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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st of all pages that have property "TextKor" with value "‘중은 보느니’ ‘학은 보느니’한 한 연구는 비록 아름답지만, 기타의 것은 모두가 어린애의 말인데, 무엇을 취할 것이 있다고 우등으로 뽑기까지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Since there have been only a few results, also nearby values are displa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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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309  + (유응부(兪應孚)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장군의 인의가 오랑캐를 진압하니 / 將軍仁義鎭夷蠻 국경 밖에 전생 사라져 사졸이 조네 / 塞外塵淸士卒眠 긴 낮 빈 뜰에 볼 것이 무엇인고 / 晝永空庭何所玩 날랜 매 삼백 마리 다락 앞에 앉았네 / 良鷹三百坐樓前 남추강(南秋江 효온(孝溫))은 그 말구를 들어, 족히 그 기상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전편이 세상에 많이 나타나서 않았기 때문에 기록한다.)
  • E481  + (이순인의 '송인' 시는 다음과 같다. "" 하응림의 시는 다음과 같다. "" 이 두 시가 모두 아름답지만, 이순인의 시가 당시에 더 가깝다.)
  • E550  + (이주는 문인이다. 서장관으로 중원에 가서 통주 문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이주는 문인이다. 서장관으로 중원에 가서 통주 문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 중국 사람들이 현판에 걸어놓고 칭송하여 말하기를 "獨鳥膜歸遼" 선생이라 했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을 낮게 보아서, 비록 최치원이 중국에서 벼슬했지만 그 시문으로는 일찍이 여러 문사들의 반열에서 개략적으로 보이지 못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당음 중에 무명씨가 고운 최치원이라 하는데, 진위를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예문지에만 조금 기록되어 보일 뿐이다. 동방 사람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긴다."라 하였다. 근자에 학관 어숙권이 일찍이 패관잡기를 저술했는데, 천중기에 초록되었으니 또한 미증유의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치원의 황소격을 자주 칭송하지만 사륙문의 책에 선택되지 못하여 중국 역시 편협함을 면하지 못한다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황소격은 비록 놀라게 하는 구절이 있지만, 언어를 세우고 뜻을 명령함에 있어 많이 전도되는 잘못이 있으니 동국 사람들은 참으로 문을 알지 못한다 하겠다. 다만 산승과 규수의 글이 역시 중국과 같이 하여 선록된 것이 보이는데 우리나라 사람의 문집에 어찌 한두 개 채택할 만한 것이 없겠는가.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이주의 시가 통주에 현판으로 걸린 것은 또한 다행이라 할 만하다. 나의 시 또한 만류장에서 현판에 걸렸으니 이에 느낀 바가 있었다. 만하다. 나의 시 또한 만류장에서 현판에 걸렸으니 이에 느낀 바가 있었다.)
  • E617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의 글은 요체는 깨달았으나 높은 경지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의 글은 요체는 깨달았으나 높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니 최동고(崔東皐 동고는 최립(崔岦)의 호)가 그를 가장 업신여겼다. 그의 시는 오로지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에게서 나왔으니 전고자(銓古者 고전을 비평하는 사람)가 작게 보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우리 중형은 일찍이 그의 시를 말씀하기를</br>학 울자 맑은 이슬 내려 맺히고 / 鶴鳴淸露下</br>달 뜨자 큰 고기 뛰어오르네 / 月出大魚跳</br>라 한 구절은 결코 성당(盛唐)의 시에 뒤지지 않으며,</br>가랑비 오는데 중이 장삼을 꿰매고 / 細雨僧縫衲</br>찬 가람에 나그네는 배 저어 가네 / 寒江客棹舟</br>와 같은 구절은 심히 한담(閑淡)한 맛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대체로 맞는 말씀이다.절은 심히 한담(閑淡)한 맛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대체로 맞는 말씀이다.)
  • E172  + (정덕(正德) 신사년에 가정(嘉靖) 황제가 즉위하자, 수찬(修撰) 당고(唐皐)정덕(正德) 신사년에 가정(嘉靖) 황제가 즉위하자, 수찬(修撰) 당고(唐皐) 등이 와서 등극(登極)의 조서를 선포할 때, 사신을 접대하였던 용재(容齋)이택지(李澤之) 가 처음 연회에서 자리를 같이하며 술잔을 들어 앞으로 내어 밀자, 당고가 팔을 뻗어 그 잔대를 잡고 약간 밀쳐서 물러서게 하니, 가까이 오는 것을 꺼리는 뜻이 있는 듯하였다. 당고의 음락시(飮酪詩)가 있었는데, 용재가 차운(次韻)하여,</br>왕가 8백 리에 비하면 / 若比王家八百里</br>서생이 너를 용서한 것이 또한 많다 / 書生貸汝亦云多</br>하였더니, 이때부터 교제가 밀접해지고 늘 시단의 노장이라고 칭찬하였다. 문장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요즈음 중국에 어떤 예부랑(禮部郞)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서적을 구입하는 것을 가혹하게 금지하고, 문장이 해외로 너무 많이 흘러나간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를 예의와 문헌이 있는 나라라고 하여 이적(吏狄)들처럼 낮추어 보지 않는 것은 이상과 같은 까닭이 있어서이니, 진실로 우리 나라 문인들로 하여금 중국에 들어가 여러 선비들 사이에서 고하(高下)를 정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저들에게 모두를 양보하겠는가. 고금에 우리를 이적들처럼 대우하지 않았던 것은 명확한 일이다.양보하겠는가. 고금에 우리를 이적들처럼 대우하지 않았던 것은 명확한 일이다.)
  • E190  + (정덕(正德) 임신년(1512, 중종 7)에 일본 사신이 서울에 와서 병이 들정덕(正德) 임신년(1512, 중종 7)에 일본 사신이 서울에 와서 병이 들어 시를 짓기를,</br>조선 사관의 문 밖 / 東國館門外</br>사면에 둘러 있는 산은 늦은 봄인데 / 四屛山暮春</br>침상 밑의 신발은 먼지가 쌓이고 / 塵埋床下屨</br>걸려 있는 두건에는 거미줄이 쳐졌도다 / 蛛網架頭巾</br>베갯머리에 고향 그리워 눈물이 글썽이는데 / 枕有思鄕淚</br>문에는 문병 오는 사람 없으니 / 門無問疾人</br>바다 건너 만 리 나그네 / 滄波萬里客</br>돌아가지 못하는 신세를 슬퍼하노라 / 惆帳未歸身</br>하였다. 그때에 선위관(宣慰官)이 그 시를 탄복해 마지않았고, 온 장안이 모두 전하며 그 시를 외웠다. 지금 보건대 당 나라 말년에 병든 중이 그의 집에서 지은 시에,</br>베갯머리에는 고향 그리워 눈물이 글썽이는데 / 枕有思鄕淚</br>문에는 문병 오는 사람 없도다 / 門無問疾人</br>침상 밑의 신발은 먼지가 쌓이고 / 塵埋床下履</br>걸려 있는 두건에는 바람이 부네 / 風動架頭巾</br>한 것이 있다. 마침 부사(部使)가 그것을 보고 조정에 말하여 온 나라 안 절에 연수료(延壽寮)를 설치하고 병든 중들을 요양하게 하였다. 일본 사신의 시는 병든 중이 지은 시의 두 연(聯)을 그대로 인용하고 다만 그 구절을 위아래로 바꾸어 놓고, 또 이(履) 자를 구(屨) 자로 고치고, 바람이 부네[風動]를 거미줄[蛛網]로 바꾸었을 뿐이니, 온 장안에 전하며 암송한 사람들은 참으로 그 식견이 좁고 선위관도 식견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매우 우스운 일이다.으로 그 식견이 좁고 선위관도 식견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매우 우스운 일이다.)
  • E686  + (정랑(正郞) 백호 임제는 시를 지음에 번천(樊川)을 배웠는데, 명성이 세상에정랑(正郞) 백호 임제는 시를 지음에 번천(樊川)을 배웠는데, 명성이 세상에 높았다. 손곡(蓀谷)이 일찍이 사람들의 시품(詩品)을 논하다 백호에 이르자 그를 ‘능수(能手)’라고 지목했고 듣는 사람들은 모두 잘된 비유라고 하였다.</br>백호가 젊었을 적 호서(湖西)에서 서울로 향할 때, 바로 한겨울〔窮冬〕을 당해 눈보라가 몰아쳤다. 길에서 한편의 율시를 지어 이르기를,</br></br>고당으로 가는 길 눈보라 세찬데 / 大風大雪高唐路</br>검과 거문고 하나로 천릿길 가네 / 一劍一琴千里人</br>새 우는 교목에 저녁연기 차갑고 / 鳥啼喬木暮煙冷</br>개 짖는 쓸쓸한 마을 민가는 가난하네 / 犬吠孤村民戶貧</br>동자 춥고 말 병들어 의뢰할 길 없지만 / 僮寒馬病若無賴</br>휘파람 불고 노래하니 신들린 듯하네 / 嘯志歌懷如有神</br>문득 아득한 고향 생각 일어나는데 / 悠悠忽起故園思</br>금수에 매화 피니 남국은 봄이겠지 / 錦水梅花南國春</br></br>하였다. 고당(高唐)은 지난 곳의 지명이다. 대곡(大谷) 성운(成運) 선생이 이 시를 보고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 백호가 드디어 가서 인사드리니 매우 기뻐하였다.</br>계미년(1583, 선조16)과 갑신년(1584, 선조17) 사이에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이 전조(銓曹 이조)의 아판(亞判 참판)이었는데, 백호가 재주를 갖고도 침체되어 있는 것을 가련히 여겼다. 추천〔吹噓〕을 하고자 하여 그를 맞아들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씨(姓氏)의 유래를 물으며, “필시 여러 대에 혁혁(奕奕)했던 문벌이었을 것이오.” 라고 말하였다. 백호가 대답하기를, “몇 대 동안 외람되이 과명(科名)을 얻어 사람들이 귀성(貴姓)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한미(寒微)한 데서 일어나 세대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br>우계는 크게 찬탄하며, 그에게 세속을 초월한 기상이 있다고 여기고는, 장차 청반(淸班)에 두고자 하여 《홍문록(弘文錄)》에 이름을 끼워 넣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그가 지은 시에서는 전혀 곤궁한 모습이 없는데 끝내 떨치지 못했으니 무슨 까닭인가.은 시에서는 전혀 곤궁한 모습이 없는데 끝내 떨치지 못했으니 무슨 까닭인가.)
  • E542  + (정사룡의 시에, ""라 하였으니, 대개 의산 이상은의 시 ""의 뜻을 용사한 것이다. 이 시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흘깃 보면 곧 당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옛사람이 당시에는 별개의 격조가 있다고 하였으니, 실로 그러하다.)
  • E058  + (충선왕(忠宣王)은 오랫동안 원 나라에 머물고 있어서 정든 사람이 있었더니, 충선왕(忠宣王)은 오랫동안 원 나라에 머물고 있어서 정든 사람이 있었더니, 귀국하게 되자 정인(情人)이 쫓아오므로 임금이 연꽃 한 송이를 꺾어주고 이별의 정표로 하였다. 밤낮으로 임금이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여 익재(益齋)를 시켜 다시 가서 보게 하였다. 이익재가 가보니 여자는 다락 속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지를 않아 말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억지로 붓을 들어 절구 한 수를 쓰는데,</br>보내주신 연꽃 한 송이 / 贈送蓮花片</br>처음엔 분명하게도 붉더니 / 初來的的紅</br>가지 떠난 지 이제 며칠 / 辭枝今幾日</br>사람과 함께 시들었네 / 憔悴與人同</br>하였다. 익재가 돌아와서, “여자는 술집으로 들어가 젊은 사람들과 술을 마신다는데 찾아도 없습니다.”고 아뢰니, 임금이 크게 뉘우치며 땅에 침을 뱉었다. 다음해의 경수절(慶壽節 왕의 생일)에 이익재가 술잔을 올리고는 뜰아래로 물러나와 엎드리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연유를 물으므로 이익재는 그 시를 올리고 그때 일을 말했다. 임금은 눈물을 흘리며, “만약 그날 이 시를 보았더라면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돌아갔을 것인데, 경이 나를 사랑하여 일부러 다른 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사랑하여 일부러 다른 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 E209  + (충암(冲庵) 김공이 일찍이 통천(通川) 총석정(叢石亭)에서 놀며 시 6수를 충암(冲庵) 김공이 일찍이 통천(通川) 총석정(叢石亭)에서 놀며 시 6수를 지었는데, 뒤에 군수가 그 시판(詩板)을 없앴기 때문에 그 두 편을 잃어버렸다. 일찍이 서사가(徐四佳)의 《동인시화(東人詩話)》를 보니, 영헌(英憲) 김지대(金之岱)가 의성(義城) 관루(館樓)에 쓴 시가 당시에 회자(膾炙)되었는데, 누각이 병란으로 불에 타는 바람에 시판도 따라서 없어졌다. 수십 년 후에 현감 오적장(吳迪莊)의 딸이 미쳐서 허튼 소리를 하다가 홀연 김지대의 시를 읊어 내니, “귀신도 시를 사랑하여 다시 세상에 전하게 하였다.” 하였다. 그런데 통천 고을에는 시를 사랑하는 귀신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내가 그의 네 시를 아래에 기록한다. 그 첫째에 이르기를,</br>끊어진 산길 붉은 낭떠러지 창해 언덕에 / 絶嶠丹崖滄海陬</br>외로운 표지가 멀고 아득하니 곧 봉구로다 / 孤標夐邈即蓬丘</br>단단한 뿌리는 곧장 그윽한 물결 험한 데 꽂혀 있고 / 硬根直揷幽波險</br>깎은 표면은 아마도 잘드는 도끼로 다듬었나 보다 / 削面疑經巧斧修</br>자라 기둥은 하늘처럼 높았으니 네 조각이 남았고 / 鰲柱天高殘四片</br>양호의 비석은 고개가 오래 되었으니□ □ / 羊碑峴古□□□</br>□□□ 떠나가니 이미 아득히 멀구나 / □□□去已寥廓</br>눈은 푸른 구름에 끊어져서 부질없이 스스로 근심하는도다 / 目斷碧雲空自愁</br>하였고, 그 둘째에는 말하기를,</br>천고의 높은 언덕 총석이 좋다 / 千古高皐叢石勝</br>올라 가보니 고요하고 아득하여 9년의 회포로다 / 登臨寥落九秋懷</br>북두성의 두괴는 광채를 감추고 푸른 바다를 따르고 / 斗魁鏟彩隨碧海</br>월궁에서 도끼를 빌려 붉은 언덕을 깎았도다 / 月宮借斧削丹崖</br>큰 바다는 위태로운 산봉우리를 떠 가려 하고 / 巨溟欲泛危巒去</br>완악한 뼈는 길게 격동하는 물결에 부딪쳐 물리치도다 / 頑骨長衝激浪排</br>봉도의 퉁소와 피리를 부질없이 기다리며 / 蓬島簫笙空淡竚</br>석양에 머리 긁으며 하늘가에 붙여 있다 / 夕陽搔首寄天涯</br>하였고, 그 셋째에는 말하기를,</br>8월 15일 총석정 밤에 / 八月十五叢石夜</br>푸른 하늘 은하수가 맑아서 유유하도다 / 碧空星漢淡悠悠</br>날아 오르는 계수나무 그림자는 하늘에 올라 가득하고 / 飛騰桂影昇天滿</br>출렁거리는 은빛은 바다에 넘쳐 뜬다 / 搖漾銀光溢海浮</br>육합에 외로운 생애는 몸이 한 낱알이요 / 六合孤生身一粒</br>네 신선이 남긴 자취는 학이 천추로다 / 四仙遺躅鶴千秋</br>흰 구름 멀고 먼 일만 산 밖에 / 白雲迢遞萬山外</br>홀로 높은 언덕에 섰으니 아득하고 아득한 근심이로다 / 獨立高邱杳遠愁</br>하였고, 그 넷째에는 말하기를,</br>구름은 사라지고 가을은 맑고 푸른 하늘은 맑은데 / 雲沒秋晴淡碧層</br>맑은 새벽에 일어나 뜨는 태양 바라본다 / 淸晨起望太陽昇</br>빛은 바다에 잠겼다 처음에는 삼켰다 토했다 하고 / 光涵海宇初吞吐</br>채색은 하늘 거리를 쏘며 홀연히 솟아 오른다 / 彩射天忂忽湧騰</br>그윽한 굴의 늙은 용은 불꽃인가 놀라고 / 幽窟老龍驚火焰</br>깊은 숲의 음침한 귀신은 의지할 곳을 잃었도다 / 深林陰鬼失依憑</br>인간의 어두움이 이제부터 사라지리라 / 人間昏黑從今廓</br>엄자를 향하여 노끈으로 잡아맸으면 / 欲向崦嵫爲繫繩</br>하였다. 人間昏黑從今廓 엄자를 향하여 노끈으로 잡아맸으면 / 欲向崦嵫爲繫繩 하였다.)
  • C010  + (‘중은 보느니’ ‘학은 보느니’한 한 연구는 비록 아름답지만, 기타의 것은 모두가 어린애의 말인데, 무엇을 취할 것이 있다고 우등으로 뽑기까지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 E743  + ("" 시는 누가 지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참으로 광대의 말이니 비루하고 가소롭다. 흰 갈매기가 어찌 사람과 수답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세상에는 시를 아는 이가 드물어서 모두 칭송하여 명작이라 하고 혹은 내가 지은 것이라 여기니 배를 잡고 웃을 일이다.)
  • C010  +
  • E240  + (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 율시가 적혀 있다고 하였다 "" 보고 들은 자들이 정자의 들보가 극히 높아서 시인이 시를 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반드시 귀신이 쓴 시라고 여겼다. 도성 아래가 소란스러우며,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말하기를, 들보의 시가 이제 없고 글씨는 원의 벽에 있다고 하니, 더욱 괴이하게 여겼다. 내가 분변하여 말하기를, "이른바 들보에 제시했다는 것은 본래 그런 일이 없었고, 다만 원의 벽에 쓰여 있었는데 전하는 자가 잘못한 것이다. 어찌 일찍이 들보에 있었다가 지금은 벽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 시를 호음 정사룡 선생에게 보였더니, "시가 심히 졸렬하고 속되며, 또한 장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불자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E295  + (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예부(禮部)를 관광(觀光)하는데, 절강(浙江)의 서생(書生) 5~6인이 먼저 와 있었다. 땅에 글을 적어 서로 문답하고, 한 절구를 지어보였다.</br>중국 조정 예부에 부평같이 모였으니 / 天朝禮部風萍集</br>천리의 관광객은 각각이 다른 고향 / 千里觀光各異鄕</br>가장 괴로운 건 내일 아침 이별하면 / 最苦明朝又分手</br>푸른 하늘 가을 숲이 정히 푸르리 / 碧天秋樹正蒼蒼</br>내가 곧 그 시의 운에 따라 지었다.</br>서리 바람 나무에 불어 성겨 누른 잎 떨어지니 / 霜風吹樹隕疏黃</br>소슬한 찬 소리에 고향 생각 괴롭도다 / 蕭瑟聲寒苦憶鄕</br>같은 나그네로 내가 가장 먼 곳이니 / 同作旅遊吾最遠</br>바다 하늘 나직한데 흩어진 산 푸르구나 / 海天低襯亂山蒼</br>서로 끌며 몰려와 보고는 선생이라 불렀다. 내가 사양하여 말하기를,</br>“중국 선비들의 과분한 칭찬이 이미 감사한데, 또 선생은 무슨 말입니까?”</br>하니, 답하기를,</br>“재주를 보는 것이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br>하였다. 이번 걸음에 무령현(撫寧縣) 벽에 한 율시를 지어 붙였다. 그 1 연(聯)에,</br>말 통하려고 땅에 글 쓰기 번거롭고 / 通言煩畫地</br>악을 보러 중국을 방문한 것 기쁘다 / 觀樂喜朝天</br>하였다. 그후 임술년간에 한 압마관(押馬官)이 와서 말하기를,</br>“어떤 현의 관사가 다 낡아 다시 지었는데, 그 시를 쓴 구벽(舊壁)은 완연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br>하였다. 케케묵고 누추한 시에서 뭐 취할 것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
  • E372  + (고성(高城)에는 옛날부터 가볼 만한 명승지가 없었다. 병인년 겨울에 아버지께고성(高城)에는 옛날부터 가볼 만한 명승지가 없었다. 병인년 겨울에 아버지께서 고성에 부임하시자, 다음 해 봄에 바로 관아 뒤 가시밭 가운데서 한군데 절승지(絶勝地)를 얻게 되어, 높은 곳을 평평하게 고르고 정자를 지었다. 서쪽은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이 쳐다보이는데, 천봉(千峯)이 한눈에 들어오며, 열흘 안 걸려 닿을 수 있고, 동쪽은 바다에 임하였는데, 거리가 10리도 못 되고, 남쪽은 남강을 수백 보 앞에다 굽어보며, 북쪽은 36봉이 바라보인다. 아래 제일 기승(奇勝)은 선군(先君)께서 기문을 짓고, 또 십영(十詠)을 지었으며, 양창해도 십영을 짓고 또 여기에 발문(跋文)을 지었는데, 문인들로 화답하는 분들이 많았다. 석봉(石峯) 한호(韓濩)는 거기에 액자를 크게 썼는데, 바로 해산정(海山亭)이다.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시를 보냈는데,</br>새로이 제일가는 강산을 열어 / 聞說新開第一區</br>바다와 산을 영동 한쪽 높이달았다는 말을 들었네 / 海山高揭嶺東陬</br>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두었던 모든 것이 눈앞에 나타나니 / 天慳地秘森呈露</br>시흥(詩興)이 나면 그 누가 넓다 하여 이 경치를 거두지 못하랴 / 詩興何人浩莫收</br>하였고, 감사(監司) 김여경(金餘慶)이 시를 짓기를,</br>이제 와서야 비로소 물 되기가 어려움을 믿겠네 / 今來始信難爲水</br>이 산 밖에 다시 좋은 산이 있다고 누가 말하리 / 此外誰言更有山</br>조그만 마음이 저같이 큰 것을 용납하니 / 方寸容他如許大</br>이번 행차가 말발굽 사이에 있음이 아니라네 / 玆行不在馬蹄間</br>하였다. 국상(國相) 윤두수(尹斗壽)의 시에,</br>삼일포(三日浦)에 조각배 띄우니 / 三日湖中泛小舟</br>한 갈피 좋은 곳 이루어 물과 구름이 한가롭네 / 一區形勝水雲悠</br>일찍이 자주 놀던 곳 기억을 더듬어 써오니 / 書來曾憶重遊處</br>서른여섯 봉우리마다 가을 다함 없네 / 三十六峯無盡秋</br>하였고, 남언경(南彦經) 공의 시에,</br>가을 달에 남강이 넓고 / 秋月南江闊</br>서리 단풍은 북령에 높았더라 / 霜楓北嶺高</br>꿈속에 늘 그리는 그곳 / 夢魂長繞處</br>갈대밭에 바람도 우수수하겠지 / 蘆荻吹蕭蕭</br>하였다. 황윤길(黃允吉)공의 시에</br>희한한 서른 봉우리 아흔 호수는 / 三十奇峯九十湖</br>네 신선 거닐던 날 몰래 놀던 곳 / 四仙當日秘名區</br>티끌 낀 소매 깨끗해짐을 문득 깨닫겠구려 / 尋眞斗覺塵襟淨</br>이 몸이 도리어 그림 가운데 있지 않나 의심이 나네 / 身世還疑入畵圖</br>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이 나네 / 身世還疑入畵圖 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
  • E205  + (근대(近代) 무신(武臣) 중에 시에 능한 사람이 몇 사람에 지나지 않고 또 근대(近代) 무신(武臣) 중에 시에 능한 사람이 몇 사람에 지나지 않고 또 볼만한 것도 못 된다. 오직 박위겸(朴撝謙)이 젊어서 신 문충공(申文忠公 신숙주)의 막하에 있을 때에 시를 지었는데,</br>10만 정병이 수루를 호위하고 / 十萬貔貅擁戍樓</br>변방의 깊은 달밤에 여우 갖옷 싸늘한데 / 夜深邊月冷狐裘</br>한 가닥 긴 피리 소리 어디메서 들려오는고 / 一聲長笛來何處</br>정부의 만리의 시름을 불어서 다하는구나 / 吹盡征夫萬里愁</br>하였다. 뒤에 흥덕현(興德縣) 배풍헌(培風軒)에서 시를 지었는데,</br>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 정정한데 / 屹立亭亭萬仞峯</br>봉우리에 선 높은 누각 멀리 바람 속에 있도다 / 峯頭高閣逈臨風</br>땅은 봉래섬과 삼청의 경계에 이어 있고 / 地連蓬島三淸界</br>사람은 소상팔경 중에 있도다 / 人在瀟湘八景中</br>구름은 산허리에 아득하고 / 雲帶山腰橫縹緲</br>물은 하늘가에 닿아 뿌옇도다 / 水㴠天影接空濛</br>문득 먼 포구에 돌아오는 배를 보니 / 忽看遠浦歸帆疾</br>물길이 멀리 한수(한강)와 통하는구나 / 水道遙連漢水通</br>하였으니, 무인(武人)의 시 가운데 이런 작품은 쉽사리 얻지 못할 일이다. 하였으니, 무인(武人)의 시 가운데 이런 작품은 쉽사리 얻지 못할 일이다.)
  • E092  + (내가 일찍이 관서(關西)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가 근 100여 편이다. 이중균내가 일찍이 관서(關西)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가 근 100여 편이다. 이중균(李仲鈞)이 유독 기자전(箕子殿) 시의 첫머리인</br>무왕이 수를 미워하지 않았으니 / 武王不憎受</br>성탕이 어찌 주를 노여워했으랴 / 成湯豈怒周</br>상나라 주나라 혁명할 즈음에 / 二家革命間</br>성인은 원망도 탓함도 없었다네 / 聖人無怨尤</br>하는 두 연(聯)만 취하고, 말하기를 “이 시구는 옛사람의 작품을 능가할 만하고 나머지는 취할 것이 없다.” 하였다. 벗들은 그의 논평이 너무 지나친 듯하다 하였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현(李齊賢)의 시를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전체 원고를 지워 버리고, 단지 「응당 성내리라, 유숙하는 손님이 일찍 문을 열어 뜰 앞에 눈이 소나무를 누른 것을 보려는 것을.〔應嗔宿客開門早 要看庭前雪壓松〕」이라는 구절만 남겨 놓았다. 이제현의 시재(詩才)는 원나라에서도 활보할 수 있었고, 시집에 실린 시는 천만 편도 넘는다. 내가 시를 배운 것은 시일이 얼마 안 되고, 관서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는 편수가 지극히 적으며, 또 중균의 시를 보는 안목은 졸옹보다 높으니, 나의 네 구절을 뽑아 준 것만도 분수에 넘는 일이다.’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이중균의 논평이 매우 온당하였다.에 넘는 일이다.’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이중균의 논평이 매우 온당하였다.)
  • E745  + (당나라 잠삼은 늘 한 편의 시를 지으면 사람들이 전하여 베꼈고 비록 이민족의당나라 잠삼은 늘 한 편의 시를 지으면 사람들이 전하여 베꼈고 비록 이민족의 무리들이라도 음송하지 않는 적이 없었다. 이익이 매번 한 편의 시를 지으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음악에 맞추고 그림에 그려넣었으니 두 사람의 시가 어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경모하게 하는가. 지금 세상에는 비록 뛰어난 작품이 있어도 독실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지금과 옛날이 다르기 때문인가?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인가? 내가 일찍이 용호정사에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사람들이 모두 전하여 읊었다. 내가 평소 지은 시 중에 이보다 나은 것이 많은데 이 시가 가장 회자되니, 시에도 또한 만나고 만나지 못함이 있는가? 효종께서 일찍이 화공으로 하여금 금병에 그리게 할 적에 이 시를 써내리고 명하여 이 시의 경치를 모사하여 올리게 하셨다. 아, 나의 보잘것없는 시구가 그림까지 명할 것이 아닌데도 외람되게 눈에 들어 그림으로 그려지게 되었으니 실로 세상에 보기 드문 좋은 일이다. 눈에 들어 그림으로 그려지게 되었으니 실로 세상에 보기 드문 좋은 일이다.)
  • E586  + (무릇 만물을 조각하여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형태를 갖추도록 만드는 것은 하무릇 만물을 조각하여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형태를 갖추도록 만드는 것은 하늘의 재능이다. 조화를 주무르며 능히 만물의 모습을 본떠낼 수 있는 것은 시인의 재능이다. 오직 하늘만큼 솜씨 좋은 것이 없거늘, 시인이 무엇이기에 하늘의 솜씨를 빼앗는다는 말인가. 이로써 알 수 있으니, 재주 있는 자에게는 수명이 없다는 것은 하늘이 시키는 일이다. 하늘 또한 시기가 많은 것인가? 이미 재주를 주었거늘 어찌 궁하게 만드는 것인가? 나의 벗 성여학은 시재가 높아 한 세상에 견줄 자가 드문데 지금 육십 세가 되도록 한 자리 벼슬도 얻지 못하여 나는 늘 괴이하게 여겼다. 그 시에, "", "", ""라 하였따. 그 말이 비록 지극히 공교하나 그 한담소색함이 영달하고 귀히 된 사람의 기상과는 매우 다르다. 어찌 시만이 그를 궁하게 만들었겠는가? 시 또한 그 궁함을 울었던 것이다. 또 이정면은 이홍남의 손자이다. 키가 작고 얼굴에 사마귀가 있어서 스스로 단사라 호하였다. 일찍이 비온 뒤에 시를 지었다. "" 그 벗 이춘영은 문인인데 늘 그 묘함을 칭찬하면서도 그 궁함을 질책하였다. 후에 과연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 대개 뜰의 진흙과 끊어진 지렁이(庭泥斷蚓)는 천함의 징조요, 벽의 햇살에 겨울 파리(壁日寒蠅)는 요절의 징조라 한다. 내가 수찬 윤계선과 함께 시인 윤효원의 집에서 작은 술자리를 가졌는데 윤계선이 즉석에서 시를 지었다. 그 한 연에, ""라 하였다. 좌중이 모두 아름답다고 칭찬하였으나 내가 "젊은 사람이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라 하였다. 과연 얼마 되지 않아 요절하였다. 아, 시라는 것은 정성의 허령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니, 요절과 천함을 미리 알고서 유연하게 발하여 기다리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곤 한다.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궁하기 때문에 시라는 것 또한 이렇게 되고 만다. 다만 재주 있는 자를 하늘도 또한 시기하니,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또 무엇을 탓하겠는가? 애석하구나.도 또한 시기하니,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또 무엇을 탓하겠는가? 애석하구나.)
  • E401  + (박 상국 순(朴相國淳)은 자(字)가 화숙(和叔)으로서 박우(朴祐)의 아들이요박 상국 순(朴相國淳)은 자(字)가 화숙(和叔)으로서 박우(朴祐)의 아들이요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그의 맑은 덕과 꿋꿋한 절개는 남이 따라갈 수 없었으며 정승으로 10년 동안 있으면서 아무 잘못도 없었다. 그런데 계미년(1583, 선조16)에 정인(正人)을 헐뜯는 자가 그를 모함에 빠뜨리면서 그의 죄 열 가지를 들어 배척할 것을 청하였는데, 선조대왕이 그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통촉해 준 덕분으로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병을 핑계로 물러나와 영평(永平) 땅에서 살았는데, 경치 좋은 그곳에서 유유자적하다가 아무 병 없이 생을 마쳤다. 그가 배척을 받고 서호(西湖)에 있을 때 시를 짓기를,</br></br>거문고 책 끼고 낭패당해 용산으로 물러나와 / 琴書顚倒下龍山</br>목란선(木蘭船)에 의지하고 바람 따라 흘러가네 / 一棹飄然倚木蘭</br>석양 노을 조각조각 붉기만 하고 / 霞帶夕暉紅片片</br>비온 뒤의 가을 물결 넘실넘실 푸르구나 / 雨增秋浪碧漫漫</br>꼬시래기 잎새 다 시들어 소객(騷客)의 마음 슬퍼지고 / 江蘺葉悴騷人怨</br>물여뀌 꽃 다 졌으니 백로도 밤에 추워하리 / 水蓼花殘宿鷺寒</br>백발 머리에 강 떠도는 나그네 신세 되어 / 頭白又爲江漢客</br>서리 이슬 잔뜩 맞고 여울을 거슬러 올라가네 / 滿衣霜露泝危灘</br></br>이라 하였는데 한때 널리 읊어졌다. 또 그의 ‘승려의 시축에 제함[題僧軸]’이라는 시에,</br></br>아침에 암자 물러나와 한가한 틈을 타서 / 小齋朝退偶乘閑</br>궤안에 기대고는 쓸쓸히 먼 산 바라보네 / 隱几蕭然看遠山</br>예로부터 세상 분규 그칠 날이 없었지만 / 終古世紛無盡了</br>오늘날 처신하기 더욱 더 어렵구나 / 秪今人事轉多艱</br>하늘 질러 지나간 새 까마득히 안 보이고 / 長空過鳥元超忽</br>석양녘 외로운 구름 갔다가는 돌아오네 / 落日孤雲自往還</br>생각나네 그 언젠가 먼 절에서 노닐던 일 / 遙想舊遊天外寺</br>목련꽃 활짝 피고 물은 졸졸 흘렀었지 / 木蓮花發水潺潺</br></br>이라 하였는데, 이것 역시 경절(警絶)하다고 칭해졌다. 그는 호를 사암(思庵)이라 하였다. 사암이 영평에 있을 때 소절(小絶) 한 수를 짓기를,</br></br>이따금 들려오는 외마디 산새 소리 / 谷鳥時時聞一箇</br>책상 머리 적요한데 서책들만 널려 있네 / 匡床寂寂散群書</br>어떡하나 백학대 앞 흐르는 저 시냇물 / 每憐白鶴臺前水</br>산문만 나가면은 이내 흙탕물 될 것이니 / 纔出山門便帶淤</br></br>라 하였는데, 한가하게 노닐며 자재(自在)하는 뜻과 홀로 높이 속세를 초월한 기상 모두가 이 시에 갖춰져 있다고 할 만하다.과 홀로 높이 속세를 초월한 기상 모두가 이 시에 갖춰져 있다고 할 만하다.)
  • E008  + (복양(濮陽) 오세재 덕전(吳世才德全)은 시를 힘차고 준수하게 지었다. 그 시복양(濮陽) 오세재 덕전(吳世才德全)은 시를 힘차고 준수하게 지었다. 그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 퍽 많지만, 강운(强韻)을 달아서 지은 것은 못 봤다.</br>그가 북산(北山)에 올라 극암(戟巖)을 시제(詩題)로 해서 시를 지으려고 할 때 사람을 시켜서 운자를 내게 하자, 그 사람은 일부러 험한 운자를 냈는데, 오 선생은 다음과 같이 썼다.</br></br>북령의 돌이 우뚝한 것을 / 北嶺石巉巉</br>사람들이 극암이라 부르네 / 邦人號戟巖</br>학을 탄 왕자 진(王子晉)을 칠 듯이 솟았고 / 逈摏乘鶴晉</br>하늘에 오르는 무함(巫咸)을 찌를 듯이 높다 / 高刺上天咸</br>휘어진 자루는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 揉柄電爲火</br>씻은 칼날은 서릿발처럼 희다 / 洗鋒霜是監</br>하필 병기를 만들어서 / 何當作兵器</br>초 나라를 망치고 범 나라를 존재시킬 것인가 / 亡楚却存凡</br></br>그 뒤에 몽고(蒙古) 사신이 왔는데 그는 시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이 시를 보고 재삼 찬탄하며,</br><u>“이 사람이 살아 있는가?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가? 혹시 만나 볼 수 있겠는가?”</br>하고 물었는데,</u> 우리나라 사람은 멍하니 대답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br>“지금 제고학사(制誥學士)의 직위에 있다고 왜 말하지 않았는가?”</br>하였다. 그가 권변(權變)에 어두움이 이와 같았으니 한탄스럽다.에 있다고 왜 말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그가 권변(權變)에 어두움이 이와 같았으니 한탄스럽다.)
  • E192  + (불분(不分)이란 두 글자는 중국의 방언이다. 분(分)은 분(噴)과 같으니 불불분(不分)이란 두 글자는 중국의 방언이다. 분(分)은 분(噴)과 같으니 불분(不分)은 곧 노여움이니, 노여움을 밖으로 분출하지 않고 노여움을 머금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노두(老杜 두보)의 시에,</br>노여움을 머금은 복숭아꽃이 비단보다 붉고 / 不分桃花紅勝錦</br>미워하는 버들개지는 솜보다 희도다 / 生憎柳絮白於綿</br>의 생증(生憎)은 곧 미워함으로 이것도 방언이다. 불분이 이미 방언이므로 생증으로써 대구를 한 것이다. 소동파(蘇東坡) 시의</br>노여움을 머금은 동군이 오로지 만물을 조절하네 / 不分東君專節物</br>의 불분도 이런 뜻이다.은 동군이 오로지 만물을 조절하네 / 不分東君專節物 의 불분도 이런 뜻이다.)
  • E429  + (산 속 깊은 골짜기에 이제 막 조그마한 초옥(草屋)을 엮었다. 때는 여름철 산 속 깊은 골짜기에 이제 막 조그마한 초옥(草屋)을 엮었다. 때는 여름철 녹음(綠陰)이 사방에 드리우고, 눈에 가득 멀리 포구(浦口)가 들어온다. 하루종일 나 홀로 앉아 있노라면, 들리는 것은 오로지 유려한 꾀꼬리들의 창화성(唱和聲) 뿐. 이에 절구(絶句) 한 수를 읊다.</br></br>녹음은 그림마냥 뜰 안에 깔리우고 / 綠陰如畵罨庭除</br>난간 밖의 가람 빛 푸른 하늘 일렁이네 / 檻外江光漾碧虛</br>얼마나 다행인가 넓고 깊은 임금 은혜 / 何幸聖恩天海大</br>유배 갔다 그래도 전원으로 돌아왔네 / 謫來猶得返田廬</br></br>이어 율시(律詩) 한 수를 또 읊다.</br></br>띠집을 청소하니 마음 또한 정결한데 / 瀟洒茅茨愜淨便</br>갈건 쓰고 앉은 자리 사방이 고요하네 / 葛巾烏几坐蕭然</br>집 짓는 저 제비들 진흙이 떨어지고 / 銜來燕子晴泥破</br>목욕 마친 오리 보게 동심원을 그리누나 / 浴罷鳧雛碧浪圓</br>산골 생활 이만하면 노년을 보내겠고 / 一壑己專成晩計</br>남은 인생 즐기면서 오래오래 살아볼까 / 餘生惟喜保長年</br>삼신산(三神山) 도솔천 모두가 헛된 소리 / 海山兜率俱虛語</br>은거한 바로 이곳 지상의 선계(仙界)라네 / 卽此幽居是地仙/ 海山兜率俱虛語 은거한 바로 이곳 지상의 선계(仙界)라네 / 卽此幽居是地仙)
  • E261  + (서사가(徐四佳)가 조사(詔使) 기순(祈順)의 시에 차운하여, 금암은 날이 따서사가(徐四佳)가 조사(詔使) 기순(祈順)의 시에 차운하여,</br>금암은 날이 따스하여 버드나무 새로 피고 / 金巖日暖初楊柳</br>검수는 봄이 차서 두견 아직 멀었네 / 劍水春寒未杜鵑</br>하였는데,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 공이 감탄해 마지않았다.</br>내가 호음에게 물으니, 곧 말하기를,</br>“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줄 모르겠다. 말에 병폐가 있다.”</br>하였다. 한 사람은 칭찬하고 한 사람은 낮게 평가하니, 두 사람의 뜻이 같지 않다. 물러나 생각하니, 이 한 연구는 오로지 원(元) 나라 사람의 시어(詩語)를 쓴 것인데, 저것은 두 땅이 서로 떨어져 있어서 초(初)ㆍ미(未) 두 자가 합당하다. 그러나 금암과 검수 사이는 아침에 떠나 저녁에 닿을 수 있는 곳이니, 어찌 날이 따스하다느니 봄이 차다느니 하는 그런 차이가 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말에 병폐가 있는 것이니, 마땅히 호음의 말을 옳다 해야 할 것이다.이른바 말에 병폐가 있는 것이니, 마땅히 호음의 말을 옳다 해야 할 것이다.)
  • E194  + (성화(成化) 병신년(1470, 성종 7)에 낭중(郞中) 기순(祈順)이 거듭 성화(成化) 병신년(1470, 성종 7)에 낭중(郞中) 기순(祈順)이 거듭 박천강(博川江 지금의 대령강(大寧江))을 지나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끝 구에 능(菱) 자 운을 놓았다. 사가 서문충공이 그 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왕복한 시가 각각 12편이나 되는데, 최후에 사가가,</br>남쪽으로 달성(達城)을 바라보니 집이 만 리나 떨어져 있는데 / 南望達城家萬里</br>꿈에 옛동산의 마름이 길게 둘려져 있도다 / 夢魂長繞故園菱</br>하였더니, 낭중이 말하기를, “마름은 동산에 있는 물건이 아닌데 이 시구는 무엇을 말함인가.” 하였다. 통역관이 나아가 말하기를, “서공의 집은 수국(水國 늪이나 하천 따위가 많은 고장)에 있어 마름이 가장 많이 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따름입니다.” 하였더니, 낭중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무방하다.” 하였다. 이것은 사가가 널리 고향을 가리켜 고원(故園)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끝내 말이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리켜 고원(故園)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끝내 말이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 E006  + (세속에서 전한 바에 의하면, 학사(學士) 정지상(鄭知常)이 일찍이 산사(山寺세속에서 전한 바에 의하면, 학사(學士) 정지상(鄭知常)이 일찍이 산사(山寺)에서 공부할 적에 달 밝은 어느 날 밤 혼자 절에 앉아 있노라니, 갑자기 시 읊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시에, 중은 보고 절이 있나 의심하고 / 僧看疑有刹 학은 보고 소나무가 없는 것을 한한다 / 鶴見恨無松 하니, 그는 귀신이 알려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뒤에 시원(試院)에 들어가니, 고관(考官)이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가 많다.’라는 것으로 글제를 삼고 봉(峯) 자 운(韻)을 냈다. 지상은 갑자기 그 글귀가 기억나서 이내 시를 잇달아 지어서 써 올렸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해가 중천에 당하니 / 白日當天中 뜬 구름이 절로 봉우리를 이루네 / 浮雲自作峰 중은 보고 절이 있나 의심하고 / 僧看疑有寺 학은 보고 소나무 없는 것을 한한다 / 鶴見恨無松 번개 빛은 초동의 도끼요 / 電影樵童斧 우레 소리는 은사의 종일러라 / 雷聲隱士鍾 누가 산이 움직이지 않는다 하느뇨 / 誰云山不動 석양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 飛去夕陽風 고관은 그 시를 읽어가다 함련(頷聯)에 이르러선 경어(驚語)라고 극찬하고는 드디어 우등으로 뽑았다 한다. 그러나 ‘중은 보느니’ ‘학은 보느니’한 한 연구는 비록 아름답지만, 기타의 것은 모두가 어린애의 말인데, 무엇을 취할 것이 있다고 우등으로 뽑기까지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을 취할 것이 있다고 우등으로 뽑기까지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 E028  + (시의 병통을 말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기쁜 일이다. 그의 말이 옳으면 받아들이고 옳지 않으면 나의 뜻대로 할 뿐이다. 어찌 듣기 싫어하기를 마치 임금이 간언을 거절하는 것과 같이 하여, 끝내 자기의 허물을 모르고 넘길 필요가 있겠는가? 무릇 시가 이루어지면 반복 관찰하되, 지은 것으로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이나 또는 평생 심히 미워하는 자의 시를 보듯하여, 하자(瑕疵)를 열심히 찾아도 오히려 하자가 없어야만 그 시를 세상에 내놓는다.)
  • E611  + (쌍매의 문앵시(聞鸎詩)에 삼십육궐(三十六闕) 후궁에 봄 나무 깊숙하고 / 三十六宮春樹深 미인이 꿈을 깨니 남창은 어둑해라 / 蛾眉夢覺午窓陰 영롱한 울음소리 수심 엉겨 듣자 하니 / 玲瓏百囀凝愁聽 모두가 향규의 님 바라는 마음일레 / 盡是香閨望幸心 라 했으니 두목지(杜牧之)의 시와 흡사하다.)
  • E221  + (예로부터 중국에는 은둔한 군자(君子)가 많아서 혹은 산림에도 숨고 혹은 성시예로부터 중국에는 은둔한 군자(君子)가 많아서 혹은 산림에도 숨고 혹은 성시(城市)에 섞여서 갈옷과 베옷을 입고 일생을 마쳤으면서도 이름은 만세에 전하는 이가 있는데, 본국은 도량이 좁고 인심이 잘아서 인물을 의논할 때마다 문벌을 가지고 따지기 때문에, 진실로 양반의 자손이 아니면 문묵(文墨)에 능히 분발하는 이가 적은데 하물며 상인(商人)ㆍ공인(工人)ㆍ서민이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근래 시정(市井) 사람 박계강(朴繼姜)이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중종(中宗) 반정 초년에 명사들을 모시고 창의문(彰義門) 밖에서 노는데, 시구(詩句)를 짓기를,</br>건곤은 새 우로요 / 乾坤新雨露</br>시주는 옛 산천이로다 / 詩酒舊山川</br>하니, 제공들이 탄복하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강목계(姜木溪)가 일찍이 박계량과 함께 목멱산(木覓山 서울 남산)에 올라서 운자(韻字)를 불러 시를 짓게 하였더니, 곧 입으로 부르기를,</br>지팡이를 짚고 산에 올라 아득한 사이를 바라보니 / 扶笻登眺渺茫間</br>만경의 창파와 만점의 산이로다 / 萬頃滄波萬點山</br>구복이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한 가지 빌미가 되어 / 口腹於吾眞一崇</br>내 몸이 강가에서 늙지 못한다 / 不將身世老江干</br>하였다. 강목계가 놀라 탄복하여 마침내 시은 선생전(市隱先生傳)을 지었으니, 시정 사람으로 그 시가 이와 같은 것도 동국에 드물게 있는 일이다.었으니, 시정 사람으로 그 시가 이와 같은 것도 동국에 드물게 있는 일이다.)
  • E589  + (옛날 내가 연산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에 아이종이 학질을 앓았다. 내가 장난옛날 내가 연산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에 아이종이 학질을 앓았다. 내가 장난삼아 사운 율시를 지어 그의 등에 붙였더니 학질이 곧 나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 대개 학질귀는 물의 신이고 토가 수를 이기므로 그래서 초사의 토백의 말을 사용한 것이다. 그 뒤로 집안에 학질을 앓는 자가 있으면 그 헤어진 종이를 가져다가 등에 붙이면 효과가 없는 이가 없었다. 이로부터 이웃 마을에 이 병을 앓는 사람이 있으면 종이를 베껴서 주었는데 온 고을이 모두 그러하였다. 심지어 은진, 석성, 부여, 공주, 진잠, 금산의 사이에서 서로 베껴 써서 전해주었는데, 비록 여러 해 묵은 학질이라도 종이 한 장으로 효과를 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라도 종이 한 장으로 효과를 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 E424  + (왕감주(王弇州 명(明) 왕세정(王世貞))의 열사(閱史)라는 시를 보건대, 왕감주(王弇州 명(明) 왕세정(王世貞))의 열사(閱史)라는 시를 보건대,</br></br>책 덮고 사립에 기대 흥망 성쇠 살펴보니 / 掩卷柴門數落暉</br>옛적부터 성인 정치 모두들 바랐지만 / 古來俱羨聖之威</br>어찌 알았으랴 이 세상 하 많은 일 / 那知天地長多事</br>모두가 영웅들 날뛴 탓임을 / 總爲英雄未息機</br>차마 두 눈 뜬 채 인체를 보게 되고 / 雙眼耐他人彘在</br>육신은 잘도 제파되어 돌아왔구나 / 一身贏得帝羓歸</br>건어물도 조룡의 악취 막지 못했고 / 鮑魚不救祖龍臭</br>제 환공(齊桓公)의 살찐 몸 구더기가 슬었었지 / 螻蟻翻因齊霸肥</br>대궐에 있다가도 사태가 일변하면 초가로 옮겨지고 / 黃屋事移輸白屋</br>곤룡포 입다가도 인연이 다하면은 서민 옷 입게 되네 / 衮衣緣盡着靑衣</br>임금의 자손들도 때때로 운명 뒤바뀌고 / 王孫子姓時時改</br>한식날 찾아와도 왕릉들 배를 곯는구나 / 寒食園陵箇箇饑</br>망아지 틈새 지나가듯 세상 목숨 어느새 다 끝나고 / 塵世隙駒俄自了</br>비평가들 붓 한 번 까딱만 하면 쉽게도 못된 놈되고도 남지 / 竪儒毫免易成非</br>강남 땅 사슴 돼지 노닐던 그 곳 / 江南鹿豕同遊處</br>아름드리 거목들만 하늘 찌르네 / 喬木連雲盡百圍</br></br>라 하였는데, 가령 제왕들에게 혼이 있다면 이 곡(曲)을 듣고 어찌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가령 제왕들에게 혼이 있다면 이 곡(曲)을 듣고 어찌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 E531  + (용재 이행이 원접사가 되고 이희보, 정사룡, 소세양이 종사관이 되어 의주에 용재 이행이 원접사가 되고 이희보, 정사룡, 소세양이 종사관이 되어 의주에 있을 적에, '희롱삼아 경사로 떠나는 사람이 기생과 이별하며'시를 지었다. 이행이 먼저 수구를 ""라 짓고 여러 종사관들에게 이어서 짓도록 하니 이희보, 정사룡, 소세양이 이어서 각각 한 구씩을 지었다. "" 무릇 경사로 가는 사람이 압록강에서 전별할 때에 강변의 작은 돌을 주워다가 반씩 나누어 정인과 함께 징험으로 삼는 것이 옛부터의 일이다. 동파 소식의 시에, ""라 하였으니, 이 결구는 과연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동파 소식의 시에, ""라 하였으니, 이 결구는 과연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 E417  +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애도한 시에, 세상 밖 구름 산 깊고 또 깊숙한데 / 世外雲山深復深 시냇가 초가집 이젠 찾기 어려워라 / 溪邊草屋已難尋 배견와 위에 떠오른 삼경의 달이여 / 拜鵑窩上三更月 선생의 일편 단심 지금도 비춰주네 / 曾照先生一片心 라 하였는데, 사암을 애도하는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배견와는 바로 사암이 거하던 별장의 이름이다.)
  • E395  + (우리 나라 서경(西京 평양)은 풍광과 누각의 경치가 빼어난데다 미녀들과 풍류우리 나라 서경(西京 평양)은 풍광과 누각의 경치가 빼어난데다 미녀들과 풍류를 즐길 수가 있어 끊임없이 중국에 가는 사신들이 이곳에 도착하게 되면 갈 길을 잊은 채 오래도록 여기에 머물며 즐기기 일쑤였고 거의 정신을 잃고서 완전히 빠져버리는 경우마저 있곤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의 학사(學士) 정지상(鄭知常)의 시에</br>비 갠 뒤의 긴 둑길 풀빛 더욱 푸르른데 / 雨歇長堤草色多</br>그대 보내는 남포에 구슬픈 노래 울리누나 / 送君南浦動悲歌</br>어느 때나 대동강 물 마를 날이 있을까 / 大同江水何時盡</br>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 別淚年年添綠波</br>라고 하였는데, 온 세상이 다투어 전하면서 지금에 이르도록 절창(絶唱)으로 떠받들고 있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경진년(1580, 선조13) 년간에 가운(嘉運) 최경창(崔慶昌)이 대동 찰방(大同察訪)이 되고 군수(君受) 서익(徐益)이 평양서윤(平壤庶尹)이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시인이었다. 이에 그 운(韻)을 따서 채련곡(採蓮曲)을 지었는데, 최(崔)의 시에,</br>길고 긴 강 언덕에 수양버들 늘어지고 / 水岸悠悠楊柳多</br>조각배 저 멀리 들려오는 연 따는 노래소리 / 小船遙唱採菱歌</br>붉은 꽃잎 모두 지고 가을바람 살랑살랑 / 紅衣落盡西風起</br>해 저물녘 텅 빈 강에 일어나는 저녁 물결 / 日暮空江生夕波</br>이라 하였고, 서(徐)의 시에서는,</br>많이들 연밥 따는 남쪽 호수 아낙네들 / 南湖士女採蓮多</br>새벽부터 단장하고 서로 노래 부르누나 / 曉日靚粧相應歌</br>치마 가득 찰 때까지 배도 꼼짝하지 않고 / 不到盈裳不回棹</br>가끔가다 부서지는 먼 물가의 하얀 물결 / 有時遙渚阻風波</br>라 하였다. 그 뒤에 이순(而順) 고경명(高敬命)과 익지(益之) 이달(李達)이 뒤미처 화운(和韻)하였는데, 고(高)의 시에,</br>뱃전에 부딪치는 맑은 물결 복숭아꽃 / 桃花晴浪席邊多</br>연꽃 속에 일렁이며 뱃노래 울려 퍼지누나 / 搖蕩蓮舟送棹歌</br>취해 기댄 미인 생각 아마 잊지 못할텐데 / 醉倚紅粧應不忘</br>산들바람 펄럭펄럭 휘장에 물결 이네 / 小風輕颺幙生波</br>라 하였고, 이(李)의 시에는,</br>들쭉날쭉 연잎 속에 연밥도 하 많은데 / 蓮葉參差蓮子多</br>연꽃 잎새 사이로 여인들 노래 소리 / 蓮花相間女郞歌</br>돌아올 땐 물목에서 짝과 약속 지키려고 / 來時約伴橫塘浦</br>고생고생 배 저으며 물 거슬러 올라가네 / 辛苦移舟逆上波</br>라 하였다. 이들 모두가 일대(一代)의 가작들인데 논하는 자들은 그 중에서도 이(李)의 작품의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한다.인데 논하는 자들은 그 중에서도 이(李)의 작품의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한다.)
  • E207  + (우리 동방의 의논이 옛날부터 부녀자의 직책은 음식을 만들고 길쌈을 하는 것뿐우리 동방의 의논이 옛날부터 부녀자의 직책은 음식을 만들고 길쌈을 하는 것뿐이요, 글과 글씨의 재주는 그들에게 마땅한 것이 아니라 하여 비록 타고난 재주가 남보다 출중한 사람이 있어도 꺼리고 숨겨 힘쓰지 않았으니 한탄할 일이다. 삼국 시대에는 알려진 사람이 없고, 고려 5백년 동안에는 다만 용성(龍城) 창기 우돌(于咄)과 팽원(彭原) 창기 동인홍(動人紅)만이 시 지을 줄을 알았고, 본조에는 정씨(鄭氏)ㆍ성씨(成氏)ㆍ김씨(金氏)가 있는데, 김씨는 시 편이 있어 세상에 전하나 너무 약하여 기운이 적고, 오직 정씨의</br>어젯밤 봄 바람이 골방에 들어오니 / 昨夜春風入洞房</br>한 장의 구름 비단 붉고 향기로움 난만하다 / 一張雲錦爛紅芳</br>이 꽃 피는 곳에 우짖는 새소리 듣노라니 / 此花開處聞啼鳥</br>한편으론 그윽한 자태 노래하는 듯, 한편으론 애를 끊는 듯하여라 / 一詠幽姿一斷腸</br>란 시와 성씨의</br>눈에는 두 줄기 눈물을 머금고 / 眼帶雙行涙</br>가슴에는 만 리의 마음을 감추었네 / 胸藏萬里心</br>문 밖의 붉은 복사꽃 일시에 다 지고 / 門外紅桃一時盡</br>수심 속 흰 머리 십분이나 새로워라 / 愁中白髮十分新</br>란 시와 김씨의</br>지경이 궁벽하니 오는 사람 적고 / 境僻人來少</br>산이 깊숙하니 시속 선비 드물구나 / 山深俗士稀</br>집이 가난하여 한 말 술도 없으니 / 家貧無斗酒</br>묵고 갈 손이 밤에 돌아가는구나 / 宿客夜還歸</br>란 시가 조금 사람들의 뜻에 든다.갈 손이 밤에 돌아가는구나 / 宿客夜還歸 란 시가 조금 사람들의 뜻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