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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st of all pages that have property "TextKor" with value "이는 초사(楚辭)의「저녁에는 떨어진 가을의 국화 꽃을 먹는다[夕餐秋菊之落英]」라는 말을 알지 못함이니, 구양수의 배우지 못한 과실이다.". Since there have been only a few results, also nearby values are displa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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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018  + (이는 초사(楚辭)의「저녁에는 떨어진 가을의 국화 꽃을 먹는다[夕餐秋菊之落英]」라는 말을 알지 못함이니, 구양수의 배우지 못한 과실이다.)
    • E043  + (결지는 과거에 합격하여 시를 잘 짓는다고 이름이 났는데, 출가하여 중이 된 결지는 과거에 합격하여 시를 잘 짓는다고 이름이 났는데, 출가하여 중이 된 뒤에 호를 취봉이라고 하였다. 그는 떨어지는 배꽃을 보고 이런 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옥 같은 용 백만 마리가 여의주 다투는 날에,</br>바다 밑 물귀신이 떨어진 비늘을 주워,</br>봄바람 부는 꽃시장에 몰래 팔아</br>봄신이 홍진에 흩어버리기 쉽다네.</div></br><div class="critique-text">시골 학생들이 지은 시라고 하겠다.</div></br>문정공 김구도 또한 “낙이화시”를 지었다.</br><div class="poetry-text">펄펄 날아 춤추며 왔다갔다,</br>거꾸로 날리다가 가지에 올라 다시 피려 하네.</br>무단히 한 잎이 거미줄에 걸리니,</br>거미가 나빈 줄 알고 잡으러 오네.</div></br><div class="critique-text">작가의 표현 수단은 본래 각자 같지 않은 것이다.</div>러 오네.</div> <div class="critique-text">작가의 표현 수단은 본래 각자 같지 않은 것이다.</div>)
    • E145  + (고려의 승려 신준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서하 고려의 승려 신준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서하 임춘도 역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 학사 미수 이인로가 평하기를, 두 공의 작품은 처음에 서로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말을 토해내는 것이 처량하고 애절하여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하였다. 나는 이를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앞의 시는 사물을 읊었으나 섬약함에 빠졌고, 뒤의 시는 정감을 말했으나 구법이 호장하니, 기상이 서로 같지 않은데 이를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함은 어찌하여서인가? 임춘의 시는 본래 구양공 구양수의 ""에서 나온 것이니, 그 뜻을 훔쳤을 뿐 아니라 그 말까지 훔친 것이다. ""에서 나온 것이니, 그 뜻을 훔쳤을 뿐 아니라 그 말까지 훔친 것이다.)
    • E266  + (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백마강’ 시는 다음과 같다. 나라 망하니 산과 물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백마강’ 시는 다음과 같다.</br>나라 망하니 산과 물이 옛날과 다른데 / 國破山河異昔時</br>홀로 강달이 남아 몇 번이나 차고 기울었다 / 獨留江月幾盈虧</br>낙화암 위의 꽃은 아직도 남았으니 / 落花巖上花猶在</br>비바람 그 당시에 다 불어 떨어뜨리지 못하였나 / 風雨當年不盡吹</br>이 사문 강남(李斯文江男)의 시는,</br>고국에 올라 보니 마침 달이 오를 때라 / 故國登臨月上時</br>백제의 왕업이 여기 이루고 망했네 / 濟王家業此成虧</br>용 죽고 꽃 떨어진 천 년의 원한은 / 龍亡花落千年恨</br>동풍에 부는 한 피리에 부쳤네 / 分付東風一笛吹</br>이 두 시는 당시 사람들이 서로들 우열(優劣)을 논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아래 시 첫째 구가 너무 싱거운 것같다.(優劣)을 논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아래 시 첫째 구가 너무 싱거운 것같다.)
    • E699  + (교관(敎官) 성여학(成汝學)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의 생질(甥姪)이다교관(敎官) 성여학(成汝學)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의 생질(甥姪)이다. 어렸을 적부터 시벽(詩癖)이 있어 시에 힘쓴 지 이미 오래되어 가는 곳마다 가구(佳句)를 지었다. 그의 시구,</br></br>풀잎 이슬에 벌레 소리 젖고 / 草露蟲聲濕</br>숲 바람에 새 꿈도 위태롭네 / 林風鳥夢危</br></br>는 사람들이 칭찬하였고,</br></br>얼굴은 그의 벗만 알 뿐이요 / 面唯其友識</br>먹는 일도 장부의 슬픔일세 / 食爲丈夫哀</br></br>한 것은 궁어(窮語)이다.</br>내가 일찍이 그의 집에 왕래하곤 하였는데, 항상 그가 떨어진 옷에 작은 두건을 쓰고 귀밑 가득 머리털이 센 채로, 홀로 한 칸 서재에 기대어 종일토록 동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으니, 진실로 일세의 궁사(窮士)였다. ‘시가 사람을 궁색하게 한다〔詩能窮人〕’는 말은 아마도 성 교수(成敎授)를 위해 나왔을 것이다.게 한다〔詩能窮人〕’는 말은 아마도 성 교수(成敎授)를 위해 나왔을 것이다.)
    • E014  + (내가《서청시화(西淸詩話)》를 상고하니,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왕 내가《서청시화(西淸詩話)》를 상고하니,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왕 문공(王文公 왕안석(王安石))의 시에, 황혼의 풍우에 원림이 어두운데 / 黃昏風雨暝園林 쇠잔한 국화 떨어지니 땅에 황금이 가득하이 / 殘菊飄零滿地金 구양수(歐陽脩)가 이 시를 보고 말하기를 ‘모든 꽃은 다 떨어지나 국화만은 가지 위에 말라붙어 있을 뿐인데, 어찌 「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문공(文公)은 크게 성내어 말하기를 ‘이는 초사(楚辭)의「저녁에는 떨어진 가을의 국화 꽃을 먹는다[夕餐秋菊之落英]」라는 말을 알지 못함이니, 구양수의 배우지 못한 과실이다.’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시란 보는 일을 읊는 것이다. 내가 옛날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노란 국화를 보았더니, 역시 떨어진 것이 있었다. 문공이 시에서 이미 ‘황혼의 풍우에 원림이 어둡다.’ 하였으니 ‘보는 일을 읊은 것이다.’고 하여 구양수의 말을 일축했어야 옳았을 것이고, 굳이 초사를 이끌었으면 ‘구공(歐公)은 어찌 이것을 보지 못했는가?’라고만 했어도 또한 족했을 것인데, 도리어 ‘배우지 못했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편협하였을까? 구양수가 설사 박학 다문한 지경에 이르지 못한 자라 하더라도 초사가 어찌 유경벽설(幽經僻說)이기에 구양수가 보지 못했겠는가? 나는 개보(介甫 왕안석의 자)를 장자(長者)로 기대할 수 없다.못했겠는가? 나는 개보(介甫 왕안석의 자)를 장자(長者)로 기대할 수 없다.)
    • E679  +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오언율시는 두보의 시 작법과 매우 비슷하다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오언율시는 두보의 시 작법과 매우 비슷하다. 하나의 글자, 한마디의 말이 모두 두보에서 나왔다. 그의</br></br>시서예를 배우지 못했으니 / 詩書禮學未</br>사십구 년 세월을 그르쳤네 / 四十九年非</br></br>라는 구절을 세상에서 모두 전하여 외지만, 사실은 두보의 시〈영월(詠月)〉에서 이른</br></br>나그네 수심 결에 보니 / 羈棲愁裏見</br>스물 네 번이나 밝았네 / 二十四回明</br></br>에서 나온 것이니, 모방에 뛰어나다고 이를 만하다. 두보의 장률은 종횡무진하고 웅건호탕하여 배운다고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동파(蘇東坡), 황정견(黃庭堅), 진사도(陳師道), 진여의(陳與義) 모두 두보의 시체를 감히 모방하지 못하였으니, 소재가 힘써 따르고자 하였으나 어려운 일이었다.</br>부윤(府尹) 강복성(康復誠)이 일찍이 소재에게서 시를 배웠는데, 소재가 말하기를,</br>“나와 호음(湖陰)은 시의 명성이 서로 비슷하여 세상에서는 그 우열을 분별하지 못하지. 나의 장률은 호음에게 미치지 못하고 호음의 단율은 나에게 미치지 못하니, 각각 장점이 있는 것뿐이라네.”</br>라고 하였다.단율은 나에게 미치지 못하니, 각각 장점이 있는 것뿐이라네.” 라고 하였다.)
    • E700  + (만력(萬曆) 경신년(1620, 광해 12)에, 내가 바야흐로 폐고(廢錮 종신만력(萬曆) 경신년(1620, 광해 12)에, 내가 바야흐로 폐고(廢錮 종신토록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는 것)된 상태에서 정처없이 영서(嶺西) 지방을 떠돌 적에, 나그네의 심경을 절구(絶句) 한 수로 읊기를,</br></br>땅에 가득 떨어진 꽃 반쯤은 벌써 진흙 / 滿地殘花半作泥</br>간 밤의 비바람 앞 시내에 요란했네 / 夜來風雨暗前溪</br>망향대 올라 서니 하염없이 슬픈 마음 / 望鄕臺上空惆悵</br>운수는 천 겹이라 꿈속에서 헤매누나 / 雲樹千重夢也迷</br></br>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시를 본 이가 말하기를, “결구(結句)에 내포하고 있는 뜻이 처연(悽然)하고 암울하니, 상서롭지 못하게 될 분위기가 배어 있는 듯하다.”고 하면서 나를 위해 상당히 걱정해 주었다. 그러나 또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운수 천중(雲樹千重)이라는 말이야말로 앞길이 창창(蒼蒼)하게 멀어 끝이 없다는 뜻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으니, 상서롭지 못한 말이 아니다.”고 하였다.</br>그런데 그 뒤 몇 년이 지나 내가 요행히 좋은 시대를 만난 덕분에 벼슬 길에 올라 현달(顯達)하게 되었는데, 그 시를 지은 것이 지금으로부터 벌써 17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혹자(或者)의 말이 자못 들어맞았다고도 하겠다. 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혹자(或者)의 말이 자못 들어맞았다고도 하겠다.)
    • E403  + (성수종(成守琮)은 바로 청송 선생(聽松先生 성수침(成守琛))의 아우로서 기묘성수종(成守琮)은 바로 청송 선생(聽松先生 성수침(成守琛))의 아우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의 명류이다. 일찍 문과(文科)에 합격했으나 과방(科榜)에서 삭제당한 뒤 한거(閑居)하였는데, 그의 시 가운데</br></br>저자 거리 변두리에 뚝 떨어진 몇 겹 청산 / 數疊靑山落市邊</br>해 저물녘 성안에선 연기가 흩어지는구나 / 層城日暮散風煙</br>사는 곳이 토굴같아 별로 사람도 안 오는데 / 幽居近壑人來少</br>혼자서 국화 따다 돌밭에 앉곤 하네 / 獨採黃花坐石田</br></br>이라고 한 하나의 소절(小絶)을 읊어 보면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다. 이라고 한 하나의 소절(小絶)을 읊어 보면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다.)
    • E553  + (시는 풍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단지 물색을 읊조리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시는 풍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단지 물색을 읊조리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는 목탁을 든 관리가 이를 채집하여 시경에 실었다. 지금은 상국 민몽룡이 시인들을 꾸짖으며 말했다. "시를 짓는 자들이 대부분 시사를 풍자하여 혹 백안시를 당하거나 혹 시안에 연좌되니 마땅히 배우지 않아야 한다." 상서 정종영도 또한 자손들에게 시 짓는 것을 경계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두 공이 비록 몸을 보전하는 계책은 좋으나 옛날 시경 삼백편의 남은 뜻을 전혀 갖지 못한 것이다. 근세에 간신 김안로가 동호에 새 정자를 짓고 편액을 보락당이라 하고는 기재 신광한에게 시를 구했다. 신광한이 사양했으나 면할 수 없어서 시를 지어 주었다. "" 이 시는 조롱과 풍자를 많이 담고 있다. "듣기에"라 한 것은 스스로 가서 보지 않았음을 밝힌 것이다. "강산이 또한 도공의 손에 들어갔네."라 한 것은 조정의 무릇 정사와 강산 전토가 모두 도공의 손에 들어갔음을 밝힌 것이다. "달빛 아래 피리 소리는 여전히 비단옷 입은 이에게 어울리네"라 한 것은 그러한 번화한 일은 풍월에 어울리지 않고 부귀한 사람에게 어울린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나아가고 물러남에 근심 있으나 공은 즐거움을 지켰네"라 한 것은 곧 전인들의 나아가고 물러남에는 모두 근심이 있었는데 김안로만은 홀로 그 즐거움을 보전하여 백성과 더불어 함께하지 않았음을 밝힌 것이다. "도를 행하고 감추는 데에 뜻이 없어 나는 참됨을 온전히 하니"라 한 것은 이 때에 나아갈 뜻이 없어서 스스로 그 절개를 온전히 하였음을 밝힌 것이다. "다시 누구를 상객으로 삼을까"라 한 것은 나는 그 당에서 상객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데 다시 어떤 사람이 세력에 붙어서 그의 빈객이 되겠느냐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시는 구구절절이 깊은 뜻이 있어서 천 년 후에도 군자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 김안로도 또한 문장에 깊었으니 어찌 그 뜻을 몰랐겠는가. 그러나 끝내 해치지 않은 것은 당시의 현인들의 구실이 될까 두려워하며 그 숨은 뜻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인들의 구실이 될까 두려워하며 그 숨은 뜻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C019  + (시란 보는 일을 읊는 것이다. 내가 옛날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시란 보는 일을 읊는 것이다. 내가 옛날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노란 국화를 보았더니, 역시 떨어진 것이 있었다. 문공이 시에서 이미 ‘황혼의 풍우에 원림이 어둡다.’ 하였으니 ‘보는 일을 읊은 것이다.’고 하여 구양수의 말을 일축했어야 옳았을 것이고, 굳이 초사를 이끌었으면 ‘구공(歐公)은 어찌 이것을 보지 못했는가?’라고만 했어도 또한 족했을 것인데, 도리어 ‘배우지 못했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편협하였을까? 구양수가 설사 박학 다문한 지경에 이르지 못한 자라 하더라도 초사가 어찌 유경벽설(幽經僻說)이기에 구양수가 보지 못했겠는가? 나는 개보(介甫 왕안석의 자)를 장자(長者)로 기대할 수 없다.못했겠는가? 나는 개보(介甫 왕안석의 자)를 장자(長者)로 기대할 수 없다.)
    • E075  + (양양(襄陽)에서 남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 길가에 입석(立石)이 있는데 항간에 전하는 말로는, “옛날에 한 안렴사(按廉使) 주기(州妓)를 몹시 사랑하다가 체직(遞職)이 되어 이별하게 되자 시를 지어 돌에 쓰기를, 너는 어느 때 돌이냐 / 汝石何時石 나는 금세의 사람이로다 / 吾人今世人 이별의 괴로움도 모르는 채 / 不知難別苦 홀로 서서 몇 번이나 봄을 지내었던고 / 獨立幾經春 하였다.”하는데, 어떤 사람은 함부림(咸傅霖)이 지은 것이라고도 말한다.)
    • E371  + (양창해(楊滄海)가 안변 군수(安邊郡守)로 있을 때, 임제(林悌)는 고산 찰방양창해(楊滄海)가 안변 군수(安邊郡守)로 있을 때, 임제(林悌)는 고산 찰방(高山察訪 지금의 철도 국장과 같은 벼슬)이 되었다. 임제가 창해에게 농담삼아 말하기를, “덕산(德山)역 벽 위에 칠언절구 한 수가 붙어 있는데, 내 못 쓰는 글씨로 쓴 것입니다. 아마 북도(北道) 변장(邊將)이 지은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고 창해에게 그 시를 죽 불러 주는데,</br>오랑캐가 일찍 수십 고을을 엿보았는데 / 胡虜曾窺數十州</br>장군이 말을 달려 봉후가 되었구나 / 將軍躍馬取封侯</br>이제 멀리 떨어진 요새에 전란이 그치면 / 如今絶塞煙塵靜</br>장사들이 한가로이 옛 역루에서 잠들리로다 / 壯士閑眠古驛樓</br>하였더니, 창해가 웃으면서, “이것은 무부(武夫)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반드시 고산(高山) 당신의 솜씨일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최경창(崔慶昌)이 ‘장군약마취봉후(將軍躍馬取封侯)’를 고쳐서 ‘당시약마취봉후(當時躍馬取封侯)’로 하였다.봉후(將軍躍馬取封侯)’를 고쳐서 ‘당시약마취봉후(當時躍馬取封侯)’로 하였다.)
    • E288  + (옛날 책사종(翟嗣宗)이 회남위(淮南尉)로 있었는데, 그때 감사(監司)에게 매옛날 책사종(翟嗣宗)이 회남위(淮南尉)로 있었는데, 그때 감사(監司)에게 매우 곤욕을 당하였다. 역관(驛館)에서 거미를 제목으로 시 한 수를 지었다.</br>실을 짜며 왕래하니 북같이 빠른데 / 織絲來往疾如梭</br>늘 공중에 올라 그물 만들기 좋아하네 / 長愛騰空作網羅</br>남을 해칠 몸과 마음 매우 적지마는 / 害物身心雖甚少</br>하늘에 늘어진 그물도 또한 많지 않구나 / 漫天網紀亦無多</br>숲 사이 자는 새들 너를 미워하지마는 / 林間宿鳥應嫌汝</br>발 아래 나는 벌레 그가 가장 너를 두려워한다 / 簾下飛虫最懼汝</br>사마귀가 매미 잡는 것 배우지 말지어다 / 莫學螳螂捕蟬□</br>모름지기 알아야지. 참새가 너를 잡을 줄을 / 須知黃雀奈君何</br>임자중(林子中)이 그를 불러 경박한 시를 짓지 말라고 꾸짖었다. 우리 동방(東方)에도 역시 무사(武士) 이장길(李長吉)이 있었는데, 그가 의흥 현감(義興縣監)으로 있을 때 백성들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br>자하 자하 또 자하야 / 子賀子賀復子賀</br>관탕 민재 모두 비우고 / 官帑民財一倂空</br>오직 강산은 옮기지 못하여 / 惟有江山移不得</br>화공을 명하여 병풍 위에 그렸네 / 命工圖畫上屛風</br>자하(子賀)는 장길의 자(字)다. 근년에 어떤 사람이 장편을 지어 종루(鐘樓) 기둥에 걸어서 낱낱이 조정 사대부(士大夫)를 헐뜯었으니, 진실로 조정에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니면 바로 천박하고 경솔한 사람일 것이다. 시는 비록 볼 만하였으나, 실로 책사종(翟嗣宗)의 죄인인 것이다. 것이다. 시는 비록 볼 만하였으나, 실로 책사종(翟嗣宗)의 죄인인 것이다.)
    • M086  + (옥 같은 용 백만 마리가 여의주 다투는 날에, 바다 밑 물귀신이 떨어진 비늘을 주워, 봄바람 부는 꽃시장에 몰래 팔아 봄신이 홍진에 흩어버리기 쉽다네.)
    • C018  +
    • E300  + (지금의 시학(詩學)은 오로지 만당(晩唐)을 숭상하고 소동파(蘇東坡) 시를 버지금의 시학(詩學)은 오로지 만당(晩唐)을 숭상하고 소동파(蘇東坡) 시를 버려두고 있다. 호음(湖陰)이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br>“소동파의 시가 수준이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br>하고, 퇴계(退溪) 역시 말하기를,</br>“소동파의 시가 과연 만당에 미치지 못하는가?”</br>하였다. 나 역시 생각하기를, 소동파의 시에 이른바,</br>어찌 청주 육종사가 / 豈意靑州六從事</br>오유 선생이 될 줄 알았으랴 / 化爲烏有一先生</br>한 것이라든지,</br>옥루가 얼어 추워서 소름이 돋고 / 凍合玉樓寒起粟</br>빛은 은해를 흔들어 안화가 피는구나 / 光搖銀海眩生花</br>라고 한것,</br>풍화가 잘못 장춘원에 날아들고 / 風花誤入長春苑</br>구름 달은 길이길이 불야성에 다달았네 / 雲月長臨不夜城</br>한 것들이, 만당시 가운데 이 시처럼 빼어난 것과 겨룰 만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고려 시대에 과거의 방(榜)이 붙을 때마다 ‘33인의 소동파가 나왔다.’ 하였다. 고려의 문장은 본조(本朝)보다 우수한데, 그때 온 세상이 소동파를 사종(師宗)으로 삼았으니, 소동파의 시를 수준이 낮은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됨을 가볍게 보아서라면, 만당대(晩唐代)의 시인으로 소동파보다 나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오직 퇴계 상공은 소동파 시를 즐겨 읽어, 언제나,</br>구름 흩어 달 밝으니 그 누가 점철하였는가 / 雲散月明誰點綴</br>하늘색 바닷빛은 본디 맑은 것 / 天容海色本澄淸</br>이라는 구를 외웠다. 자신이 지은 시에도 소동파의 시를 끌어 쓴 것이 많다.이라는 구를 외웠다. 자신이 지은 시에도 소동파의 시를 끌어 쓴 것이 많다.)
    • E335  + (참판 박영(朴英)은 중종 때의 무신으로 학문이 매우 해박하고 글씨와 시에 능참판 박영(朴英)은 중종 때의 무신으로 학문이 매우 해박하고 글씨와 시에 능하였으며 의술에도 밝았다. 그의 집이 선산(善山) 낙동강 가에 있었는데,</br>떨어진 지역 남쪽 변방 바다 기운 어두운데 / 絶域南陲海氣昏</br>투구에 쇠 갑옷 입은 늙은 왕손이러라 / 兜鍪金甲老王孫</br>기린각에 이름자 쓰는 건 생각에 없어 / 無心麟閣題名字</br>집이 낙동강 위에 있다네 / 家在洛東江上村</br>라고 하였고,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br>사십 겨우 넘어 오십이 되어 가는데 / 四十纔過五十初</br>인간에 쓸모 없는 한 거저(籧篨)라오 / 人間無用一籧篨</br>여생은 오직 유령(劉伶)처럼 취하는 것 합당하니 / 餘生只合劉伶醉</br>강호에 산책하며 고기나 잡으리 / 散步江湖堪打魚 합당하니 / 餘生只合劉伶醉 강호에 산책하며 고기나 잡으리 / 散步江湖堪打魚)
    • E696  + (학관(學官)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는 유자(儒者)이다. 그는 시를 전문학관(學官)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는 유자(儒者)이다. 그는 시를 전문적으로 힘써 한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흥을 부친 작품들은 격이 높고 뜻이 깊어 사람들이 미칠 수 없었다. 그가 최고운(崔孤雲)을 읊은 시에서 이르기를,</br></br>고운은 당나라의 진사로 / 孤雲唐進士</br>애초에 신선 배우지 않았네 / 初不學神仙</br>만촉처럼 삼한이 다툰 날 / 蠻觸三韓日</br>풍진이 사해에 가득했네 / 風塵四海天</br>영웅의 뜻 어찌 헤아리리 / 英雄安可測</br>진결은 본래 전함 없거늘 / 眞訣本無傳</br>쌍학만 남기고 떠나갔으니 / 一去留雙鶴</br>맑은 풍도 오백년을 전해오네 / 淸風五百年</br></br>하였으니, 깊이 음미해 보면 무궁한 뜻이 있다.을 전해오네 / 淸風五百年 하였으니, 깊이 음미해 보면 무궁한 뜻이 있다.)
    • E687  + (학사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평사(評事 북평사(北評事))로 함경도(咸학사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평사(評事 북평사(北評事))로 함경도(咸鏡道)에 부임하자 손곡이 〈새하곡(塞下曲)〉 3수로 송별하였다. 그 첫 수에 이르기를,</br></br>도위가 군사를 나눠 밤에 적진 습격하니 / 都尉分軍夜斫營</br>한나라의 쇠북소리 변성을 진동하네 / 漢家金鼓動邊城</br>아침에 항복한 오랑캐 얘기 들으니 / 朝來更聽降胡說</br>서쪽 아래 음산에는 복병이 있다네 / 西下陰山有伏兵</br></br>하였는데, 한 때에 전하여 읊어졌다.</br>내가 일찍이 당나라 우곡(于鵠)의 시를 보니,</br></br>물 건너 오랑캐 말을 들으니 / 度水逢胡說</br>사막 북쪽에 복병이 있다네 / 沙陰有伏兵</br></br>라는 구절이 있었고, 권송계(權松溪 권응인(權應仁))의 시〈유해상인가(遊海上人家)〉에는,</br></br>갈매기가 잘못 난간에 날아드네 / 鷗飛誤入闌</br></br>라는 구절이 있었다. 또 나는〈하월호환취각(何月湖環翠閣)〉시에 나오는,</br></br>사금이 물을 차지하여 한가히 서로 따르다 / 沙禽占水閑相趁</br>성긴 발에 잘못 들어갔다 돌아나오네 / 誤入疏簾靜却廻</br></br>라는 구절도 보았다. 옛날에 유원보(劉原父)가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을 희롱하며 말하기를,</br>“영숙(永叔 구양수의 자(字))이 한유(韓愈)의 문장에서 공취(公取 공공연히 취함)한 것이 있고 절취(竊取 몰래 취함)한 것이 있는데, 공취한 것은 대강 셀 수 있지만 절취한 것은 셀 수가 없습니다.”</br>하였는데, 송계는 칠언 두 구절을 요약하여 오언 일구를 이루어 다만 그 뜻만을 취했을 뿐이니 절취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손곡은 고구(古句)를 완전히 베껴 거기에 몇 글자만 더해 한때에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자 했으니, 공취와 절취가 아니고 발총수(發塚手 무덤을 파헤친 솜씨)이다.고자 했으니, 공취와 절취가 아니고 발총수(發塚手 무덤을 파헤친 솜씨)이다.)
    • E628  + (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br>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 때 / 昔年窮寇此殲亡</br>혈전 벌인 신검(神劍)에는 붉은 빛깔 둘렸다네 / 鏖戰神鋒繞紫芒</br>한의 깃대 꽂힌 흔적 돌 틈에 남아 있고 / 漢幟豎痕餘石縫</br>얼룩진 옷 적신 피는 노을 빛을 물들이네 / 斑衣漬血染霞光</br>소슬바람 살기 띠어 수풀 뫼는 엄숙하고 / 商聲帶殺林巒肅</br>도깨비불 음기 타니 성루는 묵어졌네 / 鬼燐憑陰堞壘荒</br>동방 사람 어육(魚肉) 면킨 우 임금의 덕일진댄 / 東土免魚由禹力</br>소신이 해를 그려 어찌 감히 칭찬하리 / 小臣摸日敢揄揚</br>기걸(奇杰)하고 혼중(渾重)하니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절강(浙江)의 오명제(吳明濟)가 이 시를 보고 비평하기를,</br>“그대의 재주는 용을 잡을 만한데 도리어 개를 잡고 있으니 애석하다.”</br>고 했는데 대개 당시(唐詩)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