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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382 +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벼슬을 버리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실 때, 송강이 뒤 …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벼슬을 버리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실 때, 송강이 뒤따라 강가에서 선생을 보냈다. 그 전별시에.</br>안위는 아랑곳없이 나라를 떠나가는 날 / 安危去國日</br>풍우를 무릅쓰고 성을 나가는 사람이 되었도다 / 風雨出城人</br>떠나는 마음은 봄풀같이 무럭무럭 자라 / 離思如春草</br>강남 가는 곳마다 새로웠으리 / 江南處處新</br>하고, 또 한 수 지어 보내기를,</br>뒤따라 광릉까지 와 보니 / 追至廣陵上</br>신선 배는 이미 어디 갔는지 아득하구나 / 仙舟已杳冥</br>봄바람에 한없는 생각을 안고 / 春風無限思</br>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름이여 / 斜日獨登亭</br>하였다.각을 안고 / 春風無限思 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름이여 / 斜日獨登亭 하였다.)
- C015 + (팔구(八九)로 이삼(二三)을 대하니 평측(平仄)이 고르지 못하오. 공(公)은 평일에 있어서는 문장이 훌륭하여 비록 수백 운(韻)의 율시(律詩)라도 한 번 내려 쓰기를 마치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스쳐가듯 빨리 하나 한 글자도 하자가 없었는데, 지금은 한 작은 율시를 짓되 도리어 염(廉)을 어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 E241 + (허국과 위시량이 왔을 때,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원접사로 하여금 종계 등의 … 허국과 위시량이 왔을 때,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원접사로 하여금 종계 등의 변무에 대해 차근차근 알리게 하되, 목은집 중에서 환조대왕 및 이인복 묘비를 보여주고, 또한 말하기를 '이것을 보면 국조 이성계와 이인임이 하나의 이씨가 아님을 스스로 변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라"고 하였다. 대개 이인복이 이인임의 형이기 때문이었다. 허국이 읽어보고 말했다. "문장이 매우 좋다. 이 사람의 시편을 보고 싶다" 홍순언이 대답하였다. "시집은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벽루에 제영하여 지은 시가 있습니다." 허국이 답했다. "그대가 시험삼아 써보라" 순언이 곧 써내었다. "" 이 시를 올리니, 허위가 오래도록 읊어보다가 말했다. "그대 나라에 어찌 이와 같은 시가 있는가?" 그 말은 우리나라를 가볍게 여기는 듯하나, 마음으로는 목은 이색의 시에 탄복한 것이다.리나라를 가볍게 여기는 듯하나, 마음으로는 목은 이색의 시에 탄복한 것이다.)
- E587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황화집은 후세에 전할 책이 아니니 필경 중국에서 드러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사신의 작품들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감히 가리지 못하고 받아서 간행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 사신 중에 글을 잘한다 일컫는 자는 필경 공용경인데 주지번에게 그를 물으니 일찍이 성명을 듣지 못했다 한다. 기순과 당고는 시어가 아름답고 굳세지만 또한 시가에 대하여 능한 사람은 아니다. 장녕은 다소 청려한 듯하나 또한 취약하여 골격이 없어서 끝내 소가에 귀결된다. 주지번의 시는 조잡하여 형태가 없으니 오히려 사신 웅화의 위약함만도 못하다. 그 밖의 사람들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 문인들이 매번 수창할 적에 대부분 미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대소정편의 다름이 있다. 원접사 서거정이 기순에 대해 감히 선창하기를 마치 도전하는 듯하게 하였지만 결국 ""구에 곤란을 겪었다. 율곡 이이가 조롱하여 말하기를 "사가 서거정은 씨름하는 사람과 같으니 먼저 다리를 걸고 후에 땅에 넘어뜨린다." 아랫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는 마땅히 받들어 접대하고 수창하여야 할 따름인데 어찌 감히 선창하겠는가? 이는 참으로 식자의 말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사신을 대할 때 그 시절 문인들 중 다소 시에 능한 자들을 모아서 수답하게 하였는데 그 택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사신의 웃음을 산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정사룡은 비록 시짓는 장수라 칭하지만 그 시가 이루어진 시에 견강부회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 오직 이행만이 혼연히 글을 완성하였으나 격조가 매우 비루하여 과체시의 류에 불과하였다. 지을 때마다 잠시 집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응수하였는데 그 대구가 잘 어울려 흠이 없었으니 평소에 익숙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소세양과 이희보는 비록 당시의 종사에게는 굴복하였으나 지금 세상에 동문을 읽고 사운시를 익히는 유근과 같은 자와는 함께 논할 수 없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문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흐르는 물이 가는 것과 같으니 탄식할 만하다.)
- E004 +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 …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하건대, 최치원의《사륙(四六)》1권을 실었고, 또《계원필경(桂苑筆耕)》10권을 간행하였다. 나는 일찍이 중국 사람은 포용력이 넓어서 외국 사람의 글이라고 경홀하게 여기지 않고, 이미 사책에 실었을 뿐더러, 또 그 문집이 세상에 행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 갸륵하게 여겼다. 그러나 문예열전(文藝列傳)에 최치원을 위하여 특별히 그 전(傳)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 뜻을 모르겠다. 혹 그의 사적이 전을 설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겨서일까? 최치원은 12세에 바다를 건너 당 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여 한 번 과거를 보아 갑과로 급제하였고, 드디어 고변(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서는 황소에게 격문을 보내니 황소의 기가 꺾였으며, 뒤에 벼슬이 도통순관 시어사(都統巡官侍御史)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려 할 때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이 유선가(儒仙歌)를 주었는데, 그 한 구에, </br></br><div class="poetry-text">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br></br>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네</div></br></br>하였고, 그의 자서(自敍)에도, “무협 중봉(巫峽重峯)의 해에 보잘것없는 몸으로 중국에 들어 왔고, 은하 열수(銀河列宿)의 해에 비단옷 입고 고국에 돌아왔다.” 하였으니, 대개 열두 살에 당 나라로 들어갔다가 스물여덟 살에 고국으로 돌아왔음을 말한 것이다. 그 행적이 이처럼 뚜렷하니, 이것으로 전을 설치한다면 예문지에 실린 심전기(沈佺期)ㆍ유병(柳幷)ㆍ최원한(崔元翰)ㆍ이빈(李頻) 등의 반장 정도되는 열전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만약 외국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지(志)에는 써야 할 것이다. 번진호용열전(藩鎭虎勇列傳)에서는 이정기(李正己)ㆍ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다 고려 사람인데도 각각 그 전을 만들어 그 사실을 소상하게 기록했는데, 어째서 문예열전에서만 최치원을 위하여 그 전을 설치하지 않았는가? 내가 사의(私意)로 헤아리건대, 옛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시기함이 없지 않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물며 최치원은 외국의 외로운 몸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사들을 압도했음에랴. 만일 전을 설치하여 바른 대로 그 사적을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 쓴다면, 그들의 시기에 저촉될까 염려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해 못할 바이다.)
- E030 + (《서청시화(西淸詩話)》에 이산보(李山甫)가 한사(漢史)를 보고 읊은 시가 다 … 《서청시화(西淸詩話)》에 이산보(李山甫)가 한사(漢史)를 보고 읊은 시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br>왕망이 희롱해 오매 일찍이 반쯤 빠졌더니 / 王莽弄來曾半沒</br>조공이 가져 가니 문득 깊이 잠겼다 / 曹公將去便平沈</br>나는 이를 아름다운 시구로 여긴다. 그런데 고영수(高英秀)라는 자가 기롱하기를 ‘파강시(破舡詩)’라 하였다.</br>나는 생각건대, 무릇 시란 물(物)의 체(體)를 말하기도 하고, 또는 그 체를 말하지 않고 곧장 그 용(用)을 말하는 것도 있다. 산보(山甫)가 뜻을 밝힌 것은, 필시 한(漢) 나라를 배[舡]에 비유하고 곧장 그 용을 말하기를 ‘반쯤 빠졌다’ ‘깊이 잠겼다’고 한 것이리라. 만일 그 당시에 산보가 있어서 말하기를,</br>“자네가 내 시를 파강시라고 하니, 그렇다. 내가 한 나라를 배에 비유하여 말하였는데, 장하도다, 자네가 능히 알아봄이여!”</br>라고 하였더라면, 영수(英秀)는 무슨 말로 답변했겠는가. 《시화》에서는 또한 영수를 함부로 지껄이는 경박한 무리로 여겼다면 반드시 그의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부로 지껄이는 경박한 무리로 여겼다면 반드시 그의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 E295 + (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 … 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예부(禮部)를 관광(觀光)하는데, 절강(浙江)의 서생(書生) 5~6인이 먼저 와 있었다. 땅에 글을 적어 서로 문답하고, 한 절구를 지어보였다.</br>중국 조정 예부에 부평같이 모였으니 / 天朝禮部風萍集</br>천리의 관광객은 각각이 다른 고향 / 千里觀光各異鄕</br>가장 괴로운 건 내일 아침 이별하면 / 最苦明朝又分手</br>푸른 하늘 가을 숲이 정히 푸르리 / 碧天秋樹正蒼蒼</br>내가 곧 그 시의 운에 따라 지었다.</br>서리 바람 나무에 불어 성겨 누른 잎 떨어지니 / 霜風吹樹隕疏黃</br>소슬한 찬 소리에 고향 생각 괴롭도다 / 蕭瑟聲寒苦憶鄕</br>같은 나그네로 내가 가장 먼 곳이니 / 同作旅遊吾最遠</br>바다 하늘 나직한데 흩어진 산 푸르구나 / 海天低襯亂山蒼</br>서로 끌며 몰려와 보고는 선생이라 불렀다. 내가 사양하여 말하기를,</br>“중국 선비들의 과분한 칭찬이 이미 감사한데, 또 선생은 무슨 말입니까?”</br>하니, 답하기를,</br>“재주를 보는 것이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br>하였다. 이번 걸음에 무령현(撫寧縣) 벽에 한 율시를 지어 붙였다. 그 1 연(聯)에,</br>말 통하려고 땅에 글 쓰기 번거롭고 / 通言煩畫地</br>악을 보러 중국을 방문한 것 기쁘다 / 觀樂喜朝天</br>하였다. 그후 임술년간에 한 압마관(押馬官)이 와서 말하기를,</br>“어떤 현의 관사가 다 낡아 다시 지었는데, 그 시를 쓴 구벽(舊壁)은 완연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br>하였다. 케케묵고 누추한 시에서 뭐 취할 것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
- E750 + (고금의 학문에 힘쓰는 선비들은 모두 부지런함으로써 이루지 않은 이가 없다. … 고금의 학문에 힘쓰는 선비들은 모두 부지런함으로써 이루지 않은 이가 없다. 우리나라의 문장이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 독서를 많이 한 사람 또한 역력히 헤아릴 수가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괴애 김수온은 문을 닫아걸고 독서하면서 밖을 내다보지도 않아서 마루를 내려와 낙엽을 보고는 비로소 가을임을 알았다 한다. 허백당 성현은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암송하면서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아 변소에 가서 돌아오기를 잊기도 하였다. 김일손은 한유의 글을 천 번 읽었고 윤결은 맹자를 천 번 읽었으며 소재 노수신은 논어와 두시를 이천 번 읽었고 백호 임제는 중용을 팔백 번 읽었으며 간이 최립은 한서를 오천 번을 읽었으며 특히 항적전을 일만 번 읽었다. 창주 차운로는 주역을 오백 번 읽었고 동악 이안눌은 두시를 수천 번 읽었으며 어우 유몽인은 장자와 유종원의 문장을 천 번 읽었고 동명 군평 정두경은 사마천의 사기를 수천 번 읽었다. 나는 성질이 노둔하여 읽는 바 공부를 다른 사람의 배로 하였다. 사기, 한서, 한유, 유종원과 같은 것을 모두 베껴서 읽기를 만여 번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백이전으로 일억일만삼천 번에 이르도록 읽었다. 마침내 나의 작은 집을 억만재라 하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지난 경술년(1670)에 시절이 가뭄을 만나 팔도에 흉년이 들었고 다음해에는 크게 기근과 역병이 돌아서 도읍과 시골에 시체가 쌓였는데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금년에 죽은 사람과 그대의 책을 읽은 숫자 중에 어느 것이 많은가?" 대개 나의 독서를 희롱한 것이다.책을 읽은 숫자 중에 어느 것이 많은가?" 대개 나의 독서를 희롱한 것이다.)
- E736 + (근래의 젊은이 중에서 사백 김석주가 일찍부터 문명을 얻었으나 문장이 난삽한 … 근래의 젊은이 중에서 사백 김석주가 일찍부터 문명을 얻었으나 문장이 난삽한 병통이 있었다. 비록 몇 구의 말을 지어도 반드시 마음을 써서 깊이 생각하며, 초고를 여러 번 고치지 않으면 내놓지 않았다. 그의 시는 대개 조각하고 꾸민 것이 많은데, 우해 홍만종에게 차운한 시 여덟 편은 모두 좋다. 그 중 한 편은 이러하다. "" 극히 평담하고 고풍에 가깝다. 내가 일찍이 김석주를 만나 문학을 논할 때 김석주가 말했다. "내가 젊어서 많이 읽지 못하여 글쓰는 힘에 박차를 가할 수 없다. 비록 힘써 읽어서 그 병통을 고치려 하나 많은 업무로 겨를이 없으니 한스러울 뿐이다." 대개 김석주가 무릇 제술할 때에는 옛 저작을 모방하는 데이만 능할 뿐으로 큰 근원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므로 그가 이처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작법을 묘하게 이해하고 각 체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참으로 얻기 쉽지 않다. 작법을 묘하게 이해하고 각 체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참으로 얻기 쉽지 않다.)
- E258 + (기재(企齋) 신 상공(申相公)이, ‘동지(同知) 장언양(張彦陽)이 연경(燕京)에 가는 것을 보내다’라는 시에, 오늘에 주 나라를 관광하는 오 나라 계찰이요 / 今日觀周吳季札 전에 오랑캐에게 화친하던 한 나라 장건이라 / 舊時和虜漢張騫 하니, 만좌(滿座)가 다시 붓을 대지 못하였다. 조송강(趙松岡)이 말한 것이다.)
- E082 + (김문평(金文平)은 문장이 웅혼(雄渾)하고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오로지 사 … 김문평(金文平)은 문장이 웅혼(雄渾)하고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오로지 사마자장(司馬子長)의 궤범(軌範)을 모방하였는데, 온 세상에 맞설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 시 또한 기상(氣像)이 높고 깊이 골수(骨髓)를 얻었다. 성품이 검속(檢束)할 줄을 모르고 압운(押韻)이 바르지 못하여 모두들 시(詩)가 문(文)보다 못하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시나 문이나 모두 넉넉하였다.〈격옹도(擊瓮圖)〉라는 시에는,</br>독 속에 있는 천지가 갑자기 활짝 열리어 / 瓮中天地忽開豁</br>산천 품물이 한가지로 밝게 되살아나도다 / 山川品物同昭蘇</br>하고, 〈심중추산재(沈中樞山齋)〉라는 시에는,</br>삐딱한 사립문 시냇가 언덕에 면해 있어 / 紫門不整臨溪岸</br>산비가 아침마다 내려 물이 불어남을 보겠도다 / 山雨朝朝看水生</br>하고, 〈용궁헌제(龍宮軒題)〉라는 시에는,</br>마음껏 백배를 마시고 누상에 누워 / 痛飮百杯樓上臥</br>발을 걷으니 남북이 모두 청산이로다 / 捲簾南北是靑山</br>하였다. 또 산사(山寺)를 두고 시를 지었는데,</br>창은 비었는데 중은 장삼을 깁고 / 窓虛僧結衲</br>탑은 조용한데 객이 시를 짓도다 / 塔靜客題詩</br>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생각 너머의 정취를 얻은 것으로 보통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생각 너머의 정취를 얻은 것으로 보통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 E011 + (나는 아홉 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지금까지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시서 … 나는 아홉 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지금까지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시서육경(詩書六經)ㆍ제자백가(諸子百家)ㆍ사필(史筆)의 글로부터 유경벽전(幽經僻典)ㆍ범서(梵書)ㆍ도가(道家)의 설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 깊은 뜻은 궁구하지 못했지만, 그를 섭렵하여 좋은 글귀를 따서 글 짓는 자료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또 복희(伏羲) 이후 삼대(三代)ㆍ양한(兩漢)ㆍ진(秦)ㆍ진(晉)ㆍ수(隋)ㆍ당(唐)ㆍ오대(五代) 사이의, 군신의 득실이며 방국의 치란이며 그리고 충신의사(忠臣義士)ㆍ간웅 대도(奸雄大盜)의 성패ㆍ선악의 자취를 비록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기억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들을 간추려 기송(記誦)하여 적시에 응용할 준비를 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혹시 지필을 가지고 풍월을 읊게 되면, 아무리 백운(百韻)에 이르는 장편(長篇)ㆍ거제(巨題)라 할지라도 마구 내려 써서 붓이 멈추지 않는다. 비록 금수(錦繡)와 주옥(珠玉) 같은 시편은 이루지 못하나 시인의 체재는 잃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건대, 자부함이 이와 같은데 결국 초목과 함께 썩게 되는 것이 애석하다. 한 번 붓을 들고 금문(金門)ㆍ옥당(玉堂)에 앉아서 왕언(王言)을 대신하고 고초(稿草)를 검토하며 비칙(批勅)ㆍ훈령(訓令)ㆍ황모(皇謨)ㆍ제고(帝誥)의 글을 지어 사방에 선포하여 평생의 뜻을 푼 뒤에야 말 것이니, 어찌 구구하게 대수롭지 않은 녹을 구하여 처자를 살릴 꾀를 하는 자의 유이기를 바랐겠는가. 아, 뜻은 크고 재주는 높건만, 부명(賦命)이 궁박(窮薄)하여 나이 30이 되도록 오히려 한 군현(郡縣)의 직임도 얻지 못하였으니, 외롭고 괴로운 온갖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내 두뇌를 알 만하다. 이때부터 경치를 만나면 부질없이 시를 읊고 술을 만나면 통쾌하게 마시며 현실을 떠나서 방랑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라, 바람은 화창하고 날씨는 따스하여 온갖 꽃이 다투어 피니, 이처럼 좋은 때를 그저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윤학록(尹學錄)과 함께 술을 가지고 구경하면서 수십 편의 시를 지었다. 흥이 무르익었을 때 취기로 인해 졸았는데, 윤학록이 운자를 부르며 나더러 시를 지으라고 권하기에 나는 곧 보운(步韻)으로 다음과 같이 지었다. 귀는 귀머거리되려 하고 입은 벙어리되려 하니 / 耳欲爲聾口欲瘖 곤궁한 처지에 더욱 세정을 안다 / 窮途益復世情諳 뜻과 같지 않은 일은 십에 팔구나 되고 / 不如意事有八九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열에 한둘도 없다 / 可與語人無二三 사업은 고기처럼 하기를 기약하고 / 事業皐夔期自比 문장은 반마처럼 하려 하였는데 / 文章班馬擬同參 연래에 신명을 점검하니 / 年來點檢身名上 전현에 미치지 못한 게 바로 나의 부끄러움이네 / 不及前賢是我慙 윤학록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팔구(八九)로 이삼(二三)을 대하니 평측(平仄)이 고르지 못하오. 공(公)은 평일에 있어서는 문장이 훌륭하여 비록 수백 운(韻)의 율시(律詩)라도 한 번 내려 쓰기를 마치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스쳐가듯 빨리 하나 한 글자도 하자가 없었는데, 지금은 한 작은 율시를 짓되 도리어 염(廉)을 어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지금은 꿈속에서 지은 것이므로 가리지 않고 내놓은 때문이오. 팔구는 천만(千萬)으로 고치는 것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소. 대갱(大羹)과 현주(玄酒)가 초장만 못하지 않은 법이라. 대가의 솜씨는 원래 이러한 것인데 공이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하품하고 기지개하면서 깨니 바로 한 꿈이었다. 그래서 꿈속에 있었던 일을 윤학록에게 갖추 말하기를, “꿈속에서 꿈에 지은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이른바 꿈속의 꿈이구려.” 하고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따라서 희롱으로 다음과 같이 한 절구를 지었다. 수향이 문득 취향과 이웃하였으니 / 睡鄕便與醉鄕隣 두 곳에서 돌아오니 다만 한 몸일러라 / 兩地歸來只一身 구십 일 온 봄이 모두 꿈이라 / 九十一春都是夢 꿈속에 도리어 꿈속 사람이 되었네 / 夢中還作夢中人꿈이라 / 九十一春都是夢 꿈속에 도리어 꿈속 사람이 되었네 / 夢中還作夢中人)
- E733 + (문장이 세상에 드물게 나오는 것은 실로 쉽게 얻을 수 없어서이다. 근세에 이 … 문장이 세상에 드물게 나오는 것은 실로 쉽게 얻을 수 없어서이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재주 있는 선비들 중 뛰어난 자들도 또한 드무니 실로 탄식할 만하다. 원구 홍석기는 타고난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좋은 작품이 이루 기록할 수 없다. 또 강운을 압운하기를 잘하여 사람이 운자를 부르면 그에 응하여 대하곤 하였다. 일찍이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마침 소나무 위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우는 것을 보았다. 벗이 까마귀를 제목으로 삼아서 침금심(針衾心) 세 글자로 운을 부르니 홍석기를 곤란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홍석기가 즉시 부른 운자에 따라 곧바로 대답하였다. "" 친구가 혀를 내두르며 칭찬하였다. 홍석기가 일찍이 계곡 장유에게 수업하였는데, 장유가 말했다. "홍석기의 재주를 문장이라고 한다면 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하겠으나, 다만 재주있는 사람이라고만 한다면 그가 반드시 억울해할 것이다. 대개 재주있는 선비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이라 하겠다." 택당 이식이 일찍이 말했다. "천장(天章: 홍석기를 말하는 듯함.)의 큰 재주는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워하는 것이나 정공 덕여와 유공 여일이 또한 필적할 만하다." 덕여는 곧 현곡 정백창의 자이고, 여일은 곧 승지 유도삼의 자이다.하다." 덕여는 곧 현곡 정백창의 자이고, 여일은 곧 승지 유도삼의 자이다.)
- E189 + (박팽년은 문장이 충담(沖澹)하고 필법이 고묘(高妙)하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조 … 박팽년은 문장이 충담(沖澹)하고 필법이 고묘(高妙)하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조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영총(榮寵)이 지극하고 명망(名望) 또한 중하였으며, 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도 모두 세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며, 유응부는 무관 재상이었다. 세조가 영의정을 지낼 때 나라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br>묘당 깊은 곳에서 처량한 거문고 소리 들리는데 / 廟堂深處動哀絲</br>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 萬事如今摠不知</br>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br>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 花明春日正遲遲</br>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 先王舊業抽金櫃</br>성주(聖主)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 聖主新恩倒玉巵</br>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 不樂何爲長不樂</br>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賡歌醉賦太平時</br>하였다.長不樂 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賡歌醉賦太平時 하였다.)
- E008 + (복양(濮陽) 오세재 덕전(吳世才德全)은 시를 힘차고 준수하게 지었다. 그 시 … 복양(濮陽) 오세재 덕전(吳世才德全)은 시를 힘차고 준수하게 지었다. 그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 퍽 많지만, 강운(强韻)을 달아서 지은 것은 못 봤다.</br>그가 북산(北山)에 올라 극암(戟巖)을 시제(詩題)로 해서 시를 지으려고 할 때 사람을 시켜서 운자를 내게 하자, 그 사람은 일부러 험한 운자를 냈는데, 오 선생은 다음과 같이 썼다.</br></br>북령의 돌이 우뚝한 것을 / 北嶺石巉巉</br>사람들이 극암이라 부르네 / 邦人號戟巖</br>학을 탄 왕자 진(王子晉)을 칠 듯이 솟았고 / 逈摏乘鶴晉</br>하늘에 오르는 무함(巫咸)을 찌를 듯이 높다 / 高刺上天咸</br>휘어진 자루는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 揉柄電爲火</br>씻은 칼날은 서릿발처럼 희다 / 洗鋒霜是監</br>하필 병기를 만들어서 / 何當作兵器</br>초 나라를 망치고 범 나라를 존재시킬 것인가 / 亡楚却存凡</br></br>그 뒤에 몽고(蒙古) 사신이 왔는데 그는 시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이 시를 보고 재삼 찬탄하며,</br><u>“이 사람이 살아 있는가?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가? 혹시 만나 볼 수 있겠는가?”</br>하고 물었는데,</u> 우리나라 사람은 멍하니 대답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br>“지금 제고학사(制誥學士)의 직위에 있다고 왜 말하지 않았는가?”</br>하였다. 그가 권변(權變)에 어두움이 이와 같았으니 한탄스럽다.에 있다고 왜 말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그가 권변(權變)에 어두움이 이와 같았으니 한탄스럽다.)
- M014 + (북령의 돌이 우뚝한 것을 / 北嶺石巉巉 사람들이 극암이라 부르네 / 邦人號戟巖 학을 탄 왕자 진(王子晉)을 칠 듯이 솟았고 / 逈摏乘鶴晉 하늘에 오르는 무함(巫咸)을 찌를 듯이 높다 / 高刺上天咸 휘어진 자루는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 揉柄電爲火 씻은 칼날은 서릿발처럼 희다 / 洗鋒霜是監 하필 병기를 만들어서 / 何當作兵器 초 나라를 망치고 범 나라를 존재시킬 것인가 / 亡楚却存凡)
- E005 + (삼한(三韓)은 하(夏) 나라 적부터 중국과 통하였으나 문헌이 민멸되어 전하지 … 삼한(三韓)은 하(夏) 나라 적부터 중국과 통하였으나 문헌이 민멸되어 전하지 않고, 수ㆍ당(隋唐) 이래로 비로소 작자가 있다. 을지문덕이 수 나라 장수에게 준 시와 신라 진덕 여주가 당 나라 임금에게 바친 송(頌)과 같은 것이 비록 간책(簡冊)에 실려 있으나 알려지지 않았다. 최치원에 와서야 당 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고 문장으로 이름을 천하에 날렸다. 그가 남긴 시 중의 한 연구(聯句)에, 곤륜산이 동으로 뻗어 다섯 산이 푸르고 / 崑崙東走五山碧 성수해(星宿海)가 북으로 흘러 한 물이 누르다 / 星宿北流一水黃 하였는데, 동년인 고운은, “이 글귀는 바로 하나의 여지지(輿地志)다.” 하였다. 대개 중국의 오악(五岳)은 모두 곤륜산에서 발달하고, 황하(黃河)는 성수해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가 윤주(潤州) 자화사(慈和寺)에 쓴 시의 한 글귀에, 화각(畫角) 소리 속에 아침저녁으로 이는 물결이요 / 畫角聲中朝暮浪 푸른 산 그림자 속엔 고금의 사람일세 / 靑山影裏古今人 하였다. 학사(學士) 박인범(朴仁範)이 경주(涇州) 용삭사(龍朔寺)에 쓴 시에,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등불은 험한 길을 밝히고 / 燈撼螢光明鳥道 무지개처럼 구부정한 사닥다리는 바위틈에 놓였네 / 梯回虹影落巖扃 하였다.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이 사천(泗川) 구산사(龜山寺)에 쓴 시에, 문 앞 손의 돛대엔 큰 물결이 일고 / 門前客棹洪波急 대나무 밑 중의 바둑엔 백일이 한가하구나 / 竹下僧棊白日閑 하였는데, 우리나라가 시로 중국을 울린 것은 이상 세 사람에서부터 시작했다. 문장이 나라를 빛내는 것이 이와 같다.것은 이상 세 사람에서부터 시작했다. 문장이 나라를 빛내는 것이 이와 같다.)
- E715 + (선조 병술년(1577) 알성시에서 오산 차천로가 사관으로써 거자 여계선을 대 … 선조 병술년(1577) 알성시에서 오산 차천로가 사관으로써 거자 여계선을 대신하여 시험을 쳤다. 일이 발각되어 곤장을 맞고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북병사가 조정에 하직할 때 임금이 차비문 밖으로 불러 교시하였다. "차천로는 비록 죄로 인하여 유배를 당했으나 내 일찍이 그 재주를 사랑하니 그대가 잘 돌봐주어라." 병사가 임지로 부임하여 차천로를 극진하게 후대하였다. 차천로가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병사가 말했다. "하직하던 날에 임금께서 친히 잘 돌보라 명하셨으니 어찌 감히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차천로가 이를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환되었으니, 선조가 인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뜻이 아, 지극하다. 중국 사신 주지번이 일찍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돌아갈 때에 동방의 사실을 가지고 황제에게 복명하였다. 그 중 한 조목에, "동방의 차천로라는 자는 문장이 기이하고 장대하다. 일찍이 북쪽으로 유배되었는데, 시 한 구에 ''라 하였다."는 등의 말을 하였다. 그가 중국에서 중히 여겨진 것이 또한 이에 이르렀다. 무오 연간(1618)에 허균이 경사에 갔는데 한 점술사가 말했다. "청구의 분야에서 규성이 빛을 잃었으니 마땅히 한 문장가가 죽을 것이다." 허균이 스스로 죽어서 이에 해당하려는지 여겼는데, 압록강가에 이르러 차천로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망연자실하였다. 여겼는데, 압록강가에 이르러 차천로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망연자실하였다.)
- M004 +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네)
- E538 + (오산 차천로는 문장이 웅건하고 기이하며 장대하였다. 정련됨을 추구하지 않아서 마치 장강 대해와 같아서 쏟아내도 다함이 없었다. 특히 대우의 문장에 장점이 있었다. 어렸을 적에 송계에서 돌을 깎아 다리를 만드는 것을 보고 시를 지었다. "" 이는 고금의 기이한 말이다. 일찍이 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왕래하며 사천여 수의 시를 얻었는데 그 한 연에 ""라 하고 또 ""라 하였다. 이로써 그 일단면을 볼 수 있다.)
- C009 +
- E301 + (재상 최연(崔演)의 문장은 호건(豪健)하여 필한(筆翰)이 물 흐르는 것같다. … 재상 최연(崔演)의 문장은 호건(豪健)하여 필한(筆翰)이 물 흐르는 것같다. 인종(仁宗)의 만시(挽詩)는 이러하다.</br>삼년상을 짧게 한 한 나라를 마음으로 낮추보고 / 三年短制心嫌漢</br>오월을 여막에 거처함은 예법이 등 나라보다 낫네 / 五月居廬禮過滕</br>전고(典故)를 쓴 것이 매우 적당하다. 임 사문 형수(林斯文亨秀)가 인종의 만장을 짓기를,</br>오늘의 눈물을 차마 가지고서 / 忍將今日淚</br>작년 옷을 거듭 적시랴 / 重濕去年衣</br>하였다. 중종(中宗)이 승하하고 1년이 되지 않아 인종(仁宗)이 승하하였으니, 말은 간략하나 뜻은 극진하였다.년이 되지 않아 인종(仁宗)이 승하하였으니, 말은 간략하나 뜻은 극진하였다.)
- E172 + (정덕(正德) 신사년에 가정(嘉靖) 황제가 즉위하자, 수찬(修撰) 당고(唐皐) … 정덕(正德) 신사년에 가정(嘉靖) 황제가 즉위하자, 수찬(修撰) 당고(唐皐) 등이 와서 등극(登極)의 조서를 선포할 때, 사신을 접대하였던 용재(容齋)이택지(李澤之) 가 처음 연회에서 자리를 같이하며 술잔을 들어 앞으로 내어 밀자, 당고가 팔을 뻗어 그 잔대를 잡고 약간 밀쳐서 물러서게 하니, 가까이 오는 것을 꺼리는 뜻이 있는 듯하였다. 당고의 음락시(飮酪詩)가 있었는데, 용재가 차운(次韻)하여,</br>왕가 8백 리에 비하면 / 若比王家八百里</br>서생이 너를 용서한 것이 또한 많다 / 書生貸汝亦云多</br>하였더니, 이때부터 교제가 밀접해지고 늘 시단의 노장이라고 칭찬하였다. 문장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요즈음 중국에 어떤 예부랑(禮部郞)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서적을 구입하는 것을 가혹하게 금지하고, 문장이 해외로 너무 많이 흘러나간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를 예의와 문헌이 있는 나라라고 하여 이적(吏狄)들처럼 낮추어 보지 않는 것은 이상과 같은 까닭이 있어서이니, 진실로 우리 나라 문인들로 하여금 중국에 들어가 여러 선비들 사이에서 고하(高下)를 정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저들에게 모두를 양보하겠는가. 고금에 우리를 이적들처럼 대우하지 않았던 것은 명확한 일이다.양보하겠는가. 고금에 우리를 이적들처럼 대우하지 않았던 것은 명확한 일이다.)
- E272 + (종곡(鍾谷) 성 징군(成徵君)은 다만 몸가짐이 매우 고상했을 뿐 아니라, 문 … 종곡(鍾谷) 성 징군(成徵君)은 다만 몸가짐이 매우 고상했을 뿐 아니라, 문장이 일세에 절묘하였으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시를 보는 이가 드물었다. 그 시에,</br>한 번 종산 속에 들어오니 / 一入鍾山裏</br>소나무와 대 속 초가에 누웠구나 / 松筠臥草廬</br>하늘이 높은데 머리 어찌 구부리랴 / 天高頭宜俯</br>땅은 좁아도 무릎을 펼 만하네 / 地膝滕猶舒</br>이름난 이 어느 누가 살았는고 / 名下何人在</br>숲 사이 이 늙은이 남았네 / 林間此老餘</br>사립문에 손은 자연 끊어지니 / 柴門客自絶</br>거문고와 책을 파하는 날이 없더라 / 無日罷琴書</br>하였다. 이와 같은 작품은 비록 옛 사람들 시집 가운데 두더라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아깝도다.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 한스럽다.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아깝도다.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 한스럽다.)
- E590 + (중국의 문사들은 문장을 감별하는 안목이 매우 밝다. 천사 주지번이 조선에 와 … 중국의 문사들은 문장을 감별하는 안목이 매우 밝다. 천사 주지번이 조선에 와서 말했다. "조선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각로를 쓸 때에는 반드시 문장이 극히 뛰어난 자를 선택한다. 수석 각로인 유영경은 문장이 가장 뛰어나다. 그의 시를 볼 때마다 책상을 치며 칭찬하며 말하기를, '동방 제일의 문장이다.'라 했다." 그 당시 영의정 유영경이 매번 동지 최립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여서, 황화집에 유영경의 이름으로 된 것은 모두 최립의 시이다. 최립이 일찍이 두 재상과 이름을 나란히 하여 요동에 문서를 올렸는데 그때 도어사 고양겸이 가마 위에서 첩을 펼쳐보고 세 재상을 앞으로 불러 말하기를, "훌륭하다. 이것이 누구의 문장인가." 말했다. "둘째 재상의 것입니다." 양겸이 자세히 살펴보고 손가락으로 첩 위에 비점을 찍으며 말했다. "시문이 중국에서도 견줄 이가 드물다." 내가 일찍이 명나라에 갔을 때 우리나라에 상이 있으니 연회를 면제하여 달라고 예부에 올렸는데 예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일곱 낭관이 그 글을 전해 보고 서로 안색이 변했다. 역관이 뜰에 서서 아침부터 해가 기울 때까지 답을 듣지 못하고, 다만 순찰하며 보는 이들이 서너 번 왔다. 역관이 그 첩을 돌려달라고 청하니 낭관이 말했다. "부중에 보관하겠다." 그해 정경세가 예부에 문서를 올리니 낭관들이 칭찬하면서 그 청을 허락하며 말했다. "이 글이 비록 좋지만 앞서 온 사신 유아무개만 못하다. 그 글은 고아함이 이것의 배나 되었는데 사체가 맞지 않아서 그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동방에는 참으로 문장가가 많구나."라 하였다. 그해 내가 영평부 만류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만류장은 홍려승 이완의 별장이었다. 내가 칠언율 16운을 벽에 써놓았는데 그 때에 날이 어두워서 촛불을 켜고 썼다. 한 노인 수재가 와서 보며 말했다. "아, 좋은 작품이구나. 좋은 작품이구나." 어사 한응경은 이완의 처남으로 이웃에 사는 문사 한림 백유와 함께 와서 칭찬하며 판에 새겨 벽에 걸었다. 예로부터 중국 문사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얕보아서, 수백 년 동안 길가 수천 리에 우리나라 시 한 편도 판에 새겨 걸린 것이 없었는데, 판에 거는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 또한 영광이다. 내가 만류장에 제시한 것들을 보니 앞뒤로 몇백 편이 되는데, 내가 지은 것도 크게 다른 것이 아닌데도 중국 문인들이 유독 이것만 벽에 게시했으니, 그들의 문장을 감별하는 안목이 우리나라 문사들과는 다른 것이다. 시는 아래와 같다. "" 감별하는 안목이 우리나라 문사들과는 다른 것이다. 시는 아래와 같다. "")
- E181 + (징군(徵君) 성운(成運)은 보은(報恩) 종곡(鍾谷) 사람이다. 행동거지가 매 … 징군(徵君) 성운(成運)은 보은(報恩) 종곡(鍾谷) 사람이다. 행동거지가 매우 고상하고 문장이 또한 절묘(絶妙)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br>종산 속에 들어와서 / 一入鍾山裏</br>솔과 대를 벗삼아 초막에 누웠네 / 松筠臥草廬</br>하늘은 높아도 머리는 숙여야 하고 / 天高頭肯俯</br>땅은 좁다 해도 무릎은 펼 만하다 / 地窄膝猶舒</br>명성 있는 사람 누가 있을꼬 / 名下何人在</br>숲 속에 늙은이 남아있네 / 林間此老餘</br>사립문에는 손님도 절로 끊어졌는데 / 柴門客自絶</br>금서는 놓는 날이 없네 / 無日罷棄書</br>하였다. 또 을사 위사훈(乙巳衛社勳)을 혁파하였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짓기를,</br>일은 지났거니 슬퍼한들 무엇 하리오만 / 事往嗟何及</br>어진 이를 회상하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懷賢淚滿衣</br>물결이 뒤집히면 용도 말라죽고 / 波軋龍爛死</br>소나무가 넘어지면 학도 놀라 날아가네 / 松倒鶴驚飛</br>지하(地下)에는 은원이 없으련만 / 地下無恩怨</br>인간세상에는 시비만이 남아있네 / 人間有是非</br>우러러 저 햇빛을 보라 / 仰瞻黃道日</br>누가 그 빛을 가리리 / 誰復俺光輝</br>하였으니, 두 시가 모두 대단히 아름답다. 성징군은 세상에 뜻이 없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처사(處士)였다.세상에 뜻이 없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처사(處士)였다.)
- E338 + (찬성 홍귀달(洪貴達)은 어렸을 때에 어른들이 연구를 지으라고 하였더니, 즉석에서, 새가 꽃나무 가지에 앉으니 / 鳥坐花枝 가지가 움직이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기도 한다 / 或枝動不動 하므로 식자들이 ‘혹(或)’자를 가지고 문장이 될 기습(氣習)이라 하였다.)
- E608 +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시는 매우 청신하고 섬부하였으니, 목은(牧 …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시는 매우 청신하고 섬부하였으니,</br>목은(牧隱)이,</br>“경지(敬之 김구용의 자)가 붓을 내려 쓰면 마치 운연(雲煙)과 같다.”</br>고 칭찬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일찍이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폐백을 요동(遼東)에 바치니, 도사(都司) 반규(潘奎)가 경사(京師)에 잡아보냈다. 그 자문(咨文)에 ‘말 50필’이라 할 것을 ‘5천 필’이라 잘못 적었기 때문이다. 명(明)의 고황제(高皇帝)는 우리나라가 요동백(遼東伯)과 사교(私交)한 것에 대해 성을 내고 또 말하기를</br>“말 5천 필이 오면 풀어서 돌아가게 해 주겠다.”</br>고 했다. 이때 이 광평(李廣平 광평부원군 이인임(李仁任)을 말함)이 국정(國政)을 맡고 있었는데 평소에 공의 무리들과 사이가 나빠 끝내 말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황제가 공을 대리(大理)에 유배시키니, 공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br>사생은 명이라 하늘 뜻을 어이하리 / 死生由命奈何天</br>동으로 부상 바라보니 고향 길은 아득한데 / 東望扶桑路渺然</br>양마라 오천 필이 어느 제나 닿을는지 / 良馬五千何日到</br>도화 핀 문 밖에는 풀만 수북 우거졌네 / 桃花門外草芊芊</br>라 하였고, 또 무창(武昌)에서 지은 시에서</br>황학루 앞에는 물결 솟구치는데 / 黃鶴樓前水湧波</br>강따라 발 드리운 주막은 몇천 챈고 / 沿江簾幕幾千家</br>추렴한 돈 술을 사와 회포를 푸노라니 / 醵錢沽酒開懷抱</br>대별산 푸르른데 해는 이미 기울었네 / 大別山靑日已斜</br>라 했는데, 공은 마침내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다.</br>그뒤 참의(參議) 조서(曺庶)가 또한 금치(金齒)에 유배당한 수년 만에 석방되어 돌아왔는데, 황주(黃州)에서 지은 시에</br>물빛과 산 기운은 맑은 모래 어루고 / 水光山氣弄晴沙</br>버들 푸른 긴 뚝에는 천만 채 집이로세 / 楊柳長堤千萬家</br>무수한 상선은 성 아래 대고 / 無數商船城下泊</br>죽루의 연월에는 젓대 노래 드높네 / 竹樓煙月咽笙歌</br>라고 하였다. 나는 장부의 몸으로 좁은 땅에 태어나 천하를 유람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왔었는데 두 공(公)은 비록 이방(異方)에 유배되었으나 그래도 오ㆍ초(吳楚)의 산천을 다 보았으니 참으로 인간의 쾌사라 할 수 있겠다.도 오ㆍ초(吳楚)의 산천을 다 보았으니 참으로 인간의 쾌사라 할 수 있겠다.)
- E074 + (태종께서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더니 신우(辛禑) 임술년에 진사 제2등에 뽑혔 … 태종께서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더니 신우(辛禑) 임술년에 진사 제2등에 뽑혔고, 또 이듬해 계해년에는 문과에 뽑혔는데, 김한로(金漢老)가 장원을 하고 심효생(沈孝生)은 2등이 되고 태종은 10등이었는데, 이내(李來)ㆍ성부(成傅)ㆍ윤규(尹珪)ㆍ윤사수(尹思修)ㆍ박습(朴習)ㆍ현맹인(玄孟仁) 등은 모두 동방(同榜)이었다. 보위(寶位)에 오르자 김한로의 딸이 세자 이지(李禔)의 부인이 되었는데, 진퇴할 때 마다 항상 장원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br>태종이 일찍이 선시(扇詩)를 지어 이르기를,</br>풍탑에 의지했을 때는 밝은 달을 생각하고 / 風榻依時思朗月</br>월헌에서 읆조리면서는 맑은 바람을 생각하도다 / 月軒吟處想淸風</br>대를 깎아 단선을 이루고 보니 / 自從削竹成團扇</br>명월 청풍이 손바닥 안에 있도다 / 朗月淸風在掌中</br>하였다. 옛날부터 일찍이 문사(文士)로써 대업을 이룬 자는 있지 아니하였고, 문장이 또한 이와 같이 기교(奇巧)한 제왕도 있지 아니하였다. 그 사물을 인용하여 비유한 것과 함축된 의취(意趣)는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다.용하여 비유한 것과 함축된 의취(意趣)는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