에 간행되었는데 주가 없었다. 가군(家君 아버님)이 수호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br>“제가 일찍이 그의 시를 수습하여 이미 한 권에 주를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에 용사와 문자가 대체로 거듭나오는지라 취하여 두루 열람해 본 즉 거듭나오는 곳이 갈수록 더욱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만두게 되었습니다…….”</br>하였다. 수호는 비록 이같이 박학했지만, 다만 시를 익히지도 않았고, 또한 즐겨 짓지도 않았다.</br>임신년(1572, 선조5)에 조사(詔使 중국 사신)를 맞이할 때 임기는 일기관(日記官)으로 임당(林塘)을 따라 용만(龍灣)에 갔다. 학사 습재(習齋) 권벽(權擘)이 조사의 시를 차운하여</br></br>중선루 위에서 북쪽으로 옷깃을 열고 / 仲宣樓上開襟北</br>자미 시 가운데 서쪽으로 길머리 했네 / 子美詩中首路西</br></br>라는 구절을 지었다. 수호가 말하기를,</br>“‘누상(樓上)’을 고쳐 ‘부리(賦裏)’로 하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br>하였다. 임당이 가군을 보며 말하기를,</br>“저 부리를 치는 것이 좋겠소.”</br>하기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포복절도하였다. 우리 동방의 말에 부리〔喙〕와 ‘부리(賦裏)’의 음이 같은 까닭이었다.</br>그러나 증다산(曾茶山)의 시 〈송증굉수천태(茶山送曾宏守天台)〉의 함련(頷聯)에서,</br></br>흥공의 부 가운데 운하가 붉고 / 興公賦裏雲霞赤</br>자미의 시 중에 도서가 푸르네 / 子美詩中島嶼靑</br></br>하였으니, 수호가 어찌 근거 없이 이 말을 하였겠는가. / 子美詩中島嶼靑 하였으니, 수호가 어찌 근거 없이 이 말을 하였겠는가.)
  • E025  + (시(詩)에는 아홉 가지의 불의체(不宜體 마땅하지 않은 체)가 있으니, 이는 시(詩)에는 아홉 가지의 불의체(不宜體 마땅하지 않은 체)가 있으니, 이는 내가 깊이 생각해서 자득한 것이다.</br>한 편 안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쓰는 것은 바로 재괴영거체(載鬼盈車體)요, 옛사람의 뜻을 절취하는 것은, 좋은 것을 절취함도 오히려 불가한데 절취한 것도 또한 좋지 못하다면 이것은 바로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다. 그리고 강운(强韻)을 근거없이 내어 쓰는 것은 바로 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요, 그 재주를 요량하지 않고 운자를 정도에 지나치게 내는 것은 바로 음주과량체(飮酒過量體)요, 험한 글자를 쓰기 좋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혹되기 쉽도록 하는 것은 바로 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요, 말이 순조롭지 못한데 사람이 그것을 쓰도록 힘쓰는 것은 바로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요, 통상 말을 많이 쓰는 것은 바로 촌부회담체(村夫會談體)요, 구가(丘軻 구는 공자 이름이고 가는 맹자 이름이다)같은 것을 쓰기 좋아하는 것은 바로 능범존귀체(凌犯尊貴體)요, 거친 말을 산삭하지 않은 것은 바로 낭유만전체(莨莠滿田體)다. 이 불의체를 능히 면한 뒤에야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다.(莨莠滿田體)다. 이 불의체를 능히 면한 뒤에야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다.)
  • E746  + (시를 아는 사람은 시로써 사람을 취하고 시를 모르는 사람은 명성으로써 시를 시를 아는 사람은 시로써 사람을 취하고 시를 모르는 사람은 명성으로써 시를 취한다. 내가 젊었을 때에는 명성이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비록 좋은 작품이 있어도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시명을 얻은 뒤로는 비록 경구가 아니어도 모두 칭송하니 참으로 가소롭다. 내가 병자년의 호란 중에 "" 구절을 얻었다. 택당 이식이 읊조리고 감탄하며 나에게 말했다. "그대의 시에는 극히 두보의 격조가 있으니 두보의 시를 얼마나 읽었는가. 문장의 국량이 있으니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다." 그 때 내가 바야흐로 두시를 읽고 있었으니 이식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밝은 거울이라 하겠다. 저 시를 모르는 자들이 칭찬한다 하여 기뻐할 것이 없고, 흠잡는다 하여 분노할 것이 없다. 자들이 칭찬한다 하여 기뻐할 것이 없고, 흠잡는다 하여 분노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