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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우리나라]]는 [[은(殷) 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동쪽에 봉해지면서부터 문헌(文獻)이 비로소 생겼는데, 그동안에 있었던 작자(作者)들은 세대가 멀어서 들을 수가 없다.<br />[[《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에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사적이 갖추 기록되어 있고, 또 그가 [[수(隋) 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오언시(五言詩) 네 구(句)]]가 실려 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br /><div class="poem font-weight-light"><br />신기한 계책은 천문을 통달하고<br /><br />묘한 꾀는 지리를 다하였네<br /><br />싸움에 이기어 공이 이미 높으니<br /><br />만족함을 알아서 중지하게나<br /></div><br /><u>[[구법(句法)]]이 [[기고(奇高)]]하여 [[화려하게 꾸민]] 흔적이 없으니, 어찌 후세의 부화(浮華)한 자가 미칠 바이겠는가.</u> <br /><br />상고하니,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대신(大臣)]]이었다.  +
복양(濮陽) 오세재 덕전(吳世才德全)은 시를 힘차고 준수하게 지었다. 그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 퍽 많지만, 강운(强韻)을 달아서 지은 것은 못 봤다. 그가 북산(北山)에 올라 극암(戟巖)을 시제(詩題)로 해서 시를 지으려고 할 때 사람을 시켜서 운자를 내게 하자, 그 사람은 일부러 험한 운자를 냈는데, 오 선생은 다음과 같이 썼다. 북령의 돌이 우뚝한 것을 / 北嶺石巉巉 사람들이 극암이라 부르네 / 邦人號戟巖 학을 탄 왕자 진(王子晉)을 칠 듯이 솟았고 / 逈摏乘鶴晉 하늘에 오르는 무함(巫咸)을 찌를 듯이 높다 / 高刺上天咸 휘어진 자루는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 揉柄電爲火 씻은 칼날은 서릿발처럼 희다 / 洗鋒霜是監 하필 병기를 만들어서 / 何當作兵器 초 나라를 망치고 범 나라를 존재시킬 것인가 / 亡楚却存凡 그 뒤에 몽고(蒙古) 사신이 왔는데 그는 시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이 시를 보고 재삼 찬탄하며, <u>“이 사람이 살아 있는가?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가? 혹시 만나 볼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는데,</u> 우리나라 사람은 멍하니 대답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지금 제고학사(制誥學士)의 직위에 있다고 왜 말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그가 권변(權變)에 어두움이 이와 같았으니 한탄스럽다.  +
사간 정지상은 이런 시를 지었다. 비 갠 뒤 긴 둑에 풀빛 푸른데, 임 보내는 남포 나루에서 슬픈 노래 부른다. 대동강물 어느때나 마를꼬? 해마다 이별의 눈물 푸른 파도에 더해만 가니. 연남 사람 양재가 일찍이 이 시를 베끼기를, “별루년년창록파”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 작과 창 두 자는 모두 그 뜻이 원만하지 않다. 마땅히 이것은 “첨록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지상은 또 이런 시를 지었다. 땅이 푸른 하늘과 닿은 곳 멀지 않은데, 사람과 흰 구름이 한가롭게 마주 대하네. 뜬구름 흐르는 물 같은 나그네 절에 이르니, 빨간 잎 푸른 이끼낀 절의 중은 문을 닫는다. 푸른 버들 아래 문닫은 집 여덟 아홉 채, 밝은 달 가운데 발을 걷은 서너 사람. 위로 북두에 닿을 듯 삼각형 지붕, 허공에 높이 솟은 한 칸의 누대. 돌 위의 늙은 소나무에 한조각 달이 걸렸고, 하늘 끝 낮은 구름 밑에 천점 산이 있네. 이 시인은 이 같은 시를 즐겨 썼다.  +
고금 중국 사신의 시를 고하(高下)에 대해 평한 이가 없었다. 내가 호음(湖陰)에게 품평을 청하니, ‘기순(祈順)이 제일이요, 예겸(倪謙)ㆍ동월(董越)이 다음이요, 김식(金湜)은 칠언 율시(七言律詩)가 극히 좋고, 장영(張寧)은 좀 미숙한 것같다.’ 하였다. 공은 일찍이 동규봉(董圭峯 동월(董越))의, 강 비 추위를 빚어 나무 끝에 오고 / 江雨釀寒來樹抄 재 구름 어둠을 나누어 바위 언덕에 떨어진다 / 嶺雲分瞑落巖阿 라는 구를 읊으면서 찬양한 적이 한번만이 아니었다.  +
우리 나라 서경(西京 평양)은 풍광과 누각의 경치가 빼어난데다 미녀들과 풍류를 즐길 수가 있어 끊임없이 중국에 가는 사신들이 이곳에 도착하게 되면 갈 길을 잊은 채 오래도록 여기에 머물며 즐기기 일쑤였고 거의 정신을 잃고서 완전히 빠져버리는 경우마저 있곤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의 학사(學士)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비 갠 뒤의 긴 둑길 풀빛 더욱 푸르른데 / 雨歇長堤草色多 그대 보내는 남포에 구슬픈 노래 울리누나 / 送君南浦動悲歌 어느 때나 대동강 물 마를 날이 있을까 / 大同江水何時盡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 別淚年年添綠波 라고 하였는데, 온 세상이 다투어 전하면서 지금에 이르도록 절창(絶唱)으로 떠받들고 있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경진년(1580, 선조13) 년간에 가운(嘉運) 최경창(崔慶昌)이 대동 찰방(大同察訪)이 되고 군수(君受) 서익(徐益)이 평양서윤(平壤庶尹)이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시인이었다. 이에 그 운(韻)을 따서 채련곡(採蓮曲)을 지었는데, 최(崔)의 시에, 길고 긴 강 언덕에 수양버들 늘어지고 / 水岸悠悠楊柳多 조각배 저 멀리 들려오는 연 따는 노래소리 / 小船遙唱採菱歌 붉은 꽃잎 모두 지고 가을바람 살랑살랑 / 紅衣落盡西風起 해 저물녘 텅 빈 강에 일어나는 저녁 물결 / 日暮空江生夕波 이라 하였고, 서(徐)의 시에서는, 많이들 연밥 따는 남쪽 호수 아낙네들 / 南湖士女採蓮多 새벽부터 단장하고 서로 노래 부르누나 / 曉日靚粧相應歌 치마 가득 찰 때까지 배도 꼼짝하지 않고 / 不到盈裳不回棹 가끔가다 부서지는 먼 물가의 하얀 물결 / 有時遙渚阻風波 라 하였다. 그 뒤에 이순(而順) 고경명(高敬命)과 익지(益之) 이달(李達)이 뒤미처 화운(和韻)하였는데, 고(高)의 시에, 뱃전에 부딪치는 맑은 물결 복숭아꽃 / 桃花晴浪席邊多 연꽃 속에 일렁이며 뱃노래 울려 퍼지누나 / 搖蕩蓮舟送棹歌 취해 기댄 미인 생각 아마 잊지 못할텐데 / 醉倚紅粧應不忘 산들바람 펄럭펄럭 휘장에 물결 이네 / 小風輕颺幙生波 라 하였고, 이(李)의 시에는, 들쭉날쭉 연잎 속에 연밥도 하 많은데 / 蓮葉參差蓮子多 연꽃 잎새 사이로 여인들 노래 소리 / 蓮花相間女郞歌 돌아올 땐 물목에서 짝과 약속 지키려고 / 來時約伴橫塘浦 고생고생 배 저으며 물 거슬러 올라가네 / 辛苦移舟逆上波 라 하였다. 이들 모두가 일대(一代)의 가작들인데 논하는 자들은 그 중에서도 이(李)의 작품의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한다.  +
정 대간의 서경시에 비 갠 긴 뚝에 풀빛은 더욱 짙고 / 雨歇長堤草色多 님 보내는 남포에 구슬픈 노래 /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 언제나 다할 날이 있으리 / 大洞江水何時盡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 別淚年年添綠波 라는 것은 지금까지 절창이라고 일컫는다. 부벽루 현판에 새겨진 시들은 중국 사신이 오게 되자 모두 철거한 일이 있었는데 이 시만은 남겨 두었었다. 그 뒤에 최고죽(崔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이 이 시에 화운(和韻)하기를, 강 언덕 길고 긴데 휘늘어진 능수버들 / 水岸悠悠楊柳多 연 따는 노랫가락 조각배에 요란터니 / 小船爭唱采菱歌 붉은 꽃도 다 져서 서풍은 차가웁고 / 紅衣落盡西風冷 해 저문 물가엔 흰 물결만 일어나네 / 日暮芳洲生白波 라 했고, 이익지(李益之 이달(李達)의 자)는, 연잎은 들쭉날쭉 연밥은 주렁주렁 / 蓮葉參差蓮子多 연꽃 서로 사이해서 아가씨가 노래하네 / 蓮花相間女郞歌 돌아 올 땐 물목에서 벗 만나자 기약했기에 / 歸時約伴橫塘口 고되이 배 저어 거슬러 올라가네 / 辛苦移船逆上波 라 했다. 두 시가 매우 훌륭하여 왕소백(王少伯 소백은 당 나라 왕창령(王昌齡)의 자)ㆍ이군우(李君虞)의 여운이 있으나 이는 채련곡(採蓮曲)이라 서경 송별시의 본뜻과는 다르다.  +
내가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제술관으로 서경(西坰) 유근(柳根) 어른을 따라 용만(龍灣 평안북도 의주(義州)의 옛 이름)으로 향하는 길에 평양(平壤)에 도착하였다. 손곡 이달은 70세가 넘어 성안에서 객지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평양의 늙은 관기와 관노들은 그의 젊었을 때 행락(行樂)하는 것을 자세히 말해주기를, “지난날 학사 서익(徐益)이 대동 찰방(大同察訪)이 되었을 때, 학사 최경창(崔慶昌)이 본부(本府)의 서윤(庶尹)이 되어 이달을 부벽루(浮碧樓)에 머무르게 하고 기녀 중 가장 이름 있는 사람 및 노래 잘하는 사람과 거문고 잘 퉁기는 사람 모두 10여 명을 가려 그들로 하여금 이달을 모시게 하여 떠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서윤 최경창은 매일 석양에 공무(公務)를 마치고 찰방 서익과 함께 가마〔肩輿〕를 타고 부벽루에 이르러 술잔을 돌리고 시를 지으며 극진히 즐긴 후 술자리를 파했는데, 최경창이 임기가 다하여 조정에 돌아가고 나서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가 귀천을 따지지 않고 뛰어난 재주를 사랑함이 이와 같았다. 부벽루 판상(板上)에는 정지상(鄭知常)의 절구 비 그친 긴 둑에 풀빛이 푸른데 / 雨歇長堤草色多 임 보내는 남포엔 슬픈 노랫소리 /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은 언제나 다 마르겠나 / 大同江水何時盡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네 / 別淚年年添綠波 가 있는데 옛날부터 절창(絶唱)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루는 학사 최경창이 술자리에서 말하기를, “우리 세 사람이 늘 이 누대에서 시를 지어서, 산천과 어조(魚鳥)에 대해 거의 다 읊조렸소. 그러니 글의 제목을 정하여 한 절구씩 짓도록 합시다.” 하였다. 서익은〈채련곡(採蓮曲)〉으로 제명(題名)함이 좋겠다고 말하자 서윤 최경창은 판상의 시(정지상의 시)로 운을 삼자고 하였다. 세 사람은 각각 붓을 잡고 더 낫게 짓기를 힘써 각고한 끝에, 최경창과 서익이 먼저 짓고 이달이 이어서 완성했는데, 마침내 이달의 작품을 절창으로 추대하였다. 그 시는 즉, 들쭉날쭉 연잎에 연밥 많으니 / 蓮葉參差蓮子多 연꽃 사이에 아가씨들 노래하네 / 蓮花相間女娘歌 돌아갈 땐 횡당 입구에서 만나자 약속했기에 / 歸時約伴橫塘口 애써 배를 저어 물결 거슬러 오르네 / 辛苦移舟逆上波 라고 하였다. 서윤 최경창과 찰방 서익의 작품이 꼭 이에 뒤진 것은 아니지만, 특히 이달의 작품을 제일로 삼고 붓을 놓은〔閣筆〕 일이 있었으니, 그 포의(布衣)를 높이고 장려하는 뜻을 알 수 있다. 이는 손곡이 나에게 자세히 말해준 것이다. 나의 우견(愚見)을 말하자면 제 2구의 ‘상간(相間)’ 두 글자는 온당치 않은 듯하다.  +
M
비 갠 뒤 긴 둑에 풀빛 푸른데,<br>임 보내는 남포 나루에서 슬픈 노래 부른다.<br>대동강물 어느때나 마를꼬?<br>해마다 이별의 눈물 푸른 파도에 더해만 가니.  +
별루년년창록파  +
비 갠 긴 뚝에 풀빛은 더욱 짙고<br>님 보내는 남포에 구슬픈 노래<br>대동강 물 언제나 다할 날이 있으리<br>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
비 그친 긴 둑에 풀빛이 푸른데 <br>임 보내는 남포엔 슬픈 노랫소리 <br>대동강 물은 언제나 다 마르겠나 <br>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네  +
비 갠 뒤의 긴 둑길 풀빛 더욱 푸르른데<br>그대 보내는 남포에 구슬픈 노래 울리누나<br>어느 때나 대동강 물 마를 날이 있을까<br>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