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site is under construction.
Search by property
This page provides a simple browsing interface for finding entities described by a property and a named value. Other available search interfaces include the page property search, and the ask query builder.
List of results
- E474 + (정승 상진은 그릇의 크기가 매우 커서 일찍이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았다. 판서 오상이 시를 지었다. "" 상진 공이 이를 보고 말했다. "어찌 말이 그리 박한가." 말을 고쳐서 ""라 하였다. 몇 글자만 고쳤을 뿐인데 혼연히 뜻이 노출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기상을 알 수 있다.)
- M067 + (한간이 그린 말이 참말이고,<br>소식이 지은 시는 그림을 보는 것 같네.<br>세상에는 백락도 없고 또 한간도 없으니,<br>이 시와 이 그림을 누가 볼 수 있겠는가.<br>)
- E628 + (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 … 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br>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 때 / 昔年窮寇此殲亡</br>혈전 벌인 신검(神劍)에는 붉은 빛깔 둘렸다네 / 鏖戰神鋒繞紫芒</br>한의 깃대 꽂힌 흔적 돌 틈에 남아 있고 / 漢幟豎痕餘石縫</br>얼룩진 옷 적신 피는 노을 빛을 물들이네 / 斑衣漬血染霞光</br>소슬바람 살기 띠어 수풀 뫼는 엄숙하고 / 商聲帶殺林巒肅</br>도깨비불 음기 타니 성루는 묵어졌네 / 鬼燐憑陰堞壘荒</br>동방 사람 어육(魚肉) 면킨 우 임금의 덕일진댄 / 東土免魚由禹力</br>소신이 해를 그려 어찌 감히 칭찬하리 / 小臣摸日敢揄揚</br>기걸(奇杰)하고 혼중(渾重)하니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절강(浙江)의 오명제(吳明濟)가 이 시를 보고 비평하기를,</br>“그대의 재주는 용을 잡을 만한데 도리어 개를 잡고 있으니 애석하다.”</br>고 했는데 대개 당시(唐詩)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
- E587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사신의 작품들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감히 가리지 못하고 받아서 간행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 사신 중에 글을 잘한다 일컫는 자는 필경 공용경인데 주지번에게 그를 물으니 일찍이 성명을 듣지 못했다 한다. 기순과 당고는 시어가 아름답고 굳세지만 또한 시가에 대하여 능한 사람은 아니다. 장녕은 다소 청려한 듯하나 또한 취약하여 골격이 없어서 끝내 소가에 귀결된다. 주지번의 시는 조잡하여 형태가 없으니 오히려 사신 웅화의 위약함만도 못하다. 그 밖의 사람들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 문인들이 매번 수창할 적에 대부분 미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대소정편의 다름이 있다. 원접사 서거정이 기순에 대해 감히 선창하기를 마치 도전하는 듯하게 하였지만 결국 ""구에 곤란을 겪었다. 율곡 이이가 조롱하여 말하기를 "사가 서거정은 씨름하는 사람과 같으니 먼저 다리를 걸고 후에 땅에 넘어뜨린다." 아랫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는 마땅히 받들어 접대하고 수창하여야 할 따름인데 어찌 감히 선창하겠는가? 이는 참으로 식자의 말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 그 시절 문인들 중 다소 시에 능한 자들을 모아서 수답하게 하였는데 그 택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사신의 웃음을 산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정사룡은 비록 시짓는 장수라 칭하지만 그 시가 이루어진 시에 견강부회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 오직 이행만이 혼연히 글을 완성하였으나 격조가 매우 비루하여 과체시의 류에 불과하였다. 지을 때마다 잠시 집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응수하였는데 그 대구가 잘 어울려 흠이 없었으니 평소에 익숙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소세양과 이희보는 비록 당시의 종사에게는 굴복하였으나 지금 세상에 동문을 읽고 사운시를 익히는 유근과 같은 자와는 함께 논할 수 없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 E743 + ("" 시는 누가 지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참으로 광대의 말이니 비루하고 가소롭다. 흰 갈매기가 어찌 사람과 수답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세상에는 시를 아는 이가 드물어서 모두 칭송하여 명작이라 하고 혹은 내가 지은 것이라 여기니 배를 잡고 웃을 일이다.)
- E240 + (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 … 가정 을축년(1505)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제천정의 들보에 근체 율시가 적혀 있다고 하였다 "" 보고 들은 자들이 정자의 들보가 극히 높아서 시인이 시를 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반드시 귀신이 쓴 시라고 여겼다. 도성 아래가 소란스러우며,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말하기를, 들보의 시가 이제 없고 글씨는 원의 벽에 있다고 하니, 더욱 괴이하게 여겼다. 내가 분변하여 말하기를, "이른바 들보에 제시했다는 것은 본래 그런 일이 없었고, 다만 원의 벽에 쓰여 있었는데 전하는 자가 잘못한 것이다. 어찌 일찍이 들보에 있었다가 지금은 벽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 시를 호음 정사룡 선생에게 보였더니, "시가 심히 졸렬하고 속되며, 또한 장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불자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의 무리가 이것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C013 + (그 사람은 이 시를 보고 재삼 찬탄하며, “이 사람이 살아 있는가?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가? 혹시 만나 볼 수 있겠는가?”)
- E390 + (내 맏형님의 휘는 은로(殷輅)이다. 5세 때부터 글을 잘 지어 신동으로 이름 … 내 맏형님의 휘는 은로(殷輅)이다. 5세 때부터 글을 잘 지어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상공(相公) 한규(韓㞳)가 강화 유수(江華留守)가 되었는데, 그때 선군께서는 성균관의 직강(直講)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계셨다. 맏형께서 겨우 아홉 살 되던 해, 어쩌다가 기와 조각 던진 것이 잘못되어 남의 집 장독에 떨어졌다. 이웃 사람은 누구의 짓인지 알지 못하고 불손한 말로 욕을 했다. 맏형은 이것을 듣고 그 사정을 하나하나 유수에게 호소했다. 유수는 잘 생긴 어린이가 뜰에 들어섬을 보고, 물어서 직강 집 아들임을 알게 되자,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묻기를, “너는 시를 지을 수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겨우 운이나 맞출 줄 압니다.” 하였다. 이때에 가뭄이 심하였으므로, 유수가 민우시(悶雨詩)를 짓도록 명하고 운(韻)자를 천(天) 하고 불렀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답하기를,</br>구름발이 공연히 하늘을 가렸네 / 雲霓空蔽天</br>하니, 또 전(田) 자를 가지고 짓도록 명했다. 대답하기를,</br>거북 등에 마른 논이 갈라졌네 / 龜背坼乾田</br>하였다. 또 연(年) 자를 가지고 지으라 하니,</br>노나라에서 무당을 불태우던 날이요 / 魯國焚巫日</br>은나라 탕 임금이 손톱 깎던 해일세 / 成湯剪爪年</br>하니, 유수가 무릎을 치며 칭찬하였다. 처음에는 사운(四韻 네 구로 된 율시임)을 짓도록 명하고자 했으나 서너 구절을 보더니, 곧 그만두었다. 아마도 재주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이어서 불러들여 약과와 음식을 먹이는 동시에, 지ㆍ필ㆍ묵도 내주었다. 그리고 그 이웃 사람을 불러다 매를 때렸다. 그 뒤 한공(韓公)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그대 아들의 재주가 매우 기특하니 꼭 숨기시오. 시를 지어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지 마시오. 내 손녀를 시집보내리다.” 하였다.를 지어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지 마시오. 내 손녀를 시집보내리다.” 하였다.)
- E014 + (내가《서청시화(西淸詩話)》를 상고하니,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왕 … 내가《서청시화(西淸詩話)》를 상고하니,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왕 문공(王文公 왕안석(王安石))의 시에, 황혼의 풍우에 원림이 어두운데 / 黃昏風雨暝園林 쇠잔한 국화 떨어지니 땅에 황금이 가득하이 / 殘菊飄零滿地金 구양수(歐陽脩)가 이 시를 보고 말하기를 ‘모든 꽃은 다 떨어지나 국화만은 가지 위에 말라붙어 있을 뿐인데, 어찌 「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문공(文公)은 크게 성내어 말하기를 ‘이는 초사(楚辭)의「저녁에는 떨어진 가을의 국화 꽃을 먹는다[夕餐秋菊之落英]」라는 말을 알지 못함이니, 구양수의 배우지 못한 과실이다.’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시란 보는 일을 읊는 것이다. 내가 옛날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노란 국화를 보았더니, 역시 떨어진 것이 있었다. 문공이 시에서 이미 ‘황혼의 풍우에 원림이 어둡다.’ 하였으니 ‘보는 일을 읊은 것이다.’고 하여 구양수의 말을 일축했어야 옳았을 것이고, 굳이 초사를 이끌었으면 ‘구공(歐公)은 어찌 이것을 보지 못했는가?’라고만 했어도 또한 족했을 것인데, 도리어 ‘배우지 못했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편협하였을까? 구양수가 설사 박학 다문한 지경에 이르지 못한 자라 하더라도 초사가 어찌 유경벽설(幽經僻說)이기에 구양수가 보지 못했겠는가? 나는 개보(介甫 왕안석의 자)를 장자(長者)로 기대할 수 없다.못했겠는가? 나는 개보(介甫 왕안석의 자)를 장자(長者)로 기대할 수 없다.)
- E023 + (다음날 배를 띄워 노를 젓지 않고 물의 흐름을 따라서 동으로 내려가 밤에 원 … 다음날 배를 띄워 노를 젓지 않고 물의 흐름을 따라서 동으로 내려가 밤에 원흥사(元興寺) 앞에 정박하여 배 속에서 기숙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밤은 고요하고 사람은 잠들었는데, 오직 들리는 것은 물 가운데서 고기가 팔딱팔딱 뛰는 소리뿐이었다.</br>나는 팔뚝을 베고 조금 졸았으나 밤 기운이 차가워서 오래 잘 수가 없었다. 어부의 노래소리와 상인의 피리소리는 원근에서 서로 들리고, 하늘은 높고 물은 맑으며 모래 빛에 언덕은 하얗고 달빛에 찬란한 물결은 선각(船閣)을 흔든다. 앞에는 기암 괴석이 있어 마치 범이 걸터앉고 곰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듯하였다. 나는 건(巾)을 잦혀 쓰고 배회하노라 자못 강호(江湖)의 낙을 얻었는데, 하물며 날마다 미인을 끼고 관현(管絃)ㆍ가무(歌舞)로 마음껏 논다면 그 낙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은 두 수의 시를 지었다.</br>푸른 하늘 아득한 물에 떠 있는데 / 碧天浮遠水</br>구름에 잠긴 섬 봉래산인 줄 알았네 / 雲島認蓬萊</br>물결 밑엔 붉은 고기 떠 다니고 / 浪底紅鱗沒</br>연기 속엔 흰 새 날아오네 / 烟中白鳥來</br>여울 이름은 곳에 따라 바뀌고 / 灘名隨地換</br>산 풍경은 배를 따라 달라진다 / 山色逐舟回</br>강성의 술을 불러와서 / 喚取江城酒</br>유연히 한 잔을 따르노라 / 悠然酌一盃</br>밤에 모래톱 푸른 바위 가까이에 정박하고 / 夜泊沙汀近翠巖</br>배 안에 앉아 시 읊으며 성긴 수염 쓰다듬는다 / 坐吟蓬底撚疏髥</br>물결은 출렁출렁 선각을 흔들고 / 水光瀲瀲搖船閣</br>달빛은 휘영청 모자 챙을 비추누나 / 月影微微落帽簷</br>푸른 물결 밀려오니 우뚝한 언덕 잠기고 / 碧浪漲來孤岸沒</br>흰 구름 끊어진 곳에 나직한 산봉우리 뽀족하이 / 白雲斷處短峯尖</br>요란한 관악 소리 차마 못 들어 / 管聲嘲哳難堪聽</br>쟁(箏) 타는 섬섬옥수 부르노라 / 須喚彈箏玉指纖</br>이때 한 아전을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였다.옥수 부르노라 / 須喚彈箏玉指纖 이때 한 아전을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였다.)
- E566 + (동고 최립은 문장에 대해 쉽게 허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질정관으로 … 동고 최립은 문장에 대해 쉽게 허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질정관으로 서울에 올라갔을 때, 율곡 이이가 정철과 함께 말을 나란히 하고 찾아왔다. 시인 이달도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삼각으로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이달이 이이를 보며 말했다. "공께서 이별시를 지으셨습니까?" 이이가 소매에서 꺼내어 보여주었다. 시는 다음과 같았다. "" 최립이 잠깐 보고는 지나쳐 버리며 오른쪽에 놓아두었다. 정철이 말했다. "숙헌 이이의 시가 어떻습니까?" 최립이 말했다. "요즈음 재상 노수신(盧相)이 책문을 잘한다고 하여 성상의 물음에 우러러 답한 것은 대개 그가 책문에 장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철이 말했다. "이 분의 글은 성리에 근본을 두고 있으니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최립이 웃으며 말했다. "학력은 내가 알지 못하지만, 글쓰기에 있어서는 어찌 내 집터조차 바라볼 수 있겠는가?" 그 자부하고 교만한 태도가 이와 같았다. 숙헌은 이이의 자이다.있겠는가?" 그 자부하고 교만한 태도가 이와 같았다. 숙헌은 이이의 자이다.)
- E233 + (만포첨사는 반드시 오랑캐 땅에서 약초를 캐어 진영에서 쓸 용도로 삼았다. 가 … 만포첨사는 반드시 오랑캐 땅에서 약초를 캐어 진영에서 쓸 용도로 삼았다. 가정 을유년(1525)에 심사손 공이 장군의 기략이 있어 특별히 첨사로 제수되었다. 무자년(1528) 정월에 전례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가서 약초를 캤다. 여러 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일에 종사하고, 오직 두서넛 군관과 여덟아홉 남짓 군졸과 함께 작은 막을 치고 앉아 있었다. 네다섯 명의 호인(胡人)이 배알하겠다는 핑계로 왔는데, 이들은 원수진 일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방비가 없는 것을 보고 칼을 뽑아 곧바로 달려왔다. 공이 급히 말에 올랐으나 말이 놀라 떨어졌다. 마침내 참혹한 해를 당하였으며 그들이 그 의복을 벗기고 떠나갔다. 용재 이행이 만가를 지었다. ""였으며 그들이 그 의복을 벗기고 떠나갔다. 용재 이행이 만가를 지었다. "")
- E574 + (명나라 장수 양경리가 왜구를 막기 위해 서울에 머물렀다. 행군하여 청파 교외 … 명나라 장수 양경리가 왜구를 막기 위해 서울에 머물렀다. 행군하여 청파 교외를 지날 때, 밭 가운데 남녀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며 김매기를 하면서 운율을 맞추고 있었다. 경리가 통관에게 물었다. "저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가락이 있는가?" "모두 가락이 있습니다." "들을 수 있겠는가?" "속어로 곡조를 만든 것이니 문자는 아닙니다." "접반사로 하여금 번역해서 올리게 하라." 그 노래는 이러하였다. "" 양경리가 이를 보고 잘 지었다고 칭찬하며 말했다. "내가 행군하여 길을 지나갈 때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지 않는 이가 없거늘, 지금 이 농부들은 김매기를 그치지 않으니, 단지 본업에만 전념할 뿐 아니라 그 노래 또한 매우 이치가 있어 가상하다." 드디어 푸른 베를 나누어 각각 한 필씩 상으로 주었다.가 있어 가상하다." 드디어 푸른 베를 나누어 각각 한 필씩 상으로 주었다.)
- C017 +
- E121 + (문인의 사조은 유전되어 불멸하며, 천 년 이후에도 그 풍채를 상상하게 한다. … 문인의 사조은 유전되어 불멸하며, 천 년 이후에도 그 풍채를 상상하게 한다. 다만 아첨하는 말로써 비위를 맞추고 애걸하며, 잘못된 것을 옳다고 한다면 그러한 아첨으로 곧 이전에 흠모했던 것까지도 모두 버리게 되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장자 김구의 시를 사랑했다. ""라 하니 그 염려함이 어떠한가. 진 양공에게 올린 시를 보면, ""라 하여 극구히 칭송하다가 또 죄를 얻어 진 양공에게 구원을 빌며 쓴 시를 보면, "" 라 하였으니, 모두 아첨과 애걸을 면하지 못하였다.며 쓴 시를 보면, "" 라 하였으니, 모두 아첨과 애걸을 면하지 못하였다.)
- E008 + (복양(濮陽) 오세재 덕전(吳世才德全)은 시를 힘차고 준수하게 지었다. 그 시 … 복양(濮陽) 오세재 덕전(吳世才德全)은 시를 힘차고 준수하게 지었다. 그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 퍽 많지만, 강운(强韻)을 달아서 지은 것은 못 봤다.</br>그가 북산(北山)에 올라 극암(戟巖)을 시제(詩題)로 해서 시를 지으려고 할 때 사람을 시켜서 운자를 내게 하자, 그 사람은 일부러 험한 운자를 냈는데, 오 선생은 다음과 같이 썼다.</br></br>북령의 돌이 우뚝한 것을 / 北嶺石巉巉</br>사람들이 극암이라 부르네 / 邦人號戟巖</br>학을 탄 왕자 진(王子晉)을 칠 듯이 솟았고 / 逈摏乘鶴晉</br>하늘에 오르는 무함(巫咸)을 찌를 듯이 높다 / 高刺上天咸</br>휘어진 자루는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 揉柄電爲火</br>씻은 칼날은 서릿발처럼 희다 / 洗鋒霜是監</br>하필 병기를 만들어서 / 何當作兵器</br>초 나라를 망치고 범 나라를 존재시킬 것인가 / 亡楚却存凡</br></br>그 뒤에 몽고(蒙古) 사신이 왔는데 그는 시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이 시를 보고 재삼 찬탄하며,</br><u>“이 사람이 살아 있는가?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가? 혹시 만나 볼 수 있겠는가?”</br>하고 물었는데,</u> 우리나라 사람은 멍하니 대답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br>“지금 제고학사(制誥學士)의 직위에 있다고 왜 말하지 않았는가?”</br>하였다. 그가 권변(權變)에 어두움이 이와 같았으니 한탄스럽다.에 있다고 왜 말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그가 권변(權變)에 어두움이 이와 같았으니 한탄스럽다.)
- E646 + (봉래가 강릉 군수로 있을 적에 익지(益之 이달(李達)의 자)를 손님으로 대우 … 봉래가 강릉 군수로 있을 적에 익지(益之 이달(李達)의 자)를 손님으로 대우했는데 사람됨이 행실이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다. 선친이 편지를 보내 그를 변호하니 공이 답장하기를</br>밤 연기에 오동 꽃 떨어지고 / 桐花夜煙落</br>바다 숲에 봄 구름 사라지도다 / 海樹春雲空</br>고 읊었던 이달(李達)을 만약 소홀히 대한다면 곧 진왕(陳王 위(魏) 조식(曺植)의 봉호)이 응양(應瑒)ㆍ유정(劉楨)을 처음 잃던 날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대접이 조금 허술해지자 익지는 시를 남기고 작별하는데</br>나그네 가고 머물 사이란 것은 / 行子去留際</br>주인이 눈썹 까딱하는 사이라 / 主人眉睫間</br>오늘 아침 기쁜 빛을 잃게 됐으니 / 今朝失黃氣</br>오래잖아 청산을 생각하리 / 未久憶靑山</br>노국에선 원거에게 제사를 했고 / 魯國鶢鶋饗</br>남방에 출정가서 율무 갖고 돌아왔네 / 南征薏苡還</br>소 계자는 가을 바람 만나자마자 / 秋風蘇季子</br>또 다시 목릉관을 나가는구나 / 又出穆陵關</br>라 읊으니, 공이 크게 칭찬과 사랑을 더하며 그를 처음처럼 대접했다. 선배들이 붕우간에 서로 바로잡아 주는 의가 어떠했던가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풍류 있는 훌륭한 재사를 또 어찌 쉬이 얻을 수 있겠는가?있다. 그리고 그 풍류 있는 훌륭한 재사를 또 어찌 쉬이 얻을 수 있겠는가?)
- E601 +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최예산(崔猊山) 이익재(益齋 익재는 이제현(李齊賢)의 …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최예산(崔猊山) 이익재(益齋 익재는 이제현(李齊賢)의 호)의 시권(詩卷)을 모두 먹칠해 지우고 다만,</br>얇은 이불에 한기(寒氣) 나고 불등은 흐릿한데 / 紙被生寒佛燈暗</br>상좌중은 한밤 내내 종 울리지 않는구나 / 沙彌一夜不鳴鍾</br>아마도 자고 난 손 문을 일찍 열고 나서 / 應嗔宿客開門早</br>뜰 앞에 눈 덮인 솔 보라 할까 꺼렸겠지 / 要見庭前雪壓松</br>라는 시 하나를 남겨두자, 익재가 크게 탄복하며 지음(知音)으로 여겼다고 하나 이는 모두 과장된 이야기다. 익재의 시에는 좋은 작품이 매우 많으니 화오서곡(和烏棲曲)과 민지(澠池) 등의 고시(古詩)는 모두 옛 시에 핍근하고 여러 가지 율시(律詩)들 또한 홍량(洪亮)하다. 젊을 적에 지은 영사시(詠史時)의</br>뉘라서 알리오 업하의 순문약이 / 誰知鄴下荀文若</br>길이 요동의 관유안에 부끄러울 줄 / 永愧遼東管幼安</br>이라는 것이나, 또</br>서시(西施)를 배에 싣고 떠날 줄 몰랐다면 / 不解載將西子去</br>월궁에는 도리어 고소대(姑蘇臺) 하나가 있었으리 / 越宮還有一姑蘇</br>라는 작품과, 또</br>유랑이 잠총국만 사랑하고 있었다면 / 劉郞自愛蠶䕺國</br>옛 동리에 우보상은 부질없이 생겼을 걸 / 故里虛生羽葆桑</br>이라는 등의 작품들에 이르러서는 모두 규모에 들어맞고 이전 사람들이 미처 발(發)하지 못했던 것이니 어찌 낮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이는 역시 영웅이 범인을 무시한 격이라 다 믿을 수는 없다. 수 있겠는가. 이는 역시 영웅이 범인을 무시한 격이라 다 믿을 수는 없다.)
- E662 + (사람들이 모두들 자민의 시는 둔하여 드날리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그가 함흥에 있을 때에 지은 시에 비 개자 관가의 버들 푸르르게 늘어지니 / 雨晴官柳綠毿毿 객지에서 처음 맞은 삼월 삼짇날이라네 / 客路初逢三月三 다 함께 고향 떠나 돌아가지 못한 신세 / 共是出關歸未得 가인은 망강남의 노래를 부르지 마소 / 佳人莫唱望江南 는 청초(淸楚)하고 유려(流麗)하니 중국 사람들과의 차이가 어찌 많다 할 수 있겠는가?)
- E654 + (사암(思庵 박순(朴淳)의 호) 정승이 돌아가자 만가(輓歌)가 거의 수백 편이 … 사암(思庵 박순(朴淳)의 호) 정승이 돌아가자 만가(輓歌)가 거의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오직 성우계(成牛溪 우계는 성혼(成渾)의 호)의 한 절구(絶句)가 절창이었다. 그 시에</br>세상 밖에 운산이 깊고 또 깊으니 / 世外雲山深復深</br>시냇가에 초가집은 이미 찾기 어려워라 / 溪邊草屋已難尋</br>배견와(拜鵑窩)위에 뜬 삼경의 달빛은 / 拜鵑窩上三更月</br>아마도 선생의 일편단심 비추리라 / 應照先生一片心</br>고 하였는데, 무한한 감상(感傷)이 말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으니 서로 간에 깊이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작품이 있겠는가?지 않으니 서로 간에 깊이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작품이 있겠는가?)
- E261 + (서사가(徐四佳)가 조사(詔使) 기순(祈順)의 시에 차운하여, 금암은 날이 따 … 서사가(徐四佳)가 조사(詔使) 기순(祈順)의 시에 차운하여,</br>금암은 날이 따스하여 버드나무 새로 피고 / 金巖日暖初楊柳</br>검수는 봄이 차서 두견 아직 멀었네 / 劍水春寒未杜鵑</br>하였는데,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 공이 감탄해 마지않았다.</br>내가 호음에게 물으니, 곧 말하기를,</br>“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줄 모르겠다. 말에 병폐가 있다.”</br>하였다. 한 사람은 칭찬하고 한 사람은 낮게 평가하니, 두 사람의 뜻이 같지 않다. 물러나 생각하니, 이 한 연구는 오로지 원(元) 나라 사람의 시어(詩語)를 쓴 것인데, 저것은 두 땅이 서로 떨어져 있어서 초(初)ㆍ미(未) 두 자가 합당하다. 그러나 금암과 검수 사이는 아침에 떠나 저녁에 닿을 수 있는 곳이니, 어찌 날이 따스하다느니 봄이 차다느니 하는 그런 차이가 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말에 병폐가 있는 것이니, 마땅히 호음의 말을 옳다 해야 할 것이다.이른바 말에 병폐가 있는 것이니, 마땅히 호음의 말을 옳다 해야 할 것이다.)
- E086 + (성화(成化)ㆍ홍치(弘治) 연간에 한씨(韓氏) 성을 가진 한 서생이 영안(永安 … 성화(成化)ㆍ홍치(弘治) 연간에 한씨(韓氏) 성을 가진 한 서생이 영안(永安)의 도산사(道山寺)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남빛 옷을 입은 한 늙은이가 마을로 쌀을 구걸하러 다니다가 서생을 만나 말하기를, “선비는 무슨 책을 애써 읽고 있소. 나는 평생을 걸식으로 만족하는 사람이오.” 하고는 절구 한 수를 썼는데,</br>하염없이 사창에 기대 있으니 봄날이 더디고 / 懶倚紗窓春日遲</br>홍안은 속절없이 늙어 꽃 지는 시절이로다 / 紅顔空老落花時</br>세상 만사가 모두 이와 같은데 / 世間萬事皆如此</br>피리 불며 노래 부른들 그 누가 알리 / 叩角謳歌誰得知</br>하였다. 동국 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좁아서 재주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영달할 수 있는데, 어찌 버려지는 인재가 있다는 탄식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지금 내가 들은 것이 이와 같으니, 내가 아직 듣지 못한 이 늙은이와 같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전야에 묻혀 있으며, 몇 사람이나 시장에서 썩고 있을까. 한씨 서생은 학문이 있고 논의가 독실한 군자로 망령된 말을 하지 않을 자이다. 나를 위하여 이를 말한다.가 독실한 군자로 망령된 말을 하지 않을 자이다. 나를 위하여 이를 말한다.)
- E036 + (소식의 제한간십사마도라는 시는 이렇다. <div class="poetr … 소식의 제한간십사마도라는 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한간이 그린 말이 참말이고,<br>소식이 지은 시는 그림을 보는 것 같네.<br>세상에는 백락도 없고 또 한간도 없으니,<br>이 시와 이 그림을 누가 볼 수 있겠는가.<br></div></br>문순공 이규보의 제노자도라는 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그림은 사람마다 간직하기 어렵지마는,</br>시는 곳곳마다 펼 수 있어라.</br>시 보는 것을 그림 보듯 하면,</br>그림 또한 만고에 전할 수 있으련만.</div></br><div class="critique-text">이 시들은 말은 같지 않으나, 거기에 쓰인 뜻은 서로 같다.</div> 전할 수 있으련만.</div> <div class="critique-text">이 시들은 말은 같지 않으나, 거기에 쓰인 뜻은 서로 같다.</div>)
- E471 + (소재 노수신이 객을 보내느라 취한 이후에 시 한 수를 지었다. 다 짓지 못했을 때에 매미가 갑작스런 비에 쫒겨 자리 앞에 떨어졌다. 공이 즉시 이어서 말하길, ""라 하였으니 마치 신의 도움을 얻은 듯하다. 두보의 시에 ""라 하였으니, 이를 용사한 것이다.)
- E028 + (시의 병통을 말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기쁜 일이다. 그의 말이 옳으면 받아들이고 옳지 않으면 나의 뜻대로 할 뿐이다. 어찌 듣기 싫어하기를 마치 임금이 간언을 거절하는 것과 같이 하여, 끝내 자기의 허물을 모르고 넘길 필요가 있겠는가? 무릇 시가 이루어지면 반복 관찰하되, 지은 것으로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이나 또는 평생 심히 미워하는 자의 시를 보듯하여, 하자(瑕疵)를 열심히 찾아도 오히려 하자가 없어야만 그 시를 세상에 내놓는다.)
- E168 + (옛날 사람들이 시를 주어 주고 받는 것은 단지 그 뜻을 화답할 따름이었다. … 옛날 사람들이 시를 주어 주고 받는 것은 단지 그 뜻을 화답할 따름이었다. 시에 차운(次韻)하여 짓는 것은 중고(中古) 때부터 처음 시작된 것으로 같은 운(韻)을 왕복하여 거듭 쓰되 갈수록 뜻은 새로운 것이었다. 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에 이르러 대단히 성하였다. 그러나 사(詞)와 부(賦)에 같은 운을 써서 짓는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에 오는 중국의 사신들을 보면 풍속과 민요를 보고 짓는 것이 많아 대개가 모두 이런 식으로 화답된 것이다. 비록 사와 부 같은 대작이라도 반드시 운을 그대로 써서 지었으니, 명 나라 사신인 진감(陳鑑)이 〈희청부(喜晴賦)〉를 지었다. 세조(世朝)가 그 사람을 어렵게 여겨서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을 불러서, “너가 한 번 지어보라.” 하셨다. 괴애가 자기 집에 물러나와 대청에 홀로 누워 정신을 가다듬고 움직이지 않은 채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누워서 골똘히 생각하기를 며칠을 두고 한 후에야 비로소 일어났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붓을 잡게 하고 써서 올리니, 글이 아주 찬란하게 뛰어났고 글의 뜻이 잘 통했으며 운(韻)으로 말하면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세조가 이것을 읽고 기쁘게 생각하고 영성(寧城) 최항(崔恒)에게 명하여 윤색하라 하였다. 영성이 몇 구절을 마음대로 고쳤더니, 괴애가 고친 것을 보고 웃으며, “어찌 천하에 추녀인 무염(無鹽)을 그린 그림으로 천하 미인인 서시(西施)의 단장을 보충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진감이 이것을 보고 과연 크게 칭찬하고 고친 부분을 지적하면서, “이것은 본인이 쓴 글이 아니다.” 하였다. 이때부터 괴애의 이름이 중국에 퍼져서 후일 괴애가 중국 조정에 들어갔을 때 한림원(翰林院)에서 아패(牙牌)를 두른 학자들이 빙 둘러서서 괴애를 보고, “이 사람이 김희청(金喜晴)이다.”라고들 칭찬하였다.둘러서서 괴애를 보고, “이 사람이 김희청(金喜晴)이다.”라고들 칭찬하였다.)
- E153 + (우리 고장의 태보 최천순 선생이 기묘년(1459) 봄에 진사 이숙황, 허순, … 우리 고장의 태보 최천순 선생이 기묘년(1459) 봄에 진사 이숙황, 허순, 이종주 등과 함께 향시를 보러 갔다. 말 위에서 갑자기 꿈을 꾸었는데, 수양버들가지가 늘어져 말머리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깨고서 기이하게 여겨 동행에게 말했는데 허순이 말했다. "버들가지의 모양이 바로 푸른 일산과 같으니 그대의 꿈은 매우 기이하다. 내가 그 꿈을 사겠다." 선생이 말했다. "길조는 이미 정해졌으니 어찌 살 수 있겠는가." 과연 향시에 합격하였다. 이어서 점필재 계온 김종직과 함께 서울로 회시를 보러 가게 되었는데, 선생이 말했다. "자네는 재주가 좋으니 반드시 장원을 하겠지만 나는 준마를 따라갈 희망이 없다." 김종직이 말했다. "옛날에 손근과 그의 아우 손하가 함께 시험을 보러 갔는데 형이 일등을 하고 아우가 이등을 한 적이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어찌 손근과 손하처럼 되지 않으리라 보장하겠습니까?" 하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길에 걸어가던 중이 있었는데 지팡이로 둥근 삿갓을 받치고서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다. 그 모양이 마치 일산과 같아서 김종직이 "이 또한 좋은 징조이다."라 하였다. 서로 담소하며 길을 갔는데, 이해에 마침내 두 사람 모두 합격하였다.였다. 서로 담소하며 길을 갔는데, 이해에 마침내 두 사람 모두 합격하였다.)
- E217 + (유몽와(柳夢窩)의 《대동시림》에 있는 그의 선친 수재의 〈숙낙생역(宿樂生驛) … 유몽와(柳夢窩)의 《대동시림》에 있는 그의 선친 수재의 〈숙낙생역(宿樂生驛)〉 시에,</br>날이 저물어 온 산이 어두운데 / 日夕衆山暗</br>멀리 낙생에 와 머물도다 / 遠來投樂生</br>나귀는 남은 풀을 씹고 / 征驢吃殘草</br>늙은 종은 좋은 밥을 먹네 / 老僕飯香粳</br>베개를 찾아 등잔을 등지고 자며 / 索枕背燈睡</br>잔을 잡고 술을 따라 마시네 / 把杯斟酒傾</br>때때로 장로를 불러 / 時時呼長老</br>손꼽아 앞길을 묻노라 / 屈指問前程</br>하였는데, 나귀가 남은 풀을 씹는다는 것은 이미 여행길이 고달픈데, 어찌 늙은 종이 좋은 밥을 먹겠으며, 이미 등잔을 등지고 자는데, 또 무슨 잔을 잡는 일이 있겠는가. 그리고 파(把)ㆍ짐(斟)ㆍ경(傾) 자는 모두 비슷한 뜻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낙생역에서 단 하루만 묵었는데, ‘때때로 장로를 부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驛)의 하인들이 불도를 닦는 중과 비길 바가 아닌데, 그들을 가리켜 장로라 함은 또한 무슨 뜻인가. 굴지(屈指)라는 말은 본래 《한서(漢書)》 진탕전(陳湯傳)에, “손꼽아 그날을 세면서 말하기를, 며칠 가지 않아서 응당 길한 말이 들릴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앞길을 물으면서 굴지라는 글자를 쓴 것은 역시 그것이 온당한 말인가 모르겠다.길을 물으면서 굴지라는 글자를 쓴 것은 역시 그것이 온당한 말인가 모르겠다.)
- E302 + (임 사문(林斯文 임형수(林亨秀)를 말함)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천하에 … 임 사문(林斯文 임형수(林亨秀)를 말함)이 말하기를,</br>“내가 일찍이,</br>천하에 어찌 천리마가 없으리오 / 天下豈無千里馬</br>인간에 구방 고를 얻기 어렵도다 / 人間難得九方皐</br>하는 한 연구(聯句)를 얻었는데, 그뒤에 황산곡(黃山谷)의 시집을 보니 거기에,</br>세상에 어찌 천리마가 없겠는가 / 世上豈無千里馬</br>사람 가운데 구방 고를 얻기 어렵도다 / 人中難得九方皐</br>라는 글귀가 있었다. ‘세상’이라 한 것은 나의 ‘천하’보다 못하고, 그의 ‘사람 가운데[人中]’라 한 것은 나의 ‘인간(人間)’보다 낫다.”</br>하였다. 생각으로는 황산곡의 이 말은 고금에 뛰어났으며, 그후로 어찌 여기에 겨룰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고 우연히 합치되었다면 그는 천 년 뒤에 황산곡과 겨룬다 할 수 있다.지 않고 우연히 합치되었다면 그는 천 년 뒤에 황산곡과 겨룬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