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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st of all pages that have property "TextKor" with value "그 시는 고고(高古)하고 웅혼(雄渾)하니 초당(初唐)의 모든 저작에 비해도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이때 동방의 문풍(文風)이 아직 왕성하지 못했는지라, 을지문덕의 이 한 절구시(絶句詩) 외에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여주가 또한 그러하였으니 기이하다.". Since there have been only a few results, also nearby values are displa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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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680  + (지난 기유년(1609, 광해군1) 조사(詔使)가 한강에서 유람할 때, 당시 지난 기유년(1609, 광해군1) 조사(詔使)가 한강에서 유람할 때, 당시 시로 유명한 이들이 모두 제술관으로 따라갔다. 배를 타고 뒤에 있으면서 서로 고금의 시를 평론하는데 온 배안이 시끌벅적하였다. 논의가 소재에 이르자 한결같이 말하기를,</br>“대가의 솜씨이니 어찌 감히 가볍게 의론할 수 있겠느냐.”</br>하였는데, 자리에 있던 두세 사람만은 유독 말하기를,</br>“단율은 비록 아름다우나 장률은 거칠어서 취할 만하지 못합니다.”</br>하였다. 전적 차운로(車雲輅)가 팔뚝을 걷으며 크게 외치기를,</br>“소가(小家)의 작품이 비록 일편 한 구절은 읊조릴 만해도 자잘한 것들을 주워 모았기 때문에 전혀 기력이 없소. 소재의 작품 같은 것은 만균(萬鈞)의 기세가 있으니 어찌 감히 그와 더불어 우열을 다투겠소. 풀밭의 귀뚜라미가 큰 종소리를 만나면 울음이 그치는 것과 다를 바 없소.”</br>하였다. 인하여〈유금강산(遊金剛山)〉장률 한 수를 들어 읊었는데, 그중,</br></br>어두운 골짝 늙은 느티나무에 구름이 머물고 / 屯雲古檜陰陰洞</br>얕은 물굽이 높다란 다리에 해가 기우네 / 落日危橋淺淺灣</br></br>라는 구절에서는 거듭 영탄(詠嘆)하였다. 내가 보기에 윗구는 혼후(渾厚)하고, 아랫구는 아량(雅亮)하여 경중이 고르게 맞지 않는 듯하다.혼후(渾厚)하고, 아랫구는 아량(雅亮)하여 경중이 고르게 맞지 않는 듯하다.)
  • E055  + (철성(鐵城) 최영(崔瑩)은 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늘 “황금을 보기를 철성(鐵城) 최영(崔瑩)은 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늘 “황금을 보기를 흙같이 하라.[見金如土]”라고 가르쳤으므로, 항상 이 네 글자를 큰 띠[紳]에 써서 종신토록 지니고 다녀 잊지 않았다. 국정(國政)을 잡아 위신이 중외에 떨쳤으나 남의 것을 조금도 취하지 아니하고 겨우 먹고 사는 데 족할 따름이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시중(侍中)이 되었을 때에 점련(占聯)하기를,</br>3척 칼머리에 사직이 편하고나 / 三尺劍頭安社稷</br>하니, 당시의 문사들은 아무도 대구를 짓지 못했는데, 공이 재빨리,</br>한가닥 채찍 끝으로 천지가 안정된다 / 一條鞭末定乾坤</br>하니,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끝으로 천지가 안정된다 / 一條鞭末定乾坤 하니,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 E061  + (파주(坡州) 서교(西郊)는 황폐하여 사람이 살지 못했는데, 정당(政堂) 안목파주(坡州) 서교(西郊)는 황폐하여 사람이 살지 못했는데, 정당(政堂) 안목(安牧)이 처음으로 넓게 밭을 개간하고 큰 집을 짓고 살았다. 정당이 시를 잘하여 한 구(句)를 짓기를,</br>목동의 피리 소리 긴 포서 밖에 들리고 / 牧笛一聲長浦外</br>고깃배의 두어 점 등불이 낙암 앞에 보이도다 / 漁燈數點洛岩前</br>하였다. 그 손자 원에 이르러 지극하게 창성하였는데, 안팎으로 차지한 밭이 무려 수만 경(頃)이나 되고 노비도 백여 호나 되었다. 늙은 고목 천여 그루가 10리에 그늘을 이루고 거위와 황새가 그 사이에서 울고 떠들었다. 공은 매를 팔 위에 올려놓고 누런 개를 데리고 매일 왕래함을 낙으로 삼았다. 지금도 남은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는데 모두 그 자손이다.은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는데 모두 그 자손이다.)
  • E167  + (허금의 '독유시'는 ""로, '拾落梅'라는 말은 뜻이 새롭다. 안지의 시에 ""로, '拳'자가 기이하다. 원재 정추의 '울진관사'시에 ""라 하니, 경물을 즉시 읊은 것이 그림과 같다.)
  • C002  + (그 시는 고고(高古)하고 웅혼(雄渾)하니 초당(初唐)의 모든 저작에 비해도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이때 동방의 문풍(文風)이 아직 왕성하지 못했는지라, 을지문덕의 이 한 절구시(絶句詩) 외에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여주가 또한 그러하였으니 기이하다.)
  • E358  + (교관 정군경(鄭君敬 정작(鄭碏))이 나에게 윤창주(尹滄洲 윤춘년(尹春年))가교관 정군경(鄭君敬 정작(鄭碏))이 나에게 윤창주(尹滄洲 윤춘년(尹春年))가 임자년(1552, 명종7) 가을에 지은 증별시(贈別詩)를 보여 주었다. 시는 다음과 같다.</br>문장에는 정맥이 있어 / 文章有正脈</br>뜻과 음이 위주이거늘 / 意音爲之主</br>이 도가 오래 전하지 않아 / 此道久不傳</br>소경과 귀머거리 되고 말았네 / 已矣爲聾瞽</br>성(性)과 정(情)은 본디 맑으니 / 性情本湛然</br>뜻만이 고무시킬 수 있다네 / 惟意能鼓舞</br>슬픔과 기쁨은 각기 상응하고 / 哀樂各相應</br>안팎은 원래 하나의 법칙이네 / 表裏元一矩</br>원기는 참으로 호연하니 / 元氣信浩然</br>큰 음악에 어찌 악보 있으랴 / 大樂安有譜</br>음조와 반절은 문자에 담겨 있고 / 調切寄文字</br>가락은 종소리 북소리에 응하네 / 節奏應鐘鼓</br>슬프다, 나는 옛글을 읽으며 / 嗟余讀古書</br>십 년 동안 고생하며 노력했네 / 十年勤自苦</br>다행히 하루아침에 터득하여 / 一朝幸有得</br>눈으로 보듯 훤하게 되었네 / 敢謂如目覩</br>정군은 비록 나이 적으나 / 鄭子雖年少</br>마음은 고인을 간절히 사모하네 / 其心甚慕古</br>나를 따르며 이미 누차 물었지만 / 相從已屢問</br>도움된 바가 없어 부끄럽구나 / 自愧無所補</br>기운을 길러 근본으로 삼고 / 養氣以爲本</br>책을 읽어 보탬으로 삼았네 / 讀書以爲輔</br>혈기가 왕성하지 않다면 / 血氣苟不盛</br>만 권 읽어도 끝내 헛일이라네 / 萬卷終鹵莽</br>그대가 귀 기울여 듣기 바라니 / 願君聽殷勤</br>내 말은 진심에서 나왔다네 / 我言出肺腑</br>어찌 문장 짓는 법에 불과하랴 / 豈徒作文法</br>도를 배우는 것도 여기서 얻으리 / 學道從此取</br>이제 그대 멀리 떠나서 / 今君有遠行</br>적막한 남쪽으로 돌아가네 / 寂寞歸南土</br>오랫동안 만날 일도 없으리니 / 追隨應久廢</br>헤어져 있는 기간 헤아릴 수 있으랴 / 別離那可數</br>옛사람 흉내내어 증별시 주고 싶지만 / 贈言欲效古</br>내 재주는 이백이나 두보가 아니라네 / 我才非李杜</br>서성거리며 차마 작별 못하는데 / 徘徊不忍別</br>가을 바람이 강가에 불어오네 / 秋風動江浦</br>이때 정군의 나이는 겨우 스물이었는데 창주가 이미 이렇게까지 인정하였다. 이 시는 상당히 법도가 있어 볼만하다. 창주가 이미 이렇게까지 인정하였다. 이 시는 상당히 법도가 있어 볼만하다.)
  • E717  + (권협은 포의의 가난한 선비로 석주 권필의 아우이며 호는 초루이다. 그의 '송권협은 포의의 가난한 선비로 석주 권필의 아우이며 호는 초루이다. 그의 '송도를 회고하며' 절구시 한 수는 다음과 같다. "" 이 시가 한때 널리 회자되었다. 권협이 일찍이 삼각산 승가사에 유람을 갔는데 때마침 여러 명사들이 와서 모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권협이 자리에서 시에 대해 태연하게 이야기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업신여기며 말했다. "오늘은 이름난 관리들의 모임인데 저 서생이 어찌 당돌하게 끼어드는가." 권협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의 벼슬이 어찌 나의 한 구절에 겨루겠는가." 여러 명사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구를 읊어 주기를 청하였다. 권협이 즉시 낭랑하게 ""의 구절을 읊으니 여러 명사들이 이에 크게 놀라 상석에 모시고 공경하고는 하루종일 취하도록 마셨다.명사들이 이에 크게 놀라 상석에 모시고 공경하고는 하루종일 취하도록 마셨다.)
  • C002  +
  • E517  + (김성립이 젊었을 때 강가의 서재에서 독서하였다. 그의 아내 허씨가 시를 보내어 말했다. "" 이 두 작품은 방탕한 것에 가까워서 문집에 싣지 않았다. 그 밖의 악부나 궁사 등의 작품들은 대부분 고시를 훔쳐 쓴 것이다. 그래서 참의 홍경신과 정랑 허적은 모두 그 일가 사람인데 항상 말하기를 허초희의 시는 두세 편 외에는 모두 위작이라 하였다. 그 '백옥루상량문' 또한 허균과 이재영이 지은 것이라 한다.)
  • E273  + (남명(南溟) 조 처사(曺處士 조식(曺植))가 사미정(四美亭) 호음(湖陰)의 남명(南溟) 조 처사(曺處士 조식(曺植))가 사미정(四美亭) 호음(湖陰)의 시에 차운하였다. 첫째,</br>늙어서 매운지 신지 구미마저 잃었고 / 垂老辛酸口失宜</br>늙는 것 잊었으나 기는 잊지 못했네 / 縱然忘老未忘機</br>백 굽이 뚫린 깊은 골에 몸은 오히려 나그네요 / 百穿深壑身猶客</br>반쯤 잠든 높은 정자 꿈이 벌써 기이하다 / 半睡高亭夢已奇</br>병목(마을 이름)의 늦은 봄에 사람은 이미 갔고 / 竝木殘春人舊謝</br>사방(물이름)의 가랑비에 물 비로소 불어나네 / 舍邦微雨水初肥</br>장군은 유에 봉해질 계책 어찌 없겠는가 / 將軍肯少封留計</br>일개 서생이 또한 이곳에 있도다 / 一介書生亦在斯</br>하였고, 둘째에,</br>언덕에 날마다 즐거움 어기지 않아 / 斯干日日樂無違</br>이것을 버리고 하늘 이야기 한들 진기할 것 없네 / 舍此談天未是奇</br>지리산 삼장 사는 곳과 비슷하고 / 智異三藏居彷彿</br>무이 구곡(武夷九曲) 물이 비슷하구나 / 武夷九曲水依俙</br>담에 덮은 기와는 늙어 바람에 나부끼어 가고 / 鏝墻瓦老風飄去</br>돌길 갈림길 깊어도 말이 스스로 아네 / 石路歧深馬自知</br>흰 머리로 거듭 오니 옛 주인이 아니고 / 皓首重來非舊主</br>한 해 봄 다 가는데 옷 없다는 시 읊조린다 / 一年春盡咏無衣</br>하였다. 말은 고상하고 뜻이 깊어 얕은 식견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일 반드시 양자운(揚子雲)이 나와야 이것을 알 것이다.있는 것이 아니다. 후일 반드시 양자운(揚子雲)이 나와야 이것을 알 것이다.)
  • E679  +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오언율시는 두보의 시 작법과 매우 비슷하다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오언율시는 두보의 시 작법과 매우 비슷하다. 하나의 글자, 한마디의 말이 모두 두보에서 나왔다. 그의</br></br>시서예를 배우지 못했으니 / 詩書禮學未</br>사십구 년 세월을 그르쳤네 / 四十九年非</br></br>라는 구절을 세상에서 모두 전하여 외지만, 사실은 두보의 시〈영월(詠月)〉에서 이른</br></br>나그네 수심 결에 보니 / 羈棲愁裏見</br>스물 네 번이나 밝았네 / 二十四回明</br></br>에서 나온 것이니, 모방에 뛰어나다고 이를 만하다. 두보의 장률은 종횡무진하고 웅건호탕하여 배운다고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동파(蘇東坡), 황정견(黃庭堅), 진사도(陳師道), 진여의(陳與義) 모두 두보의 시체를 감히 모방하지 못하였으니, 소재가 힘써 따르고자 하였으나 어려운 일이었다.</br>부윤(府尹) 강복성(康復誠)이 일찍이 소재에게서 시를 배웠는데, 소재가 말하기를,</br>“나와 호음(湖陰)은 시의 명성이 서로 비슷하여 세상에서는 그 우열을 분별하지 못하지. 나의 장률은 호음에게 미치지 못하고 호음의 단율은 나에게 미치지 못하니, 각각 장점이 있는 것뿐이라네.”</br>라고 하였다.단율은 나에게 미치지 못하니, 각각 장점이 있는 것뿐이라네.” 라고 하였다.)
  • E081  + (독곡(獨谷)이 기우(騎牛) 이선생(李先生)과 친하였는데, 하루는 방문하였으나독곡(獨谷)이 기우(騎牛) 이선생(李先生)과 친하였는데, 하루는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문짝에 쓰기를,</br>덕이는 태평한 해를 보지 못했는데 / 德彝不見太平年</br>80에 또 봄을 만났으니 다시 하늘에 감사하도다 / 八十逢春更謝天</br>도리 꽃이 성에 가득하고 향우가 지나갔는데 / 桃李滿城香雨過</br>적선은 어떤 술집에서 자고 있는가 / 謫仙何處酒家眠</br>하였다. 또 어렸을 적에 조시중(趙侍中)이 좌주(座主)를 맞아 잔치를 하였다. 독곡이 그 자리에서 축하하는 시를 지었는데,</br>선비를 보면 바야흐로 좌주의 어짊을 아나니 / 得士方知座主賢</br>시중이 시중 앞에 헌수하도다 / 侍中獻壽侍中前</br>하늘이 좋은 비를 내려 가객을 머무르게 하고 / 天敎好雨留佳客</br>바람은 꽃잎을 날려 춤추며 연석에 떨어지게 하도다 / 風送飛花落舞筵</br>하여 좌우에 있는 사람이 모두 탄복하였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용(成石容). 독곡의 형)이 듣고 책망하기를, “선비가 재주를 꺼림은 샘많은 계집을 싫어하는 것보다도 심하거늘 어찌하여 너는 사양하지 않고, 감히 먼저 시를 지어 몸가짐을 생각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것은 당시는 말세 사람들이 흔히 재주 있음을 시기하여 서로 해하는 까닭으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들이 흔히 재주 있음을 시기하여 서로 해하는 까닭으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E119  + (목은 이색의 시에 ""라 하였다. '구름 아득하다(雲藹藹)'라 한 것은 시를 말하고, '밤이 깊다(夜沈沈)"라 한 것은 술을 말한다. 이는 옛 사람들의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쌍매당 이첨도 ""라 했다. 이색이 또 ""라 했는데, 세 글자 시어를 쓴 것이 새롭다. 이첨의 시에 ""라 했는데, "이끈다(引)"는 글자가 기이하다.)
  • E126  + (문충공 달성 서거정은 호가 사가이다. '왕형공의 시집을 읽고' 절구에, ""라 하였으니 자못 의론이 담겨 있다. 또 '절구시'의 말련에서 ""라 하고, 또 ""라 하였으며, 또 ""라 하고, 또 ""라 하며, 또 ""라 하였으니 그 커다란 솜씨가 실로 가는 곳마다 우수하기가 이와 같아서, 작은 시에도 모두 극도로 한적한 뜻이 있었다. 또 '눈' 시에서, ""라 하였다.)
  • E005  + (삼한(三韓)은 하(夏) 나라 적부터 중국과 통하였으나 문헌이 민멸되어 전하지삼한(三韓)은 하(夏) 나라 적부터 중국과 통하였으나 문헌이 민멸되어 전하지 않고, 수ㆍ당(隋唐) 이래로 비로소 작자가 있다. 을지문덕이 수 나라 장수에게 준 시와 신라 진덕 여주가 당 나라 임금에게 바친 송(頌)과 같은 것이 비록 간책(簡冊)에 실려 있으나 알려지지 않았다. 최치원에 와서야 당 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고 문장으로 이름을 천하에 날렸다. 그가 남긴 시 중의 한 연구(聯句)에, 곤륜산이 동으로 뻗어 다섯 산이 푸르고 / 崑崙東走五山碧 성수해(星宿海)가 북으로 흘러 한 물이 누르다 / 星宿北流一水黃 하였는데, 동년인 고운은, “이 글귀는 바로 하나의 여지지(輿地志)다.” 하였다. 대개 중국의 오악(五岳)은 모두 곤륜산에서 발달하고, 황하(黃河)는 성수해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가 윤주(潤州) 자화사(慈和寺)에 쓴 시의 한 글귀에, 화각(畫角) 소리 속에 아침저녁으로 이는 물결이요 / 畫角聲中朝暮浪 푸른 산 그림자 속엔 고금의 사람일세 / 靑山影裏古今人 하였다. 학사(學士) 박인범(朴仁範)이 경주(涇州) 용삭사(龍朔寺)에 쓴 시에,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등불은 험한 길을 밝히고 / 燈撼螢光明鳥道 무지개처럼 구부정한 사닥다리는 바위틈에 놓였네 / 梯回虹影落巖扃 하였다.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이 사천(泗川) 구산사(龜山寺)에 쓴 시에, 문 앞 손의 돛대엔 큰 물결이 일고 / 門前客棹洪波急 대나무 밑 중의 바둑엔 백일이 한가하구나 / 竹下僧棊白日閑 하였는데, 우리나라가 시로 중국을 울린 것은 이상 세 사람에서부터 시작했다. 문장이 나라를 빛내는 것이 이와 같다.것은 이상 세 사람에서부터 시작했다. 문장이 나라를 빛내는 것이 이와 같다.)
  • E326  + (상(尙) 정승은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의 〈화죽(畫竹)〉과 〈청우(晴雨상(尙) 정승은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의 〈화죽(畫竹)〉과 〈청우(晴雨)〉두 장자(障子)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재(企齋)와 호음(湖陰)에게 나누어 시를 써 달라고 청하였는데, 각기 팔운 배율을 써서 보냈다. 기재 시의 한 구에는,</br>소자첨(송소식(蘇軾)의 자) 간 후에 진필이 없더니 / 子瞻去後無眞筆</br>여가(송 문동(文同)의 자) 죽은 이후 이 사람이 있다 / 與可亡來有此人</br>하였고, 호음의 시 한 구에는,</br>정신은 소동파의 삼생의 동안 익힌 솜씨를 옮겼고 / 神移蘇老三生習</br>기세는 문옹(문동을 지칭)의 만 척 길이를 압도하였네 / 勢倒文翁萬尺長</br>라고 하여, 다 칠운(七韻)이었다. 그 용사(用事)와 조의(措意)가 동일하였으되 시어를 쓰는 방법은 아주 달랐다. 평생 두 사람의 기상을 상상할 수 있는데 천연스럽고 독특한 것은 쉽게 우열을 논할 수 없다.기상을 상상할 수 있는데 천연스럽고 독특한 것은 쉽게 우열을 논할 수 없다.)
  • E303  + (서얼 이달은 자못 시명이 있었다. '신륵사 중의 시권에 제하다'시는 아래와 같다. "" 졸암 이충작이 또한 시를 잘한다 하였는데 그 운에 차운하였다. "" 당시 사람들이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하였다. 내가 이충작에게 이를 말하니 답했다. "이달의 시는 비록 청고한 듯하나 부허하여 엄정함이 없으니 어찌 취할 만하겠는가." 이는 이충작이 자신을 이달보다 높이 본 것이다.)
  • E009  + (선배 중에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난 자가 일곱 사람인데, 그들은 스스로 한때의선배 중에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난 자가 일곱 사람인데, 그들은 스스로 한때의 호준(豪俊)이라 생각하고 서로 어울려서 칠현(七賢)이라 하였으니, 아마 진(晉) 나라의 칠현을 사모한 것이었으리라. 매일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시며 시를 짓되 자기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하니, 세상에서 그를 빈정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내 나이 19세였는데, 오덕전(吳德全)이 망년우(忘年友)로 삼아 항상 그 모임에 데리고 갔었다. 그 뒤 덕전(德全)이 동도(東都 경주(慶州))에 놀러갔을 때 내가 다시 그 모임에 참석하였더니, 이청경(李淸卿 청경은 이담지(李湛之)의 자)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자네의 덕전이 동도에 놀러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자네가 그를 보충(補充)하겠는가?” 하므로, 내가 곧 대답하기를, “칠현이 조정의 벼슬인가요? 어찌 그 궐(闕)을 보충한단 말이요? 혜강(嵇康)ㆍ완적(阮籍) 뒤에 그를 계승(繼承)한 이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하니, 모두들 크게 웃었다. 또 나보고 시를 짓게 하면서 춘(春)ㆍ인(人) 두 자를 운(韻)으로 부르기에 내가 곧, 영광스럽게도 대나무 아래 모임에 참여하여 / 榮參竹下會 유쾌히 독 안의 술을 마시네 / 快倒甕中春 모르겠다 칠현 중에 / 未識七賢中 누가 오얏씨 뚫는 사람인고 / 誰爲鑽核人 라고 불렀더니, 모두들 불쾌한 기색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곧 거만스러운 태도로 거나하게 취해서 나와 버렸다. 내가 젊어서 이처럼 미치광이 같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광객(狂客)으로 지목했었다.럼 미치광이 같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광객(狂客)으로 지목했었다.)
  • E715  + (선조 병술년(1577) 알성시에서 오산 차천로가 사관으로써 거자 여계선을 대선조 병술년(1577) 알성시에서 오산 차천로가 사관으로써 거자 여계선을 대신하여 시험을 쳤다. 일이 발각되어 곤장을 맞고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북병사가 조정에 하직할 때 임금이 차비문 밖으로 불러 교시하였다. "차천로는 비록 죄로 인하여 유배를 당했으나 내 일찍이 그 재주를 사랑하니 그대가 잘 돌봐주어라." 병사가 임지로 부임하여 차천로를 극진하게 후대하였다. 차천로가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병사가 말했다. "하직하던 날에 임금께서 친히 잘 돌보라 명하셨으니 어찌 감히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차천로가 이를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환되었으니, 선조가 인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뜻이 아, 지극하다. 중국 사신 주지번이 일찍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돌아갈 때에 동방의 사실을 가지고 황제에게 복명하였다. 그 중 한 조목에, "동방의 차천로라는 자는 문장이 기이하고 장대하다. 일찍이 북쪽으로 유배되었는데, 시 한 구에 ''라 하였다."는 등의 말을 하였다. 그가 중국에서 중히 여겨진 것이 또한 이에 이르렀다. 무오 연간(1618)에 허균이 경사에 갔는데 한 점술사가 말했다. "청구의 분야에서 규성이 빛을 잃었으니 마땅히 한 문장가가 죽을 것이다." 허균이 스스로 죽어서 이에 해당하려는지 여겼는데, 압록강가에 이르러 차천로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망연자실하였다. 여겼는데, 압록강가에 이르러 차천로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망연자실하였다.)
  • E176  + (설날 아침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것이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설날 아침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것이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시는데, 지금 풍속은 또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 하는데, 이것은 자기의 병을 파는 것으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의 설날 아침에 대한 절구를 좋아하였는데, 이르기를,</br>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도소주 마시는 이 많으니 / 人多先我飮屠蘇</br>이제는 쇠퇴한 줄 알겠으니 큰 포부를 저버렸다 / 已覺衰遲負壯圖</br>일마다 병을 파나 병은 끝나지 않으니 / 事事賣癡癡不盡</br>그대로 옛 나를 가지고 지금의 내가 될 뿐이네 / 猶將古我到今吾</br>라고 한 것이다. 내가 80세 되던 설날 아침에 장난삼아 이 시에 차운하여 이르기를,</br>약한 몸 병이 많아 도소주 빨리 못 깬다 / 微軀多病少醒蘇</br>80살 강녕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 八十康寧是不圖</br>어찌 병 팔려고 먼저 술 마실까 / 何用賣癡先飮酒</br>시장에서의 강한 상대에게나 대항해 볼까 / 詩場强敵可支吾</br>라고 지어서 서교(西郊) 송동지(宋同知 송찬)에게 보냈다./ 詩場强敵可支吾 라고 지어서 서교(西郊) 송동지(宋同知 송찬)에게 보냈다.)
  • E047  + (세조(世祖) 때에 한림(翰林) 진감(陳鑑)과 태상(太常) 고윤(高閏)이 우리세조(世祖) 때에 한림(翰林) 진감(陳鑑)과 태상(太常) 고윤(高閏)이 우리나라에 왔는데, 한림 진감이 연꽃 그림을 보고 시를 짓기를,</br>쌍쌍의 백로는 서로 친한 것 같고 / 雙雙屬玉似相親</br>물 위로 나온 연꽃은 더욱 핍진하다 / 出水紅蓮更逼眞</br>객이 있어 이름이 송성하는 글에까지 퍼지고 / 名播頌聲緣有客</br>연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염계 뒤엔들 어찌 없겠는가 / 愛從周後豈無人</br>멀리서 바라봐도 절로 더위를 물리치겠고 / 遠觀自可袪煩暑</br>나란히 선들 어찌 속진(俗塵)에 물들으리요 / 幷立何曾染俗塵</br>그림으로도 이런 뜻을 알겠으니 / 料得丹靑知此意</br>거위와 오리가 이웃을 괴롭히는 것보다 낫구나 / 絶勝鵝鴨惱比隣</br>하였다. 박연성(朴延城)이 관반사가 되어 차운(次韻)하기를,</br>수향의 화조는 멀리서 친하기 어려운데 / 水鄕花鳥邈難親</br>붓으로 옮겨옴이 교묘하게 참[眞]을 빼앗아 왔구나 / 筆下移來巧奪眞</br>갓 피어 오른 연꽃 봉오리가 말하고자 하고 / 菡蓞初開如欲語</br>한가롭게 서 있는 백로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네 / 鷺絲閑立不驚人</br>진흙 속에서 났으나 오히려 깨끗하여 물들지 않았으며 / 淤泥淨色還無染</br>빙설 같은 고상한 자태 멀리 속진을 벗어났구나 / 氷雪高標逈脫塵</br>옥서(玉署 홍문관(弘文館))에 노는 신선이 보기를 싫어하지 아니함은 / 玉署遊仙看不厭</br>맑은 몸매와 향기로운 덕이 닮았기 때문인가 / 淸儀馨德與相隣</br>하였는데, 그 그림은 종사(從事) 이윤보(李胤保)가 그린 것이다. 또 〈희청부(喜晴賦)〉를 지었는데, 김문량(金文良)이 곧 차운하여 시를 지으니 한림이 크게 칭찬하면서, “동방의 문사(文士)는 중국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태상(太常)은 사람됨이 교만하여 알성하는 날에 고풍(古風 한시의 한 체)을 짓고서 유사(儒士)들로 하여금 차운하게 하였다. 짓지 못하여 붓을 놓은 사람이 있으면, “시를 짓지 못한 자가 5명이다. 뒷날 차운하여 짓고자 하는 자는 천백 편을 지어도 좋다.”고 크게 썼는데, 그의 거만함이 이와 같았다.자는 천백 편을 지어도 좋다.”고 크게 썼는데, 그의 거만함이 이와 같았다.)
  • E677  + (수호(垂胡) 임기(林芑)는 많은 서적을 읽었고 겸하여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을수호(垂胡) 임기(林芑)는 많은 서적을 읽었고 겸하여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을 지녔다. 그래서 무릇 구류백가(九流百家) 및 기서고문(奇書古文)을 눈으로 섭렵하고 입으로 외우지 않는 것이 없었다.</br>일찍이 서울에서 문인재자(文人才子)들이 모두 그의 집에 모여 각자의 견문(見聞)을 수호에게 문난(問難 질문)하였다. 수호가 좌우를 보면서 묻는 대로 즉답하는데 의혹스러운 곳이 없어서, 마치 쏟아지는 강물이나 흐르는 수은 같아 그침이 없었다. 호음(湖陰)은 늘 그를 가리키며 ‘걸어 다니는 비서〔行秘書〕’라고 말하였다.</br>호음은 술자리에서 많은 시를 지었는데 때때로 그 용사(用事)가 이해할 수 없는 곳이 있었으니, 대개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수호가 일찍이 사적인 자리에서 호음을 모시고 있다가 물어 보기를,</br>“상공(相公)의 시는 자주 위어(僞語)로 사람을 속이는데 후세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십니까?”</br>하였다. 호음이 대답하기를,</br>“세간에 당신같이 안목을 기른 자가 몇이겠는가. 희작(戱作)은 사고(私稿)에는 등재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후인의 눈에 띄겠는가.”</br>하였다. 마침내 서로 한바탕 웃었다.</br>호음은 병이 위독하자 수호에게 부탁하기를,</br>“그대가 꼭 내 시에 주를 달아 주게.”</br>하였다. 수호는 이를 허락하였다. 십여 년 후에 호음의 시고가 세상에 간행되었는데 주가 없었다. 가군(家君 아버님)이 수호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br>“제가 일찍이 그의 시를 수습하여 이미 한 권에 주를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에 용사와 문자가 대체로 거듭나오는지라 취하여 두루 열람해 본 즉 거듭나오는 곳이 갈수록 더욱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만두게 되었습니다…….”</br>하였다. 수호는 비록 이같이 박학했지만, 다만 시를 익히지도 않았고, 또한 즐겨 짓지도 않았다.</br>임신년(1572, 선조5)에 조사(詔使 중국 사신)를 맞이할 때 임기는 일기관(日記官)으로 임당(林塘)을 따라 용만(龍灣)에 갔다. 학사 습재(習齋) 권벽(權擘)이 조사의 시를 차운하여</br></br>중선루 위에서 북쪽으로 옷깃을 열고 / 仲宣樓上開襟北</br>자미 시 가운데 서쪽으로 길머리 했네 / 子美詩中首路西</br></br>라는 구절을 지었다. 수호가 말하기를,</br>“‘누상(樓上)’을 고쳐 ‘부리(賦裏)’로 하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br>하였다. 임당이 가군을 보며 말하기를,</br>“저 부리를 치는 것이 좋겠소.”</br>하기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포복절도하였다. 우리 동방의 말에 부리〔喙〕와 ‘부리(賦裏)’의 음이 같은 까닭이었다.</br>그러나 증다산(曾茶山)의 시 〈송증굉수천태(茶山送曾宏守天台)〉의 함련(頷聯)에서,</br></br>흥공의 부 가운데 운하가 붉고 / 興公賦裏雲霞赤</br>자미의 시 중에 도서가 푸르네 / 子美詩中島嶼靑</br></br>하였으니, 수호가 어찌 근거 없이 이 말을 하였겠는가. / 子美詩中島嶼靑 하였으니, 수호가 어찌 근거 없이 이 말을 하였겠는가.)
  • E002  + (신라 진덕 여주(眞德女主)의 태평시(太平詩)가《당시류기(唐詩類記)》에 실려 신라 진덕 여주(眞德女主)의 태평시(太平詩)가《당시류기(唐詩類記)》에 실려 있는데, </br><div class="critique-text">그 시는 고고(高古)하고 웅혼(雄渾)하니 초당(初唐)의 모든 저작에 비해도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이때 동방의 문풍(文風)이 아직 왕성하지 못했는지라, 을지문덕의 이 한 절구시(絶句詩) 외에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여주가 또한 그러하였으니 기이하다.</div></br>그 시는 다음과 같다.</br><div class="poetry-text">위대한 당 나라 큰 업을 열었으니<br></br>높고 높은 제왕의 모책이 창성하도다<br></br>무(武)는 한번 융의 입어 천하를 평정했고<br></br>문(文)을 닦아 백왕을 이었네<br></br>하늘을 대신하여 은택을 비처럼 뿌리고<br></br>만물을 다스림엔 땅의 도를 법받았네<br></br>인(仁)을 깊이 펴기를 일월과 같이하고<br></br>천운을 따라서 치세(治世)를 힘쓰네<br></br>번기(幡旗)는 뚜렷이 빛나는데<br></br>정고(鉦鼓)는 어찌 그리도 찬란한가<br></br>외방 오랑캐로서 명을 어긴 자는<br></br>하늘의 재앙을 받아 멸망하리라<br></br>화평한 풍기가 우주에 어리어<br></br>원근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네<br></br>사시는 옥촉(玉燭)처럼 고르고<br></br>칠요는 만방을 순행한다<br></br>산악의 정기가 재보(宰輔)를 탄생시키고<br></br>임금은 그 충량(忠良)을 쓰도다<br></br>오삼(五三)의 덕을 겸했으니<br></br>황가(皇家)인 당 나라가 밝도다<br></div></br>그 소주(小註)를 상고하니, “영휘(永徽) 원년에 진덕 여주가 백제 군사를 대파하고 나서 곧 오언으로 태평시(太平詩)를 지어 바쳤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영휘는 바로 고종의 연호이다.을 쓰도다<br> 오삼(五三)의 덕을 겸했으니<br> 황가(皇家)인 당 나라가 밝도다<br></div> 그 소주(小註)를 상고하니, “영휘(永徽) 원년에 진덕 여주가 백제 군사를 대파하고 나서 곧 오언으로 태평시(太平詩)를 지어 바쳤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영휘는 바로 고종의 연호이다.)
  • E153  + (우리 고장의 태보 최천순 선생이 기묘년(1459) 봄에 진사 이숙황, 허순,우리 고장의 태보 최천순 선생이 기묘년(1459) 봄에 진사 이숙황, 허순, 이종주 등과 함께 향시를 보러 갔다. 말 위에서 갑자기 꿈을 꾸었는데, 수양버들가지가 늘어져 말머리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깨고서 기이하게 여겨 동행에게 말했는데 허순이 말했다. "버들가지의 모양이 바로 푸른 일산과 같으니 그대의 꿈은 매우 기이하다. 내가 그 꿈을 사겠다." 선생이 말했다. "길조는 이미 정해졌으니 어찌 살 수 있겠는가." 과연 향시에 합격하였다. 이어서 점필재 계온 김종직과 함께 서울로 회시를 보러 가게 되었는데, 선생이 말했다. "자네는 재주가 좋으니 반드시 장원을 하겠지만 나는 준마를 따라갈 희망이 없다." 김종직이 말했다. "옛날에 손근과 그의 아우 손하가 함께 시험을 보러 갔는데 형이 일등을 하고 아우가 이등을 한 적이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어찌 손근과 손하처럼 되지 않으리라 보장하겠습니까?" 하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길에 걸어가던 중이 있었는데 지팡이로 둥근 삿갓을 받치고서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다. 그 모양이 마치 일산과 같아서 김종직이 "이 또한 좋은 징조이다."라 하였다. 서로 담소하며 길을 갔는데, 이해에 마침내 두 사람 모두 합격하였다.였다. 서로 담소하며 길을 갔는데, 이해에 마침내 두 사람 모두 합격하였다.)
  • E726  + (우리 동방의 문인들은 매번 중국 사신들과 창화할 때에 모두 율시를 사용하였다우리 동방의 문인들은 매번 중국 사신들과 창화할 때에 모두 율시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호음 정사룡과 같은 대가도 고시 장편에 있어서는 능하지 못하였다. 오직 석주 권필만이 고시체를 깊이 알았다. 그의 충주석, 호수재를 보내며와 같은 시편들이 절묘하게 좋아서 동방의 사람들 중 단지 배비(排比)만을 일삼는 자들과는 매우 다르다. 근세에 동명 군평 정두경이 한 시대에 걸출하여 부미한 습속을 모두 쓸어버렸다. 그가 지은 가행은 웅건하고 준일하여 가히 성당의 여러 시인들과 견줄 만하다. 그 협객편에, ""라 하였으니, 이와 같은 작품은 당시 가운데서 구하여도 또한 드물 것이다. 평하는 사람들이 말한다. "우리 나라의 문장에 전대를 초월하여 중국 사람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소암 임숙영의 변려문과 정두경의 가행이다."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소암 임숙영의 변려문과 정두경의 가행이다.")
  • E207  + (우리 동방의 의논이 옛날부터 부녀자의 직책은 음식을 만들고 길쌈을 하는 것뿐우리 동방의 의논이 옛날부터 부녀자의 직책은 음식을 만들고 길쌈을 하는 것뿐이요, 글과 글씨의 재주는 그들에게 마땅한 것이 아니라 하여 비록 타고난 재주가 남보다 출중한 사람이 있어도 꺼리고 숨겨 힘쓰지 않았으니 한탄할 일이다. 삼국 시대에는 알려진 사람이 없고, 고려 5백년 동안에는 다만 용성(龍城) 창기 우돌(于咄)과 팽원(彭原) 창기 동인홍(動人紅)만이 시 지을 줄을 알았고, 본조에는 정씨(鄭氏)ㆍ성씨(成氏)ㆍ김씨(金氏)가 있는데, 김씨는 시 편이 있어 세상에 전하나 너무 약하여 기운이 적고, 오직 정씨의</br>어젯밤 봄 바람이 골방에 들어오니 / 昨夜春風入洞房</br>한 장의 구름 비단 붉고 향기로움 난만하다 / 一張雲錦爛紅芳</br>이 꽃 피는 곳에 우짖는 새소리 듣노라니 / 此花開處聞啼鳥</br>한편으론 그윽한 자태 노래하는 듯, 한편으론 애를 끊는 듯하여라 / 一詠幽姿一斷腸</br>란 시와 성씨의</br>눈에는 두 줄기 눈물을 머금고 / 眼帶雙行涙</br>가슴에는 만 리의 마음을 감추었네 / 胸藏萬里心</br>문 밖의 붉은 복사꽃 일시에 다 지고 / 門外紅桃一時盡</br>수심 속 흰 머리 십분이나 새로워라 / 愁中白髮十分新</br>란 시와 김씨의</br>지경이 궁벽하니 오는 사람 적고 / 境僻人來少</br>산이 깊숙하니 시속 선비 드물구나 / 山深俗士稀</br>집이 가난하여 한 말 술도 없으니 / 家貧無斗酒</br>묵고 갈 손이 밤에 돌아가는구나 / 宿客夜還歸</br>란 시가 조금 사람들의 뜻에 든다.갈 손이 밤에 돌아가는구나 / 宿客夜還歸 란 시가 조금 사람들의 뜻에 든다.)
  • E675  + (을미년(1595, 선조28)과 병신년(1596, 선조29) 사이에 명나라의 을미년(1595, 선조28)과 병신년(1596, 선조29) 사이에 명나라의 장군 제독(提督) 유정(劉綎)이 병사를 이끌고 호남과 영남 사이를 왕래하였는데, 막하에 한 서생을 데리고 다녔다. 가끔씩 시를 지었고, 사람들은 간혹 그의 가구(佳句)를 전하여 읊었으나, 그 얼굴은 본적도 없고 이름도 알지 못하였다. 그때 우리나라와 왜적은 서로 대치하여 승패를 결정하지 못했는데, 그 서생이 방휼(蚌鷸)의 비유를 써서 장률을 지어 이르기를,</br></br>늙은 조개 추위 피해 햇볕을 쬐는데 / 老蚌當陽爲怕寒</br>들새는 무슨 일로 애써 구하였는가 / 野禽何事苦相干</br>몸은 굴혈 떠나 진주 태는 손상되고 / 身離窟穴珠胎損</br>여울에서 힘 다해 푸른 깃은 쇠잔타 / 力盡沙灘翠羽殘</br>입 닫을 때에 열 때의 화를 어찌 알며 / 閉口豈知開口禍</br>머리 넣을 때에 빼기 어려움 누가 알았으랴 / 入頭誰料出頭難</br>어부 손에 함께 떨어질 줄 일찍 알았던들 / 早知俱落漁人手</br>구름과 물속 맘껏 날고 잠겨있을 텐데 / 雲水飛潛各自安</br></br>하였다. 서생은 대개 당시의 어지러운 사세(事勢)를 보고 어부지리(漁父之利)의 설을 그릇되게 거론한 것이다. 마침내 국가가 다시 회복되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상국(上國 명나라)이 한결같이 우리나라를 구휼하고 선조(宣祖)께서 발리(跋履 여러 곳을 다니며 애씀)하시며 난을 극복한 노력이 아님이 없으니, 서생이 어찌 말을 할 줄 아는 자이겠는가.을 극복한 노력이 아님이 없으니, 서생이 어찌 말을 할 줄 아는 자이겠는가.)
  • E595  + (이 대간이 승정원(承政院)에서 숙직하며 지은 시에 공작 병풍 깊은 곳에 촛불이 대간이 승정원(承政院)에서 숙직하며 지은 시에</br>공작 병풍 깊은 곳에 촛불 그림자 희미한데 / 孔雀屛深燭影微</br>원앙새는 쌍쌍 자니 어찌 각각 날아가리 / 鴛鴦雙宿豈分飛</br>애닯구나 초췌한 청루 속의 여인이여 / 自憐憔悴靑樓女</br>길이 남을 위하여 시집갈 옷 짓다니 / 長爲他人作嫁衣</br>라 했으니, 대개 대간이 오래도록 하관(下官)으로 있어 상기 등용되지 못했는데 동료들은 모두 재상 길에 올랐으므로 재상의 사령장(辭令狀)을 초(草) 하면서 느낀 바가 있어 이 시를 지은 것이었다. 사령장(辭令狀)을 초(草) 하면서 느낀 바가 있어 이 시를 지은 것이었다.)
  • E549  + (이색이 중국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급제하고 명성이 중국에 퍼졌다.이색이 중국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급제하고 명성이 중국에 퍼졌다. 어느 절에 이르렀는데, 절의 승려가 예를 갖추며 말했다. "동방의 문장가라는 소문을 익히 들었는데, 중국에서 제일 과에 급제했다니 오늘 다행히 뵙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한 사람이 떡을 가지고 와서 대접했다. 승려가 곧 한 구절을 지어 말했다. "" 라 하고 이색으로 하여금 대구를 짓게 했다. 승소는 곧 떡의 다른 이름이다. 이색이 창졸간에 대구를 짓지 못하고 사례하고 물러나며 말했다. "다른 날 다시 와서 보답하겠습니다." 후에 천 리 밖으로 멀리 유람하다가, 주인이 떡을 들고 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무엇입니까?" 답하기를 "객담입니다." 객담은 술의 다른 이름이다. 이색이 크게 기뻐하며 곧 전날의 구절에 대구를 지었다. "" 반년 후에 돌아와서 그 승려에게 이야기하니 승려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무릇 대구를 얻는 것은 정교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늦고 이름이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한 구절의 교묘함을 얻어서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와서 보답하니, 이것이야말로 기이함 중의 기이함입니다."를 멀다 하지 않고 와서 보답하니, 이것이야말로 기이함 중의 기이함입니다.")
  • E582  + (정월 십오일에 농가에서 달을 보고 점을 치는데 옛 기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동방의 백성들이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것이 신과 같이 영험하다. 창주 차운로가 마땅히 농가의 달점으로 근체 사운시를 지어야겠다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