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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st of all pages that have property "TextKor" with value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이 있다. 그러므로 동방학자들은 모두 그를 유종(儒宗)으로 여긴다.". Since there have been only a few results, also nearby values are displa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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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003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이 있다. 그러므로 동방학자들은 모두 그를 유종(儒宗)으로 여긴다.)
    • E030  + (《서청시화(西淸詩話)》에 이산보(李山甫)가 한사(漢史)를 보고 읊은 시가 다《서청시화(西淸詩話)》에 이산보(李山甫)가 한사(漢史)를 보고 읊은 시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br>왕망이 희롱해 오매 일찍이 반쯤 빠졌더니 / 王莽弄來曾半沒</br>조공이 가져 가니 문득 깊이 잠겼다 / 曹公將去便平沈</br>나는 이를 아름다운 시구로 여긴다. 그런데 고영수(高英秀)라는 자가 기롱하기를 ‘파강시(破舡詩)’라 하였다.</br>나는 생각건대, 무릇 시란 물(物)의 체(體)를 말하기도 하고, 또는 그 체를 말하지 않고 곧장 그 용(用)을 말하는 것도 있다. 산보(山甫)가 뜻을 밝힌 것은, 필시 한(漢) 나라를 배[舡]에 비유하고 곧장 그 용을 말하기를 ‘반쯤 빠졌다’ ‘깊이 잠겼다’고 한 것이리라. 만일 그 당시에 산보가 있어서 말하기를,</br>“자네가 내 시를 파강시라고 하니, 그렇다. 내가 한 나라를 배에 비유하여 말하였는데, 장하도다, 자네가 능히 알아봄이여!”</br>라고 하였더라면, 영수(英秀)는 무슨 말로 답변했겠는가. 《시화》에서는 또한 영수를 함부로 지껄이는 경박한 무리로 여겼다면 반드시 그의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부로 지껄이는 경박한 무리로 여겼다면 반드시 그의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 E591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호) 최 학사(崔學士)의 시는 당말(唐末)에 있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호) 최 학사(崔學士)의 시는 당말(唐末)에 있어 역시 정곡(鄭谷)ㆍ한악(韓偓)의 유를 벗어나지 못하고 대개는 경조하고 부박하여 후(厚)한 맛이 없다. 다만</br>가을 바람 일어라 애달픈 노래 / 秋風唯苦吟</br>한 세상 돌아봐도 지음 드무네 / 世路少知音</br>삼경이라 창밖에는 비가 으시시 / 窓外三更雨</br>만리라 등잔 앞엔 내 고향 생각 / 燈前萬里心</br>이라 한 절구(絶句) 한 수가 가장 훌륭하며, 또 다른 한 연구(聯句)에,</br>먼 나무는 강둑 길에 들쭉날쭉하고 / 遠樹參差江畔路</br>찬 구름은 말 앞의 봉우리에 떨어지네 / 寒雲零落馬前峯</br>라 하였으니, 역시 아름답다. 말 앞의 봉우리에 떨어지네 / 寒雲零落馬前峯 라 하였으니, 역시 아름답다.)
    • C003  +
    • E003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이 있다. 그러므로 동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황(破天荒)의 큰 공이 있다. 그러므로 동방학자들은 모두 그를 유종(儒宗)으로 여긴다.<br />그가 지은 비파행(琵琶行) 한 수가 《당음(唐音)》유향(遺響)에 실려 있는데 작자는 무명씨로 적혀 있다. 후세에 그에 대한 의신(疑信)이 결정되지 못하는데 혹자는,<br /><div class="poem font-weight-light"><br /> 동정에 달이 떨어지니 고운이 돌아간다<br /></div><br />라는 글귀로 최치원의 저작이라는 증거를 댄다. 그러나 또한 그것으로는 단안을 내릴 수가 없다.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檄文) 한 편과 같은 것은 비록 사적(史籍)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죽이기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도 벌써 죽이기를 의논했다.’라는 대문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와서 무릎을 꿇었다 하니,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의 시는 크게 빼어나지는 못하니 아마 그가 중국에 들어간 때가 만당(晩唐)의 뒤여서인가.)
    • E741  + (근래에 시가 없다는 것은 정말로 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라고 할 만한 시근래에 시가 없다는 것은 정말로 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라고 할 만한 시가 없다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이 옛날의 시짓기에 힘쓰지 않고 오직 과거 공부에만 힘써서 혹 과부나 과시에는 공교로우면서도 고시율에는 전혀 어둡다. 비록 대략 구를 엮을 줄 아는 자라도 또한 과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골 북과 섬 피리 같아서 잡다하고 산란하여 들을 수가 없으니 그것을 어찌 시라 하겠는가. 사람들이 전하는 어떤 향사의 시에, ""라 하였다. 비록 당시의 율격은 아니지만 과시의 틀을 벗어나 장법이 절로 이루어졌다. 애석하구나. 그 이름을 잃어 세상에 전하지 못하는 것이. 절로 이루어졌다. 애석하구나. 그 이름을 잃어 세상에 전하지 못하는 것이.)
    • E011  + (나는 아홉 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지금까지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시서나는 아홉 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지금까지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시서육경(詩書六經)ㆍ제자백가(諸子百家)ㆍ사필(史筆)의 글로부터 유경벽전(幽經僻典)ㆍ범서(梵書)ㆍ도가(道家)의 설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 깊은 뜻은 궁구하지 못했지만, 그를 섭렵하여 좋은 글귀를 따서 글 짓는 자료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또 복희(伏羲) 이후 삼대(三代)ㆍ양한(兩漢)ㆍ진(秦)ㆍ진(晉)ㆍ수(隋)ㆍ당(唐)ㆍ오대(五代) 사이의, 군신의 득실이며 방국의 치란이며 그리고 충신의사(忠臣義士)ㆍ간웅 대도(奸雄大盜)의 성패ㆍ선악의 자취를 비록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기억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들을 간추려 기송(記誦)하여 적시에 응용할 준비를 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혹시 지필을 가지고 풍월을 읊게 되면, 아무리 백운(百韻)에 이르는 장편(長篇)ㆍ거제(巨題)라 할지라도 마구 내려 써서 붓이 멈추지 않는다. 비록 금수(錦繡)와 주옥(珠玉) 같은 시편은 이루지 못하나 시인의 체재는 잃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건대, 자부함이 이와 같은데 결국 초목과 함께 썩게 되는 것이 애석하다. 한 번 붓을 들고 금문(金門)ㆍ옥당(玉堂)에 앉아서 왕언(王言)을 대신하고 고초(稿草)를 검토하며 비칙(批勅)ㆍ훈령(訓令)ㆍ황모(皇謨)ㆍ제고(帝誥)의 글을 지어 사방에 선포하여 평생의 뜻을 푼 뒤에야 말 것이니, 어찌 구구하게 대수롭지 않은 녹을 구하여 처자를 살릴 꾀를 하는 자의 유이기를 바랐겠는가. 아, 뜻은 크고 재주는 높건만, 부명(賦命)이 궁박(窮薄)하여 나이 30이 되도록 오히려 한 군현(郡縣)의 직임도 얻지 못하였으니, 외롭고 괴로운 온갖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내 두뇌를 알 만하다. 이때부터 경치를 만나면 부질없이 시를 읊고 술을 만나면 통쾌하게 마시며 현실을 떠나서 방랑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라, 바람은 화창하고 날씨는 따스하여 온갖 꽃이 다투어 피니, 이처럼 좋은 때를 그저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윤학록(尹學錄)과 함께 술을 가지고 구경하면서 수십 편의 시를 지었다. 흥이 무르익었을 때 취기로 인해 졸았는데, 윤학록이 운자를 부르며 나더러 시를 지으라고 권하기에 나는 곧 보운(步韻)으로 다음과 같이 지었다. 귀는 귀머거리되려 하고 입은 벙어리되려 하니 / 耳欲爲聾口欲瘖 곤궁한 처지에 더욱 세정을 안다 / 窮途益復世情諳 뜻과 같지 않은 일은 십에 팔구나 되고 / 不如意事有八九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열에 한둘도 없다 / 可與語人無二三 사업은 고기처럼 하기를 기약하고 / 事業皐夔期自比 문장은 반마처럼 하려 하였는데 / 文章班馬擬同參 연래에 신명을 점검하니 / 年來點檢身名上 전현에 미치지 못한 게 바로 나의 부끄러움이네 / 不及前賢是我慙 윤학록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팔구(八九)로 이삼(二三)을 대하니 평측(平仄)이 고르지 못하오. 공(公)은 평일에 있어서는 문장이 훌륭하여 비록 수백 운(韻)의 율시(律詩)라도 한 번 내려 쓰기를 마치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스쳐가듯 빨리 하나 한 글자도 하자가 없었는데, 지금은 한 작은 율시를 짓되 도리어 염(廉)을 어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지금은 꿈속에서 지은 것이므로 가리지 않고 내놓은 때문이오. 팔구는 천만(千萬)으로 고치는 것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소. 대갱(大羹)과 현주(玄酒)가 초장만 못하지 않은 법이라. 대가의 솜씨는 원래 이러한 것인데 공이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하품하고 기지개하면서 깨니 바로 한 꿈이었다. 그래서 꿈속에 있었던 일을 윤학록에게 갖추 말하기를, “꿈속에서 꿈에 지은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이른바 꿈속의 꿈이구려.” 하고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따라서 희롱으로 다음과 같이 한 절구를 지었다. 수향이 문득 취향과 이웃하였으니 / 睡鄕便與醉鄕隣 두 곳에서 돌아오니 다만 한 몸일러라 / 兩地歸來只一身 구십 일 온 봄이 모두 꿈이라 / 九十一春都是夢 꿈속에 도리어 꿈속 사람이 되었네 / 夢中還作夢中人꿈이라 / 九十一春都是夢 꿈속에 도리어 꿈속 사람이 되었네 / 夢中還作夢中人)
    • E177  +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80세에 자식을 낳은 것은 근세에 드문 일로 사람들은 경사라 하나, 나는 재변이라고 여긴다. 장난삼아 두 절구를 지어서 서교(西郊 송찬)와 죽계(竹溪 한안) 두 늙은 친구에게 보냈더니, 두 노인이 모두 화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 전파되었으니, 더욱 우습다. 나의 시에,</br>75세 생남도 세상에 드문 일인데 / 七五生男世古稀</br>어이하여 80에 또 생남했나 / 如何八十又生兒</br>알겠구나. 조물주가 참으로 하는 일이 많아 / 從知造物眞多事</br>이 늙은이를 후대하여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을 / 饒此衰翁任所爲</br>80 생남은 재앙인가 두려우니 / 八十生兒恐是災</br>축하는 당치 않소 웃기나 하소 / 不堪爲賀只堪咍</br>괴이한 일이라고 다투어 말하게나 / 從敎怪事人爭說</br>어쩌리 세상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 其奈風情尙未灰</br>하였다.爭說 어쩌리 세상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 其奈風情尙未灰 하였다.)
    • E026  + (대저 시란 뜻으로 주를 삼는 것이니 뜻을 베푸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대저 시란 뜻으로 주를 삼는 것이니 뜻을 베푸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미는 것이 그 다음 어렵다. 뜻은 기운으로 주를 삼는 것이니, 기운의 우열로 말미암아 곧 천심(淺深)이 있게 된다. 그러나 기운은 하늘에 근본한 것이니, 배워서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운이 약한 자는 문장을 수식하는 데 공을 들이고 뜻으로 우선을 삼지 않는다. 대개 문장을 다듬고 문구를 수식하면 그 글은 참으로 화려할 것이나, 속에 함축된 심후한 뜻이 없으면 처음에는 꽤 볼 만하지만, 재차 음미할 때에는 맛이 벌써 다한다. 시를 지을 때에는 먼저 낸 운자가 뜻을 해칠 것 같으면 운자를 고쳐 내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의 시를 화답할 경우에 만일 험한 운자가 있거든, 먼저 운자의 안치할 바를 생각한 다음에 뜻을 안배해야 한다.</br>시구 중에 대(對)를 맞추기가 어려운 것이 있으면, 한참 동안 침음(沈吟)해 보아서 능히 쉽게 얻을 수 없거든 곧 그 시구는 아낌없이 버리는 것이 좋다. 시를 구상할 때에 깊이 생각해 들어가서 헤어나지 못하면 거기에 빠지고, 빠지면 고착되고, 고착하면 미혹되고, 미혹하면 집착되어 통하지 못하게 되니, 오직 이리저리 생각하여 변화 자재하게 해야 원만하게 된다.</br>혹은 뒷글귀로 앞글귀의 폐단을 구제하기도 하고, 한 글자로 한 글귀의 안전함을 돕기도 하니, 이것은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글자로 한 글귀의 안전함을 돕기도 하니, 이것은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 E559  + (북창 정렴이 구월 스무날 이후에 늦게 핀 국화를 읊었다. "" 그의 동생 정작이 화답하여 말했다. "" 그때 정렴과 정작의 이 시를 가지고 대제학 유근에게 말하였더니 정작의 시를 취하고 정렴의 시를 버리면서 시율이 없다고 여겼다. 아! 정렴과 같이 음률을 잘 아는 사람이 어찌 유근이 음을 아는 것만 못하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예로부터 지음을 얻기가 어렵다 하는 것이다.)
    • E347  + (사인(士人) 이양국(李良國)은 자못 기풍이 있어 스스로 높은 체하고 법도를 사인(士人) 이양국(李良國)은 자못 기풍이 있어 스스로 높은 체하고 법도를 따르지 않았다. 일찍이 금강산으로 유람가는 사람을 전송하는데, 대개 그는 유람한 지 이미 10년이 되고 전송하는 사람은 3년이 된다. 그러므로 시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br>십년 된 사람이 삼년 된 손님을 전송하고 / 十年人送三年客</br>팔만 봉우리는 구만 장천에 솟았네 / 八萬峯高九萬天</br>휘파란 소리 부상에 떨어지는데 파도는 해를 흔들고 / 嘯落扶桑波撼日</br>읊조림은 울릉도에 울리는데 바다에는 안개가 일어나네 / 吟搖蔚島海生煙</br>또 신해년 겨울에 국가에서 두 종(宗)의 선과(禪科)를 다시 베풀게 되자, 유림들이 장차 소를 올리려고 회문(回文)하여 그의 집에 도착하였더니, 그는 자기의 이름 아래에,</br>불을 배척하여 상소한 것은 한유의 일이요 / 闢佛上疏韓愈事</br>학 타고 하늘에 간 것은 여동빈의 광기다 / 乘鶴橫空呂洞狂</br>라고 쓰고, 이어 말하기를,</br>“나는 내일 산으로 유람간다.”</br>하고 항소의 반열에 끼지 아니하였다.</br>또 일찍이 시를 가지고 그 애인을 이별하고자 부채에 시를 썼었는데, 그 애인에게 마음이 있었던 한 문관(文官)이 이를 보고 불살라 버렸다. 이 양국은 또 뒤에 타다 남은 끝에 다가,</br>지금까지 분서한 불이 꺼지지 않아 / 至今未盡焚書火</br>낭군의 석별시를 태우네 / 燒盡郞君惜別詩</br>라고 하여 문관은 그 기상을 가상하게 여겼었으니, 대개 소광(疎狂)하여서이다.고 하여 문관은 그 기상을 가상하게 여겼었으니, 대개 소광(疎狂)하여서이다.)
    • E019  + (서백사(西伯寺) 주지(住持) 돈유 선사(敦裕禪師)가 시 두 수를 부쳐왔다. 서백사(西伯寺) 주지(住持) 돈유 선사(敦裕禪師)가 시 두 수를 부쳐왔다. 사자(使者)가 문에 이르러 독촉하므로 주필(走筆)로 다음과 같이 화답해 부쳤다. 우로 같은 임금 은혜 성기는 게 아니라 / 不是皇恩雨露疏 연하의 높은 생각 스스로 - 원문 1자 빠짐 - 그윽해서라오 / 煙霞高想自囗幽 임금께서 바삐 부르실 줄 아오니 / 須知紫闥催徵召 푸른 산 사랑해 오래 머물 생각 마오 / 休憐靑山久滯留 세상을 은둔하는 진인은 기꺼이 자취를 감추었는데 / 遁世眞人甘屛跡 시세를 따르는 신진들은 다투어 머리를 내미네 / 趍時新進競昂頭 상왕(象王)이 어느 날에나 오셔서 / 象王何日來騰踏 호서의 비린내를 쓸어버릴는지 / 狐鼠餘腥掃地收 장안의 서신이 성기다 마소 / 莫道長安鯉信疏 세속의 소리가 어떻게 그윽한 수운에 이르겠소 / 俗音那到水雲幽 그대는 암당의 연월에서 편안히 은거하시는데 / 巖堂煙月棲身穩 나는 경연의 풍진에서 녹봉 그리워 머문다오 / 京輦風塵戀祿留 생각건대 그대는 도의 풍치가 골수에 스몄을 터인데 / 道韻想君風入骨 가련하도다 나는 벼슬길에서 머리가 희었다오 / 宦遊憐我雪蒙頭 어느날에나 벼슬 버리고 고상한 그대를 따라 / 掛冠何日攀高躅 육척의 쇠잔한 몸 고이 늙을꼬 / 六尺殘骸老可收 또 별도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어서 촉(燭)을 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해동 고운의 십세손인데 / 東海孤雲十世孫 문장에는 오히려 선조의 유풍이 있구려 / 文章猶有祖風存 최치원(崔致遠)의 10세 손이다. 치원의 자는 고운(孤雲)이다. 두 자루 금촉에 시까지 겸해 주셨으니 / 兩條金燭兼詩貺 시는 족히 마음을 밝히겠고 촉은 어둠을 밝히리 / 詩足淸心燭破昏 선사는 다음과 같이 답서를 보내왔다. “나는 그 시가 인물되어 전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제 간판에 새겨 벽 위에 걸어서 길이 전하게 했소.”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제 간판에 새겨 벽 위에 걸어서 길이 전하게 했소.”)
    • E643  + (선친의 송행시첩(送行詩帖)에 있는 소상(蘇相 소세양을 가리킴)의 시 가운데 선친의 송행시첩(送行詩帖)에 있는 소상(蘇相 소세양을 가리킴)의 시 가운데</br>백옥당 이뤄진 지 오래이러니 / 白玉堂成久</br>황금대 하사받기 오늘이라네 / 黃金帶賜今</br>라는 구절을 사람들은 아름답게 여긴다. 그러나 박수암(朴守庵 수암은 박지화(朴枝華)의 호)의 시 가운데,</br>경월이 높이 뜬 걸 문득 보노니 / 忽看卿月上</br>내 옷이 화사하다 뉘 아깝다 하리 / 誰惜我衣華</br>라는 절구는 바로 경책(警策)이다. 그가 미암(眉庵)을 애도한 시에</br>천추의 푸른 바다 물결 위에서 / 千秋滄海上</br>백일은 큰 이름을 드리웠도다 / 白日大名垂</br>라 한 것은 어찌 두릉(杜陵 두보를 가리킴)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日大名垂 라 한 것은 어찌 두릉(杜陵 두보를 가리킴)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
    • E554  +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말은 공교로이 꾸며내었다 하더라도 만약 뜻이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말은 공교로이 꾸며내었다 하더라도 만약 뜻이 돌아갈 곳을 잃는다면 시를 아는 사람은 취하지 않는다. 옛날 선왕 때에 도화마(桃花馬)가 있어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부를 짓게 하였는데, 정사룡이 시를 지었다."" 정사룡이 스스로 자신의 원고를 선별할 때 세 번 그 시를 선택했다가 세 번 빼버렸다. 그러므로 호음집에는 이 시가 없다. 그 복사꽃을 읊은 것은 교묘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속을 두드려보면 끝내 돌아가는 바가 없다. 망이(望夷)와 학진(虐秦)과 같은 말이 어찌 응교에 합당하다 하겠는가. 타당하구나. 끝내 빠지게 된 것이.은 말이 어찌 응교에 합당하다 하겠는가. 타당하구나. 끝내 빠지게 된 것이.)
    • E726  + (우리 동방의 문인들은 매번 중국 사신들과 창화할 때에 모두 율시를 사용하였다우리 동방의 문인들은 매번 중국 사신들과 창화할 때에 모두 율시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호음 정사룡과 같은 대가도 고시 장편에 있어서는 능하지 못하였다. 오직 석주 권필만이 고시체를 깊이 알았다. 그의 충주석, 호수재를 보내며와 같은 시편들이 절묘하게 좋아서 동방의 사람들 중 단지 배비(排比)만을 일삼는 자들과는 매우 다르다. 근세에 동명 군평 정두경이 한 시대에 걸출하여 부미한 습속을 모두 쓸어버렸다. 그가 지은 가행은 웅건하고 준일하여 가히 성당의 여러 시인들과 견줄 만하다. 그 협객편에, ""라 하였으니, 이와 같은 작품은 당시 가운데서 구하여도 또한 드물 것이다. 평하는 사람들이 말한다. "우리 나라의 문장에 전대를 초월하여 중국 사람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소암 임숙영의 변려문과 정두경의 가행이다."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소암 임숙영의 변려문과 정두경의 가행이다.")
    • E380  + (윤결(尹結) 공이 젊었을 때 어느날 작은 마루에 나와 앉아 있는데 문이 열리윤결(尹結) 공이 젊었을 때 어느날 작은 마루에 나와 앉아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고운 옷을 입은 종 하나가 나타나, 명함을 내어 놓기에 문으로 가서 맞이하니, 한 관인(官人)이 따라 들어오는데, 의관과 용모가 매우 바르고 깨끗하였다. 장원이 말하기를, “ 반드시 잘못 찾아오신 겁니다. 어찌 우리 집에 올 관인이 있겠습니까. 그만두시고 다른 데 가서 찾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자, 그 관인은 말하기를, “꼭 윤 진사님을 뵙고자 합니다.” 하였다. 장원은 바로 갓과 옷을 가져오라 명하고 손님을 들어오시도록 하니, 그 관인은 자리를 옮겨 꿇어 앉아 말하기를, “제가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 어른을 번거롭게 하니, 말이 나오지 아니하여 감히 여쭙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명하신 어른께서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장원이 말하기를, “공의 모습을 뵈옵건대 현달한 관원 같으신데, 무슨 일이 있으시기에 이렇게 오시어 이름도 없는 저를 찾으셨습니까.” 하였다. 그 관인은 용모를 단정히 하고 말하기를, “장옥견(張玉見) 선생이 남양부백(南陽府伯)이 되었는데, 거문고 잘 타는 사람이 차례가 되어 서울에 왔었는데, 제가 우연히 그와 만나는 기회를 얻게 되어 그것을 계기로 정이 함빡 들어 떨어지려 하여도 차마 떨어질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장공에게 관대하게 용납하기를 청해 보았지만 허락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이름난 어른들의 글을 가져다가 청을 넣어 보았지만 그래도 허락하지 못하겠다 하시더니, 말씀하시기를, ‘만일 윤 진사의 시를 얻게 된다면, 내가 1년 동안 빌려 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감히 두려움을 무릅쓰고 와서 청하는게 올시다.” 하고, 이어서 술과 돈과 홍화전(紅花牋 글 쓰는 종이)한 폭을 꺼내서 무릎을 꺼내서 무릎을 꿇고 바치면서, “원하옵건대 명공(明公)께서 한 번 글 지으시는 노고를 아끼지 마시고 베푸시어 이 목마르고 주린 사람의 소망을 풀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장원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왜 다른 시를 구해다가 내가 지은 양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합니까.” 하니, 그는 또 말하기를, “고명한 선생의 시명(詩名)이 당대에 제일인 까닭으로 장공께서 꼭 얻고자 하옵니다. 다른 분의 시야 어디 이를 나위가 있습니까.” 하였다. 장원이 마침내 율시(律詩) 한 수를 내리쓰니,</br>보압좋은 향로(옛날의 향로는 오리 모양이었다)에 향불 잦아지고 / 寶鴨香銷罷</br>난당(아름다운 방 또는 여자가 쓰는 그윽한 방)에는 연기 흩어지네 / 蘭堂烟散初</br>등잔불 식어가니 작은 병풍은 어슴푸레하고 / 燈寒小屛暗</br>달 떠오르니 반쯤 드린 발에 빛 새어 들어 오누나 / 月上半簾疎</br>혀를 내밀면 모두 시샘을 이루고 / 吐舌皆成妬</br>맹약을 삼으면 또 헛될까 두렵구나 / 申盟更怕虛</br>낭군(郞君)의 정이 나와 같을 양이면 / 郞君情似妾</br>어찌 백년 된 옥이라도 아낄 것인가 / 何惜百年磲</br>하였다. 다 써서 주니, 그 관인이 고맙다 인사하고 돌아갔다. 얼마 후에 그 관인이 와서 사례하여 말하기를, “장 사또께서 선생의 시를 얻고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거문고 타는 아가씨를 돌려보내라고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관인은 옥천군수(沃川郡守) 왕손명(王孫名)이었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관인은 옥천군수(沃川郡守) 왕손명(王孫名)이었다.)
    • E550  + (이주는 문인이다. 서장관으로 중원에 가서 통주 문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이주는 문인이다. 서장관으로 중원에 가서 통주 문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 중국 사람들이 현판에 걸어놓고 칭송하여 말하기를 "獨鳥膜歸遼" 선생이라 했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을 낮게 보아서, 비록 최치원이 중국에서 벼슬했지만 그 시문으로는 일찍이 여러 문사들의 반열에서 개략적으로 보이지 못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당음 중에 무명씨가 고운 최치원이라 하는데, 진위를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예문지에만 조금 기록되어 보일 뿐이다. 동방 사람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긴다."라 하였다. 근자에 학관 어숙권이 일찍이 패관잡기를 저술했는데, 천중기에 초록되었으니 또한 미증유의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치원의 황소격을 자주 칭송하지만 사륙문의 책에 선택되지 못하여 중국 역시 편협함을 면하지 못한다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황소격은 비록 놀라게 하는 구절이 있지만, 언어를 세우고 뜻을 명령함에 있어 많이 전도되는 잘못이 있으니 동국 사람들은 참으로 문을 알지 못한다 하겠다. 다만 산승과 규수의 글이 역시 중국과 같이 하여 선록된 것이 보이는데 우리나라 사람의 문집에 어찌 한두 개 채택할 만한 것이 없겠는가.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이주의 시가 통주에 현판으로 걸린 것은 또한 다행이라 할 만하다. 나의 시 또한 만류장에서 현판에 걸렸으니 이에 느낀 바가 있었다. 만하다. 나의 시 또한 만류장에서 현판에 걸렸으니 이에 느낀 바가 있었다.)
    • E234  + (정덕 연간에 교리 황효헌이 나에게 '팔진도'시를 보이며 말했다. "이는 눌재정덕 연간에 교리 황효헌이 나에게 '팔진도'시를 보이며 말했다. "이는 눌재 박상이 그의 아우 박우를 대신하여 옥당(홍문관)의 월과로 지은 시입니다. 대제학이 등수를 매길 때 우등에 두지 않았으니 괴이한 일입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 대개 기묘년(1519) 즈음에 박상과 충암 김정 등 여러 공들이 시는 성당을 숭상하고 문은 전한을 숭상하였다. 승지 김구, 전한 기준과 그 동료들이 모두 박상과 김정을 스승과 벗으로 삼았다. 여러 공들이 화를 당하자, 용재 이행이 문형를 맡아 시문의 체를 고치고자 했다. 무릇 감시와 문과에서 모두 평이한 문장을 취하고, 조금이라도 기건한 체가 있으면 떨어뜨렸다. 그러므로 월과시의 취사도 이와 같았던 것이다.건한 체가 있으면 떨어뜨렸다. 그러므로 월과시의 취사도 이와 같았던 것이다.)
    • E071  + (중 둔우(屯雨)는 환암(幻庵 혼수(混修))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학중 둔우(屯雨)는 환암(幻庵 혼수(混修))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써 경전(經傳)을 탐독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뜻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또 시에도 능하여 시사(詩思)가 청절하여 목은(牧隱)ㆍ도은(陶隱) 등 선생과 더불어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 아조(我朝)에서는 불교를 숭상하지 않아 명가의 자제는 머리를 깎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승려로서 글을 아는 자가 없어 사(師)의 이름이 더욱 나타났으며 사방의 학자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고, 집현전의 선비들도 모두 탑하(榻下)에 나아가 글을 물으니, 성대하게 유석 사림(儒釋士林)의 사표가 되어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나의 백형과 중형이 일찍 회암사(檜巖寺)에서 글을 읽을 때, 사의 나이가 90여 세였는데 용모가 맑고 파리하며, 기체가 여전히 강하여 혹은 이틀쯤 밥을 먹지 않아도 그다지 배고파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밥을 올리면 혹은 몇 그릇을 다 먹되, 또한 배부른 빛이 없고 며칠이 지나도록 변소에 가지 아니하며, 항상 빈 방에 우뚝 앉아서 옥등을 달고 깨끗한 책상을 놓고, 밤새도록 책을 보아 작은 글자까지 하나하나 연구하며 졸거나 드러눕는 일이 없으며, 사람을 물리쳐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부를 일이 있으면 손으로 소쟁(小錚)을 쳐서 제자들이 수응하도록 하였으며, 큰소리를 지르지 아니하였다. 일본 국사인 중 문계(文溪)가 시를 구하여 진신(縉紳) 중에서 시를 지은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었는데, 사도 또한 명을 받들어 시를 지었다. 그 시에,</br>수국고정 / 水國古精</br>상쾌한 무위의 사람이로다 / 灑然無位人</br>빨리 달리는 것도 응당 스스로 그칠 것이요 / 火馳應自息</br>고목처럼 섰으니 다시 누구와 친하리오 / 柴立更誰親</br>풍악에는 구름이 발 아래에서 일고 / 楓岳雲生屨</br>분성에는 달빛이 성문에 가득하도다 / 盆城月滿闉</br>바람 맞은 돛은 해천이 넓고 / 風帆海天闊</br>매류는 고원의 봄이로구나 / 梅柳故園春</br>하였다. 당시에 춘정(春亭)이 문형(文衡)을 주관(主管)하였는데, 쇄연무위(灑然無位)의 글귀를 고쳐서 “소연절세인(蕭然絶世人 쓸쓸히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이라 하니, 스승이 말하기를, “변공(卞公)은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로다. 소연(蕭然)이 어찌 쇄연(灑然)만 하며, 절세(絶世)가 어찌 무위(無位)만 하겠는가. 이것은 자연무위(自然無爲)의 뜻을 깎아 없앨 뿐이로다.”하고, 항상 문사를 보면 섭섭해 마지않았다. 지금 천봉집(千峯集)이 세상에 전해진다.상 문사를 보면 섭섭해 마지않았다. 지금 천봉집(千峯集)이 세상에 전해진다.)
    • E731  + (중구 박장원은 문재가 일찍 이루어졌다. 열두살 때 아버지의 벗 중에 임자년(중구 박장원은 문재가 일찍 이루어졌다. 열두살 때 아버지의 벗 중에 임자년(1552)에 태어난 이가 귀양을 가게 되어 이별의 자리에서 여러 어른들이 박장원에게 시를 짓도록 하였다. 박장원이 즉시 제하여 시를 지었다. "" 박장원 또한 임자년에 태어났으므로 이렇게 지은 것이다. 사람들이 기이한 신동이라고 칭하였다. 박장원이 일찍이 정언으로 월과를 지어 올린 반포조 시 한 절구에, ""라 하였다.인조가 그 시를 보고 전교하였다. "이 사람의 부모가 생존하여 있는가?" 승지가 회계하였다. "이 사람은 편모만 있습니다." 다시 전했다. "그 절구를 보니 효성이 범상치 않다. 한 집안의 충효가 사람을 감탄하게 한다. (효도에 대한) 바람과 나무의 비유는 옛사람도 슬퍼한 바이니 해당 관청에 명하여 좋은 쌀과 베를 주어서 대접하지 못하는 아픔을 면하도록 하여라." 이는 실로 특별한 대우이다. 대개 박장원의 외조부 심공 심현이 전 도정으로서 나이 일흔에 정축년(1637)의 난을 만나 종묘사직을 따라 강화도로 들어갔는데, 적병이 이미 갑곶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붓을 구하여 유소를 쓰고 부부가 함께 목을 매어 죽었다. 박장원이 그 소를 올리니 인종이 보시고 가상하게 여겨 그 마을에 정문을 내렸다. 그러므로 위의 교서에서 한 집안의 충효라 한 것이다. 중구의 호는 구당으로, 나와 친하게 지냈다. 한 집안의 충효라 한 것이다. 중구의 호는 구당으로, 나와 친하게 지냈다.)
    • E297  + (중국 사신 왕경민(王敬民)의 ‘새벽에 출발하여 조서를 반포하러 가다[早行頒詔중국 사신 왕경민(王敬民)의 ‘새벽에 출발하여 조서를 반포하러 가다[早行頒詔]’라는 시에,</br>천자의 위엄이 지척에 계신 듯 두터운 정으로 조서를 반포하니 / 天威咫尺頒殊渥</br>동국의 의관들이 모두들 절하며 조아리네 / 東國衣冠盡拜稽</br>하니, 원접사(遠接使) 율곡(栗谷) 이이(李珥) 상공이 그 운에 차운하여 지었다.</br>은은한 만세 소리 상서로운 안개 드날리니 / 殷殷呼嵩騰瑞霧</br>삼한의 머리들이 일시에 조아리네 / 三韓厥角一時稽</br>대개 계(稽) 자는 다 측성(仄聲)으로 쓰이는데, 왕공이 이미 틀린 것을 율곡이 따라 틀리게 썼으니, 어째서일까? 내가 그 시를 상공에게 평하니, 상공이 곧 운자를 바꾸었다. 그러므로 《황화집(皇華集)》에 실은 것은 초고와 다른 것이다. 율곡은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박식 다문(博識多聞)한데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이렇게 착오하여 웃음거리를 면치 못할 뻔하였는데, 하물며 재주가 율곡에 미치지 못하면서 이 임무를 맡은 자는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율곡에 미치지 못하면서 이 임무를 맡은 자는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 E656  + (최고죽(崔孤竹)의 시는 한경(悍勁)하며 백옥봉(白玉峯 옥봉은 백광훈(白光勳)의 호)의 시는 고담(枯淡)하다. 모두 당시(唐詩)의 노선(路線)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 이익지(李益之)는 이들보다 조금 크다. 그러므로 최ㆍ백을 함께 뭉쳐 나름대로 대가를 이루었다.)
    • E739  + (태관 홍만종은 일찍이 병으로 독서를 폐하여 전문적으로 시에 공을 들이지 못하태관 홍만종은 일찍이 병으로 독서를 폐하여 전문적으로 시에 공을 들이지 못하였으나 동명 군평 정두경에게 배웠다. 그러므로 그 시는 향기가 배고 색채로 물들었으며 격조가 청준하였다. 그의 채련곡 시에, ""라 하였다. 정두경이 이를 보고 말했다. "이는 성당의 말이니, 내가 마땅히 의발을 그대에게 전하겠다." 나는 늘 그의 수종사 시를 좋아하였다. ""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매우 뛰어나서 당인의 경취를 얻었다. 홍만종이 일찍이 나에게 말했다. "만약 내가 어르신처럼 독서를 하였다면 어찌 지금처럼 변변치 않겠습니까." 대개 자신이 많이 읽지 못한 것을 한탄한 것인데, 비록 많이 읽은 사람이 시를 짓는다 하여도 어찌 능히 이런 말을 지어내겠는가.록 많이 읽은 사람이 시를 짓는다 하여도 어찌 능히 이런 말을 지어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