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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067 + (한간이 그린 말이 참말이고,<br>소식이 지은 시는 그림을 보는 것 같네.<br>세상에는 백락도 없고 또 한간도 없으니,<br>이 시와 이 그림을 누가 볼 수 있겠는가.<br>)
- E587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사신의 작품들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감히 가리지 못하고 받아서 간행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 사신 중에 글을 잘한다 일컫는 자는 필경 공용경인데 주지번에게 그를 물으니 일찍이 성명을 듣지 못했다 한다. 기순과 당고는 시어가 아름답고 굳세지만 또한 시가에 대하여 능한 사람은 아니다. 장녕은 다소 청려한 듯하나 또한 취약하여 골격이 없어서 끝내 소가에 귀결된다. 주지번의 시는 조잡하여 형태가 없으니 오히려 사신 웅화의 위약함만도 못하다. 그 밖의 사람들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 문인들이 매번 수창할 적에 대부분 미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대소정편의 다름이 있다. 원접사 서거정이 기순에 대해 감히 선창하기를 마치 도전하는 듯하게 하였지만 결국 ""구에 곤란을 겪었다. 율곡 이이가 조롱하여 말하기를 "사가 서거정은 씨름하는 사람과 같으니 먼저 다리를 걸고 후에 땅에 넘어뜨린다." 아랫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는 마땅히 받들어 접대하고 수창하여야 할 따름인데 어찌 감히 선창하겠는가? 이는 참으로 식자의 말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 그 시절 문인들 중 다소 시에 능한 자들을 모아서 수답하게 하였는데 그 택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사신의 웃음을 산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정사룡은 비록 시짓는 장수라 칭하지만 그 시가 이루어진 시에 견강부회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 오직 이행만이 혼연히 글을 완성하였으나 격조가 매우 비루하여 과체시의 류에 불과하였다. 지을 때마다 잠시 집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응수하였는데 그 대구가 잘 어울려 흠이 없었으니 평소에 익숙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소세양과 이희보는 비록 당시의 종사에게는 굴복하였으나 지금 세상에 동문을 읽고 사운시를 익히는 유근과 같은 자와는 함께 논할 수 없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 E001 + ([[우리나라]]는 [[은(殷) 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동쪽에 봉 … [[우리나라]]는 [[은(殷) 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동쪽에 봉해지면서부터 문헌(文獻)이 비로소 생겼는데, 그동안에 있었던 작자(作者)들은 세대가 멀어서 들을 수가 없다.</br>[[《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에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사적이 갖추어 기록되어 있고, 또 그가 [[수(隋) 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오언시(五言詩) 네 구(句)]]가 실려 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br><div class="poetry-text">신기한 계책은 천문을 통달하고<br>묘한 꾀는 지리를 다하였네<br>싸움에 이기어 공이 이미 높으니<br>만족함을 알아서 중지하게나</div></br><div class="poetry-text">구법(句法)이 기고(奇高)하여 화려하게 꾸민 흔적이 없으니, 어찌 후세의 부화(浮華)한 자가 미칠 바이겠는가.</div></br></br>상고하니,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대신(大臣)]]이었다.)
- C001 +
- E610 + (국초(國初)에는 정교은(鄭郊隱 교은은 정이오(鄭以吾)의 호)ㆍ이쌍매(李雙梅 … 국초(國初)에는 정교은(鄭郊隱 교은은 정이오(鄭以吾)의 호)ㆍ이쌍매(李雙梅 쌍매는 이첨(李詹)의 호)의 시가 가장 훌륭했다. 정교은 시에</br>이월도 무르익어 삼월이 오려 하니 / 二月將闌三月來</br>한 해의 봄빛이 꿈속에 돌아오네 / 一年春色夢中回</br>천금으로도 가절은 살 수가 없으니 / 千金尙未買佳節</br>술 익는 뉘 집에서 꽃은 정히 피었는고 / 酒熟誰家花正開</br>라 한 시는 당인(唐人)의 아름다운 경지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쌍매의</br>신선이 차고 온 옥소리 쟁그랑쟁그랑 / 神仙腰佩玉摐摐</br>고루에 올라와서 벽창에 걸어놓고 / 來上高樓掛碧窓</br>밤 들어 다시금 유수곡을 타노라니 / 入夜更彈流水曲</br>한 바퀴 밝은 달이 가을 강에 내리누나 / 一輪明月下秋江</br>라고 한 시 역시 빼어난 아취가 있다.가을 강에 내리누나 / 一輪明月下秋江 라고 한 시 역시 빼어난 아취가 있다.)
- E171 + (그 뒤 시강(侍講) 동월(董越)이 왔을 때 행차가 평양까지 와서 풍월루(風月 … 그 뒤 시강(侍講) 동월(董越)이 왔을 때 행차가 평양까지 와서 풍월루(風月樓)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안찰사로 있던 성허백당(成虛白堂)은 모습이 훌륭하지 못하였다. 동월이 안찰사를 주(州)의 관리인 줄 알고 그렇게 대수롭게 보지 않았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시를 짓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시에 화답하였다. 성허백이 지은 시에,</br>붉은 비 뜰에 가득한데 복사꽃 이미 떨어졌고 / 紅雨滿庭桃已謝</br>파란 연잎 물결에 점 일으키며 연꽃이 처음 떠오르더라 / 靑錢點水藕初浮</br>하였다. 동월이 이것을 보고 정색하고는, “이런 사람이 어째서 주(州)의 관리밖에 못하고 있는가.” 하니, 반접사(伴接使)인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이, “우리 나라에서는 풍화(風化)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하여 조정에서 으뜸가는 사람들을 뽑아서 주관(州官)으로 삼습니다.” 하였다. 동월의 풍월루기(風月樓記)에, “관찰사가 속으로 빼어나고 문아(文雅)하다.” 한 것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가 돌아갈 무렵 압록강에서 전별 잔치를 할 때에 쌍방이 모두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빛이 있었다. 충정공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는데,</br>푸른 연기는 고요하게 떠 있고 풀은 무성한데 / 靑煙漠漠草離離</br>바로 강두에서 석별할 때라 / 正是江頭惜別時</br>말없이 서로 보는 정 한 없으니 / 黙黙相看無限意</br>이생에 어디에서 다시 만나 즐길고 / 此生何處更追隨</br>하였다. 두 중국 사신이 서로 보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렸으니, 정말 정과 뜻이 한가지로 통하는 것은 풍속과 지역의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정말 정과 뜻이 한가지로 통하는 것은 풍속과 지역의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 E741 + (근래에 시가 없다는 것은 정말로 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라고 할 만한 시 … 근래에 시가 없다는 것은 정말로 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라고 할 만한 시가 없다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이 옛날의 시짓기에 힘쓰지 않고 오직 과거 공부에만 힘써서 혹 과부나 과시에는 공교로우면서도 고시율에는 전혀 어둡다. 비록 대략 구를 엮을 줄 아는 자라도 또한 과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골 북과 섬 피리 같아서 잡다하고 산란하여 들을 수가 없으니 그것을 어찌 시라 하겠는가. 사람들이 전하는 어떤 향사의 시에, ""라 하였다. 비록 당시의 율격은 아니지만 과시의 틀을 벗어나 장법이 절로 이루어졌다. 애석하구나. 그 이름을 잃어 세상에 전하지 못하는 것이. 절로 이루어졌다. 애석하구나. 그 이름을 잃어 세상에 전하지 못하는 것이.)
- E736 + (근래의 젊은이 중에서 사백 김석주가 일찍부터 문명을 얻었으나 문장이 난삽한 … 근래의 젊은이 중에서 사백 김석주가 일찍부터 문명을 얻었으나 문장이 난삽한 병통이 있었다. 비록 몇 구의 말을 지어도 반드시 마음을 써서 깊이 생각하며, 초고를 여러 번 고치지 않으면 내놓지 않았다. 그의 시는 대개 조각하고 꾸민 것이 많은데, 우해 홍만종에게 차운한 시 여덟 편은 모두 좋다. 그 중 한 편은 이러하다. "" 극히 평담하고 고풍에 가깝다. 내가 일찍이 김석주를 만나 문학을 논할 때 김석주가 말했다. "내가 젊어서 많이 읽지 못하여 글쓰는 힘에 박차를 가할 수 없다. 비록 힘써 읽어서 그 병통을 고치려 하나 많은 업무로 겨를이 없으니 한스러울 뿐이다." 대개 김석주가 무릇 제술할 때에는 옛 저작을 모방하는 데이만 능할 뿐으로 큰 근원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므로 그가 이처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작법을 묘하게 이해하고 각 체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참으로 얻기 쉽지 않다. 작법을 묘하게 이해하고 각 체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참으로 얻기 쉽지 않다.)
- E445 + (김종직의 시에, ""라 하였다. 상고컨대 순자가 "예의를 말하지 않고 시서로 … 김종직의 시에, ""라 하였다. 상고컨대 순자가 "예의를 말하지 않고 시서로만 이를 하려는 것은 마치 차으로 기장을 찧는 것과 같다."라 하였다. 옛 책에 말하기를, "이상은이 글을 쓸 적에 많은 책들을 좌우로 두고 점검하며 열람하였는데, 비늘처럼 차례로 늘어선 것이 수달이 물고기를 제사 지내는 것과 같다고 하여 '獺祭魚'라 불렀다"고 하였다. 나의 생각에 글을 쓰면서 그 뒤쪽에 용사를 늘어놓음으로써 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인의 병통이다. 근세에 정사룡이 여러 책들을 유별로 초록하여 큰 자루에 가득 담고 매번 글을 쓸 때마다 반드시 보고 따랐다. 이 때문에 그의 시에는 끌어다 붙인 흔적이 많이 보이며 평온하고 안정된 기상이 전혀 없으니 대개 이 병통의 때문이다. 많이 보이며 평온하고 안정된 기상이 전혀 없으니 대개 이 병통의 때문이다.)
- E011 + (나는 아홉 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지금까지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시서 … 나는 아홉 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지금까지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시서육경(詩書六經)ㆍ제자백가(諸子百家)ㆍ사필(史筆)의 글로부터 유경벽전(幽經僻典)ㆍ범서(梵書)ㆍ도가(道家)의 설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 깊은 뜻은 궁구하지 못했지만, 그를 섭렵하여 좋은 글귀를 따서 글 짓는 자료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또 복희(伏羲) 이후 삼대(三代)ㆍ양한(兩漢)ㆍ진(秦)ㆍ진(晉)ㆍ수(隋)ㆍ당(唐)ㆍ오대(五代) 사이의, 군신의 득실이며 방국의 치란이며 그리고 충신의사(忠臣義士)ㆍ간웅 대도(奸雄大盜)의 성패ㆍ선악의 자취를 비록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기억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들을 간추려 기송(記誦)하여 적시에 응용할 준비를 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혹시 지필을 가지고 풍월을 읊게 되면, 아무리 백운(百韻)에 이르는 장편(長篇)ㆍ거제(巨題)라 할지라도 마구 내려 써서 붓이 멈추지 않는다. 비록 금수(錦繡)와 주옥(珠玉) 같은 시편은 이루지 못하나 시인의 체재는 잃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건대, 자부함이 이와 같은데 결국 초목과 함께 썩게 되는 것이 애석하다. 한 번 붓을 들고 금문(金門)ㆍ옥당(玉堂)에 앉아서 왕언(王言)을 대신하고 고초(稿草)를 검토하며 비칙(批勅)ㆍ훈령(訓令)ㆍ황모(皇謨)ㆍ제고(帝誥)의 글을 지어 사방에 선포하여 평생의 뜻을 푼 뒤에야 말 것이니, 어찌 구구하게 대수롭지 않은 녹을 구하여 처자를 살릴 꾀를 하는 자의 유이기를 바랐겠는가. 아, 뜻은 크고 재주는 높건만, 부명(賦命)이 궁박(窮薄)하여 나이 30이 되도록 오히려 한 군현(郡縣)의 직임도 얻지 못하였으니, 외롭고 괴로운 온갖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내 두뇌를 알 만하다. 이때부터 경치를 만나면 부질없이 시를 읊고 술을 만나면 통쾌하게 마시며 현실을 떠나서 방랑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라, 바람은 화창하고 날씨는 따스하여 온갖 꽃이 다투어 피니, 이처럼 좋은 때를 그저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윤학록(尹學錄)과 함께 술을 가지고 구경하면서 수십 편의 시를 지었다. 흥이 무르익었을 때 취기로 인해 졸았는데, 윤학록이 운자를 부르며 나더러 시를 지으라고 권하기에 나는 곧 보운(步韻)으로 다음과 같이 지었다. 귀는 귀머거리되려 하고 입은 벙어리되려 하니 / 耳欲爲聾口欲瘖 곤궁한 처지에 더욱 세정을 안다 / 窮途益復世情諳 뜻과 같지 않은 일은 십에 팔구나 되고 / 不如意事有八九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열에 한둘도 없다 / 可與語人無二三 사업은 고기처럼 하기를 기약하고 / 事業皐夔期自比 문장은 반마처럼 하려 하였는데 / 文章班馬擬同參 연래에 신명을 점검하니 / 年來點檢身名上 전현에 미치지 못한 게 바로 나의 부끄러움이네 / 不及前賢是我慙 윤학록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팔구(八九)로 이삼(二三)을 대하니 평측(平仄)이 고르지 못하오. 공(公)은 평일에 있어서는 문장이 훌륭하여 비록 수백 운(韻)의 율시(律詩)라도 한 번 내려 쓰기를 마치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스쳐가듯 빨리 하나 한 글자도 하자가 없었는데, 지금은 한 작은 율시를 짓되 도리어 염(廉)을 어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지금은 꿈속에서 지은 것이므로 가리지 않고 내놓은 때문이오. 팔구는 천만(千萬)으로 고치는 것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소. 대갱(大羹)과 현주(玄酒)가 초장만 못하지 않은 법이라. 대가의 솜씨는 원래 이러한 것인데 공이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하품하고 기지개하면서 깨니 바로 한 꿈이었다. 그래서 꿈속에 있었던 일을 윤학록에게 갖추 말하기를, “꿈속에서 꿈에 지은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이른바 꿈속의 꿈이구려.” 하고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따라서 희롱으로 다음과 같이 한 절구를 지었다. 수향이 문득 취향과 이웃하였으니 / 睡鄕便與醉鄕隣 두 곳에서 돌아오니 다만 한 몸일러라 / 兩地歸來只一身 구십 일 온 봄이 모두 꿈이라 / 九十一春都是夢 꿈속에 도리어 꿈속 사람이 되었네 / 夢中還作夢中人꿈이라 / 九十一春都是夢 꿈속에 도리어 꿈속 사람이 되었네 / 夢中還作夢中人)
- E015 + (나는 옛날 매성유(梅聖兪 성유는 송(宋)의 시인 매요신(梅堯臣)의 자)의 시 … 나는 옛날 매성유(梅聖兪 성유는 송(宋)의 시인 매요신(梅堯臣)의 자)의 시를 읽고 마음속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옛날 사람들이 그를 시옹(詩翁)이라고 호칭하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겉으로는 약한 듯하나 속으로는 단단한 힘이 있어 참으로 시 중의 우수한 것이었다. 매성유의 시를 알아본 뒤라야 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옛사람들이 사령운(謝靈運)의 시에, 못 언덕에 봄풀이 돋아난다 / 池塘春草生 는 것을 용하다고 하나, 나는 좋은 점을 모르겠다. 서응(徐凝 당(唐) 나라 시인)의 폭포시(瀑布詩)에, 한 가닥이 푸른 산 빛을 갈라 놓았다 / 一條界破靑山色 는 것은, 나는 매우 좋은 시구라고 생각되는데, 소동파(蘇東坡)는 악시(惡詩)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나 같은 자의 시를 알아보는 것은 옛날 사람에 미치지 못함이 매우 멀다. 도잠(陶潛)의 시는 담연히 화평하고 고요하여 마치 청묘(淸廟)의 거문고가 줄이 붉고 구멍이 커서 한 사람이 창(唱)하면 세 사람이 화답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 체를 본받으려 하나 끝내 비슷하게도 할 수 없으니 더욱 가소롭다. 나는 그 체를 본받으려 하나 끝내 비슷하게도 할 수 없으니 더욱 가소롭다.)
- E223 + (남추강이 육신전을 지었는데, 그 이개 전에 이르기를, 수레에 실림에 임하여 … 남추강이 육신전을 지었는데, 그 이개 전에 이르기를, 수레에 실림에 임하여 시(詩)를 짓기를,</br>우(禹)의 솥이 무거울 때 생명도 또한 크나 / 禹鼎重時生亦大</br>기러기 털 가벼운 곳에 죽음 또한 영화롭다 / 鴻毛輕處死亦榮</br>새벽에 자지 않고 문을 나서니 / 明發不寐出門去</br>현릉(顯陵 문종(文宗)의 능)의 송백이 꿈 가운데 푸르고나 / 顯陵松栢夢中靑</br>하였다. 박팽년전에 이르기를, 광묘(光廟)가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부중(府中)에서 잔치를 베푸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br>묘당 깊은 곳에서 처량한 거문고 소리 들리는데 / 廟堂深處動哀絲</br>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 萬事如今摠不知</br>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br>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 花明春日正遲遲</br>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 先王舊業抽金櫃</br>성주(聖主)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 聖主新恩倒玉巵</br>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 不樂何爲長不樂</br>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賡歌醉賦太平時</br>하였다. 성삼문전에,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그 아래에 주를 남기기를, 수레에 실릴 때에 임하여 시를 지어 이르되,</br>둥 둥 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 擊鼓催人命</br>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 回頭日欲斜</br>머나먼 황천길에, 주막하나 없으니 / 黃泉無一店</br>오늘밤은 뉘 집에서 재워줄꼬 / 今夜宿誰家</br>하였다. 나의 생각에 금언휘언에 이르기를, 손궤는 송나라 잠계의 고제이다. 죄를 입고 형에 이르자 시를 짓기를, </br>북소리 바야흐로 촉급한데 / 鼉鼓聲正急</br>서산의 해도 기울어가네 / 西山日又斜</br>저승에는 여관이 없다하니 / 黃泉無客店</br>오늘 밤엔 누구네 집에서 잘까 / 今夜宿誰家</br>라 하였으니, 이것은 성삼문이 지은 것이 아님이 명확하다. 실로 주석의 오류이다.였으니, 이것은 성삼문이 지은 것이 아님이 명확하다. 실로 주석의 오류이다.)
- E078 + (내가 신미년에 파주(坡州)의 별장에 있었는데, 하루는 나의 백형(伯兄)이 어 … 내가 신미년에 파주(坡州)의 별장에 있었는데, 하루는 나의 백형(伯兄)이 어머니를 모시고 진암(珍巖)에 올라갔었다. 바위는 임진강[洛河]을 베개로 삼고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데, 그 위에는 백여 명이나 앉을 만하였다. 서쪽은 해문(海門)에 닿아 있고, 북쪽은 송도(松都)와 더불어 서로 마주보아 송악산, 관악산, 성거산(聖居山) 등 여러 산이 마치 지척에 있는 것 같고, 풍경은 잠령(蠶領)보다도 좋았다. 이때 해가 기울어지면서 문득 비가 몰려오고, 무지개가 바위 위에 있는 조그마한 우물에서 강 속으로 들어가니, 빛이 비치는 곳마다 사람의 얼굴이 모두 노랗게 되고, 비릿한 기(氣)가 있어 사람이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으니 참으로 천지의 부기(浮氣)이니, 옛 사람의 말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백형은 시를 짓기를,</br>출렁이는 강물은 아득히 허공과 같고 / 江波渺渺水如空</br>둥둥 뜬 고깃배는 하나하나가 다 같구나 / 泛泛漁舟箇箇同</br>저물녘 바람 불고 무지개 비 지나더니 / 日暮顚風虹雨過</br>늦은 무지개가 때마침 떠올라 강동을 끊는구나 / 晩虹時起斷崗東</br>하였다.雨過 늦은 무지개가 때마침 떠올라 강동을 끊는구나 / 晩虹時起斷崗東 하였다.)
- E688 + (내가 지난 기해년(1599, 선조32) 무렵에 차오산(車五山)과 함께 아계( … 내가 지난 기해년(1599, 선조32) 무렵에 차오산(車五山)과 함께 아계(鵝溪) 이 상공(李相公)을 찾아가 알현하였을 때, 벽 위에 한 편의 장률이 걸렸는데 바로 동고(東皐) 최립(崔岦)의 시였다. 그 함련에 이르기를,</br></br>초호가 진을 멸할 날 기약할 수 없으니 / 未期楚戶亡秦日</br>오병이 영에 침입한 해를 경계해야 하네 / 宜戒吳兵入郢年</br></br>하였으니, 대개 때를 슬퍼하는 작품이었다. 이 상공이 나를 바라보며 말하기를,</br>“그대도 한번 이 작품을 보게나. 초(楚)는 누구를 비유한 것인가?”</br>하기에, 대답하기를,</br>“우리나라를 비유한 것입니다.”</br>하였다. 또 묻기를,</br>“진(秦)은 누구를 비유한 것인가?”</br>하기에, 대답하기를,</br>“왜적을 비유한 것입니다.”</br>하였다. 묻기를,</br>“오(吳)는 누구를 비유한 것인가?”</br>하기에, 대답하기를,</br>“오는 왜적을 비유한 것입니다.”</br>묻기를,</br>“영(郢)은 누구를 비유한 것인가?”</br>하기에 대답하기를,</br>“영은 한양〔我國〕을 비유한 것입니다.”</br>하였다. 문답이 끝나자 말하기를,</br>“이같이 해도 괜찮은가?”</br>하였다. 대개 진(秦)ㆍ초(楚)ㆍ오(吳)ㆍ영(郢) 넉자가 2구 가운데 합쳐 들어가 비유가 번잡하게 겹쳤으니, 이는 실로 시가(詩家)에서 꺼리는 것이다. 동고가 시학에 깊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실수를 면하지 못하였던 것이니, 이 상공의 말은 실로 최립의 재주를 질투해서 한 것은 아니다.</br></br>○ 이 상공이 최립의 시를 취하지 않은 것은 그 내력이 오래되었다. 고태헌(高苔軒) - 제봉은 만년에 호를 고쳐 태헌이라고 하였다. - 이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 최립이 질정관이 되어 연도에서 수창(酬唱)한 시가 매우 많았다. 이 상공은 고태헌과 최립이 돌아오는 것을 살피고 있다가 시권(詩卷)을 빌려 왔는데 초면에 실린 서너 수의 창화시(唱和詩)를 보고는 최립의 시를 무척 싫어하였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을 시켜 종이를 잘라 최립의 시를 덮게 한 후에야 그 시권을 보았으니, 싫어하는 정도가 깊었다. 이것은 이 상공의 말을 내가 직접 들은 것이다.</br></br>이 상공은 언론이 온화하고 부드러워 시를 논함에 있어 일찍이 남의 재주를 얕보고 모멸함이 없었는데, 최립의 시에 이르러서는 발언할 때마다 매번 비방하며 말하기를, “아는 자만이 이를 알 것이다.” 하였다. 때마다 매번 비방하며 말하기를, “아는 자만이 이를 알 것이다.” 하였다.)
- E707 + (문장에서 뜻을 쓴 바의 곳은 절로 기묘한 조화가 있어서 참으로 쉽게 논할 수 … 문장에서 뜻을 쓴 바의 곳은 절로 기묘한 조화가 있어서 참으로 쉽게 논할 수 없다. 사물을 묘사하고 경치를 그리는 언어에 이르러서는 마치 바람과 구름이 변화하는 모양과 같아서 아침저녁으로 일정하지 않다. 만약 스스로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명확히 깨달을 수 없으니, 이는 성인만이 성인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지봉 이수광의 지봉유설 중 호음 정사룡의 후대에 밤에 앉아서 시의 한 연인 "" 를 평하며 달이 외로이 걸렸네(月孤懸) 세 글자가 강소리 홀연히 사나우니(江聲忽厲)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였다. 허균이 지은 국조시산에서 이 시를 뽑아 넣으면서 평하였다. "이 노인의 이 연은 마땅히 이 권을 압도한다." 허균은 감식안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으니 마땅히 깊은 이해가 있는 바일 텐데 이수광이 이러한 폄하하는 논평을 한 것은 아마도 세밀하게 연구하지 않아서가 아니겠는가. 내가 일찍이 청풍을 지나 황강역에 이르러 머물렀는데 한밤중에 여울 소리가 매우 빠른 것을 들었고 문을 열어 바라보니 지는 달이 외롭게 걸려 있었다. 이에 정사룡의 "" 구를 떠올리며 한번 읊조리고 세 번 탄식하면서 비로소 옛사람이 경치를 묘사함이 핍진함을 깨달았다. 그 시의 가치가 실경을 대하니 더욱 높아진 듯하였다.이 핍진함을 깨달았다. 그 시의 가치가 실경을 대하니 더욱 높아진 듯하였다.)
- E303 + (서얼 이달은 자못 시명이 있었다. '신륵사 중의 시권에 제하다'시는 아래와 같다. "" 졸암 이충작이 또한 시를 잘한다 하였는데 그 운에 차운하였다. "" 당시 사람들이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하였다. 내가 이충작에게 이를 말하니 답했다. "이달의 시는 비록 청고한 듯하나 부허하여 엄정함이 없으니 어찌 취할 만하겠는가." 이는 이충작이 자신을 이달보다 높이 본 것이다.)
- E036 + (소식의 제한간십사마도라는 시는 이렇다. <div class="poetr … 소식의 제한간십사마도라는 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한간이 그린 말이 참말이고,<br>소식이 지은 시는 그림을 보는 것 같네.<br>세상에는 백락도 없고 또 한간도 없으니,<br>이 시와 이 그림을 누가 볼 수 있겠는가.<br></div></br>문순공 이규보의 제노자도라는 시는 이렇다.</br><div class="poetry-text">그림은 사람마다 간직하기 어렵지마는,</br>시는 곳곳마다 펼 수 있어라.</br>시 보는 것을 그림 보듯 하면,</br>그림 또한 만고에 전할 수 있으련만.</div></br><div class="critique-text">이 시들은 말은 같지 않으나, 거기에 쓰인 뜻은 서로 같다.</div> 전할 수 있으련만.</div> <div class="critique-text">이 시들은 말은 같지 않으나, 거기에 쓰인 뜻은 서로 같다.</div>)
- E718 + (오언배율은 초당에서 ㅈ시작되었다. 자미 두보가 일백 운을 지었고 고려의 상국 … 오언배율은 초당에서 ㅈ시작되었다. 자미 두보가 일백 운을 지었고 고려의 상국 이규보도 삼백 운을 지었다. 우리 조선에 이르러서는 소암 임숙영이 칠백 운을 지어 동악 이안눌에게 보냈다. 그 시는 널리 해박하고 기이하고 독특하여 실로 천년의 걸작이다. 비록 두보와 같은 대가도 오히려 백 운에 그쳤으며 후세의 시인들 또한 이러한 대작이 없는데 임숙영이 처음으로 창작하였으니 그 학문의 창고가 부유함을 알 만하다. 이안눌이 시 한 수로 대답하였다. "" 이는 대개 작은 것으로 큰 것에 대적하려는 것인데, 중모 손권의 삼만 병사로 조조의 십만 대군에 대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모 손권의 삼만 병사로 조조의 십만 대군에 대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E207 + (우리 동방의 의논이 옛날부터 부녀자의 직책은 음식을 만들고 길쌈을 하는 것뿐 … 우리 동방의 의논이 옛날부터 부녀자의 직책은 음식을 만들고 길쌈을 하는 것뿐이요, 글과 글씨의 재주는 그들에게 마땅한 것이 아니라 하여 비록 타고난 재주가 남보다 출중한 사람이 있어도 꺼리고 숨겨 힘쓰지 않았으니 한탄할 일이다. 삼국 시대에는 알려진 사람이 없고, 고려 5백년 동안에는 다만 용성(龍城) 창기 우돌(于咄)과 팽원(彭原) 창기 동인홍(動人紅)만이 시 지을 줄을 알았고, 본조에는 정씨(鄭氏)ㆍ성씨(成氏)ㆍ김씨(金氏)가 있는데, 김씨는 시 편이 있어 세상에 전하나 너무 약하여 기운이 적고, 오직 정씨의</br>어젯밤 봄 바람이 골방에 들어오니 / 昨夜春風入洞房</br>한 장의 구름 비단 붉고 향기로움 난만하다 / 一張雲錦爛紅芳</br>이 꽃 피는 곳에 우짖는 새소리 듣노라니 / 此花開處聞啼鳥</br>한편으론 그윽한 자태 노래하는 듯, 한편으론 애를 끊는 듯하여라 / 一詠幽姿一斷腸</br>란 시와 성씨의</br>눈에는 두 줄기 눈물을 머금고 / 眼帶雙行涙</br>가슴에는 만 리의 마음을 감추었네 / 胸藏萬里心</br>문 밖의 붉은 복사꽃 일시에 다 지고 / 門外紅桃一時盡</br>수심 속 흰 머리 십분이나 새로워라 / 愁中白髮十分新</br>란 시와 김씨의</br>지경이 궁벽하니 오는 사람 적고 / 境僻人來少</br>산이 깊숙하니 시속 선비 드물구나 / 山深俗士稀</br>집이 가난하여 한 말 술도 없으니 / 家貧無斗酒</br>묵고 갈 손이 밤에 돌아가는구나 / 宿客夜還歸</br>란 시가 조금 사람들의 뜻에 든다.갈 손이 밤에 돌아가는구나 / 宿客夜還歸 란 시가 조금 사람들의 뜻에 든다.)
- E213 + (우리나라에는 원숭이가 없으므로 고금의 시인들이 원숭이 소리를 표현한 것은 모 … 우리나라에는 원숭이가 없으므로 고금의 시인들이 원숭이 소리를 표현한 것은 모두 틀리다. 가정 병오년에 행인(行人) 왕학(王鶴)이 한강에서 놀면서 시를 지었는데,</br>푸른 술통이 물결에 잠겼으니 춘의(술 구더기)가 뜨고 / 綠尊隱浪浮春蟻</br>긴 피리 바람에 부니 저녁 원숭이의 휘파람 소리로다 / 長笛吹風嘯暮猿</br>하였다. 대제학 낙봉(駱峯) 신광한(申光漢)이 이에 화답하기를,</br>한수에서 지금 채봉을 만났으니 / 漢水卽今逢彩鳳</br>초운 어느 곳에서 원숭이 울음을 들을꼬 / 楚雲何處聽啼猿</br>하였는데, 이것은 을사년 여름에 행인 장승헌(張承憲)이 고명(誥命)을 받들고 왔을 때 낙봉이 강가에서 송영(送迎)하면서, 초(楚) 나라에서 사신으로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이 시를 지은 것으로 제원(啼猿)으로 운을 달았는데, 기교의 흔적이 없어 가장 뛰어난 시가 되었다.원(啼猿)으로 운을 달았는데, 기교의 흔적이 없어 가장 뛰어난 시가 되었다.)
- E738 + (윤보 이서우와 문약 이옥은 모두 문사에 공교하여 각각의 장점이 있었다. 이옥 … 윤보 이서우와 문약 이옥은 모두 문사에 공교하여 각각의 장점이 있었다. 이옥이 젊었을 적에 동주 이민구의 문하에서 배웠다. 이민구가 일찍이 칭찬하였다. "이 사람은 재주가 범상치 않지만 너무 젊을 적에 등과하여 문장에 힘을 다할 수 없으니 애석하다." 만년에 시를 좋아하였으나 왕왕 고어를 쓰지 않아 교룡과 지렁이 같은 것들이 섞여 있어서 시가 문만 못하였다. 박사 홍도 역시 이민구의 문인이었다. 총명함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서 한 번 보면 곧 기억하고 자의와 음운에 밝게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문장을 지을 때에는 즉시 붓을 잡고 곧 완성하여 조금도 막히는 바가 없었으나 시에 있어서는 한 구도 제대로 짓지 못했다. 이민구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문에 장점이 있으나 시에 단점이 있는 것을 보니, 옛사람이 말한 바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다는 말이 믿을 만하다." 보니, 옛사람이 말한 바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다는 말이 믿을 만하다.")
- E675 + (을미년(1595, 선조28)과 병신년(1596, 선조29) 사이에 명나라의 … 을미년(1595, 선조28)과 병신년(1596, 선조29) 사이에 명나라의 장군 제독(提督) 유정(劉綎)이 병사를 이끌고 호남과 영남 사이를 왕래하였는데, 막하에 한 서생을 데리고 다녔다. 가끔씩 시를 지었고, 사람들은 간혹 그의 가구(佳句)를 전하여 읊었으나, 그 얼굴은 본적도 없고 이름도 알지 못하였다. 그때 우리나라와 왜적은 서로 대치하여 승패를 결정하지 못했는데, 그 서생이 방휼(蚌鷸)의 비유를 써서 장률을 지어 이르기를,</br></br>늙은 조개 추위 피해 햇볕을 쬐는데 / 老蚌當陽爲怕寒</br>들새는 무슨 일로 애써 구하였는가 / 野禽何事苦相干</br>몸은 굴혈 떠나 진주 태는 손상되고 / 身離窟穴珠胎損</br>여울에서 힘 다해 푸른 깃은 쇠잔타 / 力盡沙灘翠羽殘</br>입 닫을 때에 열 때의 화를 어찌 알며 / 閉口豈知開口禍</br>머리 넣을 때에 빼기 어려움 누가 알았으랴 / 入頭誰料出頭難</br>어부 손에 함께 떨어질 줄 일찍 알았던들 / 早知俱落漁人手</br>구름과 물속 맘껏 날고 잠겨있을 텐데 / 雲水飛潛各自安</br></br>하였다. 서생은 대개 당시의 어지러운 사세(事勢)를 보고 어부지리(漁父之利)의 설을 그릇되게 거론한 것이다. 마침내 국가가 다시 회복되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상국(上國 명나라)이 한결같이 우리나라를 구휼하고 선조(宣祖)께서 발리(跋履 여러 곳을 다니며 애씀)하시며 난을 극복한 노력이 아님이 없으니, 서생이 어찌 말을 할 줄 아는 자이겠는가.을 극복한 노력이 아님이 없으니, 서생이 어찌 말을 할 줄 아는 자이겠는가.)
- E098 +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이 젊어서 재예(才藝)가 있었다. 만년에 양주(楊 …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이 젊어서 재예(才藝)가 있었다. 만년에 양주(楊州)의 누원(樓院)에 올라 짧은 시 3편을 남겼다. 그 첫 편에,</br>산이 있으면 어디나 여산이 아닐까 / 有山何處不爲廬</br>앉아 청산을 대하고 한번 탄식하노라 / 坐對靑山試一噓</br>벼슬살이 십 년에 늙은이 되었으니 / 簪笏十年成老大</br>노경에 〈귀거래사〉를 읊게 하지 말라 / 莫敎霜鬢賦歸歟</br>하였다. 영천군(永川君) 이정(李定)은 자가 안지(安之)인데, 이 시를 보고 절하고, 또 비평하기를 “이 시는 매우 핍진하니, 서(徐)의 시가 아니면 이(李)의 시일 것이다.” 하였다. 그 당시 서거정(徐居正)과 이승소(李承召)가 시명을 독차지하여 이정이 감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이정이 다시 누각 아래를 지나가다가 전날 썼던 비평을 다시 읽어 보니, 그 아래에 글이 쓰여 있기를 “이 시에는 강산의 아취(雅趣)가 있어 한 점의 티끌도 없으니, 이는 반드시 번뇌에 얽매인 세속의 선비가 지은 것이 아니다. 또 천지가 크고 강산이 깊은데 어찌 인재가 없어서 반드시 서(徐)와 이(李)라고 추측하는가. 인재를 저버리고 사람을 멸시함이 어찌 이리도 심하단 말인가.” 하였다. 이정이 이 글을 보고 크게 뉘우쳐서 전날 비평했던 글을 지워 버렸다. 지금의 《진산세고》에는 3편이 모두 실려 있지 않으니, 경순(景醇)의 편집이 넓지 못함이 이와 같다.편이 모두 실려 있지 않으니, 경순(景醇)의 편집이 넓지 못함이 이와 같다.)
- E665 +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은 시명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은 시명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추켜 받들고 인정해 주면서, 그의 삭설은 변방 길에 휘몰아치네[朔雪龍荒道]라는 시 한 편은 성당(盛唐)의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했다. 일찍이 그의 말을 들으면 어느 절에 가니 승축(僧軸)에</br>동화에서 밥을 빌던 옛날의 학관이라 / 竊食東華舊學官</br>분산이 좋아 노닐 만하다지만 / 盆山雖好可盤桓</br>십 년이나 그리던 꿈 비로봉(飛盧峯)을 감도니 / 十年夢繞毗盧頂</br>베갯머리 솔바람 밤마다 서늘하네 / 一枕松風夜夜寒</br>라 했는데, 어사(語詞)가 심히 탈쇄(脫洒)하나 그 이름이 빠져서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세상에 참으로 버려진 인재가 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br>중형(仲兄)이 사명을 받들고 북방에 나가 압호정(壓胡亭)에 올라서</br>백옥에는 해 지난 병든 백성들 / 白屋經年病</br>푸른 벼를 망쳐 버린 하루 밤 서리 / 靑苗一夜霜</br>라 읊었는데, 임자순은 이를 극찬하고,</br>백옥 청묘는 열 글자의 시사(詩史)로다 / 白屋靑苗十字史</br>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중형도 임자순의</br>오랑캐 일찍이 이십 주를 엿볼 적엔 / 胡虜曾窺二十州</br>장군은 말 솟구쳐 봉후를 취했는데 / 將軍躍馬取封侯</br>지금은 절새에 정벌 싸움 없으니 / 如今絶塞無征戰</br>장사는 옛 역루에 한가로이 잠을 자네 / 壯士閑眠古驛樓</br>라는 시를 칭찬하여 협기(俠氣)가 펄펄 뛴다고 하였다.네 / 壯士閑眠古驛樓 라는 시를 칭찬하여 협기(俠氣)가 펄펄 뛴다고 하였다.)
- E190 + (정덕(正德) 임신년(1512, 중종 7)에 일본 사신이 서울에 와서 병이 들 … 정덕(正德) 임신년(1512, 중종 7)에 일본 사신이 서울에 와서 병이 들어 시를 짓기를,</br>조선 사관의 문 밖 / 東國館門外</br>사면에 둘러 있는 산은 늦은 봄인데 / 四屛山暮春</br>침상 밑의 신발은 먼지가 쌓이고 / 塵埋床下屨</br>걸려 있는 두건에는 거미줄이 쳐졌도다 / 蛛網架頭巾</br>베갯머리에 고향 그리워 눈물이 글썽이는데 / 枕有思鄕淚</br>문에는 문병 오는 사람 없으니 / 門無問疾人</br>바다 건너 만 리 나그네 / 滄波萬里客</br>돌아가지 못하는 신세를 슬퍼하노라 / 惆帳未歸身</br>하였다. 그때에 선위관(宣慰官)이 그 시를 탄복해 마지않았고, 온 장안이 모두 전하며 그 시를 외웠다. 지금 보건대 당 나라 말년에 병든 중이 그의 집에서 지은 시에,</br>베갯머리에는 고향 그리워 눈물이 글썽이는데 / 枕有思鄕淚</br>문에는 문병 오는 사람 없도다 / 門無問疾人</br>침상 밑의 신발은 먼지가 쌓이고 / 塵埋床下履</br>걸려 있는 두건에는 바람이 부네 / 風動架頭巾</br>한 것이 있다. 마침 부사(部使)가 그것을 보고 조정에 말하여 온 나라 안 절에 연수료(延壽寮)를 설치하고 병든 중들을 요양하게 하였다. 일본 사신의 시는 병든 중이 지은 시의 두 연(聯)을 그대로 인용하고 다만 그 구절을 위아래로 바꾸어 놓고, 또 이(履) 자를 구(屨) 자로 고치고, 바람이 부네[風動]를 거미줄[蛛網]로 바꾸었을 뿐이니, 온 장안에 전하며 암송한 사람들은 참으로 그 식견이 좁고 선위관도 식견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매우 우스운 일이다.으로 그 식견이 좁고 선위관도 식견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매우 우스운 일이다.)
- E116 + (참판 홍일동이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놀러 나갔다가 바야흐로 배를 타고 … 참판 홍일동이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놀러 나갔다가 바야흐로 배를 타고 건너게 되었다. 어떤 호걸이 노복 십여 명을 거느리고 나타났는데 혹 활을 끼거나 사냥한 족제비를 들고 있었으며 안장과 말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소리치며 다가왔다. 홍일동의 말과 노복을 보고는 모두 배 아래로 내쫒자 홍일동이 홀로 간청하며 말했다. "저 또한 양가의 사람이니 청컨대 모퉁이에 남도록 해 주십시오." 모퉁이에 엎드려 기다렸다. 그 사람이 배에 오르자 노복들이 각기 물품을 받들어 올렸다. 그 사람은 음식을 먹으면서 뱃전을 두드리며 시를 짓기를, ""라 하였는데, 그 대구를 오래 기억하지 못했다. 홍일동이 나와서 ""라 하자 그 사람이 놀라서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라 하였다. 대답하기를 "생원 홍일동입니다."라 하자 그 사람이 곧 손을 잡고 함께 앉아 시를 읊으며 매우 즐거워하였다. 이 때문에 교분이 두터워졌으니, 그 사람은 심선이었다. 매우 즐거워하였다. 이 때문에 교분이 두터워졌으니, 그 사람은 심선이었다.)
- E209 + (충암(冲庵) 김공이 일찍이 통천(通川) 총석정(叢石亭)에서 놀며 시 6수를 … 충암(冲庵) 김공이 일찍이 통천(通川) 총석정(叢石亭)에서 놀며 시 6수를 지었는데, 뒤에 군수가 그 시판(詩板)을 없앴기 때문에 그 두 편을 잃어버렸다. 일찍이 서사가(徐四佳)의 《동인시화(東人詩話)》를 보니, 영헌(英憲) 김지대(金之岱)가 의성(義城) 관루(館樓)에 쓴 시가 당시에 회자(膾炙)되었는데, 누각이 병란으로 불에 타는 바람에 시판도 따라서 없어졌다. 수십 년 후에 현감 오적장(吳迪莊)의 딸이 미쳐서 허튼 소리를 하다가 홀연 김지대의 시를 읊어 내니, “귀신도 시를 사랑하여 다시 세상에 전하게 하였다.” 하였다. 그런데 통천 고을에는 시를 사랑하는 귀신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내가 그의 네 시를 아래에 기록한다. 그 첫째에 이르기를,</br>끊어진 산길 붉은 낭떠러지 창해 언덕에 / 絶嶠丹崖滄海陬</br>외로운 표지가 멀고 아득하니 곧 봉구로다 / 孤標夐邈即蓬丘</br>단단한 뿌리는 곧장 그윽한 물결 험한 데 꽂혀 있고 / 硬根直揷幽波險</br>깎은 표면은 아마도 잘드는 도끼로 다듬었나 보다 / 削面疑經巧斧修</br>자라 기둥은 하늘처럼 높았으니 네 조각이 남았고 / 鰲柱天高殘四片</br>양호의 비석은 고개가 오래 되었으니□ □ / 羊碑峴古□□□</br>□□□ 떠나가니 이미 아득히 멀구나 / □□□去已寥廓</br>눈은 푸른 구름에 끊어져서 부질없이 스스로 근심하는도다 / 目斷碧雲空自愁</br>하였고, 그 둘째에는 말하기를,</br>천고의 높은 언덕 총석이 좋다 / 千古高皐叢石勝</br>올라 가보니 고요하고 아득하여 9년의 회포로다 / 登臨寥落九秋懷</br>북두성의 두괴는 광채를 감추고 푸른 바다를 따르고 / 斗魁鏟彩隨碧海</br>월궁에서 도끼를 빌려 붉은 언덕을 깎았도다 / 月宮借斧削丹崖</br>큰 바다는 위태로운 산봉우리를 떠 가려 하고 / 巨溟欲泛危巒去</br>완악한 뼈는 길게 격동하는 물결에 부딪쳐 물리치도다 / 頑骨長衝激浪排</br>봉도의 퉁소와 피리를 부질없이 기다리며 / 蓬島簫笙空淡竚</br>석양에 머리 긁으며 하늘가에 붙여 있다 / 夕陽搔首寄天涯</br>하였고, 그 셋째에는 말하기를,</br>8월 15일 총석정 밤에 / 八月十五叢石夜</br>푸른 하늘 은하수가 맑아서 유유하도다 / 碧空星漢淡悠悠</br>날아 오르는 계수나무 그림자는 하늘에 올라 가득하고 / 飛騰桂影昇天滿</br>출렁거리는 은빛은 바다에 넘쳐 뜬다 / 搖漾銀光溢海浮</br>육합에 외로운 생애는 몸이 한 낱알이요 / 六合孤生身一粒</br>네 신선이 남긴 자취는 학이 천추로다 / 四仙遺躅鶴千秋</br>흰 구름 멀고 먼 일만 산 밖에 / 白雲迢遞萬山外</br>홀로 높은 언덕에 섰으니 아득하고 아득한 근심이로다 / 獨立高邱杳遠愁</br>하였고, 그 넷째에는 말하기를,</br>구름은 사라지고 가을은 맑고 푸른 하늘은 맑은데 / 雲沒秋晴淡碧層</br>맑은 새벽에 일어나 뜨는 태양 바라본다 / 淸晨起望太陽昇</br>빛은 바다에 잠겼다 처음에는 삼켰다 토했다 하고 / 光涵海宇初吞吐</br>채색은 하늘 거리를 쏘며 홀연히 솟아 오른다 / 彩射天忂忽湧騰</br>그윽한 굴의 늙은 용은 불꽃인가 놀라고 / 幽窟老龍驚火焰</br>깊은 숲의 음침한 귀신은 의지할 곳을 잃었도다 / 深林陰鬼失依憑</br>인간의 어두움이 이제부터 사라지리라 / 人間昏黑從今廓</br>엄자를 향하여 노끈으로 잡아맸으면 / 欲向崦嵫爲繫繩</br>하였다. 人間昏黑從今廓 엄자를 향하여 노끈으로 잡아맸으면 / 欲向崦嵫爲繫繩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